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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현식이 은하를 데려간 곳은 생각지도 못한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단순히 감사의 표시로 받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식사였다. 은하는 자리를 옮기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는 기어코 이곳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하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성의를 계속 거절할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고 그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차분히 식사를 했다.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었을 즈음, 현식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참. 여기 손기태 씨도 자주 오던데. 아시죠? 이번에 한국최면치료연구소에서 손기태 씨 치료를 맡았다던데.”
스테이크를 썰던 은하의 손이 멈추었다. 그 얘기가 일반인도 알 정도로 널리 퍼졌나 싶었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현식을 보았다.
“손기태 씨 치료도 고 선생님이 맡으셨나요?”
“……그런데요.”
현식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아, 그러시군요. 이것 참 우연이네요.”
그때 레스토랑의 문이 열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던 은하의 눈동자가 그대로 굳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남자도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하고 섰다가, 이윽고 함께 온 일행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와 함께 온 중년의 남녀는 외국인이었고 얼핏 보아도 사업상 몹시 중요한 자리인 듯했다. 그는 일행을 정중한 태도로 챙기며 그녀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손기태 씨네요.”
현식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조금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기태는 은하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었다. 은하는 그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다. 은하는 그가 그렇게 차려입은 모습을, 그리고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는 언뜻 보기에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중후하지만 호탕한 웃음소리가 은하의 테이블에까지 와 닿았다. 그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자상한 말솜씨로 테이블의 분위기를 띄웠고 일행들을 웃게 만들었다.
은하는 몰랐다. 밖에서 만난 그는 너무도 환하고 밝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은하는 그때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기우가 말한 그의 가면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기태가 은하 쪽을 보다가 은하와 눈이 마주쳤다. 기태는 그 짧은 사이에 현식도 살피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기태가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은하는 낯설면서도 반가운 그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고 선생님, 제 말 안 들려요?”
은하는 현식이 계속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죄송해요. 말씀하세요.”
“손기태 씨 말이에요. 어때요?”
“어떻다니. 뭐가요?”
“치료 맡으셨다면서요. 별일은 없었나요? 최면 치료는 해 보셨어요?”
은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문득 오전에 인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왜요? 무슨 일 할 것 같은데요?”
은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계속 쳐다보았다.
“너무 정색하지 마세요. 맞아요. 기자예요.”
“……손기태 씨에 대해 물어보려고 여기 오신 건가요?”
현식은 태연하게 스테이크를 썰어 먹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이것 보세요. 몇 년 만에 처음 안 떨고 식사를 하게 됐는데 감사해서 그렇죠.”
은하는 그의 너스레가 더욱 언짢게 느껴졌다.
“저는 손기태 씨에 대해 할 말 없어요. 그 때문이라면 그만 가 볼게요.”
“그쪽에서 꽤 넉넉히 챙겨 주던가요? 치료에 대해선 절대 함구하라고?”
“이봐요.”
은하는 점점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현식은 처음 연구소에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차가운 눈빛으로 은하를 보며 말했다.
“아쉽네요. 그런 게 아니라면 고 선생님도 분명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렴 사이코패스를 데리고 치료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겠어요? 다 얘기해 보세요. 저도 원하시는 만큼은 드릴 수 있어요.”
“저야말로 안타깝네요. 고작 기사 하나가 뭐라고 기자님은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죠?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정 지어 말하지 마세요. 저는, 그 어떤 이유 때문도 아니고, 다만 제 환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는 것뿐이에요. 손기태 씨도 제가 맡은, 제 도움이 필요한 분이에요. 저는 그분을 최선을 다해 치료할 거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돈 따위에 팔지 않을 거예요.”
현식이 헛웃음을 흘렸다.
“고 선생님이 훌륭한 치료사인 건 알겠지만, 조심하셔야 될 거예요.”
“…….”
“고 선생님에겐 아무리 다 똑같은 환자라도, 손기태는 달라요. 세강의 아들이에요. 그런 큰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거, 아주 위험한 거거든요. 정 주고 몸 바치다가 뒤통수 맞기 십상이에요.”
은하는 갑자기 감정적으로 변한 현식의 말투를 보며 불안한 감이 스쳤다. 그의 말투에는 어떤 울분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설마, 하고 생각했다. 현식의 아버지가 정리 해고를 당하고 파업을 했던 회사가 세강이라면, 현식은 생각보다 더욱 위험한 존재였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냥 기자가 아니라 세강에 원한을 갖고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는 기자였다. 현식의 사정도 안됐지만, 은하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기태의 편에 서고 있었다.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그와 말을 섞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기태가 은하와 그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지 걱정도 되었다.
