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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은하는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마시며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창밖엔 벌써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찬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가슴에서 싸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은하는 크게 숨을 한 번 뱉은 뒤 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왔다.
코끝이 아릴 정도로 강한 찬바람이 불었다. 목도리를 올려 입을 가리는 순간 짧은 경적 소리가 들렸다. 회색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은하의 옆에 있었다. 지난번 연구소 앞에서 보았던 기우의 차와 같은 종이었다.
은하는 그제야 오갈 때 가드와 함께 차를 보내겠다던 기우의 말이 떠올랐다. 은하는 그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기에 그 얘기는 스치듯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차 안에서 반듯한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내렸다.
“손기우 상무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 네…….”
은하는 막상 이런 대접을 받으니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두렵던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작은 약속도 놓치지 않고 지키는 기우의 모습에 약간의 신뢰와 안도감이 생긴 것이었다.
차 안은 따뜻했다. 은하는 목도리를 벗고 가방에서 기태와 관련된 서류를 꺼냈다. 일주일 전에 기우와 계약을 한 뒤 자세히 상담했던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었다. 물론 기우는 기태에 대해 다 알려 주지는 않았다. 그저 중요한 정보와 객관적인 사실들만 말해 주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은하는 그렇게 정리한 정보들을 복습하듯이 훑어보며 기억에 되새겼다.
기태는 서른 살로 은하와 동갑이었다. 그는 11년 전에 사랑했던 사람을 갑자기 잃었고, 그 충격으로 많은 심리적 병을 갖게 되어 거의 모든 종류의 심리 치료를 받으며 방황을 했다. 그렇게 1년 뒤, 돌연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병적인 증상들도 많이 완화되었다.
그는 곧 H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1년 동안 성실히 학교생활을 하다가 2학년이 되어서 군 입대를 했다. 제대 후 바로 복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였고, 스물여덟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한 달 전쯤 귀국하여 세강차에 입사, 이사의 직급으로 국내영업본부 CS추진실장을 맡게 되었다.
가족들은 물론 주변 지인들도 그가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돌아온 것을 축하했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일적으로는 세강의 후계자로서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사적으로는 예기치 못했던 문제를 보이는 것이었다. 늦은 밤에 일어나는 불안한 심리 상태와 폭력적 성향이 그것이었다. 여기까지가 그가 그녀에게 알려 준 정보의 전부였다.
‘그 녀석은 10년 동안 가면을 쓰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요.’
그렇다면 그가 쓰고 있다는 가면은 무엇일까? 은하는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다.
문서를 보며 기태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그의 집 앞에 도착했다. 직접 디자인을 주문하여 새로 지은 집인지, 주변의 다른 주택들과는 구조가 사뭇 달랐다. 본래 기우 혼자 사는 집이었는데, 2주 전 있었던 폭행사건 이후 기태가 들어와서 같이 살게 되었다고 했다.
“다 왔습니다.”
“네.”
“저도 같이 들어갈까요?”
“네?”
“손기우 상무님께서, 고 선생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하는 얼핏 웃음을 흘렸다. 기우는, 늦은 시각 남자 둘이 사는 집에 홀로 방문하는 것이 껄끄러웠던 그녀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은하는 정중히 거절하고 차에서 내렸다.
대문 앞에 선 은하는 초인종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순간 갑자기 숨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크게 한 번 뱉어 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녀는 긴장해 있었다. 간신히 진정을 하고 덤덤한 가슴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천천히 집으로 걸어가는데 현관문이 열리고 기우가 나왔다.
“오셨어요?”
“기태 씨는요?”
“지금 방에서 영화 보고 있어요.”
“영화요?”
“네.”
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집은 대체로 블랙 앤 화이트로 심플하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단정하고 반듯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느낌이 나는 기우와 닮아 있었다.
“이쪽이에요.”
기우는 웃으며 은하를 기태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은 꼭 닫혀 있었다. 은하는 닫힌 방문을 보며 약간 당황했다. 보통 최면 치료는 당사자가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신청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태도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기우처럼 마중을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방문을 닫고 영화를 보고 있진 않았을 것이었다.
문 앞에 멈춰 선 은하가 기우를 보며 물었다.
“기태 씨가 오늘 상담을 모르는 건 아니죠?”
“네, 알고 있어요.”
기우는 약간 쓴 미소를 지으며 문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
“잠시만요.”
기우는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선 대답 대신 갑자기 커다란 영화의 사운드가 들려왔다. 기태가 볼륨을 키운 것 같았다. 은하는 흠칫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긴장감 있고 공포스러운 고전 영화의 사운드였다. 은하는 평소 범죄 영화나 공포 영화는 잘 보지 않았지만 영화 자체는 좋아하는 편이어서 그 영화에서 히치콕 감독 특유의 느낌이 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기태야, 선생님 오셨어. 문 열어.”
