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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연습 1화
프롤로그
“이. 종. 은.”
딱딱 끊어지는 음산하고 낮은 부름에 종은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간담이 서늘해진 그녀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젠장, 이대로 냅다 뛰면 되지 않을까? 자신의 짧고 느린 다리와 그의 길고 단단한 다리를 떠올린 그녀는 금방 탈출의 가능성을 포기했다.
복잡한 마음에 며칠간 잠을 못 잔 탓에 어제는 한계에 달했는지 기절하듯 잠이 들어 아침에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일주일 내내 저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느라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던가? 한순간의 방심이 그동안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구나. 그렇다고 현관문 앞에서 기다릴 건 뭐냐? 집요한 놈 같으니.
종은은 늦잠을 자 버린 자신과 등이 따끔거릴 정도로 노려보는 남자를 향해 속으로 원망 섞인 욕설을 퍼부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긴장한 채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 왜?”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말끝이 떨려 나왔다. 눈을 가늘게 뜬 키가 큰 남자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놈.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종은은 최대한 반항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의 비웃음만 더 커졌지만.
“오늘 시간 비워 둬.”
“아, 안 돼. 오늘은 바빠.”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지만 종은은 재빨리 거절의 말을 뱉어 냈다. 그러자 남자의 눈빛이 짙어지며 성큼 다가섰다.
우왓!
위압적일 만큼 큰 키다. 뭘 먹고 다니길래 저렇게 컸대. 게다가 운동으로 다져진 호리호리하고 탄탄한 몸이 닿을 듯 다가오자 종은은 움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곧 그런 자신의 겁먹은 몸짓에 자존심이 상해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쫑, 내가 오늘은 너 쫓아다닐 기분이 아니거든. 한 번만 더 도망가 봐 아주, 죽는다.”
“진, 진짜야. 나 오늘 학교 샘들이랑 모임 있어.”
“빠져.”
살벌할 정도로 건조한 명령에 종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일주일간 아래층에서 문소리만 나도 몸을 숨기던 그녀였다. 심지어는 엄마마저 몸을 잔뜩 사린 그녀에게 왜 그러냐고 물을 정도였다.
정규한, 이번 한 번만 어떻게 봐주면 안 될까?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못마땅한 듯 잔뜩 구겨진 미간과 차갑게 노려보는 시선에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또 이 일로 얼마나 저를 들볶을까, 종은은 걱정되고 두려웠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규한을 만났던 초등학교 4학년으로 돌아가 인생을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바야흐로 인생의 황금기, 사춘기에 서서히 접어들 무렵, 규한의 가족이 아래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비슷한 또래의 양가 부모님들은 금방 격의 없이 친해졌다. 무엇보다 같은 나이인 규한은 그녀와 같은 학교, 같은 반까지 배정받았다.
하지만 규한의 성격이 무뚝뚝한 데다 종은 역시 수줍음이 많아 쉽게 친해지진 않았었다. 적어도 종은이 기억하는 한 그때의 규한은 종은에게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런 그가 바뀐 건 그 여름이었다.
아이들의 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의기투합한 양가 부모님들이 신이 나서 여름 캠핑을 추진했다. 뭐, 종은 역시 상당히 들떴었고, 규한도 좋아한 눈치였던 건 지금도 기억난다. 휴양림이 있는 덕유산 아래의 계곡으로 놀러 간 가족은 2박 3일간 신나게 캠핑을 즐겼다.
하지만 캠핑 마지막 날 작은 사고가 있었다. 종은이 바위에서 미끄러져 물에 빠졌던 것이다. 넘어지면서 이마가 찢어지며 정신을 잃은 종은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규한의 두 살 터울의 형인 규섭이었다.
무뚝뚝한 규한과 달리 규섭은 잘생긴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 역시 싹싹하고 부드러웠다. 안 그래도 괜찮은 오빠다 생각했는데 기절을 했다가 정신이 든 순간 종은은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규섭을 보고는 이게 바로 꿈속의 왕자님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종은의 오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 내내 그녀의 일기장을 빼곡히 채운 건 규섭의 이니셜이었다. 여기까지면 얼마나 아름다운 첫사랑 얘기일까? 하지만 그때부터 이상하게 정규한이 그녀의 인생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차마 부끄러워 이름 전체를 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니셜의 주인공을 알아낸 규한이 그녀를 협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 규섭보다 더 많이 그녀의 일기장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도 규한은 꿋꿋하게, 오히려 더 잘 자라났다.