“저는 더 할 말이 없으니 그만 가 보겠습니다.”
“차라리 그만두고 다른 연구원에게 넘기는 게 좋을 거예요.”
은하가 가려다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진심으로, 고 선생님을 위해 하는 말이에요.”
은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 레스토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려다가 왠지 기태를 마주칠 것 같아 계단으로 가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 복도 한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기태를 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그녀는 온몸이 바싹 굳어 버렸다.
말끔한 차림새의 그가 집에서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른침을 꿀꺽 삼켰을 때, 그녀의 코끝에 옅은 향수 냄새가 스쳤다.
향기는 머물지 않고, 그렇게 스쳐 갔다. 그는 그녀에게 한 마디 말도 걸지 않고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가고 있었다.
그녀는 일순 섭섭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묘한 감정에 북받쳐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냈다.
“대체 이유가 뭔데요?”
그가 발을 멈추었다.
“대체 그 대단한 이유가 뭐길래, 날 자꾸 밀어내는 건데요?”
“…….”
“난,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하려고, 이현식 기자를 만났나?”
기태가 천천히 뒤를 돌아 그녀를 보았다. 복도를 울리는 맑은 구두 소리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구두 소리가 그녀의 코앞에서 멈추었다.
“그건…… 몰랐어요. 난 정말.”
“미안한 표정 할 거 없어. 애초에 난 당신을 믿은 적이 없으니까.”
“…….”
“내 편이라 생각한 적도 없고 뭘 기대한 적도 없으니까.”
“…….”
“그러니까 실망할 일도 없지.”
그렇게 말하는 기태의 입가에 얕은 조소가 흘렀다. 그 서늘한 미소를 본 순간, 그를 믿었기 때문일까, 은하는 가슴이 싸하게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요.”
은하는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먼저 거두었다.
“고맙네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기태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또다시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녀가 천천히, 그러나 차가운 걸음으로 그를 지나쳐 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이윽고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왠지 가슴 한쪽이 허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급한 전화를 받고 오겠다고 나온 것인데, 이제 그만 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태는 여전히 그녀가 사라진 계단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낯익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현식이었다. 기태가 날 선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젠 치료사까지 건드려서 뭘 알아내려고 하나?”
“그러려고 했는데. 치료사랑 연애라도 하시나 보죠?”
“뭐?”
현식은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말했다.
“필사적이더라구요, 그 여자.”
“…….”
“좀 이상할 정도로.”
현식은 짧은 눈인사를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기태는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는 현식의 말이 바늘처럼 가슴을 쿡쿡 찔러 댔다.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만 엇나갔던 자신의 말도 부메랑처럼 돌아와 가슴을 찔러 댔다.
허해진 가슴에 너무 많은 따가움이 밀려들었기 때문일까. 심장이 감당하지 못한 듯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태는, 아프다고 요동치는 제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11년 만에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6.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어느새 1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태는 그 숫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몸을 틀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온 기태는 저 앞에서 택시를 잡고 있는 현식을 발견했다.
어느새 땀이 고인 손바닥을 꼭 말아 쥐며, 그는 현식에게로 향했다. 인기척을 느낀 현식이 기태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기태는 그에게 한 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
기태가 다시 한 발 다가갔다. 현식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으려 애썼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현식이 실소를 뱉으며 그를 보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재밌네, 라는 한마디가 툭 굴러 나왔다. 기태가 더는 참지 못하고 현식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살기 어린 눈빛만 매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만두라고 했죠.”
“…….”
“고 선생을 위해서. 그게 좋을 거라고.”
현식은 기태가 누구에게 무슨 치료를 받는 것인지 알기 위해 직접 은하를 찾아가 최면 치료를 받아 보았다. 평소에 최면이라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자신의 아픔이 진정으로 드러나고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것이 매우 신비한 잠재의식의 영역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괜히 은하가 기태를 맡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젊고 여려 보이는 여자이긴 했어도,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데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능숙했다. 그녀의 부드럽고 따스한 마법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안됐잖아요. 그렇게 능력 있고 좋은 여자가 고작 당신 같은 사람한테 애쓰는 거. 사이코패스한테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 여잔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돈 따위에 팔지 않을 거라고.”
기태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기 혼자만 진심일 때만큼, 억울한 게 없거든.”
기태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는 묵묵히 현식의 옷깃을 놓아주었다. 현식은 기태가 잡았던 부분을 당당히 털어 내고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그럼 전 이만.”