기우가 약간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영화의 사운드 소리가 너무 커서 기우의 말이 들리는지도 의문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난관에 은하는 난감해졌다. 내담자가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에는 최면 치료는 물론 상담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기우는 은하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서서 기다릴 뿐이었다. 왜인지, 그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기다리다 못한 은하가 저기, 하고 다시 말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덜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은하도 기우도 선뜻 그 문을 잡고 열지 못했다. 멍하니 서 있는 은하에게 기우가 말했다.
“들어가세요. 괜찮아요.”
은하는 혹여나 자신이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을까 봐 마음이 불편했다. 상대가 어떤 성격과 문제를 갖고 있든 치료사는 내담자에게 겁을 먹거나 반감을 가져선 안 됐다. 은하는 목청을 가다듬고 어깨를 폈다. 그리고 특유의 담담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기우는 그녀가 준비가 된 것을 알아챈 듯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실에 있을게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불러 주세요.”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우는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느긋한 자세로 노트북을 두드렸다. 그의 그런 차분한 모습을 보니 왠지 조금 안심이 되고 의지가 되는 것 같았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은하는,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열었다.
진회색 카디건을 걸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하지만 은하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 영화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을 그토록 굳게 다잡았건만, 그의 알 수 없는 태도를 보자 그녀는 왠지 모르게 몸이 굳고 입이 건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기우와는 다르게 무척 진한 검은 머리칼. 그 남자의 뒷모습에는 조용한 무게감과 위압감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마침내 방 안으로 한 발 내디딘 순간이었다.
“저 파리도 죽이지 않을 거야.”
은하가 멈칫하고 섰다. 기태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선 채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보고 있어야 하는데…….”
“…….”
“그들은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말하겠지. 난 파리 한 마리도 해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은하는 그 자리에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떨림과 불안함이 등 뒤를 훑고 지났다.
어느새 영화는 끝났고 엔딩크레딧이 오르고 있었다. 기태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뒤이어 기태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말했다.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의 마지막 대사죠.”
“…….”
“난 사이코가 아니에요.”
기태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지금 방금 당신이 생각한 것처럼.”
기태가 몸을 앞으로 돌렸다. 단, 고개는 숙이고 있어서 둘은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정신병자도 아니구요.”
“…….”
“그러니까 거기 그렇게 서 있을 필요 없어요.”
기태가 은하를 향해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은하는 그가 입을 연 순간부터 계속해서 이상한 떨림을 느꼈지만 더 이상 뒤로 도망치지 않았다.
기태가 은하를 약 세 걸음 정도 앞에 두고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로 앞에 두고 서 있었다. 비로소 은하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때, 은하는 보았다. 무엇이든 빨아들일 것만 같은 블랙홀을 닮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마치 우주에 광대한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그의 까만 블랙홀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세게. 아주, 거세게.
3.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고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안에서 그녀도 흔들리고 있었다. 왜일까. 두려울 정도로 위압적인 분위기로 걸어오던 그가 무엇 때문에 그녀를 보자마자 이렇듯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은하는 그게 궁금했다.
그의 목젖이 달싹였다. 갈증이 나는 것은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어 은하가 한 발 내디뎠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한 손을 살짝 들었다 내리며 거부의 의사를 표했다. 그가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백인에 가까울 정도로 새하얀 그의 피부가 더욱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저…….”
“오지 마.”
그가 미간을 좁히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를 뱉었다. 얼핏 보기에, 그는 반쯤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토해졌다. 그는 그녀로부터 도망치기라도 하듯 연신 발을 뒤로 물렸다. 그의 입에서 결국 얕은 신음 소리가 흘렀다.
그는 지금 고통스러워 보였고 그 고통은 서서히 가중되는 것 같았다.
“저기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은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놀람보다는 걱정이 먼저였다. 그녀가 다시 한 발 내디딘 순간, 그가 말했다.
“……손기우.”
그가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
“손기우!”
은하는 갑작스러운 그의 고함에 깜짝 놀라 멈추어 섰다. 그는 연신 기우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원망과 분노가 다분히 섞여 있었다.
잠시 후, 기우가 방으로 들어왔다. 기태가 악을 쓰며 괴로워하는데도 기우는 작은 파동조차 허용하지 않는 호수처럼 고요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기우를 보자 기태가 당장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왜…… 왜!”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뱉으며 기우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은하는 놀랐지만 차가운 살기로 번뜩이는 기태를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다. 기우는 기태의 눈을 바로 쏘아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기태의 손을 조용히 떼어 내었다. 얼마나 강한 힘이 맞붙었는지, 두 사람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기우는 은하를 보며 엷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잠깐 나가 있어요.”
