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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는 끝내 맛있다는 말 한 마디 없었지만 은하는 그가 접시를 깨끗이 비워 준 것만도 너무 고마워서 마음이 벅찼다.
기태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다 먹었어요?”
은하가 천천히 일어나 식기를 치우려 하자 그가 말했다.
“……내가.”
“…….”
“내가 무섭지 않아?”
은하가 그대로 멈추었다. 은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은하가 아무 말이 없자 그가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무섭지 않아?”
은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가 보지 않아도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하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
“…….”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기태 씨 여자는 안 건드린다면서요.”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은하가 가벼운 톤으로 농담하듯 말했다. 기태의 입꼬리가 얼핏 올라갔다가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기우 씨가 그러더군요. 당신은 이 시간에만 가면을 벗는다고.”
“…….”
“가면을 쓴 모습도 궁금하긴 하지만, 난 기태 씨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컵을 잡고 있는 기태의 손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원래 사람은 비밀을 나눌 때 친구가 되잖아요.”
“…….”
“나는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
기태는 컵에서 손을 놓았다. 손의 떨림이 점점 더 커져서 그녀가 느낄까 두려웠다. 기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동자의 그녀가 자신을 보며 엷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순간 다시 느꼈다. 바람처럼 갑자기 가슴을 치고 드는 불쾌한 떨림을.
그는 몇 시간 전 연구소 앞에 차를 대고 그녀를 지켜보다가 그녀가 버스 정류장에서 잠이 드는 모습을 보았다. 설마 했는데 십여 분이 다 되도록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에 그는 깜짝 놀랐다. 얼마나 피곤하면 이 추위에 정류장에 앉아 잠이 들 수 있을까 싶었다. 다가가서 깨우고 차에 태워야 하나 고민을 하던 그가 막 핸들에 손을 갖다 댔을 무렵, 정류장 앞에 서는 낯익은 차 한 대를 보았다. 기우였다.
기우가 그녀를 깨웠고 그녀는 그 차에 탔다. 순간, 왠지 모르게 허탈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이 왜 따로 만나는지 불안한 예감도 들었다. 기우가 무슨 생각인지도 궁금했다. 그는 그만 돌아가려다가 기우의 차를 멀리서 미행했다.
두 사람은 함께 카페에 들어갔다. 창가에 앉은 그들이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기태는 바깥에 차를 대고 그들을 잠시 지켜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그녀가 웃는 게 보였다. 은하는 기우를 보며 연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우도 마찬가지였다. 기태는 그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어째서.
기태는 그들의 모습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왔을 때보다 좀 더 거칠게 차를 몰아 돌아갔다. 가만히 보면 볼수록 은하는 주미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녀는 주미가 아니었다. 그걸 아는데도 왠지 모르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녀가 집에 왔을 때, 기태는 그녀를 저번보다 더 강하게 거부할 생각이었다. 무서운 모습으로 상처도 주고 최면 치료 따위 스스로 때려 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를 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한 시간이 다 되도록 그의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분주한 도마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나가지 않고 침대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내심 기다리던 그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기태는 그 짧은 순간 그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심한 내적 갈등을 했다. 그러다 결국 처음 마음먹었던 것처럼 그녀를 내쫓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달콤한 향기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는 주방을 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녀는 정말 요리를 해 놓았다.
정갈하게 차려진 스파게티와 오이 초밥을 보는 순간, 그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워낙 좋아해서, 주미가 자주 차려 주던 음식이었다. 주미와의 추억이 가득 담긴 음식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처음의 다짐도 잊고 주방으로 가서 식탁에 앉았다.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젓가락을 들었다. 대신 그 나약한 표정을 보이고 싶진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초밥 하나를 먹어 보았다.
기태는 그것을 먹는 순간 목이 메어 하마터면 삼키지 못할 뻔했다.
맛이…… 달랐다.
예전에 그녀가 해 주었던 오이 초밥의 맛이 아니었다. 스파게티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익숙한 그 맛이 나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신중하게 음미해 보았지만, 달랐다.
‘기우 씨한테 물어봤더니 스파게티랑 오이 초밥을 좋아한대서 해 본 건데. 입에 맞아요?’
