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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기태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차 한 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하를 보는 순간 가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어 괴로웠지만, 은하를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발이 창가로 향했고 기우와 얘기하는 은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닮았다. 분명히 닮았다. 기태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이목구비를 하나씩 따져 보면 크고 선한 눈을 제외하고는 그리 닮은 곳이 없었지만, 분위기나 느낌이 분명히 닮아 있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은하를 보는 순간 그녀가 생각났다. 11년간 잊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던 그녀가. 차마 입 밖으로 한 번도 꺼내 놓지 못했던 그녀가.
임주미라는 여자가.
‘왜죠? 왜 난 안 되는 거죠?’
그래서 그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기우에게 네가 일부러 벌인 짓이냐고 따져 물었지만, 그럴 일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생김새가 쌍둥이나 자매처럼 닮았다면 모를까, 그저 분위기나 이미지가 묘하게 닮아 있을 뿐이었다. 기우는 주미를 11년 전에 딱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기억도 나지 않을 사람의 흔적을 은하에게서 발견하고 데리고 왔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기태는 은하를 계속 볼 자신이 없었다. 마치 주미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말투, 그 목소리, 그 분위기. 모든 게 주미처럼 느껴졌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발소리가 기태의 방으로 가까워져 왔다.
“손기태.”
차가운 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태는 여전히 창밖만 보고 서 있었다.
“어린애처럼 이게 무슨 짓이야.”
“바꿔.”
차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야 진정이 되는 듯했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안 된다고 말했어.”
“바꿔. 안 그러면 나 이거 못 해.”
“이거 아버지 명령이야. 네 맘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치료받겠다고. 받을 테니까 치료사만 바꿔 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기태가 등을 돌려 기우를 보았다.
“아버진 무조건 한국최면치료연구소에서 데려오라고 했고. 그중에 너 같은 사이코를 맡겠다는 연구원은 고은하밖에 없어. 알아들어?”
기태는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저도 모르는 새 온 국민에게 무서운 사이코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고은하, 그 사람은 왜 자신을 맡으려 했을까.
“최면 치료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 아버지 너 정말 감방 보내려고 했어. 네 어머니랑 회장님이 간신히 말려 나온 거지. 아버진 그 무엇보다 회사 명예에 목숨 거는 분이야. 그걸 지키려면 너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치료라도 제대로 받아. 싫으면 받는 척이라도 해. 어린애 같은 사고 좀 치지 말고. 네가 고작 그딴 걸로 이렇게 쉽게 무너져 버리면 내가 너무 재미없잖아.”
“나 위하는 척하지 마.”
“…….”
“네가 어떻게 알고 저 여자를 데려왔는진 모르지만, 아무것도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진 않을 거야.”
“그래?”
기우의 입꼬리가 매섭게 올라갔다.
“그럼 잘해 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우는 입가의 미소를 거두지 않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기태는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도 힘든 그와 같이 살게 된 것은 2주 전 폭행사건 때문이었다. 구치소에서 나온 기태는 낯선 남자 두 명에게 붙잡혀 본가로 가게 되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보였다. 기태가 한 달 전 오피스텔에 들어갈 때 가지고 갔던 것이었다.
“들어와라.”
아버지는 기태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가드 두 명을 붙여 주었으니 편하게 다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24시간 보호의 명목 아래 감시를 당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하루빨리 심리 치료를 다시 해 보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11년 전의 악몽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 모든 게 싫거든 기우의 집에 가서 함께 살라고 했다. 기태는 하는 수 없이 후자를 선택해야 했다. 기우가 아무리 싫어도 24시간 철통 감시 속에 숨 막히는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는 심리 치료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버지와 기우가 미리 손을 써 놓았고, 기태는 오늘 아침에야 자신이 한 달간 최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 상대는, 그가 가진 고질병의 근원과 꼭 닮은 사람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싸해졌다. 기우에게는 당당히 말했지만, 기태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까마득한 밤이었다. 은하는 좁고 복잡한 미로를 걷는 기분으로 작고 허름한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큰길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걸어도 보이지 않았다. 깊은 어둠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잘 분간도 되지 않았다.
은하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질수록 골목의 집들이 더욱 흉물스럽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집들은 금방이라도 흙으로 무너져 내려 은하를 덮쳐 올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는 점점 강해졌으나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고 고통스러운 추위만 은하의 몸을 감쌀 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타인의 발소리가 은하의 발소리에 맞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은하는 발소리로부터, 골목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럼에도 발소리는 은하의 귓가에 가까이 와 닿았다. 은하가 눈을 질끈 감고 젖 먹던 힘까지 발을 내디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한 여자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고, 은하는 눈을 번뜩 떴다.
