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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1화
1.
12월의 첫날은 새하얀 눈이 맞이했다. 은하는 가만히 서서 연구실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국최면치료연구소는 13층의 복합 상가 7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깥의 풍경을 보기에는 꽤 좋았다.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높이. 은하는 그 어중간한 높이가 좋았다. 그런 어중간한 높이에서 가만히 눈이 내리는 것만 보고 있자니, 왠지 금방이라도 트랜스 상태*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은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제야 다른 연구원들이 나누는 얘기가 들려왔다. 자리를 비운 조근형 소장을 제외하고 연구소의 유일한 남자 연구원인 기현은 평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일에 몰두하는 중이었으니 그래 봐야 남은 여자 연구원 둘이 하는 얘기였다.
하지만 인영과 문주는 본래 목소리가 큰 데다 무슨 일인지 상당히 흥분된 상태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으므로 연구소의 분위기는 이미 그들이 떠드는 가십의 허황된 무게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그러니 평소 자질구레한 가십 같은 것에는 영 관심이 없던 은하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웬일이야, 정말.”
문주가 인영의 옆에 바싹 붙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놀란 듯이 입을 가렸다. 문주의 반응에 탄력을 받은 인영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내 사촌 중에 세강 본사 다니는 애가 있는데 회사엔 이미 소문이 자자했대. 사이코네, 사이코패스네 그런 말까지 나올 정도로.”
“원래 사람이 그렇게 폭력적이래요?”
“아니. 평소엔 잘 웃고 쾌활하고 보통 사람 같은데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 버린다는 거야. 그러니 사이코라고 하겠지.”
“그래도 인물은 괜찮은데요? 웬만한 연예인보다 훨 낫네.”
“원래 살인자들이 대체로 허우대는 멀쩡하잖아.”
컴퓨터를 하고 있던 은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자연스럽게 실시간 검색어에 눈이 갔다. 상위권에 ‘세강자동차’와 ‘손기태 폭행’이 자리하고 있었다.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와 검색어 덕분에, 은하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대기업 세강자동차의 차남인 손기태가 어젯밤 살인미수에 가까운 폭행을 저질러 경찰에 잡혀갔다는 얘기였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처리되었을 문제가 이리 화제가 된 이유는 동영상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중년의 남자를 가차 없이 폭행하는 장면이 누군가로 인해 동영상으로 촬영되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이었다. 영상은 현재 모두 삭제되었지만 영상을 캡처한 사진들이 곳곳에 돌아다녔고 문주와 인영도 그것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태 측은, 남자가 여자를 음흉한 눈빛으로 보며 따라가고 있어서 그를 막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여자도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아서 불편한 느낌을 받긴 했다며 어느 정도 기태를 변호해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가 음흉한 목적이 있었다고 한들, 실상 여자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말은 무의미했다. 순전히 범죄를 막으려는 목적이었다고 보기에는 폭행 정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기태와 세강 집안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문주와 인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대화의 중심이 파악되자 금세 관심을 끄고 오늘 오기로 한 내담자들의 명단과 자료를 체크했다.
그런데 그때, 인영이 은하에게 말을 붙였다. 대화 상대가 하나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은하 씨도 봤어? 기사?”
은하는 어김없이 자신을 ‘은하 씨’라고 부르는 인영이 못마땅해서 잠시 대답을 참았다. 은하가 비록 연구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도 가장 어리긴 했지만, 다른 연구원들은 모두 은하를 똑같이 ‘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대해 주었다. 그러나 인영은 자신이 이 연구소에서 소장 다음으로 경력이 오래됐고, 나이도 40대로 가장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지 항상 은하만은 ‘은하 씨’라고 부르며 처음 본 순간부터 반말을 했다.
이 연구소는 다른 연구소와는 달리 연구원들 사이에 주임연구원이나 책임연구원, 수석연구원 등의 직급이 따로 없고 모두 ‘책임연구원’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상하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서 은하는 보자마자 말을 놓은 인영에게 불만이 있었다. 은하는 모든 것은 능력 위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철저한 실력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였다.
“아니요. 별로 관심 없어서.”
뒤늦게 들려온 은하의 심드렁한 대답에 인영의 미간이 티 나게 구겨졌지만 은하는 못 본 척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세강 집안의 아들이 무슨 짓을 했고 어떤 사람이건 은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얼른 이런 무의미한 대화에서 벗어나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때마침 연구실 문이 열리고 사무원 보람이 들어왔다.
“고 선생님, 상담이요.”
한 아주머니와 여중생이 문밖에 서 있었다. 은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셨어요.”