기태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에 대한 것들을 묻기 위해 기우를 만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솔함과 어떤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기억했다. 11년 전, 주미를 잃고 나서 어머니에게 끌려 다니며 강제로 받았던 무수히 많은 심리 치료들. 그는 1년간 온갖 치료들을 받으면서 매번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구역질을 했다.
모두가 친절하고 다정한 말투로 그를 대해 주었지만 그들의 미소는 가짜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은 웃고 있으면서 눈은 굳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공무원들이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처리하듯이 그를 대했다. 그들은 기태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강요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를 아프게 하는 기억을 어떻게든 끄집어내려고 갖은 애를 썼다.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그 기억을, 그들은 정작 기태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이 자꾸만 들추어 내려고 했다.
기태는 그게 싫었다. 못 견딜 만큼 싫었다. 아픔의 원인을 알아야만 아픔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들이 기태에게 그 기억을 뱉어 내라고 심장을 들쑤셨다.
그 무렵 기우와 있었던 일이 그의 갑작스런 변화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가 가면을 쓴 이유 중 하나는 그 무수히 많은 치료들 때문이었다.
기태는 쓰디쓴 기억들을 뱉어 내느라 내장이 뒤틀리는 구역질을 견디고 싶지 않았다. 더 아프더라도, 그 기억들을 되새기지 않아도 된다면 차라리 삼켜서 영원히 간직하고 살고 싶었다. 그래서 괜찮은 척했다. 다시는 아무도 자신의 아픔을 건드리지 못하게 최선을 다해 괜찮은 척하며 살았다.
‘당신은, 내가 무섭지 않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주미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 그녀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달랐다. 적어도 미소만큼은 남들과 달랐다. 하얀 겨울을 닮은 그녀의 미소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을 때, 그녀의 맑은 눈도 함께 웃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숱한 사람들처럼 굳은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차갑고 어두운 분위기가 있었지만 웃을 때만큼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밝았다.
“……친구.”
그래서 기태는, 그녀를 더 곁에 두고 싶지가 않았다.
“난 싫은데.”
그녀는, 그녀만은, 끝끝내 언젠가 자신의 아픔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큰 보폭으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었다. 은하가 그의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기태 씨.”
그 작은 발소리가, 그 작은 목소리가, 자꾸만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고마워요.”
그 짧은 한마디가, 결국 그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맛있게 다 먹어 줘서. 고마워요.”
‘맛있게 먹어 줘서 고마워. 다음에 또 해 줄게.’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주미의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어느새 흐려진 눈앞에, 예쁜 눈웃음을 짓고 서 있는 주미가 보였다. 기태는 두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도 그녀와 함께라면 수도 없이 느껴야 할 이 기분을 도저히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뒤를 돌아 거친 걸음으로 은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여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벽에 밀쳤다.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붉고 작은 입술을 삼켜 버리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바싹 다가갔다.
“왜 이래요.”
당황한 그녀가 그를 밀쳐 내려 했지만 그는 힘주어 그녀의 양팔을 잡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굳게 다문 입술이 보였다. 어느새 그와 그녀의 입술은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닿아 있었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가까이 있었는데, 그는 끝내 그녀의 입술에 침범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이 몹시 낯설었다. 떨치고 싶은데 떨칠 수 없었다. 못되게 해치고 싶은데, 해칠 수가 없었다. 보고 싶지 않은데,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만은 절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여자, 안 건드린다고 한 적 없어.”
한참을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난 그럴 자신 없어.”
“…….”
“그러니까 네가 그만둬.”
나는 할 수 없으니, 네가 나를 끊어 줘.
기태는 가슴속에서부터 들끓고 있던 그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



5.


그의 검은 눈동자가 대답을 기다리는 듯 그녀의 입술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은하는 아직도 자신의 입가를 맴도는 듯한 그의 뜨거운 숨결에 입술을 달싹일 수가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은하의 팔을 압박하고 있던 힘이 천천히 풀렸다. 기태가 그녀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은하는 현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들어온 기우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잠시,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태가 먼저 그 정적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은하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기태에게서 차가운 냉기를 느꼈다. 처음 느낀 것도 아닌데, 순간 왠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방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는 내려앉은 가슴을 진동하게 만들었다.