은하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괜찮아요.”
“하지만…….”
“잠깐이면 돼요.”
은하는 기우가 걱정이 됐지만, 자신이 있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왔다.
은하가 나가자마자 방문이 닫히고 이윽고 쾅 하는 마찰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문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은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앞에 주저앉았다. 엿들으려던 것은 아닌데 얼핏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무슨 짓이야.”
“왜 저 여잘 데려왔어, 왜!”
은하는 기태의 말에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일었다. 아직 그와 제대로 말도 한 번 섞어 보지 못했는데, 단순히 자신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이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빛이 흔들렸고 혼란스러워했으며, 왜 저 여자를 데리고 왔냐고 기우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알기라도 하는 듯이. 하지만 은하는 기태는 물론 기우도 생전 처음 보았다.
“저 여자가 왜.”
“시침 떼지 마! 네 짓인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너야말로 알아듣게 말해.”
그런데 한동안 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혹시 그들이 목소리를 낮추어서 안 들리는 것은 아닌지 문 앞에 바싹 붙어 귀를 세워 보았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후, 기태의 날 선 목소리가 은하의 귀에 화살처럼 와 박혔다.
“바꿔.”
“……뭐?”
“바꾸라고. 치료사.”
은하는 굳은 표정으로 문에 붙인 얼굴을 떼었다.
“그건 안 돼.”
“모르는 척 그만하고 당장 바꿔!”
“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은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 번 양보해서 네가 정말 모른다고 해도, 그래도 바꿔. 저 여잔 안 돼. 절대 안 돼!”
“왜 안 되는데.”
“손기우!”
“왜 안 되는데. 그 이유를 말해 봐.”
은하의 손끝에 문고리의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됐어. 네가 안 하면 내가 직접 바꿔.”
덜컥. 문이 열렸다. 뜨거운 열기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남자가 일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을 애써 감추려던 좀 전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당당해 보였다. 그녀는 두 사람 중 기태에게 시선을 꽂았다.
“왜죠?”
그녀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기태의 검은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은하 씨.”
기우가 그녀를 불렀으나 그녀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왜 난 안 되는 거죠?”
“…….”
“왜 치료사를 바꾸려는 건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이유도 모르고 물러설 순 없어요.”
은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완벽주의자였다. 나이는 젊어도 경력과 실력은 누구에게 쉽게 뒤처지지 않았다. 환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환자에게 거부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자존심이 기태의 손에서 한순간에 구겨지고 있었다.
기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은하를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미세하게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그는 은하에게서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운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는 또다시 고통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나가.”
“…….”
“나가, 제발!”
은하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아까처럼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오히려 아파하는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괜찮다고, 괜찮아질 거라고 최면이라도 걸어서 안정을 시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기태는 점점 더 크게 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기우의 말대로 그가 여자는 건드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녀가 남자였다면 벌써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기태는 그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나가요, 은하 씨.”
“잠시만요.”
“지금은 안 돼요.”
기우가 결국 은하의 손을 잡아끌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기태의 울음 섞인 비명 소리가 들렸다. 고통스러워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슬픔인지도 모른다는.
은하는 미련이라도 남은 듯 기태의 방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미안해요.”
기우가 말했다.
“오늘은 이만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저 녀석은 너무 위험해요. 왜 저러는지는 저도 통 모르겠어서…….”
은하는 문득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시선을 내려 보았다. 기우가 아직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본 기우가, 놀란 듯 손을 놓았다.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상담도 못 해 드리고 가서 제가 더 죄송하죠.”
“아닙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차 타고 가시면서 좀 쉬세요.”
은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드시겠지만 치료는 앞으로도 은하 씨가 맡아 주셔야 할 겁니다.”
은하는 문득 기우의 여유로운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기우는 언제나 차분하고 덤덤했다. 마치 모든 일을 한 차원 위에서 보고 있는 사람처럼, 미래를 훤히 꿰뚫어보는 사람처럼, 그에게서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여유가 보였다.
“왜 저렇게 저한테 반감을 가지는지, 혹시 알게 되면 말해 주세요.”
“그러죠.”
은하는 기우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와 차에 올랐다. 백미러 안에서 기우는 점점 작아졌다. 독특한 모양의 집도, 그 집 안 어딘가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기태도, 점점 멀어졌다. 은하는 정면을 보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이상한 기분에 몸이 떨렸다.
몰려오는 피로에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거세게 흔들리던 한 남자의 눈빛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