은하의 바로 앞에 한 여자의 시체가 보였다. 여자의 얼굴이 구르듯이 고개를 돌려 은하 쪽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고등학교 시절의 은하였다.
“악!”
은하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악몽이었다. 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주변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훅 끼쳐 왔다. 한동안 이런 악몽은 꾸지 않았는데, 오랜만이었다.
은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버릇처럼 ‘괜찮아. 다 괜찮아.’라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욕실로 갔다. 따뜻한 물로 한참 반신욕을 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안정되면서 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인지, 눈을 감으면 자꾸만 이틀 전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새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카락. 기우보다 조금 날카로운 눈매와 잊을 수 없는 검은 눈동자. 아랫입술이 조금 도톰하고 붉은 입술. 그의 첫인상은 경계심이 많고 아주 강한 신비의 동물 같았다. 다가가기 두렵지만 자꾸만 호기심이 생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늘은 그를 다시 만나는 날이었다. 그가 자신을 거부하는 만큼 반드시 잘해 내고 싶다는 오기가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정말 해도 될까, 하는 의문들이 수시로 은하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은하는 그런 생각을 떨쳐 내려고 머리를 흔들며 물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버릇처럼 ‘괜찮아. 다 괜찮아.’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면서.
*
“좋은 아침.”
기태는 싱긋 미소 지으며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폭행사건 후로 그를 처음 보는 팀원들은 다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기태는 개의치 않는 듯 다시 한 번 웃어 보인 뒤 실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동안 밀린 업무를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자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일만 계속했다. 그는 한 번 집중하면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여사원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와 식사 안 하시냐고 묻는 말도 듣지 못했다. 여사원은 무안해하며 나갔고, 결국 팀원들은 모두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는 뒤늦게 점심시간이 지난 것을 알았고 잠시 옥상에 가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휴식을 취하고 들어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사님.”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일을 놓고 정신을 차린 것은, 강 비서가 와서 문서 하나를 전해 주었을 때였다. 말없이 문서를 넘겨 보던 기태는 어느 순간 손을 멈추었다. 그의 눈매가 묘하게 가늘어졌다.
‘예인 고등학교’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순간 짧은 떨림이 가슴을 치고 지났다. 예인 고등학교는 주미가 나온 고등학교였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 것일까.
그녀는, 주미와 출신 고등학교가 같았다.
기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가득 쌓여 있던 서류들을 모두 정리하고 다급히 실장실을 나왔다.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다들 적당히 하고 일찍 퇴근하세요.”
그는 팀원들에게 인사 받을 시간도 없는 듯 제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렸다.
기태는 차를 타고 곧바로 한국최면치료연구소로 향했다. 시간은 아직 다섯 시 반이었다. 연구원들의 퇴근 시간까지는 삼십 분이 남아 있었다. 차를 모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그의 심장 소리도 점점 빨라졌다.
그는 그토록 급하게 차를 몰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정확히 무슨 목적으로 그녀를 만나러 가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묻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녀를 붙잡고 소리쳐 묻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냐고. 그녀를 아냐고. 임주미라는 여자를 아냐고. 당신은 도대체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거냐고. 어쩌면 그는, 그녀를 앞에 두고 가슴속에 쌓여 있던 오랜 울분을 터뜨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차가 멈춘 뒤에도 오랜 시간 내리지 못했다. 건물에서 사람들이 나왔고 그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앞만 보며 걷는 그녀는, 사람들이 기태의 차를 흘긋거리며 보아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했고 횡단보도를 건넜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 멍한 얼굴로 몇 대의 버스를 보내는 그녀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릴 수가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수전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떨려 왔지만, 그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또다시 밀려든 알 수 없는 고통 때문에, 그는 결국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쓰린 가슴을 움켜쥐고도 그의 시선은 그녀를 좇고 있었다.
하염없이, 좇고 있었다.
4.
은하는 멍하니 앉아 앞을 보고 있었다. 버스 몇 대가 지나갔지만 느끼지 못했다. 차가운 칼바람이 귓불을 스치고 지났을 때야 그녀는 버스 안내판을 바라보았다. 타야 할 버스가 방금 지나가서 대기 시간이 10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녀는 새삼 자신이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또다시 검은 눈동자의 남자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그를 볼 텐데, 오늘은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는 어떤 생각에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번호부를 열어 손기우를 찾았다. 통화 버튼 옆에서 망설이던 엄지손가락이 이내 화면에 닿았다.