망할 놈!
어쨌든 그의 마수에 걸린 종은은 그때부터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왜 그렇게 같은 반 배정은 잘 되는지. 6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년을 같이 보내고 겨우 중학교에 가면서 해방되나 했는데 그건 종은의 헛된 꿈일 뿐이었다. 중학교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심지어는 대학교까지 같은 델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후 종은은 규한의 온갖 구박과 괴롭힘을 견뎌 내며 지금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짜증이 나는 건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주변 사람들은 좋게만 본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중, 고등, 대학생 때의 친구들마저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했다. 그 때문에 종은은 그 흔한 소개팅 한번 들어온 적이 없었다.
반면에 정규한, 저놈은 순정남으로 소문나 여자들에게 오히려 인기가 높았다는 게 종은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원통했다. 물론, 정규한의 외모가 한눈에 혹할 정도로 잘생긴 건 종은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디스트적이라고 할 정도로 못된 그의 성격을 아는 그녀로서는 절대, 네버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표리부동한 규한에게 질린 탓인지 남자에 관심도 없던 그녀라 소개팅 못 한 건 다소 작은 억울함으로 치더라도 저놈 때문에 수많은 여자들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화병이 날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저 바람둥이 놈이 왜 그렇게 여자는 자주 갈아 치우는지. 그 여자애들을 떼 낼 때마다 그녀가 규한의 오래된 애인, 아닌 거의 조강지처 역할을 본의 아니게 해야 했다.
그동안 당해 온 걸 생각하자 왠지 분해졌다. 일주일 전의 일로 다시 약점을 잡힌다면 앞으로 평생 저 변태 악마 놈의 꼬봉이 되지 않을까. 종은은 덜컥 겁이 나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심정으로 반항해 보았다.
“진짜 오늘은 빠지면 안…….”
“그럼 아줌마랑 우리 엄마 불러 놓고 그날 일 말해?”
헉! 종은은 펄쩍 뛸 정도로 기겁을 했다. 새파랗게 질린 종은은 반쯤 우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오, 오늘 만나.”
풀이 죽은 그녀의 말에 규한이 피식, 웃었다. 항상 그녀가 곤란해하면 저런 웃음을 짓는다. 아, 저 웃음을 한 방에 날릴 수만 있다면.
혼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데 그가 고개를 숙였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종은의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헉, 이건 무슨 반응이지?
평소 그에게 느끼던 두려움이 아닌 이상한 두근거림이었다. 종은이 자신의 뜬금없는 반응에 당황한 사이 규한이 손을 내밀어 이마를 콕 찍었다.
“쫑! 이젠 도망가지 마라. 넌 반드시 나한테 잡힌다.”
그러고는 휙 몸을 돌려 걸어간다. 종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쥔 채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
나비효과라고 들어는 봤나? 종은은 자신이 무심코 했던 작은 일의 어마어마한 결과를 확인한 순간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나중엔 무시무시한 태풍이 될 수도 있다는,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면식도 없는 그 이론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정확한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처음 그녀가 유라를 규섭에게 소개시킨 건 우연한 계기였다. 고등학생 때 규한에게 끌려다니느라 동성의 친구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던 그녀에게 유일한 동성 친구는 유라 하나뿐이었다.
키가 작고 성장이 더딘-이건 물론 규한의 적나라한 독설로 더 확실히 확인된 사실이다- 여자로서는 볼품없는 몸매를 가진 그녀와 달리 유라는 키가 크고 늘씬해 도저히 그녀와는 친해지지 않을 것 같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유라 역시 그 뛰어난 외모 때문에 동성의 여학생들과는 오히려 거리감이 있어 학교에서 친구들과 쉬이 어울리지 못했다.