기태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앞만 바라보았다. 현식이 택시를 잡고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도 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난,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고…….’
‘미안한 표정 할 거 없어. 애초에 난 당신을 믿은 적이 없으니까.’
‘내 편이라 생각한 적도 없고 뭘 기대한 적도 없으니까.’
실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힘없이 계단을 내려가던 그 뒷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은하는 연구소로 돌아가자마자 자리에 앉아 현식의 페이퍼를 찾았다. 기자라는 정보는 적혀 있었지만, 가족사에 대한 세부 사항까지는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최선을 다하려고, 이현식 기자를 만났나?’
기태가 그토록 차가운 얼굴로 그의 이름까지 언급하며 말한 것을 보면 그녀의 추측이 얼추 맞은 것 같긴 했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은하는 왠지 쉽게 잊히지 않는 현식의 분노 어린 눈빛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렇게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은하는 고민 끝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은하 씨.
그는 은하의 전화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갑자기 죄송해요. 뭐 좀 여쭤 보려는데, 괜찮으세요?”
- 그럼요. 뭔데요?
“다른 게 아니라…… 이현식 기자…… 잘 아세요?”
기우가 잠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 그 사람은 왜요?
“혹…… 세강하고 어떤 관곈지 여쭤 봐도 될까요?”
- 별로 좋은 관곈 아니죠. 이 기자 아버지가 예전에 저희 회사에서 일을 하셨는데 안 좋은 문제가 있었어요. 그 일에 원한을 품은 건지 저희 회사에 유독 배타적이어서 이 기자랑은 불편한 일이 많았어요.
“그렇군요.”
은하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이 결코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현식에게 말려들 뻔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고 기태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만큼,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기태가 오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가 앞뒤도 묻지 않고 자신을 그렇게 판단해 버린 것은 섭섭했다.
- 이현식 기자를 만났어요?
“아, 네……. 오늘 치료를 받으러 왔더라고요. 그래서…….”
- 근데 기태에 관한 걸 물었군요.
은하는 그 한마디로 사태 파악을 다 해 버린 기우에게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은 그래요. 다음에 만나면 자세히 말씀해 드릴게요.”
- 놀랐겠어요, 은하 씨.
“…….”
- 기태 치료를 맡았다는 이유로, 은하 씨가 피곤해질지도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은하는 뜻밖의 사과를 받아 약간 당황했다. 기태에게 미안한 처지였던 그녀에게, 그는 도리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니에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실수를 할 뻔했는데. 죄송하죠.”
- 은하 씨 잘못 없어요. 그걸로 괜히 신경 쓰지 마요.
그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면 예의상 하는 말이든, 은하는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쓰리던 가슴에 분명 위로를 받았다.
- 그럼 내일 봐요.
“……네.”
전화를 끊고 나서 은하는 깍지 낀 손을 턱에 대고 생각에 잠겼다. 기우의 배려에 마음이 편안해진 것도 잠시, 눈을 감자마자 기태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안 건드린다고 한 적 없어. 난 그럴 자신 없어. 그러니까 네가 그만둬.’
‘차라리 그만두고 다른 연구원에게 넘기는 게 좋을 거예요.’
은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에게 이 일을 그만두라고 말한 사람은 겨우 두 사람뿐이었지만, 그중 한 사람이 기태였기 때문일까. 그녀는 본인을 제외한 모두가 이 치료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며 울렸다. 설상가상 열까지 나는 거 같았다.
“고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은하가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지 않자, 앞자리에 있던 기현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하는 온몸에 서서히 열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안 좋으신데.”
기현의 말에 문주와 인영도 은하를 보더니 동조를 했다.
“그러게요. 낯빛이 창백한데. 점심 뭐 잘못 먹었어요?”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조금 피곤한가 봐요.”
“요즘 너무 무리한다 했더니, 몸살 오는 거 아니야?”
은하는 그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조 소장도 일을 하다 말고 은하를 보았다. 은하는 괜찮은 척했지만 기태의 상담을 맡은 이후로 부쩍 피곤해 보였다.
조 소장은 한 번 맡은 일은 어떻게든 완벽히 해내려는 은하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이번 일로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을 것이란 걸 알았다. 더군다나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에 상담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은하는 연구원들이 아무리 물어도 좀처럼 상담에 대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조 소장은 그녀가 지금 정신적 스트레스는 물론 육체적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은하는 그렇잖아도 몸이 약한 편인데, 이틀에 한 번꼴로 새벽까지 방문 상담을 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고 선생, 괜찮아?”