은하가 기다리던 오늘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상담은 벌써 두 번째였기 때문에 은하는 친밀한 미소로 인사를 하며 그들을 맞았다.
“오늘은 발표할 때 딸꾹질 안 했어?”
은하는 여학생에게 최대한 자상하게 대해 주며 상담실로 들어갔다.
은하가 상담실로 들어가고 나자 인영은 참았던 불만을 토해 내듯 말했다.
“우리가 매달 친절사원 뽑는 서비스직도 아니고 왜 저렇게 손님들한테만 극성인지 몰라. 주변 사람들한테는 냉기가 아주 철철 흐르면서.”
“그게 고 선생님 매력이잖아요.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여태 말 한 마디 없던 기현이 갑자기 헤벌쭉 웃으며 은하의 편을 들고 나서자 인영이 발끈하며 말했다.
“권 선생도 남자라고. 하여간 남자들은 예쁘기만 하면 다지? 은하 씨는 아주 그냥 손기태 같은 사이코한테나 한번 걸려 봐야 되는데.”
“어우, 선생님도. 그런 악담을.”
문주가 팔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왜, 사이코한테도 저렇게 잘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인영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기현과 문주는 그녀의 말에 상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면치료실을 제외하고 연구소의 모든 구조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연구실 안에서도 대기실이나 상담실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은하는 어김없이 선한 웃음을 지으며 내담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은하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마치 지금 창밖에 내리고 있는 눈처럼, 맑고 새하얀 미소였다.
*
며칠 동안 눈과 비가 번갈아 가며 내리다가 간만에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은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가끔씩 눈을 때리듯이 다가오는 햇살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는 것처럼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요즘 내내 어둑어둑한 날들이 계속되어 기분이 처지던 차에 가뭄에 든 단비처럼 반가운 날씨였다. 때마침 이어폰에서는 ‘기분 좋은 날’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항상 집, 연구소, 집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특별할 일도 없었지만 왠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은하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 들뜬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익숙한 길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던 은하의 발이 멈칫했다. 은빛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햇빛에 반사되어 은하의 눈을 찔렀다. 은하는 의도치 않게 차 안을 보게 되었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꼿꼿한 자세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차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로봇처럼 각이 잡혀 있는 게, 누군가의 운전기사나 수행비서처럼 보였다.
왠지 범상치 않은 사람이 이 건물에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사람이 꼭 연구소에 들렀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었기에 은하는 이내 관심을 끄고 고개를 돌렸다.
건물에 들어선 은하는 이제 막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로 뛰어가며 말했다.
“잠시만요!”
사람이 꽤 많았지만 앞에 있던 남자가 문을 다시 열어 주었다. 은하는 그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을 누르려고 손을 움직이려는 찰나, 이미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몇 층 가세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위치 때문에 버튼을 누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준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은하는 새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진회색의 정장을 입은 그에게서는 굉장히 세련되고 깔끔한 분위기가 풍겼다. 짙은 브라운색의 머리와 하얀 피부가 다소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눈동자도 검은색보다는 갈색에 가까웠다. 날카로운 콧날과 대비되는 선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키는 은하와 족히 20cm는 차이가 날 만큼 커서 오래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은하는 다시 앞을 보며 대답했다.
“7층이요.”
남자는 잠시 있다가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내렸다.
“저랑 같네요.”
보이진 않았지만 은하는 남자가 미소 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7층에 도착했다. 은하가 먼저 내리고 남자가 뒤따라 내렸다. 7층에는 한국최면치료연구소와 이비인후과가 있었다. 은하는 연구소가 있는 왼쪽으로 꺾었다. 잠시 멈추었던 남자의 구두 소리가 은하의 뒤에서 다시 들렸다. 남자는 구두 소리마저 반듯했다.
은하는 연구소 문 앞에서 멈추었다. 연구소에 들를 손님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모른 척 먼저 들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남자의 구두 소리가 멈추었다.
은하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의아한 듯 은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은하를 보던 그의 눈빛이 묘하게 점점 깊어질 무렵, 은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죠.”
남자는 대답 없이 은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은하는 자신의 얼굴에서 무엇을 찾기라도 하는 듯 멍하니 바라보는 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 남자가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은하가 뒤따라 들어갔다. 은하는 남자를 접수대로 안내하고 연구실로 들어가 제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바쁜 소장을 제외한 연구원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다. 연구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방 정리를 하는데 옆자리의 문주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누구시래요?”
문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글쎄요.”