그녀가 종은과 친해진 건 어쩌면 그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에 조금 둔한 종은이 아무런 편견 없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유라는 어릴 적부터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 덕에 일찌감치 연예계에 입문을 했다. 하지만 엄청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결국 가수가 될 준비만 주구장창 하다가 결국 진로를 바꿔 몇 개의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고는 은퇴를 해 버렸다.
그런 유라의 행보가 인터넷에서는 한 줄 기삿거리조차 되지 못했지만 종은에게 유라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였기에 느끼는 배신감이 생각보다 크고 쓰렸다. 어째서 유라를 그저 그런 평범한 친구처럼 생각했던 걸까? 비록 연예계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유라의 외모는 남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여전히 예뻤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규섭과 만나게 한 등신 같은 자신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싶을 정도다.
바보, 멍텅구리, 둔탱아! 이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한 신세인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두 달 전 그날, 오랜만에 동네 포장마차에서 유라와 회포를 풀던 종은은 우연찮게 지나가던 규섭을 알아보고 달려 나가는 짓을 해 버렸고, 결국 규섭과 유라, 두 사람이 만나게 됐다. 물론, 그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운명적인 만남이었겠지만 종은에게는 마치 하늘이 두 쪽 나는 듯한 충격적이고도 절망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른 채 종은은 유라에게 규섭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오롯이 털어놓았었다. 그나마 최대의 치욕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짝사랑 상대가 규섭이라는 걸 털어놓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라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규한이라고 여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얼굴에 경련이 일 정도로 어색하고 딱딱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규섭과 유라가 결혼을 한다는 발표보다 규한과 자신을 엮는 두 사람의 행보가 그녀에게는 더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무섭고 불가능한 일을 생각할 수 있는 거야!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라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규한이도 불렀으니까 좀 이따 올 거야. 두 사람한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었어.”
가라앉은 기분이 규한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요동을 쳤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정규한이었다. 규섭에 대한 그녀의 비밀스런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그 변태적일 만큼 잔인한 놈이 어떻게 자신을 놀릴까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종은은 자신의 그런 두려움을 숨긴 채 눈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었다. 잔이 넘쳐 손에 술이 흘렀지만 아랑곳없이 그녀는 한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이렇게 된 거 그 자식이 오기 전에 그냥 취해 버려서 차라리 모든 걸 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두 사람도 이젠 나이 생각해서 진지하게 만나야지. 안 그대로 우리 부모님은 종은이 너 둘째 며느리로 생각하고 계신다.”
오, 마이 갓. 제발. 종은은 슬픈 눈으로 규섭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연거푸 술을 마신 탓인지 조금 굴절되어 보이지만 잘생긴 건 여전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젠장,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을 누가 아름답다고 했던가? 종은은 들고 있는 술잔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런데 언제부터 두 사람 사귄 거…….”
“첫눈에 반했잖아. 오빠도, 나도. 진짜 오빠 보는 순간 누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치는 것 같더라. 오빤 종소리가 들렸대.”
발갛게 볼을 물들인 유라의 말에 종은은 울컥 나오는 욕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그녀의 머리를 누군가 망치로, 그것도 흡사 북유럽의 천하장사 신인 토르가 가진 그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아찔함을 참으며 다시 술을 들이켜는데 규섭이 그녀의 뒤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규한이 왔다.”
갈수록 태산, 첩첩산중이라더니. 종은이 술을 따르는데 털썩 옆에 커다란 남자가 앉는다. 그녀가 따른 술을 마시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그 잔을 낚아챘다.
“뭐야!”
하지만 이미 술은 규한의 입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오늘 종은이가 술 좀 받나 봐. 아까부터 혼자 달린다.”
규섭의 말에 규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식식대며 혼자만의 울분을 삭이던 종은이지만 차마 규한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알 그이기에 자신의 감정을 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도 슬슬 제대로 사귀어야지. 언제까지 미적지근하게 있을 거야.”
“우린 그냥 친구예요. 친. 구!”
규섭의 말에 종은이 고개를 발딱 들었다. 하지만 종은의 말은 그대로 허공에 흩어진 의미 없는 단어일 뿐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누구도 그 말에 가타부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프롤로그
“이. 종. 은.”
