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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연습 2화


“어쨌든 축하해. 그동안 잘도 숨기고 연애했네.”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인 규한의 말에 규섭과 유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매사에 삐딱하다고 해야 할까? 칼 같다고 해야 할까? 형제인데도 규섭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축하하는 의미로 건배 한 번 하죠.”
호기롭게 말을 뱉은 사람은 종은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 취해서 인사불성이 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규한 앞에서 질질 짜는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그 뒤로 종은은 러브샷에 파도타기 등등 동석한 세 사람이 당황할 정도로 자신이 아는 술 자리의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종은의 모습을 규한이 눈살을 찌푸린 채 쳐다보는 것도 모른 채.

“야, 쫑! 정신 안 차려?”
규섭과 유라를 먼저 보낸 규한이 한심한 듯 종은을 쳐다보았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는 주제에 쉴 새 없이 마셔 대더니 순식간에 정신줄을 놔 버린 것이다. 철없고 부질없는 첫사랑인 걸 왜 모르는 걸까? 아무리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규섭에 대한 감정이 진지하고 절실했다면 지금까지 미적지근하게 끌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마음도 모르는 바보 같으니. 그는 혀를 쯧, 하고 찼다.
“쫑, 지금 안 일어나면 버리고 간다.”
“나쁜 놈.”
“뭐?”
“못돼 처먹은 놈. 지금 나 버리고 가면 너 진짜 나쁜 놈이다.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날 버리고 가!”
평소 그의 말에 주눅 드는 것과 달리 술이 들어간 탓에 간이 부었는지 종은이 갑자기 얼굴을 발딱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평소 땡그란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해 반쯤 감겨 있었다. 규한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꼬집듯 잡았다.
“아주 간땡이가 처부었지.”
“너 때문이야!”
“뭐?”
“이씨, 내가 이렇게 된 건 너 때문이라고!”
규한의 인상이 확 찌그러졌다.
이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고? 웃기지 말라고 그래. 이렇게 된 건 이종은 너 때문이다. 어리숙할 정도로 순진해 빠져서는 정작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 줄도 모르는 둔탱이 같으니.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종은의 팔을 확, 당겨 세웠다.
“일어나!”
“싫어! 너하고는 안 가! 이씨, 나 혼자 갈 거야!”
종은이 그를 뿌리치고 일어서려다 비틀대며 탁자를 짚었다. 그 바람에 그 위의 접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소란에 가게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하지만 종은은 그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고는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깨진 건 없어 규한은 달려온 종업원에게 사과를 한 후 종은의 뒤를 따랐다.
거리에 나와서도 종은의 걸음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아주 가관이었다. 거기다 허공에 삿대질까지 하며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규한은 바닥난 인내심을 간신히 끌어모았다.
“이종은, 그만해라. 참을 만큼 참았다.”
“뭘 참아! 너 때문에 내가 참은 게 얼만데. 이번엔 내가 안 참아!”
“안 참으면?”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음산할 정도로 낮아지자 취한 와중에도 종은이 화들짝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근 20년을 그 목소리에 벌벌 떨어 온 탓인지 머리끝까지 오른 취기에도 불구하고 위기의식을 느끼긴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반응이 못마땅한지 평소 같으면 퓨슈슉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질 텐데 종은이 고개를 발딱 들며 반항적인 표정을 지었다.
“정규한. 오늘 딱 한 번만 말하는데, 너랑 나랑은 오늘부터 쫑이야! 쫑!”
“뭐?”
“이제 너 안 본다고. 그러니까 너랑 나랑 다시 볼 일 없다고. 유 오케이, 미 오케이, 에브리바디 오케이! 여러분! 오늘부터 전 정규한한테서 해방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팔을 쭉 펴고 빙글빙글 돌며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규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의 행동에 킥킥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날카롭게 노려보는 규한의 시선에 금방 시선을 돌리면서도 종은을 힐끗거렸다.
널 어쩌면 좋냐? 이종은.
그는 화가 난 몸짓으로 그때까지 빙글빙글 돌고 있는 종은의 팔을 확 당겼다. 작은 그녀의 몸이 찰싹, 품 안으로 들어왔다.
