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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에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침이 왔다. 은하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가뭄 든 밭처럼 갈라져 버린 입술과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은 좀처럼 바깥에 내보일 것이 못 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도 곤욕이었다.
은하는 얕은 숨을 토해 내며 휴대폰을 들었다. 어느새 시간은 열 시가 넘어 있었고 조 소장을 비롯한 연구원들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은하는 조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소장님. 꼭 나가려고 했는데…….”
미안해하는 은하에게 조 소장은 너그럽게 웃으며, 오늘 예약된 환자는 물론 기태의 상담도 자신이 다 잘 처리해 놓을 테니 걱정 말고 주말까지 푹 쉬라고 했다. 은하는 일단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난번 일로 더 틀어진 마당에 상담까지 펑크를 내면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 같았다. 어쩌면 기태는 이번 기회에 잘됐다며 그녀를 아예 잘라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어떨까.
마음은 아프고 자존심에 상처도 받을 것 같았지만, 어쩔 도리 또한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도 손기태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를 진심으로 치료해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자신을 밀어내는 사람에게 더 다가갈 힘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니, 문득 그의 차가운 눈빛과 냉담했던 태도가 생각나 다시금 마음이 아렸다.
은하는 얼른 병원에 갔다 오자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한 발 내딛자마자 방 안이 빙그르 돌면서 머리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은하는 다시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부드러운 침대 시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난밤에 잠을 설친 탓에 몸살이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입가에서 실소가 툭툭 터져 나왔다. 그 작은 숨에서마저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은하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옅은 실소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힘들게 부여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툭 놓아 버렸다.
은하는 아주 까만 방 안에 홀로 갇혀 있었다. 위를 보아도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그 어느 곳에도 빛 한 점 없는 아주 컴컴한 어둠이었다.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벽을 두드리며 살려 달라고 소리치다가,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곳은 감옥이라는 것을.
쾅쾅쾅쾅. 그때였다. 그녀는 분명 허탈하게 두 손을 놓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은하는 서둘러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온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소리가 정확히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쾅쾅쾅쾅.
그 소리와 동시에 은하의 눈이 번뜩 뜨였다. 어두웠다. 감옥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다만 오른쪽에 창문이 있었고, 그 틈으로 가녀린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꿈이었구나, 안도한 순간 다시금 그 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 소리만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분명 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가운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불을 켜니 시계가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나절 이상 쓰러져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순간 은하의 귀를 때린 초인종 소리였다. 초인종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혼자 살기 시작한 이래 무엇을 시켜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초인종 소리를 거의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누군가 이 집에 찾아온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긴장되고 두려운 가슴을 추스르며 인터폰을 확인한 은하는 깜짝 놀랐다.
“고은하!”
문밖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은하. 은하는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온전한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것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보았다. 오랜 시간 친구가 없었던 만큼, 그렇게 불릴 일도 없었다.
은하는 어쩌면 이것 또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이 너무 혼미한 나머지, 꿈과 현실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녀가 어느새 문 앞에 섰다. 천천히 올리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잠금 장치의 해제 버튼을 눌렀다. 덜컥, 문이 열렸다. 아주 미약한 빛 정도만 간신히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좁았던 그 틈이, 조금씩 더 벌어졌다.
이윽고 다소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선뜻 말을 뱉지 못했다. 그 침묵이 고통 속에 잠을 설쳤던 지난밤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남자가 한 발 내디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은하는 따라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문이 닫혔다.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는 더욱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은하의 숨에서, 그의 숨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만이 그 어색한 정적의 빈틈을 채웠다.
“……지 마.”
“…….”
“포기하지 마.”
느닷없이 찾아온 그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은하는 습관처럼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자꾸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 매혹적인 검은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 포기하지 마.”
7.
‘그 여잔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돈 따위에 팔지 않을 거라고.’
기태는 그날 현식에게 얘기를 듣고 그녀를 오해하고 차갑게 보내 버린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만두라고 했다는 현식의 말도 신경이 쓰였다.
기태는 이미 여러 번 그녀에게 그만두라고 말했고, 그러길 바라는 마음도 분명 있었지만, 막상 그녀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녀가 정말 그만두면 어쩌나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안했다. 솔직한 마음은 그랬다. 내일 그녀가 오면 사과는 못 하더라도 조금은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다정하게 대해 주어야 할지가 막막했다. 너무 갑작스럽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는 이런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라 자신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니 그것에 대해 생각한 일밖에 없었다. 그는 그렇게 내일을 기다리며 약간은 불안하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홉 시에 그녀는 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시계만 들여다보며 9라는 숫자에 시침이 가까이 가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던 그는, 아홉 시 반이 되도록 아무도 오지 않자 방문을 열고 나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지만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직 그녀의 연락처도 몰랐다.