조 소장으로서는, 어찌 됐건 자신 때문에 은하가 기태의 상담을 떠맡게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네, 괜찮아요.”
“많이 안 좋으면 조퇴하지 그래.”
“아니에요. 아직 두 분이나 남았어요.”
“내일도 상담 많나?”
“내일은 하나요.”
“그래. 그럼 내일 더 심해지면 그냥 하루 쉬어. 상담은 내가 미루어 놓을 테니.”
“심하면요.”
은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힘들긴 했지만 신경 써 주는 사람들이 있어 고마웠다.

버릇처럼 괜찮다는 말만 속으로 되뇌며 힘든 하루를 버틴 은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씻지도 못 하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만 해도 온 신경이 일순 감전이라도 된 듯 찌릿했고 누군가 행주를 짜듯 뇌를 쥐어짜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가 조여 왔다. 온몸을 찌르듯이 몰려오는 추위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면 아픔만 더 심해질 것 같았다.
은하는 사력을 다해 일어나 욕실로 갔다. 어떤 정신으로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혼미한 정신을 달래기 위해 조금 뜨겁다 싶을 정도의 물을 받아 반신욕을 했다. 희뿌연 수증기가 가득 들어차는 욕실처럼, 그녀의 머릿속도 뿌옇게 흐려져 갔다. 은하는 짙은 안개 속에 홀로 서서 생각했다.
아픔은, 언제나 이렇듯 갑자기 닥쳐오는구나.
그녀는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에 욕실에서 나왔다. 옷을 입을 겨를도 없었다. 평소 잘 입지도 않던 가운 하나를 걸치고 나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턱까지 올려 덮었지만 곳곳에서 찬바람이 기습해 오는 것처럼 추웠다.
은하는 몸이 약한 편이어서 환절기마다 감기를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갑작스런 몸살에도 자주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은하는 혼자 견뎌 내야 했다. 처음엔 아픔보다 더한 외로움 때문에 힘이 들었지만, 나중엔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은하는 태어나고 한 달도 안 되어 어느 대형 마트의 화장실 변기 위에 버려졌다. 당시 그 사건은 신문에도 몇 번 실릴 정도로 꽤 이슈가 됐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은하는 덕분에 버려진 지 얼마 안 돼 새 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은하의 새아버지는 S대학병원의 외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은하는 그 좋은 집에서 외동딸로 자랐다.
은하의 집은 겉으로 보기에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은하의 집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었다.
사랑. 그녀의 집에는 부부간의 사랑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없었다.
은하의 친구들은 부잣집 공주님으로 곱게 자라는 은하를 항상 부러워했다. 하지만 은하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많은 엄마들이 커다란 우산 하나를 쓰고 학교 밖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수많은 엄마들 틈에서 제 엄마를 한눈에 알아보고 엄마! 하면서 달려가 품 안에 쏙 안겼다. 우산이 하나라 가방이 젖고 신발이 젖어도, 그들은 어디가 젖는지도 모르고 엄마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럴 때면 은하는 아이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검은 승용차에 올라탔다. 차 안엔 기사 아저씨 한 명이 전부였다. 차라리 우산 없이 비 내리는 거리를 걷고 싶을 만큼, 은하는 그 안의 정적과 고독이 끔찍하게 싫었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첨벙첨벙 물웅덩이에 발장난 치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런 것 좀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누군가의 잔소리가 듣고 싶었다. 은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부모님이 반대하던 최면 치료를 하겠다고 대학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은하는 독립해서 혼자 살았다. 부모님과는 한집에 살 때도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기에, 따로 살면서부터는 거의 남남처럼 연락을 끊고 살게 되었다. 그녀는 완전한 혼자가 되었지만, 차라리 마음은 전보다 편했다. 누구와 함께 있는데 외로운 것보다 혼자여서 외로운 편이 더 나았다.
‘잘 때 옆으로 누워서 자요.’
‘그럼 가위에 덜 눌린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왠지 오늘은 이 익숙한 고독을 견뎌 내는 것이 몹시 힘이 들었다. 은하는 그의 말대로 모로 누워 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새끼손가락에 온 힘을 주어 가위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은하는 가위를 눌리는 것은 반수면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심리적 공포 현상이라는 논리를 가장 신뢰했다. 피로에 잠긴 육체는 먼저 잠이 들었는데 정신이 따라서 잠들지 못함에 따라 자신이 잠들었음을 자각하면서 공포심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론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가위에 눌리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