“쫑, 정신 차려.”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지만 반응이 없다. 작은 팔이 그의 허리를 불쑥 감아 왔다.
“야, 너 진짜…….”
“정규한, 나쁜 놈아.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그를 욕하면서도 종은이 더 강하게 그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그녀를 떼어 내려던 규한의 눈빛이 짙어졌다. 한동안 말없이 종은을 내려다보던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은 팔에 힘을 꾹 주었다.

“으응.”
잠결에 종은은 몸을 뒤척였다. 가슴께가 짓눌린 듯 무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입안은 텁텁하고 쥐가 머릿속을 긁어 대는 듯이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그녀는 간신히 눈을 뜨고 무거운 몸을 버둥거렸다.
이게 뭐야?
종은은 흐릿한 정신에 가슴 위의 물체를 들어 그 정체를 확인했다. 잘 빠진 탄탄한 갈색의 팔. 응?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오싹해지며 머리끝이 쭈뼛 섰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천천히 돌려 옆을 확인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악! 꺄악!”
주변 공기가 흔들릴 정도로 큰 비명에 옆에 있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왜 그래? 뭔데?”
아직도 잠에서 덜 깬 듯 규한의 목소리가 약간 낮게 쉬어 있었다.
오 마이 갓!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제발 이것이 꿈이라고 해 주세요.
종은은 자기가 아는 모든 신들을 부르며 빌었지만 눈앞의 커다란 남자의 형체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헝클어진 머리와 떡 벌어진 어깨, 탄탄한 가슴팍을 지나 매끈한 복부까지 시선을 내리던 종은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하체는 하얀 시트에 덮여 있었다.
팬티는 입었겠지? 아니, 입었을 거야. 설마, 우리가 사고를 쳤을 리가 없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규한하고 사고를 쳐. 꿈에서라도 안 될 일이지.
하지만 확신은 없고, 불안함만 점점 더 커져갔다. 무엇보다 자신이 속옷 바람이라는 게 더 무서웠다. 그 때문에 저도 모르게 딸꾹, 하고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비명에 잠이 깬 규한이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울상이 된 종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졸음기가 가시며 사악할 정도로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그 표정에 종은은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전율을 느꼈다.
갑자기 그가 몸을 그녀에게로 숙이더니 긴 팔을 그녀의 맨어깨 위에 털썩 올렸다. 움찔, 놀라는 그녀의 몸짓에도 아랑곳없이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의 숨결이 뺨에 닿자 오소소 팔에 소름이 돋아 왔다.
아, 안 돼.
“잘 잤어? 우리 쫑.”
헉, 순간 종은은 숨을 쉬는 걸 잊고 말았다. 그녀의 온몸이 얼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아연한 그 표정에 규한의 미소는 더욱 커져 갔다.
이젠 죽었구나.
종은은 악마 같은 그 미소를 차마 마주할 수 없어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잘도 도망 다녔지, 그동안. 어쩐지 운이 좋다 했다.
퇴근 준비를 하던 종은은 씁쓸하게 지난 주말의 일들을 떠올렸다. 생각할수록 한숨밖에 안 나왔다. 그놈의 술이 웬수지.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저절로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종은 샘, 오늘 처총회 모임 갈 거죠?”
바로 앞자리의 교사이자 종은의 반 부담임인 서형우 선생의 말에 종은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오늘은 참석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다음에는 안 빠질게요.”
학교의 처총회는 제법 기강이 잡혀 한 달에 한 번씩 꼭 모임을 가졌다. 딱히 남녀가 사귀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친목도모의 목적이 더 강해 또래 젊은 동료교사들과 친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나 최근 부담임인 형우가 그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종은에게 관심을 보였다. 형우가 성격도 좋고, 잘생기긴 했지만 연하라 그런지 종은은 그가 그저 친한 동생처럼만 느껴졌다.
게다가 규한과 그런 일까지 있은 마당에 처총회 따위가 뭔 상관이랴. 규한을 떠올린 종은은 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에 형우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종은 샘, 오늘 무슨 걱정 있으세요? 땅 꺼지겠어요.”