“은하 씨.”
기우가 은하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군요.”
기우가 그녀의 표정을 예리하게 살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같이 밥도 먹었는걸요.”
“미안해요. 제가 자리를 비워서.”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기우는 그녀의 말이 거짓임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얕은 한숨을 쉬며 기태의 방을 쳐다보았다.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래도…… 기다리죠, 뭐.”
은하는 기우를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주방으로 갔다. 식탁을 정리하려는 모양이었다. 기우가 다가가 도와줄까 물었지만 그녀는 얼마 되지 않는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기우는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다소 차가웠던 첫인상과는 달리 단아하면서도 친근한 분위기가 풍겼다. 본래 사람이라는 게 한 가지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녀는 유독 볼 때마다 색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우가 이내 고개를 떨치며 실웃음을 뱉었다.
“그럼 전 거실에 있을게요.”
“들어가서 쉬셔도 돼요. 피곤하실 텐데.”
“아니에요. 같이 있어요.”
기우는 저번처럼 테이블에 노트북과 서류들을 펼쳐 놓고 일을 시작했다. 은하는 그의 배려가 고맙게 느껴졌다.
설거지를 마친 뒤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태의 방을 찾았다. 노크를 해 보았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문도 잠겨 있었다. 은하는 하는 수 없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한 뒤 거실로 가서 기우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은하는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결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정말 싫은가 봐요.”
기우가 노트북에서 손을 놓고 은하를 보았다.
“……자신이 없네요.”
“은하 씨.”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보려구요.”
은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여자, 안 건드린다고 한 적 없어.’
아까 전 기태의 행동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그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면, 그는 그녀의 작은 입술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연약한 몸쯤이야 얼마든지 건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느꼈다. 그것은 분명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었다. 그의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 주었다. 그녀의 입술에 닿지 못하고 미미하게 떨리던 그의 입술이, 그 숨결이, 그것을 말해 주었다.
그래서 은하는 그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그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 선택이 설사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해도, 그녀는 그에게 믿음이란 것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 최면 치료는 절대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의 아픔을 진심으로 치료해 주고 싶었다.
열두 시가 되도록 기태는 결국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은하는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우가 배웅해 주겠다며 따라나섰다. 은하는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태의 방으로 갔다.
“기태 씨, 저 갈게요.”
그는 지금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그가 듣는다고 생각하고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올게요.”
“…….”
“기태 씨가 자신 없어도, 내가 있어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닐 거예요. 은하는 속으로 말했다.
“잘 자요.”
안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은하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현관으로 걸어갔다. 기우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핏 미소를 지었다. 기우가 먼저 밖으로 나갔고 은하도 뒤이어 나갔다.
“밤엔 너무 쌀쌀하네요. 옷 잘 입고 다녀요.”
기우가 말했지만 은하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생각에 잠긴 채 멍하니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현관에서 대문까지 가는 길은 다소 경사가 있어서 희고 커다란 돌들이 계단처럼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그런데 넋을 놓고 앞만 보며 걷고 있는 은하를 보며 기우는 순간 불안함을 느꼈다. 역시나 은하는 몇 걸음 가다 말고 발을 잘못 디뎌 휘청거렸다. 앗, 하는 짧은 비명이 나올 새도 없이 기우가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바로 그때, 은하는 또 한 번 온몸을 훑고 지나는 이상한 전율을 느꼈다. 처음 그와 악수를 했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이었다. 은하는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기우의 얼굴에 평소와는 다른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은하의 시선을 느낀 그가 다시 표정을 풀며 말했다.
“조심해야죠. 여기서 넘어지면 위험해요.”
“……네, 고마워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느낌. 도대체 무엇일까. 잘못 느낀 것일까. 그저 기분 탓일까. 은하는 답을 구하기라도 하는 듯 그의 갈색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기태의 검은 눈동자처럼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은하에게 먼저 가라고 손을 내밀었다. 은하가 의아한 마음을 삭이며 한 발 내디뎠을 때였다.