은하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서류를 꺼냈다. 그때 남자가 뒤를 돌아 연구실을 보았다. 마침 고개를 들었던 은하는 다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역시나 은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머, 여기 보는데요? 잘생겼다. 귀티도 흐르는 게…… 보통 남자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자 인영도 불쑥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남자는 은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어, 저 사람!”
인영이 놀란 듯 말했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인영을 향했다.
“왜요? 아는 사람이에요?”
“손기우잖아. 그 세강차 장남!”
“네? 정말요? 그 사람이 여길 왜요?”
인영은 갑자기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엊그제 소장님이 세강 쪽이랑 통화를 하는 것 같아서 살짝 엿들었는데, 손기태 폭행사건 때문에 얘기하는 것 같더라구. 설마 했는데 진짜였네! 아무래도 너무 말들이 많으니까 폭력성 좀 치료해 보려는 거 아니겠어?”
“세상에. 그걸 왜 하필 여기서요?”
문주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은하도 무심한 척 서류를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뭐, 그동안 온갖 치료 다 해 보지 않았겠어? 요즘 최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늘고.”
얼마 전 한 다큐멘터리가 최면 치료에 대해 그동안의 미신적인 접근 방법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시각으로 다루면서 대중들의 최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조근형 소장도 한국의 최면 치료사들을 대표하여 그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를 했었다.
“당연히 소장님이 맡으시겠죠?”
문주가 약간 두려운 기색으로 인영에게 물었다.
“그렇겠지. 전화까지 하신 걸 보면.”
인영은 그렇게 말했지만 표정은 어두워져 있었다. 기현도 이 일에 얽히기 싫다는 듯 바로 고개를 숙이고 제 일에 몰두했다.
그때였다. 연구실 문이 열리고 보람이 들어왔다.
“고 선생님, 잠시만요.”
서류를 넘기던 은하의 손이 멈칫했다.
“왜요?”
“손님이 잠깐 뵙기를 청하시는데요.”
은하는 약간 당황했지만 조용히 대기실을 내다보았다. 남자는 어느새 서서 대기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기실 벽에 붙어 있는 연구원들의 이력을 보고 있었다.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가 은하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은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연구실을 나왔다. 보람은 다시 접수대로 돌아갔고 은하는 대기실을 서성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부르셨다고요.”
은하가 옆에 서서 말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은하도 그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낯익은 얼굴과 고은하라는 이름이 보였다. Y대학교 심리학과 학사, D대학교대학원 자연치유학과 최면NLP 전공 석사, 국제심리연구원 수료 등의 학력이 보였고, ABH 국제 공인 최면전문가, 최면심리상담사, 국제 공인 NLP 프랙티셔너, NLP 마스터 프랙티셔너 등 은하가 가지고 있는 자격증들이 보였다.
“저기요.”
기다리다 못한 은하가 다시 그를 부르자, 남자는 그제야 은하를 돌아보았다.
“젊으신 것 같은데, 이력이 화려하네요.”
“저를 왜 부르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러자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손기우라고 합니다.”
은하는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내민 손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서 무언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거절할 수도 없어서 이윽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은하의 손을 잡았다.
순간 아주 잠깐이었지만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한 짜릿한 느낌이 스쳐 지났다. 은하는 흠칫 놀라 커진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은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연구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손이 떨어졌다. 은하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등에 굵은 핏줄이 얼핏 솟아 있는 평범한 남자의 손이었다. 분명 평범한 손이었는데, 그의 손을 잡았던 순간의 느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아, 손기우 씨 오셨나요?”
조 소장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조 소장과 기우가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일이 있어서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들어가서 얘기하실까요?”
“아니요.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우가 은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은하는 아직 그에게서 느낀 묘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죄송하지만, 담당 선생님을 바꾸려고 합니다.”
조 소장은 물론 은하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고은하 선생님이 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우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는, 트랜스 상태만큼이나 신비롭고 몽환적이었다.
2.
벌써 몇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메마른 입술은 여전히 퍼석하기만 했다. 은하는 생각에 잠긴 채 조 소장과 기우가 하는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고은하 선생님.”
은하는 잠시 뒤에야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은하는 조 소장의 얼굴을 보았다. 조 소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눈짓을 주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은하는 평소 절대 환자를 가려서 받지 않았다. 마음의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심을 다해 받아 주고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우는 기태의 치료를 일주일에 세 번씩 한 달간, 방문 상담으로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방문 상담이라고 해도 대개는 업무 시간 내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그는 업무 시간이 훌쩍 지난 밤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를 상담 시간으로 부탁했다.