딱딱 끊어지는 음산하고 낮은 부름에 종은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간담이 서늘해진 그녀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젠장, 이대로 냅다 뛰면 되지 않을까? 자신의 짧고 느린 다리와 그의 길고 단단한 다리를 떠올린 그녀는 금방 탈출의 가능성을 포기했다.
복잡한 마음에 며칠간 잠을 못 잔 탓에 어제는 한계에 달했는지 기절하듯 잠이 들어 아침에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일주일 내내 저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느라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던가? 한순간의 방심이 그동안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구나. 그렇다고 현관문 앞에서 기다릴 건 뭐냐? 집요한 놈 같으니.
종은은 늦잠을 자 버린 자신과 등이 따끔거릴 정도로 노려보는 남자를 향해 속으로 원망 섞인 욕설을 퍼부었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긴장한 채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 왜?”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말끝이 떨려 나왔다. 눈을 가늘게 뜬 키가 큰 남자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놈.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종은은 최대한 반항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의 비웃음만 더 커졌지만.
“오늘 시간 비워 둬.”
“아, 안 돼. 오늘은 바빠.”
빠져나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지만 종은은 재빨리 거절의 말을 뱉어 냈다. 그러자 남자의 눈빛이 짙어지며 성큼 다가섰다.
우왓!
위압적일 만큼 큰 키다. 뭘 먹고 다니길래 저렇게 컸대. 게다가 운동으로 다져진 호리호리하고 탄탄한 몸이 닿을 듯 다가오자 종은은 움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곧 그런 자신의 겁먹은 몸짓에 자존심이 상해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쫑, 내가 오늘은 너 쫓아다닐 기분이 아니거든. 한 번만 더 도망가 봐 아주, 죽는다.”
“진, 진짜야. 나 오늘 학교 샘들이랑 모임 있어.”
“빠져.”
살벌할 정도로 건조한 명령에 종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일주일간 아래층에서 문소리만 나도 몸을 숨기던 그녀였다. 심지어는 엄마마저 몸을 잔뜩 사린 그녀에게 왜 그러냐고 물을 정도였다.
정규한, 이번 한 번만 어떻게 봐주면 안 될까?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못마땅한 듯 잔뜩 구겨진 미간과 차갑게 노려보는 시선에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또 이 일로 얼마나 저를 들볶을까, 종은은 걱정되고 두려웠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규한을 만났던 초등학교 4학년으로 돌아가 인생을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바야흐로 인생의 황금기, 사춘기에 서서히 접어들 무렵, 규한의 가족이 아래층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비슷한 또래의 양가 부모님들은 금방 격의 없이 친해졌다. 무엇보다 같은 나이인 규한은 그녀와 같은 학교, 같은 반까지 배정받았다.
하지만 규한의 성격이 무뚝뚝한 데다 종은 역시 수줍음이 많아 쉽게 친해지진 않았었다. 적어도 종은이 기억하는 한 그때의 규한은 종은에게 티끌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그런 그가 바뀐 건 그 여름이었다.
아이들의 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의기투합한 양가 부모님들이 신이 나서 여름 캠핑을 추진했다. 뭐, 종은 역시 상당히 들떴었고, 규한도 좋아한 눈치였던 건 지금도 기억난다. 휴양림이 있는 덕유산 아래의 계곡으로 놀러 간 가족은 2박 3일간 신나게 캠핑을 즐겼다.
하지만 캠핑 마지막 날 작은 사고가 있었다. 종은이 바위에서 미끄러져 물에 빠졌던 것이다. 넘어지면서 이마가 찢어지며 정신을 잃은 종은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규한의 두 살 터울의 형인 규섭이었다.
무뚝뚝한 규한과 달리 규섭은 잘생긴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 역시 싹싹하고 부드러웠다. 안 그래도 괜찮은 오빠다 생각했는데 기절을 했다가 정신이 든 순간 종은은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규섭을 보고는 이게 바로 꿈속의 왕자님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종은의 오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 내내 그녀의 일기장을 빼곡히 채운 건 규섭의 이니셜이었다. 여기까지면 얼마나 아름다운 첫사랑 얘기일까? 하지만 그때부터 이상하게 정규한이 그녀의 인생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차마 부끄러워 이름 전체를 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니셜의 주인공을 알아낸 규한이 그녀를 협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이후 규섭보다 더 많이 그녀의 일기장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도 규한은 꿋꿋하게, 오히려 더 잘 자라났다.