“잘 때 옆으로 누워서 자요.”
“네?”
은하는 갑자기 들려온 기우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돌려서 그를 보았다.
“그럼 가위에 덜 눌린다고 하더라구요.”
그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은하는 순간 혈관이 굳기라도 한 듯 몸이 뻣뻣해졌다.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가위에 잘 눌리는 편이었다. 오늘도 꽤 오랫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을 꾸면서 몇 번씩이나 가위에 눌렸다. 그녀는 그가 마치 그 사실을 알고 말하는 것 같아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저 가위에 잘 눌리는 거.”
“아, 그래요? 전 그냥 은하 씨 오늘 많이 피곤해 보여서 해 본 말인데. 제가 피곤하면 가위에 잘 눌리거든요.”
“그렇군요.”
은하가 맥이 빠진 듯 헛웃음을 흘렸다. 기우도 따라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왜요. 제가 신기라도 있어 보여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두 사람은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웃고 얘기하며 대문을 나갔다.
은하는 밤길이라면 아주 짧은 거리도 혼자 걷는 걸 싫어했는데, 차 앞까지 친절하게 배웅해 주는 기우가 있어 든든했다. 은하는 기우와 인사를 나눈 뒤 차에 타기 직전에 그를 보며 물었다.
“기우 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네?”
기우가 약간 놀란 듯 되물었다. 은하가 특유의 새하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구요. 오늘 같이 식사 못해서 아쉬웠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기우 씨한테도 꼭 대접해 드릴게요.”
언제나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화를 잘 이어 나가던 그가, 그 순간에는 잠시 말을 잃은 듯 멈칫했다. 그러다 왠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치찌개요.”
“…….”
“돼지고기 김치찌개.”
그는 다시 미소를 되찾았지만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쓸쓸함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돼지고기 김치찌개. 왠지 우아한 정장을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그와 상반되는 음식이었다. 그래도 은하가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어 하는 요리 중 하나였다.
“그렇군요. 다음에 꼭 해 드릴게요. 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 가 볼게요.”
“네.”
은하는 그와 미소를 나눈 뒤 차에 올랐다. 기우는 저번처럼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지켜봐 주었다. 은하는 문득 자신의 왼팔을 만져 보았다. 은하는 가위가 눌릴 때마다 왼팔을 움직여 푸는 습관이 있었다. 오늘은 그가 말해 준 대로 모로 누워서 잠을 청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이 집을 떠날 때마다 최면에 빠질 것만 같은 멍하고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은하는 문주와 인영에게 둘러싸여 온갖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기태의 첫 상담 후에도 그랬지만 그날은 별 수확이 없었기에 싱거워하며 물러갔었다. 은하는 자신이 꼭 취재진에 둘러싸인 연예인 매니저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궁금하시면 저 대신 맡으시지 그러셨어요.”
그러자 인영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은하 씨도 참. 우리만 궁금해하는 줄 알아? 손기태가 폭행사건 때문에 워낙 유명해졌어야 말이지. 벌써 우리 연구소에서 최면 치료받는다는 얘기가 퍼져서 기자들한테도 전화 오고 하는 것 같던데. 소장님이 자기 스트레스 안 받게 알아서 다 쳐 내시는 거지.”
“그래요?”
은하는 몰랐던 얘기에 내심 신경이 쓰여서 곧 오기로 한 내담자의 페이퍼에서 손을 떼었다.
“은하 씨한테는 아직 연락 안 왔어? 좀 있으면 귀찮아질걸.”
“뭘 그렇게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거래요?”
“그야 뭐, 무슨 정보든 알고 싶겠지. 진짜 사이코패스인지 아닌지부터, 최면 치료를 해 봤으면 진짜 폭행 원인이 뭐였는지, 심리 상태는 어떤지 등등.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이겠지.”
은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는 왠지 대중들이 기태에게 갖는 관심과 궁금증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때, 연구실 문이 열리고 보람이 들어왔다. 밖에는 말끔한 차림의 건장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은하는 아까 보던 내담자 페이퍼로 잠시 시선을 내렸다. 페이퍼에 적혀 있는 것이라고 해 봐야 내담자에 대한 간단한 정보들이 전부였지만, 은하는 사소한 정보 하나도 몹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고 선생님, 상담이요.”