은하는 밤과 추위를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그토록 완벽주의를 추구하면서도 한 번도 야근한 적이 없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집에 가서 하곤 했다. 개인적인 약속을 잡아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밤늦게 나가지 않았다. 어둠공포증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어둠이 싫었다.
그런데 그 늦은 시간에, 그것도 남자 둘이 산다는 집에 가서 상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하고 불편했다.
“반드시 그 시간이어야만 하는 건가요? 조금만 당길 순 없나요?”
은하가 고민 끝에 묻자 기우는 단칼에 대답했다.
“네. 그 시간이어야만 합니다.”
“왜죠?”
“기태의 문제가 그 시간에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은하도 지난번 폭행사건으로 그의 문제를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시간과 연관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기태는 한밤중에, 특히 열한 시경에 상당히 예민해집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누군가 자극하면 심리 상태가 더욱 불안해져 폭력성까지 보이는 겁니다. 귀국한 뒤로 간혹 보이긴 했는데 지난번 사건은 그 정도가 가장 심했습니다. 아무래도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찾아오게 됐습니다.”
밤 열한 시. 그리고 누군가의 자극이라. 잠시 생각에 잠겨 굳어 있던 은하의 표정을 보고 기우가 짧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께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녀석이 폭력성을 보이는 대상은 오직 남자뿐이니까요. 그런 면에서도 조 소장님보다는 고은하 선생님이 더 적격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기우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은하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반드시 문제가 일어나는 시간에만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면 치료라는 것은, 언제 하는지와 관계없이 마음의 고통을 잘 덜어 주기만 하면 문제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기태가 밤 열한 시에 유독 예민해지고 폭력성을 보인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왜 굳이 치료까지 그 시간에 해야 하는지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기태는 그 시간이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네?”
“그 녀석은 10년 동안 가면을 쓰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요. 그 가면을 벗는 유일한 시간이 바로 밤 열한 시입니다. 오로지 그때만 진짜 손기태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아니고서, 그 녀석은 절대 자신의 진심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최면 치료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밤 열한 시. 꼭 그 시간에만 예민해지고, 또 그 시간에만 진짜 모습을 보인다.
은하는 기우의 말을 유심히 곱씹어 보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산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그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밤 열한 시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지금 물을 수는 없었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기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간을 옮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고 선생님 같은 젊은 여자 선생님들이 늦은 시간에 방문 상담을 하시는 게 쉽진 않습니다. 고 선생님은 특히 밤을 유독 싫어해서 저희랑 제대로 된 회식도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요.”
어두운 표정의 은하가 걱정이 됐는지, 조 소장이 은하를 대신하여 말해 주었다. 기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기우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게 가장 큰 문제라면 여자 가드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상담을 오실 때와 가실 때 언제든 가드와 함께 차를 보낼 테니, 그걸 타고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은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저, 그런데…….”
그러나 기우는 그녀가 거절을 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말을 자르며 나섰다.
“이천.”
은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 숫자가 낯설어 처음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이윽고 그 숫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보통 최면 치료는 한 회에 15만 원에서 많으면 20만 원까지 받았다. 고작 열두 번의 최면 치료에 이천만 원이라니. 지나치게 넘치는 금액이었다.
“선후 천만 원씩 총 이천만 원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특별하고 위험한 케이스인 만큼, 저희도 신경을 써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이번 계약이 성사될 경우 조 소장은 은하에게도 1/4의 특별 수당을 주겠다고 했다. 수당 하나가 월급의 두 배를 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하에게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 그녀는 그다지 돈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이번처럼 특별 수당이 있긴 했지만, 은하의 연구소는 월급제였다. 차라리 기우가 은하에게 사적으로 이런 제안을 해 왔다면 오히려 쉽게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치료비는 은하가 아닌 연구소에 들어가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기우는 치료가 잘될 경우 계약된 치료비 외에 주기적인 후원금도 줄 수 있다고 했다. 은하가 이 일을 맡기만 하면 연구소의 사정이 훨씬 좋아지고 연구원들의 월급도 오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 소장이 편한 대로 하라고 말해도 은하는 이 일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은하는 짧은 숨을 토해 낸 뒤 기우를 보았다.
“하죠.”
기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하겠습니다. 손기태 씨 치료.”
1화
1.
