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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곧장 서 회장의 집으로 간 세광은 가끔 드나들고는 했던 사랑채에 앉아 열린 문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3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심어 주는 커다란 저택도, 하늘을 뒤덮을 듯 자라난 빽빽한 정원수들도 그대로다. 두 명의 경호원과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날렵한 도베르만 두 마리가 미닫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서 회장의 명령만 떨어지면 달려들 기세로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베르만과 눈이 마주쳤다. 경계를 하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개를 붙잡으며 투덜거리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들어오시랍니다.”
일하는 여자가 알려 주자 세광은 방석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창 너머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젊은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여자는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긴 복도를 지나 금방 누군가가 빠져나간 서재 안으로 들어선 세광이 서 회장의 앞에 깍듯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자 서 회장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고생 많았다.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세광아.”
“그동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덕분입니다.”
변함없이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세광을 보고 있으니 서 회장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렇잖아도 요즘 부쩍 나빠진 몸 상태에 누구 하나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고심을 하던 차였다. 다시 옆으로 불러 들여올 수 있게 된 세광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 꽤 오랜 시간을 데리고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녀석. 많은 사람을 거느려 봤어도 누구 하나 세광만 한 사람이 없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타국에서의 생활이 잘 맞지 않았나 보다.”
“아닙니다.”
“당분간은 푹 쉬고 있어. 집이랑 가게는 이미 일러 뒀으니 불편하지는 않을게다.”
“감사합니다.”
“세광아,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만 지난 일은 평생 묻어 두고 살아야 한다.”
“……네.”
방에서 물러나와 대문을 나서니 언제 달려왔는지 성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여전한 녀석의 모습을 보니 반가움이 밀려 왔다.
“형님, 그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없는 동안 고생은 네가 더 많았다며? 수고 많았다.”
“수고는요. 저야 뭐 늘 하던 일인데요. 형님이야말로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어찌 사셨을지 눈에 훤합니다.”
“후후후.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나름대로 살 만하더라. 안 죽고 돌아왔잖아.”
“아무튼 진심으로 복귀를 환영합니다. 다시는 못 뵙는 줄 알았는데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기분입니다.”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성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세광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반겨 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헛살지는 않은 모양이야.”
“애들, 오신다는 소식 듣고 클럽에서 기다립니다. 가시죠.”
“그래, 가자. 가야지……. 내가 갈 곳이 거기밖에 더 있겠냐.”
유난히 푸르고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세광의 목소리에선 서글픔이 잔뜩 묻어났다. 그리웠던 땅의 냄새가 알싸하게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오랜 그리움의 냄새다.

문이 열리자 귀청이 찢길 듯한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한때 지겨울 만큼 듣고 살았고, 늘 적막감뿐이던 곳에선 지독하게 그리웠던 소리. 세광은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을 타고 전해지는 그 짜릿한 기운이 삽시간에 온몸으로 전해졌다. 가슴이 불타는 것 같다.
“상사로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언젠가 돌아오시리라고 굳게 믿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성진을 마주 보며 세광은 참 시간이 많이도 흘렀구나 싶었다.
“넌 결혼도 했다면서 이렇게 늦게까지 일을 해도 되는 거냐?”
“뭐, 할 줄 아는 일이 이런 일밖에 없는데 뾰족한 수가 없잖습니까. 애 키우려면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이 나라가 돈 없으면 살기 힘들잖습니까.”
“제수씨는 어떤 여자야?”
성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그러더니 지갑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엔 다정해 보이는 부부와 갓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어지간히 억척을 떠는 여잡니다. 남들 눈엔 모르겠는데 내 눈엔 세상에서 가장 예쁘기도 하고요.”
뿌듯해하는 성진의 모습에 한참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엔 한 여자와 아이가 성진의 옆에서 웃고 있었다.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선한 이미지의 여자였다. 가족이란 것이 이런 것이었나……. 단란해 보이는 성진을 보니 문득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이 세계에 발을 딛었던 그 순간부터 가족을 갖겠다는 꿈 같은 건 꾸지도 않았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누군가의 인생이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같은 걸 항상 가지고 있었다.
“행복하냐?”
“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합니다. 형님도 이제 정착하셔야죠.”
“나 같은 놈 만나서 살 여자는 아마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겠지.”
“설마요. 저 같은 놈도 갔는데 뭐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와이프한테 잘해.”