- 여보세요.
“아. 저…… 고은한데요.”
- 네, 은하 씨.
은하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언제부턴가 ‘고 선생님’이라는 명칭 대신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혹시 지금 잠깐 뵐 수 있을까요?”
-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그냥 좀 여쭤 볼 게 있어서요.”
- 그래요. 어디시죠?
“지금 막 끝났어요.”
- 그럼 거기 잠깐만 있을래요? 안 그래도 그 근처라, 제가 갈게요.
“네, 감사해요.”
은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렇잖아도 흐리던 날씨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도시가 점점 탁한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위가 몰려왔는데도 잠이 들 것만 같았다. 은하는 옷을 여미고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눈을 감자마자 피로가 몰려왔다.
정말 잠이 들 줄은 몰랐는데, 갑작스런 경적 소리에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익숙한 차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시계를 보니 약 십 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때 뒷좌석의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고 이제는 낯익은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의 갈색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발하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선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은하는 카모마일 차를 마셨고 기우는 에스프레소 더블샷이 들어간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향긋한 차향과 짙은 커피향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배우요?”
은하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네, 그래서 고등학교 3년 내내 학교에서 연극 동아리를 했어요. 부모님 몰래 학원도 다니고.”
“근데 왜 연극 영화과를 안 가고…….”
“우선은 부모님 반대가 너무 심했죠.”
“그리고요?”
기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얼핏 웃었다.
“글쎄요. 그러곤 저도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사고가 있고 1년 동안 방황하다가 돌연 마음을 잡고 공부를 했다고 했죠?”
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노트에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시구요?”
“네.”
은하는 벌써 삼십 분째 기태에 대한 얘기들을 전해 듣고 있었다. 첫 상담 때는 객관적이고 중요한 정보만 들었다면, 이번엔 좀 더 사소하고 구체적인 정보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기태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러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에 대해 잘 알고 그와 공감대를 형성해서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하는 최면 치료에 있어서 환자와 치료사 간의 라포* 형성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기태 씨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음, 글쎄요.”
기우는 미간을 약간 좁히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은하와 눈이 마주치자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은하가 그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당황한 듯 물었다.
“그냥요. 은하 씨가 그렇게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쳐다보니까. 그냥 웃음이 나네요.”
기우의 말에 은하도 얼핏 따라 웃었다.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요?”
“네?”
“보통은 예의상이라도 한두 개 정도 물어 줄 텐데, 은하 씬 너무 기태에 대한 것만 물으니까.”
“아…….”
은하는 그의 말이 순전히 농담처럼 느껴지지는 않아서, 그에게 무엇을 물어야 할지 생각하느라 잠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또다시 그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은하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장난이에요. 너무 당황하지 마요.”
은하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기우가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 잔이 기우의 입술에 닿았다가 다시 테이블로 내려갈 때, 한층 진정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파게티랑 오이 초밥이요.”
은하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엔 좋아했어요.”
“그렇군요. 스파게티는 어떤 거요?”
“토마토 스파게티요.”
은하는 그제야 웬만한 궁금증이 다 해결된 듯 메모를 마무리하고 엷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혹시 이따 제가 주방 좀 써도 될까요?”
“직접 하려고요?”
“네, 간단한 거니까요. 원래 요리하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근데 아쉽네요. 전 오늘 일이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은데.”
은하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걱정 마세요. 저 대신 가드를 보내 놓을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미 붙여 주신 분도 계시고.”
“기태랑 단둘이 있는 거, 괜찮아요?”
은하는 잠시 기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장을 빼곡히 적은 기태에 관한 정보를 다시 들추어 보며 말했다.
“이것도 궁극적으론 다 서로의 신뢰를 위한 건데. 제가 먼저 기태 씨를 믿어야, 기태 씨도 저를 믿겠죠.”
기우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은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 기태 씨.”
은하의 입가에 다시금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궁금해져요. 점점.”