12월의 첫날은 새하얀 눈이 맞이했다. 은하는 가만히 서서 연구실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국최면치료연구소는 13층의 복합 상가 7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깥의 풍경을 보기에는 꽤 좋았다.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높이. 은하는 그 어중간한 높이가 좋았다. 그런 어중간한 높이에서 가만히 눈이 내리는 것만 보고 있자니, 왠지 금방이라도 트랜스 상태*에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은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제야 다른 연구원들이 나누는 얘기가 들려왔다. 자리를 비운 조근형 소장을 제외하고 연구소의 유일한 남자 연구원인 기현은 평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일에 몰두하는 중이었으니 그래 봐야 남은 여자 연구원 둘이 하는 얘기였다.
하지만 인영과 문주는 본래 목소리가 큰 데다 무슨 일인지 상당히 흥분된 상태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으므로 연구소의 분위기는 이미 그들이 떠드는 가십의 허황된 무게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그러니 평소 자질구레한 가십 같은 것에는 영 관심이 없던 은하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웬일이야, 정말.”
문주가 인영의 옆에 바싹 붙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놀란 듯이 입을 가렸다. 문주의 반응에 탄력을 받은 인영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내 사촌 중에 세강 본사 다니는 애가 있는데 회사엔 이미 소문이 자자했대. 사이코네, 사이코패스네 그런 말까지 나올 정도로.”
“원래 사람이 그렇게 폭력적이래요?”
“아니. 평소엔 잘 웃고 쾌활하고 보통 사람 같은데 어느 순간 갑자기 돌아 버린다는 거야. 그러니 사이코라고 하겠지.”
“그래도 인물은 괜찮은데요? 웬만한 연예인보다 훨 낫네.”
“원래 살인자들이 대체로 허우대는 멀쩡하잖아.”
컴퓨터를 하고 있던 은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자연스럽게 실시간 검색어에 눈이 갔다. 상위권에 ‘세강자동차’와 ‘손기태 폭행’이 자리하고 있었다. 직원들이 하는 이야기와 검색어 덕분에, 은하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을 대표하는 대기업 세강자동차의 차남인 손기태가 어젯밤 살인미수에 가까운 폭행을 저질러 경찰에 잡혀갔다는 얘기였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히 처리되었을 문제가 이리 화제가 된 이유는 동영상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중년의 남자를 가차 없이 폭행하는 장면이 누군가로 인해 동영상으로 촬영되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이었다. 영상은 현재 모두 삭제되었지만 영상을 캡처한 사진들이 곳곳에 돌아다녔고 문주와 인영도 그것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태 측은, 남자가 여자를 음흉한 눈빛으로 보며 따라가고 있어서 그를 막기 위해 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여자도 남자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아서 불편한 느낌을 받긴 했다며 어느 정도 기태를 변호해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가 음흉한 목적이 있었다고 한들, 실상 여자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말은 무의미했다. 순전히 범죄를 막으려는 목적이었다고 보기에는 폭행 정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기태와 세강 집안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문주와 인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대화의 중심이 파악되자 금세 관심을 끄고 오늘 오기로 한 내담자들의 명단과 자료를 체크했다.
그런데 그때, 인영이 은하에게 말을 붙였다. 대화 상대가 하나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은하 씨도 봤어? 기사?”
은하는 어김없이 자신을 ‘은하 씨’라고 부르는 인영이 못마땅해서 잠시 대답을 참았다. 은하가 비록 연구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이도 가장 어리긴 했지만, 다른 연구원들은 모두 은하를 똑같이 ‘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대해 주었다. 그러나 인영은 자신이 이 연구소에서 소장 다음으로 경력이 오래됐고, 나이도 40대로 가장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지 항상 은하만은 ‘은하 씨’라고 부르며 처음 본 순간부터 반말을 했다.
이 연구소는 다른 연구소와는 달리 연구원들 사이에 주임연구원이나 책임연구원, 수석연구원 등의 직급이 따로 없고 모두 ‘책임연구원’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상하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서 은하는 보자마자 말을 놓은 인영에게 불만이 있었다. 은하는 모든 것은 능력 위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철저한 실력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였다.
“아니요. 별로 관심 없어서.”
뒤늦게 들려온 은하의 심드렁한 대답에 인영의 미간이 티 나게 구겨졌지만 은하는 못 본 척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세강 집안의 아들이 무슨 짓을 했고 어떤 사람이건 은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얼른 이런 무의미한 대화에서 벗어나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때마침 연구실 문이 열리고 사무원 보람이 들어왔다.
“고 선생님, 상담이요.”
한 아주머니와 여중생이 문밖에 서 있었다. 은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셨어요.”
은하가 기다리던 오늘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상담은 벌써 두 번째였기 때문에 은하는 친밀한 미소로 인사를 하며 그들을 맞았다.