“저도 잘하려고 노력 많이 하는 중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진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세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럽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음악 소리는 심장을 울릴 만큼 커졌다. 몇 년 사이 이곳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스테이지가 한눈에 보이는 이 층 난간에 자리를 잡고 섰다.
현란한 사이키 조명 아래 미친 듯이 몸을 흔드는 사람들. 심장까지 후벼 대는 커다란 음악 소리와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금방이라도 폭발을 일으킬 것처럼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그 열기에 감염이라도 된 것인지 넥타이로 조여진 목이 답답하다.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단추 하나를 풀자 그나마 좀 나은 것 같았다.
3년만의 귀국. 어느 것 하나 변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엇 하나 같은 것도 없었다. 같은 듯 다른 세상.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로 다시 돌아온 걸까.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세광의 눈빛이 짙어졌다.
한성. 명목상으로는 제조업과 유통업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서상훈 회장이 검은 손의 대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가 자신을 다시 불러들였을 때, 이미 무엇을 맡기려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여전히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는, 개념 없는 서 회장의 아들 태훈의 소문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에도 심심찮게 들려 왔었다. 여전히 한심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들. 여자가 있다고 했던가. 아마도 서태훈에 걸맞게 한심하기 그지없는 여자겠지.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서 회장을 처음 만났던 건 열여섯이 되던 해. 그때부터 그에게 복종하는 건 세광의 법이 되어 버렸다.
3년 전, 버려지다시피 했었다. 그게 자신이 떠맡은 일이었기에 두말없이 버려져야만 했었다. 필리핀에서 일종의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동안 시간은 흘렀고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무지한 사람들과 섞여 사탕수수 농사나 지으며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여겨질 즈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돌아오라는 서 회장의 명령이 생각처럼 그렇게 반갑지 않았던 것은.
수많은 상념에 사로잡혀 서 있던 세광은 아까부터 자신이 한곳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현란하게 내부를 휘젓는 조명 아래에서 유독 사람들을 열광케 하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옷 사이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이 춤사위를 따라 출렁일 때면 늑대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릴 정도로 여자는 도발적이었다. 탱탱한 엉덩이를 실룩이며 기다란 다리로 이리저리 거닐더니 마침내 한 남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먹잇감을 찾은 모양이었다.
여자가 움직였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의 넥타이를 거머쥔 여자는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어깨부터 가슴을 지나 아래로 몸을 훑어 내리며 자신의 엉덩이를 그에게 비벼 댔다. 아니나 다를까 참을 수 없는 듯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모르긴 해도 잔뜩 부푼 남성은 단숨에 바지를 뚫고 나올 듯한 기세일 것이다.
그런 남자의 반응에 여자는 더욱 마녀 같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흔들어 댔다. 아예 사정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구는 꼴이 우스워 세광은 난간에 몸을 길게 내밀었다. 여자를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물고기처럼 움직이는 여자의 미세한 놀림까지 놓치지 않고 추적하는 세광의 입술이 슬쩍 휘었다.
재밌네…….
불과 한 시간 전. 저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성진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순간 무심한 얼굴로 건물 입구에 서 있었던 여자. 그저 스친 여자를 기억하고 있었던 건 클럽 입구를 쏘아보고 있던 그녀의 표정 때문이었다. 춤을 추러 온 건 아닌 듯했다. 즐거워 보이기는커녕 여자의 표정은 무표정을 넘어 비장하기까지 했다. 클럽에 오면서 그런 표정을 짓는 여자는 흔치 않았다.
그런 여자가 유혹적으로 춤을 추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전개에 세광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유혹이라……. 여자의 모든 것을 읽어 내려는 듯 세광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달콤한 사탕 같은 유혹에 넘어간 남자가 자제력을 잃고 여자의 손목을 붙잡으려 하자 여자는 탁 손바닥을 내밀며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모면하고 있다. 모든 것을 내줄 것처럼 남자를 유혹해 대더니 저 표정은 또 뭔가. 여자가 거부할수록 남자는 안달이 났다. 잡으려 하면 한발 멀어지고, 다시 잡으려 하면 또다시 멀어지고. 뭐가 못마땅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저 남자를 따라가지 않을 건 분명했다.
몇 번이나 안으려는 시도를 하던 남자는 끝내 자신을 내주지 않는 여자의 외면에 벌게진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뚫고 급하게 사라졌다. 빨라지는 걸음걸이로 보아 목적지는 뻔했다. 다른 여자를 찾을 새도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 급한 불을 끌 테지. 도발한 여자를 상상하거나 욕을 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배설해 내겠지.