“네.”
은하는 페이퍼를 다 보지 못했지만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어김없이 부드러운 미소로 내담자에게 인사를 건네며 상담실로 자리를 옮겼다.

삼십 대 중반인 남자의 이름은 이현식이었다. 현식은 약 십 년 전부터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마다 생기는 수전증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으로 인한 증상이 아니라 순전히 심리적인 이유라서 여태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중요한 자리에서도 수전증 때문에 곤욕을 치르곤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최면 치료를 통해 수전증이 갑자기 생긴 정확한 원인을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꼭 치료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치료하고 싶은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상담을 오래 하지 않고 바로 최면 치료실로 들어갔다.
은하는 치료실의 조명을 낮춘 뒤 현식을 안락의자에 눕히고 그 옆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최면 치료에 들어가기 전에 주의사항부터 꼼꼼히 알려 주었다.
“최면 시 본인이 잊고 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에 노출될 수 있구요. 치료받으시고 며칠 후에, 치료 당시 느낀 감정들이 다시 생겨날 수 있어요. 몸이 피로해지셔서 하루 정도 잠이 많아지실 수 있구요. 간혹 있는 경우지만 열이 나거나 설사, 구토 등이 있을 수 있어요. 치료하시고 나서 바로 운전하시면 안 되구요. 하루 동안은 술이나 약을 삼가시고 물 많이 드세요. 운동도 가벼운 산책 정도로만 하시구요. 아셨죠?”
“네.”
“준비되셨으면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세요.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고…… 그렇죠. 다시 마시고 내쉬고…… 몸에 힘을 빼시고 몸이 완전히 가벼워질 때까지 다시 마시고 내쉬고…… 네, 좋아요. 이제 점점 더 편안하고 나른한 상태가 되실 거예요. 잠이 올 듯 말 듯 나른하고 몽롱한 상태가 되면서…… 초점이 흐려질 거예요. 그렇죠?”
은하는 나긋한 목소리와 느리고 부드러운 말투로 최면을 시도해 나갔다.
“자, 이제 저 앞을 보시겠어요? 벽에 조약돌이 많이 붙어 있죠.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걸 하나만 고르시고 계속 바라보세요. 눈이 점점 따가워지면서…… 자꾸만 졸음이 밀려오고 감고 싶어질 거예요. 이제 눈을 감으면, 아주 편안하고 가벼운 상태가 되실 거예요.”
그가 자신의 문제를 치료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만큼, 최면 치료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금방 최면 상태에 빠져들었고 은하는 문제가 생긴 과거의 시간으로 그를 유도해 보았다.
그는 스물세 살 가을의 어느 날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강제 정리 해고 통보를 받고 파업에 가담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이었다. 현식은 집에서 엄마와 동생과 함께 있었다. 엄마는 밥 생각이 없다고 했고, 현식은 여동생과 컵라면을 먹기 위해 물을 끓였다. 다 끓은 물을 막 컵라면에 붓고 있는데 엄마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경악을 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집중하던 현식은 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놀라 뜨거운 물에 손을 데었다. 찬물에 급하게 손을 씻었지만 떨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현식은 그때 아버지가 자살했음을 알게 되었다.
은하는 그가 뜨거운 물에 손을 데었을 때 아무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고 데인 후에도 엄마의 따뜻한 손길을 받으며 응급치료를 마쳤으며, 여동생과 함께 컵라면을 맛있게 먹었다고 기억을 적당히 편집해 주었다. 물론 전화는 그 뒤에라도 올 수밖에 없었고 현식은 그때를 기억하며 고통스러워했지만, 당시의 충격과 불안함으로 인해 생겨났던 수전증은 치료될 수 있었다. 치료를 마치고 대기실에 나와 함께 차를 마셨는데 그는 손을 떨지 않았다.
그는 은하에게 무척 고마워하며, 초면에 실례인 것은 알지만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은하는 그의 제안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침 시간도 점심시간이었고 최면을 통해 그의 아픈 기억을 보게 된 까닭에 결국 승낙하고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