“오늘은 발표할 때 딸꾹질 안 했어?”
은하는 여학생에게 최대한 자상하게 대해 주며 상담실로 들어갔다.
은하가 상담실로 들어가고 나자 인영은 참았던 불만을 토해 내듯 말했다.
“우리가 매달 친절사원 뽑는 서비스직도 아니고 왜 저렇게 손님들한테만 극성인지 몰라. 주변 사람들한테는 냉기가 아주 철철 흐르면서.”
“그게 고 선생님 매력이잖아요.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여태 말 한 마디 없던 기현이 갑자기 헤벌쭉 웃으며 은하의 편을 들고 나서자 인영이 발끈하며 말했다.
“권 선생도 남자라고. 하여간 남자들은 예쁘기만 하면 다지? 은하 씨는 아주 그냥 손기태 같은 사이코한테나 한번 걸려 봐야 되는데.”
“어우, 선생님도. 그런 악담을.”
문주가 팔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왜, 사이코한테도 저렇게 잘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인영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기현과 문주는 그녀의 말에 상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면치료실을 제외하고 연구소의 모든 구조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연구실 안에서도 대기실이나 상담실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은하는 어김없이 선한 웃음을 지으며 내담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은하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마치 지금 창밖에 내리고 있는 눈처럼, 맑고 새하얀 미소였다.
*
며칠 동안 눈과 비가 번갈아 가며 내리다가 간만에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은하는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가끔씩 눈을 때리듯이 다가오는 햇살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는 것처럼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요즘 내내 어둑어둑한 날들이 계속되어 기분이 처지던 차에 가뭄에 든 단비처럼 반가운 날씨였다. 때마침 이어폰에서는 ‘기분 좋은 날’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항상 집, 연구소, 집의 생활이었기 때문에 특별할 일도 없었지만 왠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은하는 평소답지 않게 조금 들뜬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익숙한 길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던 은하의 발이 멈칫했다. 은빛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햇빛에 반사되어 은하의 눈을 찔렀다. 은하는 의도치 않게 차 안을 보게 되었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꼿꼿한 자세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차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로봇처럼 각이 잡혀 있는 게, 누군가의 운전기사나 수행비서처럼 보였다.
왠지 범상치 않은 사람이 이 건물에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사람이 꼭 연구소에 들렀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었기에 은하는 이내 관심을 끄고 고개를 돌렸다.
건물에 들어선 은하는 이제 막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로 뛰어가며 말했다.
“잠시만요!”
사람이 꽤 많았지만 앞에 있던 남자가 문을 다시 열어 주었다. 은하는 그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7층을 누르려고 손을 움직이려는 찰나, 이미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몇 층 가세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위치 때문에 버튼을 누르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준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은하는 새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진회색의 정장을 입은 그에게서는 굉장히 세련되고 깔끔한 분위기가 풍겼다. 짙은 브라운색의 머리와 하얀 피부가 다소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눈동자도 검은색보다는 갈색에 가까웠다. 날카로운 콧날과 대비되는 선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키는 은하와 족히 20cm는 차이가 날 만큼 커서 오래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은하는 다시 앞을 보며 대답했다.
“7층이요.”
남자는 잠시 있다가 버튼을 누르려던 손을 내렸다.
“저랑 같네요.”
보이진 않았지만 은하는 남자가 미소 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7층에 도착했다. 은하가 먼저 내리고 남자가 뒤따라 내렸다. 7층에는 한국최면치료연구소와 이비인후과가 있었다. 은하는 연구소가 있는 왼쪽으로 꺾었다. 잠시 멈추었던 남자의 구두 소리가 은하의 뒤에서 다시 들렸다. 남자는 구두 소리마저 반듯했다.
은하는 연구소 문 앞에서 멈추었다. 연구소에 들를 손님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모른 척 먼저 들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남자의 구두 소리가 멈추었다.
은하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의아한 듯 은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은하를 보던 그의 눈빛이 묘하게 점점 깊어질 무렵, 은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죠.”
남자는 대답 없이 은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은하는 자신의 얼굴에서 무엇을 찾기라도 하는 듯 멍하니 바라보는 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때 남자가 비로소 정신이 든 듯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은하가 뒤따라 들어갔다. 은하는 남자를 접수대로 안내하고 연구실로 들어가 제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바쁜 소장을 제외한 연구원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다. 연구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방 정리를 하는데 옆자리의 문주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누구시래요?”
문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글쎄요.”