치익.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을 빨아들이는 세광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밤 사냥에 나선 여우인가? 이거 꽤 재미있겠어.
제법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몰아쉬는 숨소리까지 전해지는 기분이다. 짙은 페로몬을 분비하는 발정 난 암컷의 도발에 오래 전에 사라진 줄 알았던 짜릿한 전율이 일렁인다. 또 다른 남자를 유혹하러 나서는 여자를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피우던 담배를 끄고는 일어섰다.
계단을 느릿하게 내려가자 여기저기서 사내들이 고개를 숙였다. 쟁반에 잔뜩 술병을 올린 웨이터들이 비켜서고 세광은 사냥에 나선 재규어처럼 위험스럽고 조용하게 플로어를 향해 나아갔다. 여자의 게임에 동참을 해 볼 셈이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로 인해 플로어는 발 디딜 자리도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졌다. 빠른 비트의 음악이 집채만 한 스피커를 통해 커다란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온몸에 파장이 일 정도로 강렬한 음악 소리. 그 안에서 흐르는 땀으로 반질거리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세광은 천천히 공간을 만들며 여자의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얼마나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는지 여자의 이마를 감싼 머리카락은 흠뻑 젖어 있었다. 흰 이마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명 때문이 아니라 해도 꽤 예쁘장한 외모다. 저런 여자가 작정을 하고 유혹을 하면 무너지지 않을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시선이 마주쳤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여자의 입술이 웃는다.
“…….”
맥이 뛴다. 서서히. 그러다 조금 빠르게. 모처럼만에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목덜미를 흔들었다. 처음 유리창 안에 놓여 있던 값비싼 장난감 자동차를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갖고 싶단 욕심이 스멀거렸다. 그건 그저 본능 같은 욕망일 뿐이다. 섹시한 몸짓으로 도발하는 여자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여자와의 거리는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빠르게 교차하는 시선이 탐색하듯 서로의 전부를 훑어 내리는 동안 세광의 입매가 스륵 비틀렸다. 몸을 던지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던 여자의 눈동자가 우습게도 냉기로 가득 차 있다. 잘못 보았을까. 얼핏 스치는 그 차가움을 확인하고자 그는 턴을 해 여자에게로 한 발을 더 내딛었다.
“…….”
여자는 늪 같았다. 한 발을 딛고 나니 다음은 빨려들어 가듯 스스럼없이 이끌렸다. 멈춘 것 같았던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현란한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 춤은 시작되었다. 한 마리 불나방 같은 여자의 몸짓에 대응하듯 남자는 노골적인 동작으로 여자의 몸을 훑었다. 잘록한 허리를 살짝 붙잡아 아슬아슬하게 하반신을 부비며 자신의 몸에 그녀를 밀착시켰다. 옷 위로 느껴지는 여자의 탄탄한 몸을 가볍게 쥐었다. 웃고 있는 여자의 입술과 달리 몸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설마 가짜?
몸짓은 유혹인데 마음은 도망이라.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 세광은 좀 더 자극적으로 몸을 더듬었다. 여자가 무너지는 걸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이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한때 춤에 미쳐 살던 시절도 있었다. 내일은 없다고 믿던 그 시절. 세월은 흘렀지만 몸은 기억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 실력을 뽐내듯 비트를 따라 움직이자 그는 순식간에 야성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섹시하게 변하기도 했다.
구애 행동이나 다름없는 춤이 계속되는 동안 주위의 시선은 온통 그들을 향해 있었다. 누가 먼저 무너지는지가 관심사다. 호기심 어린 눈망울들이 점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남녀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얼마나 그렇게 몸을 흔들었을까. 음악이 바뀌었다. 여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플로어를 벗어나려는 순간 때를 놓치지 않은 세광이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낚아챘다. 손을 끌어당겨 제 어깨에 걸치게 하고 몸을 바싹 끌어당겼다.
“끝은 보고 가야지.”
뜨거운 몸과 달리 올려다보는 여자의 시선이 서늘하다. 그 서늘함이 어쩐지 더 매혹적이다. 이 여자를 통째로 삼켜 버리면 어떤 느낌일까. 저런 서늘한 눈빛을 가진 여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음은 어떤 느낌일까. 저 표정만큼 차가운 탄성일까. 아니면 가짜 몸짓처럼 뜨거운 신음일까. 괜한 상상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자신만큼이나 표정을 숨기는 일에 능수능란한 여자의 끝을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