망할 놈!
어쨌든 그의 마수에 걸린 종은은 그때부터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왜 그렇게 같은 반 배정은 잘 되는지. 6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년을 같이 보내고 겨우 중학교에 가면서 해방되나 했는데 그건 종은의 헛된 꿈일 뿐이었다. 중학교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심지어는 대학교까지 같은 델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후 종은은 규한의 온갖 구박과 괴롭힘을 견뎌 내며 지금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짜증이 나는 건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주변 사람들은 좋게만 본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중, 고등, 대학생 때의 친구들마저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했다. 그 때문에 종은은 그 흔한 소개팅 한번 들어온 적이 없었다.
반면에 정규한, 저놈은 순정남으로 소문나 여자들에게 오히려 인기가 높았다는 게 종은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원통했다. 물론, 정규한의 외모가 한눈에 혹할 정도로 잘생긴 건 종은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디스트적이라고 할 정도로 못된 그의 성격을 아는 그녀로서는 절대, 네버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표리부동한 규한에게 질린 탓인지 남자에 관심도 없던 그녀라 소개팅 못 한 건 다소 작은 억울함으로 치더라도 저놈 때문에 수많은 여자들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화병이 날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저 바람둥이 놈이 왜 그렇게 여자는 자주 갈아 치우는지. 그 여자애들을 떼 낼 때마다 그녀가 규한의 오래된 애인, 아닌 거의 조강지처 역할을 본의 아니게 해야 했다.
그동안 당해 온 걸 생각하자 왠지 분해졌다. 일주일 전의 일로 다시 약점을 잡힌다면 앞으로 평생 저 변태 악마 놈의 꼬봉이 되지 않을까. 종은은 덜컥 겁이 나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심정으로 반항해 보았다.
“진짜 오늘은 빠지면 안…….”
“그럼 아줌마랑 우리 엄마 불러 놓고 그날 일 말해?”
헉! 종은은 펄쩍 뛸 정도로 기겁을 했다. 새파랗게 질린 종은은 반쯤 우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오, 오늘 만나.”
풀이 죽은 그녀의 말에 규한이 피식, 웃었다. 항상 그녀가 곤란해하면 저런 웃음을 짓는다. 아, 저 웃음을 한 방에 날릴 수만 있다면.
혼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는데 그가 고개를 숙였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종은의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헉, 이건 무슨 반응이지?
평소 그에게 느끼던 두려움이 아닌 이상한 두근거림이었다. 종은이 자신의 뜬금없는 반응에 당황한 사이 규한이 손을 내밀어 이마를 콕 찍었다.
“쫑! 이젠 도망가지 마라. 넌 반드시 나한테 잡힌다.”
그러고는 휙 몸을 돌려 걸어간다. 종은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움켜쥔 채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
나비효과라고 들어는 봤나? 종은은 자신이 무심코 했던 작은 일의 어마어마한 결과를 확인한 순간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나중엔 무시무시한 태풍이 될 수도 있다는,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면식도 없는 그 이론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정확한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처음 그녀가 유라를 규섭에게 소개시킨 건 우연한 계기였다. 고등학생 때 규한에게 끌려다니느라 동성의 친구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던 그녀에게 유일한 동성 친구는 유라 하나뿐이었다.
키가 작고 성장이 더딘-이건 물론 규한의 적나라한 독설로 더 확실히 확인된 사실이다- 여자로서는 볼품없는 몸매를 가진 그녀와 달리 유라는 키가 크고 늘씬해 도저히 그녀와는 친해지지 않을 것 같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유라 역시 그 뛰어난 외모 때문에 동성의 여학생들과는 오히려 거리감이 있어 학교에서 친구들과 쉬이 어울리지 못했다.