은하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서류를 꺼냈다. 그때 남자가 뒤를 돌아 연구실을 보았다. 마침 고개를 들었던 은하는 다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역시나 은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머, 여기 보는데요? 잘생겼다. 귀티도 흐르는 게…… 보통 남자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자 인영도 불쑥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남자는 은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어, 저 사람!”
인영이 놀란 듯 말했다. 일순 모두의 시선이 인영을 향했다.
“왜요? 아는 사람이에요?”
“손기우잖아. 그 세강차 장남!”
“네? 정말요? 그 사람이 여길 왜요?”
인영은 갑자기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엊그제 소장님이 세강 쪽이랑 통화를 하는 것 같아서 살짝 엿들었는데, 손기태 폭행사건 때문에 얘기하는 것 같더라구. 설마 했는데 진짜였네! 아무래도 너무 말들이 많으니까 폭력성 좀 치료해 보려는 거 아니겠어?”
“세상에. 그걸 왜 하필 여기서요?”
문주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은하도 무심한 척 서류를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뭐, 그동안 온갖 치료 다 해 보지 않았겠어? 요즘 최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늘고.”
얼마 전 한 다큐멘터리가 최면 치료에 대해 그동안의 미신적인 접근 방법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시각으로 다루면서 대중들의 최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 조근형 소장도 한국의 최면 치료사들을 대표하여 그 다큐멘터리에서 인터뷰를 했었다.
“당연히 소장님이 맡으시겠죠?”
문주가 약간 두려운 기색으로 인영에게 물었다.
“그렇겠지. 전화까지 하신 걸 보면.”
인영은 그렇게 말했지만 표정은 어두워져 있었다. 기현도 이 일에 얽히기 싫다는 듯 바로 고개를 숙이고 제 일에 몰두했다.
그때였다. 연구실 문이 열리고 보람이 들어왔다.
“고 선생님, 잠시만요.”
서류를 넘기던 은하의 손이 멈칫했다.
“왜요?”
“손님이 잠깐 뵙기를 청하시는데요.”
은하는 약간 당황했지만 조용히 대기실을 내다보았다. 남자는 어느새 서서 대기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기실 벽에 붙어 있는 연구원들의 이력을 보고 있었다.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가 은하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은하는 담담한 표정으로 연구실을 나왔다. 보람은 다시 접수대로 돌아갔고 은하는 대기실을 서성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부르셨다고요.”
은하가 옆에 서서 말했지만 남자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은하도 그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낯익은 얼굴과 고은하라는 이름이 보였다. Y대학교 심리학과 학사, D대학교대학원 자연치유학과 최면NLP 전공 석사, 국제심리연구원 수료 등의 학력이 보였고, ABH 국제 공인 최면전문가, 최면심리상담사, 국제 공인 NLP 프랙티셔너, NLP 마스터 프랙티셔너 등 은하가 가지고 있는 자격증들이 보였다.
“저기요.”
기다리다 못한 은하가 다시 그를 부르자, 남자는 그제야 은하를 돌아보았다.
“젊으신 것 같은데, 이력이 화려하네요.”
“저를 왜 부르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러자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손기우라고 합니다.”
은하는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그가 내민 손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서 무언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거절할 수도 없어서 이윽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은하의 손을 잡았다.
순간 아주 잠깐이었지만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한 짜릿한 느낌이 스쳐 지났다. 은하는 흠칫 놀라 커진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은하를 보고 있었다.
그때 연구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손이 떨어졌다. 은하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등에 굵은 핏줄이 얼핏 솟아 있는 평범한 남자의 손이었다. 분명 평범한 손이었는데, 그의 손을 잡았던 순간의 느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아, 손기우 씨 오셨나요?”
조 소장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조 소장과 기우가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일이 있어서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그러시군요. 들어가서 얘기하실까요?”
“아니요.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우가 은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은하는 아직 그에게서 느낀 묘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죄송하지만, 담당 선생님을 바꾸려고 합니다.”
조 소장은 물론 은하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고은하 선생님이 해 주셨으면 합니다.”
기우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는, 트랜스 상태만큼이나 신비롭고 몽환적이었다.
2.
벌써 몇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메마른 입술은 여전히 퍼석하기만 했다. 은하는 생각에 잠긴 채 조 소장과 기우가 하는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고은하 선생님.”
은하는 잠시 뒤에야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은하는 조 소장의 얼굴을 보았다. 조 소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눈짓을 주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은하는 평소 절대 환자를 가려서 받지 않았다. 마음의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심을 다해 받아 주고 치료해 주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우는 기태의 치료를 일주일에 세 번씩 한 달간, 방문 상담으로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방문 상담이라고 해도 대개는 업무 시간 내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그는 업무 시간이 훌쩍 지난 밤 아홉 시부터 열두 시까지를 상담 시간으로 부탁했다.