그날 은하는 근처 마트에서 토마토 스파게티와 오이 초밥을 할 재료를 사서 기태의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누르면서 집에 기태뿐이라서 혹시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문은 열렸다. 물론 문이 열리기까지는 평소보다 두 배는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은하는 마치 기태의 마음의 문이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은하는 당분간은 치료보다 그 문을 여는 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방문은 닫혀 있었다. 기태는 문만 열어 주고 다시 방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당연히 현관이나 거실까지 나와서 그녀를 마중해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그리 섭섭하진 않았다.
그녀는 먼저 주방으로 들어가 장을 봐 온 봉지와 가방을 식탁 의자에 내려놓고 기태의 방으로 갔다. 문 앞에서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었지만 이내 도로 내려놓았다. 괜히 들어갔다가 그가 저번처럼 반응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왠진 모르지만 그는 그녀를 보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으니까. 또다시 그가 고통스러워한다면 기우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막막했고 준비해 온 것들도 할 수 없으니 아쉬웠다.
일단은 기태에게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껏 해서 대접하고, 몇 마디라도 나누어 보고 싶었다. 그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남자 둘이 사는 집이었지만, 오후엔 가정부가 있어서 그런지 주방은 깨끗했고 냉장고도 적당히 차 있었다. 기태는 입맛이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어서 햄이나 계란, 치즈 등을 좋아한다고 했다. 은하는 그것을 최대한 고려해서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달콤하면서도 매콤하게 잘 만들어진 붉은 소스에 미리 삶아 둔 면을 넣고 볶기 시작하자 맛있는 냄새가 온 집 안에 퍼졌다. 싱싱한 오이도 깨끗이 씻어서 자른 뒤 초밥을 만들고 게맛살과 옥수수콘을 올려 마무리했다. 은하는 다 된 음식들을 접시에 예쁘게 담아 식탁 위에 올렸다.
준비가 다 되자 긴장 때문인지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은하는 기태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태의 방 앞으로 갔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저번처럼 영화 사운드가 들리지도 않았다.
“기태 씨, 잠깐 나와 봐요.”
은하는 돌연 치료사를 바꾸라던 기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혹시 자신에게 완전히 마음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기태 씨.”
그렇게 세 번을 더 불러 보았지만 안에선 계속 대답이 없었다. 은하는 포기와 체념과 걱정이 뒤섞인 깊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어 섰다.
그때였다. 달칵, 문이 열렸다. 은하가 깜짝 놀라 몸을 세우고 방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기태가 방에서 나와 그녀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은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 들어 있는 자신을 보며 왠지 모를 안도를 느꼈다. 오늘은 그녀가 흔들려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곧게 서 있었다. 지난번처럼 그가 격하게 혼란스러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음식을 좀 해 봤어요. 같이 들어요.”
기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주방을 쳐다보았다. 은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그가 혹시 거절을 하거나 주방에 가서 음식들을 죄다 뒤엎어 버리면 어쩌나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 보았었다. 그래야 실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충격이 조금 덜할 것 같아서였다.
기태는 주방을 뚫어져라 보더니 마침내 그쪽으로 한 발 내디뎠다. 은하는 자꾸만 차오르는 손의 땀을 거두어 내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주방에 도착했다.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은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흔들림이 거세짐에 따라, 은하의 심장 소리도 커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기태가 의자를 빼더니 그 앞에 앉았다. 그것을 지켜본 은하도 기쁜 마음으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은하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하의 시선을 느꼈던지, 그는 이윽고 그녀가 볼 수 없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을 들었다.
은하는 식탁 밑으로 넣은 두 손을 꼭 쥐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이 초밥 한 개를 집더니 천천히 입에 넣었다. 은하는 일단 그가 음식을 하나라도 먹었다는 사실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가 음식을 씹는 소리마저도 너무 크고 섬세하게 들렸다. 초밥 하나를 다 먹은 그가 컵에 물을 조금 따라 마셨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어때요?”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은하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기우 씨한테 물어봤더니 스파게티랑 오이 초밥을 좋아한대서 해 본 건데. 입에 맞아요?”
“…….”
“안 맞나.”
은하가 멋쩍게 웃으며 초밥 하나를 먹어 보았다. 제 입맛에는 간이 딱 맞았지만 기태에게는 맞지 않을까 봐 뒤늦은 염려가 되었다.
기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적이 저번처럼 숨 막히게 느껴지진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대답 대신 초밥 하나를 더 집어서 먹었다. 은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절로 드리워지는 미소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스파게티도 한 입 먹고 맛을 오래 음미하더니 이후로는 크게 말아서 먹었다. 그는 계속해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해 준 음식을 열심히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