그녀가 종은과 친해진 건 어쩌면 그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시선에 조금 둔한 종은이 아무런 편견 없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유라는 어릴 적부터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 덕에 일찌감치 연예계에 입문을 했다. 하지만 엄청난 외모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결국 가수가 될 준비만 주구장창 하다가 결국 진로를 바꿔 몇 개의 드라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고는 은퇴를 해 버렸다.
그런 유라의 행보가 인터넷에서는 한 줄 기삿거리조차 되지 못했지만 종은에게 유라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였기에 느끼는 배신감이 생각보다 크고 쓰렸다. 어째서 유라를 그저 그런 평범한 친구처럼 생각했던 걸까? 비록 연예계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유라의 외모는 남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여전히 예뻤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규섭과 만나게 한 등신 같은 자신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싶을 정도다.
바보, 멍텅구리, 둔탱아! 이 얼마나 한심하고 처량한 신세인가?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두 달 전 그날, 오랜만에 동네 포장마차에서 유라와 회포를 풀던 종은은 우연찮게 지나가던 규섭을 알아보고 달려 나가는 짓을 해 버렸고, 결국 규섭과 유라, 두 사람이 만나게 됐다. 물론, 그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운명적인 만남이었겠지만 종은에게는 마치 하늘이 두 쪽 나는 듯한 충격적이고도 절망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도 모른 채 종은은 유라에게 규섭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오롯이 털어놓았었다. 그나마 최대의 치욕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짝사랑 상대가 규섭이라는 걸 털어놓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라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규한이라고 여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얼굴에 경련이 일 정도로 어색하고 딱딱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규섭과 유라가 결혼을 한다는 발표보다 규한과 자신을 엮는 두 사람의 행보가 그녀에게는 더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무섭고 불가능한 일을 생각할 수 있는 거야!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라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규한이도 불렀으니까 좀 이따 올 거야. 두 사람한테 제일 먼저 알리고 싶었어.”
가라앉은 기분이 규한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요동을 쳤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정규한이었다. 규섭에 대한 그녀의 비밀스런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그 변태적일 만큼 잔인한 놈이 어떻게 자신을 놀릴까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종은은 자신의 그런 두려움을 숨긴 채 눈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었다. 잔이 넘쳐 손에 술이 흘렀지만 아랑곳없이 그녀는 한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이렇게 된 거 그 자식이 오기 전에 그냥 취해 버려서 차라리 모든 걸 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두 사람도 이젠 나이 생각해서 진지하게 만나야지. 안 그대로 우리 부모님은 종은이 너 둘째 며느리로 생각하고 계신다.”
오, 마이 갓. 제발. 종은은 슬픈 눈으로 규섭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연거푸 술을 마신 탓인지 조금 굴절되어 보이지만 잘생긴 건 여전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젠장,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을 누가 아름답다고 했던가? 종은은 들고 있는 술잔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런데 언제부터 두 사람 사귄 거…….”
“첫눈에 반했잖아. 오빠도, 나도. 진짜 오빠 보는 순간 누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치는 것 같더라. 오빤 종소리가 들렸대.”
발갛게 볼을 물들인 유라의 말에 종은은 울컥 나오는 욕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그녀의 머리를 누군가 망치로, 그것도 흡사 북유럽의 천하장사 신인 토르가 가진 그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았다. 아찔함을 참으며 다시 술을 들이켜는데 규섭이 그녀의 뒤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규한이 왔다.”
갈수록 태산, 첩첩산중이라더니. 종은이 술을 따르는데 털썩 옆에 커다란 남자가 앉는다. 그녀가 따른 술을 마시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그 잔을 낚아챘다.
“뭐야!”
하지만 이미 술은 규한의 입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오늘 종은이가 술 좀 받나 봐. 아까부터 혼자 달린다.”
규섭의 말에 규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식식대며 혼자만의 울분을 삭이던 종은이지만 차마 규한을 볼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알 그이기에 자신의 감정을 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도 슬슬 제대로 사귀어야지. 언제까지 미적지근하게 있을 거야.”
“우린 그냥 친구예요. 친. 구!”
규섭의 말에 종은이 고개를 발딱 들었다. 하지만 종은의 말은 그대로 허공에 흩어진 의미 없는 단어일 뿐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누구도 그 말에 가타부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