“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네.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저 먼저 가 볼게요.”
“아, 그럼 제가 데려다…….”
“아니, 됐어요. 내일 봐요.”
종은은 그녀를 바래다주겠다며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는 형우에게 인사를 하고는 혼자 교무실을 나섰다. 교문 앞에서 마침 학교를 나가는 학생들의 인사를 받는데 빵, 하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익숙한 차체의 모습이 들어왔다.
도망갈 구멍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거네. 종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차 앞으로 다가갔다. 조수석 창문이 징, 하고 내려갔다.
“타.”
양복 상의를 벗은 규한은 왠지 더 남자답고 잘생겨 보였다. 외모 하나는 KS마크를 찍어 놔도 될 정도다. 종은이 머뭇거리자 규한의 잘생긴 눈썹이 올라갔다. 그 표정에 그녀는 평소 습관처럼 주춤하고 말았다.
“뭐 해? 안 타고.”
“아, 미안.”
집에 가서나 볼 줄 알았는데 학교 앞까지 오다니. 전자기기를 생산하는 대기업에 다니는 규한은 그녀보다 빨리 출근하고 늦게 퇴근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추다니. 조퇴라도 했나? 얼마나 화가 났으면. 더럭 겁이 나면서도 종은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차에 올랐다.
하지만 차 안에 타자 긴장감이 가슴에 터질 듯이 차올라 결국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녀의 커다란 한숨 소리에 규한이 힐끗 돌아보았다.
“저녁 먹으러 가자.”
“응? 난 별로 배 안 고픈데. 그냥 얘기만 하…….”
“난 배고파. 너 먹고 싶은 거 없으면 나 가고 싶은 데로 가면 되지?”
“아, 응. 그, 그러든지.”
규한이 운전을 하는 동안 종은은 침묵을 지켰다. 그와 있는 동안 가끔씩 이상한 침묵이 깔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규한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봐 종은은 늘 그와 있을 때면 그 어색하고 야릇한 침묵을 피하기 위해 종알종알 얘기를 걸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규한의 분위기 역시 평소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힐끗힐끗 규한을 훔쳐보았다. 조각같이 깎인 얼굴선이 딱딱하게 굳은 탓에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규한의 잘생긴 외모가 저한테도 그 매력을 발산하면 좋으련만 종은은 그가 주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 가족만큼이나 같이 보낸 시간이 많은 걸 생각하면 그녀가 느끼는 그 불편함은 부자연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가끔 저를 보는 규한의 그 시선이 무섭기도 해서 종은은 늘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붙어 있게 되는 건 왜인지 저도 잘 모를 일이었다.
생각보다 꽤 먼 곳으로 가는지 거의 한 시간을 달려서야 차가 멈췄다. 규한이 차를 멈춘 곳은 시 외곽의 큰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평일 저녁이고 조금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전망이 좋은 창가의 구석진 자리로 안내되었다.
“뭐 먹을래?”
“너 먹고 싶은 거 먹어. 난 괜찮아.”
“나 혼자 시켜 먹으라고?”
“아, 난 그럼 크림파스타.”
불에 덴 듯 후다닥 주문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규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도 별 입맛은 없는지 파스타 하나와 탄산음료만 시켰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사라지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종은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먼저 말을 걸어 줬으면 좋겠는데 규한은 그녀가 무서워하는 그 시선으로 쳐다만 보았다. 결국, 답답해진 종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규한아. 우리…….”
“내 말 먼저 들어.”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규한이 말을 막았다. 뭐야!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더니. 종은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더 짙어진 걸 알고 움찔했다. 저럴 때의 규한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종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날 일, 난 후회 안 해.”
헉, 종은은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회 안 한다니, 무슨 뜻이지?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하려던 종은의 입이 쑥 들어갔다. 규한이 말을 이었다.
“내가 강제로 했던 것도 아니고 네가 먼저 원했던 거야.”
“뭐?”
맙소사. 그날 일을 떠올리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써 봤지만 단편적인 기억이 전부였다. 그 기억 속에서 확실히 규한에게 입술을 밀어붙인 건 자신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