은하는 밤과 추위를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그토록 완벽주의를 추구하면서도 한 번도 야근한 적이 없었다. 필요한 일이 있다면 집에 가서 하곤 했다. 개인적인 약속을 잡아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밤늦게 나가지 않았다. 어둠공포증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정말로 어둠이 싫었다.
그런데 그 늦은 시간에, 그것도 남자 둘이 산다는 집에 가서 상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하고 불편했다.
“반드시 그 시간이어야만 하는 건가요? 조금만 당길 순 없나요?”
은하가 고민 끝에 묻자 기우는 단칼에 대답했다.
“네. 그 시간이어야만 합니다.”
“왜죠?”
“기태의 문제가 그 시간에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은하도 지난번 폭행사건으로 그의 문제를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떻게 시간과 연관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기태는 한밤중에, 특히 열한 시경에 상당히 예민해집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누군가 자극하면 심리 상태가 더욱 불안해져 폭력성까지 보이는 겁니다. 귀국한 뒤로 간혹 보이긴 했는데 지난번 사건은 그 정도가 가장 심했습니다. 아무래도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찾아오게 됐습니다.”
밤 열한 시. 그리고 누군가의 자극이라. 잠시 생각에 잠겨 굳어 있던 은하의 표정을 보고 기우가 짧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께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녀석이 폭력성을 보이는 대상은 오직 남자뿐이니까요. 그런 면에서도 조 소장님보다는 고은하 선생님이 더 적격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기우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은하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반드시 문제가 일어나는 시간에만 치료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면 치료라는 것은, 언제 하는지와 관계없이 마음의 고통을 잘 덜어 주기만 하면 문제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기태가 밤 열한 시에 유독 예민해지고 폭력성을 보인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왜 굳이 치료까지 그 시간에 해야 하는지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기태는 그 시간이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네?”
“그 녀석은 10년 동안 가면을 쓰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요. 그 가면을 벗는 유일한 시간이 바로 밤 열한 시입니다. 오로지 그때만 진짜 손기태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아니고서, 그 녀석은 절대 자신의 진심을 내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최면 치료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밤 열한 시. 꼭 그 시간에만 예민해지고, 또 그 시간에만 진짜 모습을 보인다.
은하는 기우의 말을 유심히 곱씹어 보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산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그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밤 열한 시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지금 물을 수는 없었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기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간을 옮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고 선생님 같은 젊은 여자 선생님들이 늦은 시간에 방문 상담을 하시는 게 쉽진 않습니다. 고 선생님은 특히 밤을 유독 싫어해서 저희랑 제대로 된 회식도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요.”
어두운 표정의 은하가 걱정이 됐는지, 조 소장이 은하를 대신하여 말해 주었다. 기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기우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게 가장 큰 문제라면 여자 가드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상담을 오실 때와 가실 때 언제든 가드와 함께 차를 보낼 테니, 그걸 타고 오시면 어떻겠습니까?”
은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저, 그런데…….”
그러나 기우는 그녀가 거절을 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말을 자르며 나섰다.
“이천.”
은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 숫자가 낯설어 처음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몰랐으나 이윽고 그 숫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보통 최면 치료는 한 회에 15만 원에서 많으면 20만 원까지 받았다. 고작 열두 번의 최면 치료에 이천만 원이라니. 지나치게 넘치는 금액이었다.
“선후 천만 원씩 총 이천만 원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특별하고 위험한 케이스인 만큼, 저희도 신경을 써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이번 계약이 성사될 경우 조 소장은 은하에게도 1/4의 특별 수당을 주겠다고 했다. 수당 하나가 월급의 두 배를 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하에게 그런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 그녀는 그다지 돈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이번처럼 특별 수당이 있긴 했지만, 은하의 연구소는 월급제였다. 차라리 기우가 은하에게 사적으로 이런 제안을 해 왔다면 오히려 쉽게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엄청난 치료비는 은하가 아닌 연구소에 들어가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기우는 치료가 잘될 경우 계약된 치료비 외에 주기적인 후원금도 줄 수 있다고 했다. 은하가 이 일을 맡기만 하면 연구소의 사정이 훨씬 좋아지고 연구원들의 월급도 오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 소장이 편한 대로 하라고 말해도 은하는 이 일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은하는 짧은 숨을 토해 낸 뒤 기우를 보았다.
“하죠.”
기우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하겠습니다. 손기태 씨 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