그때 멀리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기태는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방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쩌지도 못하고 앉아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기우가 들어왔다. 잠시나마 활기로 일렁이던 기태의 눈동자가 금세 차게 식었다.
“웬일로 나와 있어?”
기우는 이윽고 무언가 생각난 듯 짧은 웃음을 터뜨린 뒤 말했다.
“아! 은하 씨.”
“…….”
“오늘 못 온대. 몸이 아파서.”
기태는 순간 가슴이 툭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네가 기다릴 거란 생각은 못 해서 말 안 했는데. 기다렸나 보지?”
기태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다시 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료사, 바꾸고 싶으면 바꿔.”
“…….”
“출근까지 못 할 정도로 아픈 걸 보면, 은하 씨도 많이 힘든가 본데. 네 성격에 차이는 건 싫을 거 아니야.”
기태는 묵묵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솟아올랐다.
“누가 너 같은 놈을 맡으려 할진 모르겠지만.”
기태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떨림을 억누르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설마 했던 불안이 현실로 다가올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됐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쓰며 벌렁 뒤로 누웠다.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검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 위로 자꾸만 낯익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그려지자마자 여지없이 불편한 떨림이 가슴을 스치고 지났다. 그는 낯익은 얼굴과 불편한 떨림을 떨쳐 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기태는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코트 하나와 차 키를 챙겨 들고 방을 나왔다. 기우가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갔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왜 하는지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따지다 보면 그녀에게 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놔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낯선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주소는 연구소의 소장에게 전화를 해서 알아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 앞이었고, 그의 손은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안에서 아무 인기척이 없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 불안하고 초조해졌고 떨리는 손으로 문까지 두드리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이 열렸다.
하얗다 못해 얼핏 푸른빛까지 띨 정도로 창백해진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기태는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일단 그녀가 너무 아파 보여서 마음이 쓰렸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정말 아파서 못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나, 포기하지 마.”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온 그 말을, 기태는 참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말에 놀란 듯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이윽고 파리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포기 안 해요.”
“…….”
“안 해요, 절대.”
그 한마디 말이 뭐라고, 기태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위태로워 보이던 그녀가 한 발 뒤로 주춤하며 휘청거렸다. 놀란 기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바로 다음 순간 향긋하면서도 은은한 비누향이 그의 코를 스쳤고 뜨거운 온기가 그의 가슴과 온몸에 닿았다. 미약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던 그녀가 그가 당기는 대로 끌려가 그의 품 안에 쓰러지듯 안긴 것이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덜컹거렸다.
“……미안해요.”
은하가 애써 몸을 떼어 내며 말했다. 기태는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오른손을 그녀의 작은 이마 위에 대 보았다. 델 듯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그는 짧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다르게 시선을 내리고는 어디에 둘지 몰라 했다.
기태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돌연 양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맘 같아서는 당장 문을 열고 응급실로 가고 싶었지만 그녀는 얇은 가운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그마저도 어깨 부분이 약간 흘러내려 가슴 굴곡이 보일 듯 말 듯 보이는 상태였다. 기태는 얼른 시선을 거두었지만 일순 그들의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분위기는 거두어낼 수 없었다. 은하도 그제야 자신의 차림새를 알아챈 듯, 내려간 옷을 조심스레 잡아 올렸다.
“…….”
오묘한 정적이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듯 내려왔다.
기태는 그녀를 안고 방으로 걸어가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은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낯설고 정신까지 혼미해서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기태가 등을 돌리고 섰다. 이대로 가 버리는 것인가 싶어, 은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잠깐 기다려.”
마침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멈칫한 상태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오로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렸다. 순식간에 집이 휑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괜찮았다.
그는 분명, 기다리라는 말을 했으니까.
은하는 기태가 나간 사이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늘 병원에 가서 약이라도 받아 왔어야 했는데, 약을 먹기는커녕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랜 수면으로 육체적 피로가 풀리긴 했지만 아픈 것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때, 짧은 초인종 소리가 은하의 귓전을 울렸다. 그 소리 하나에, 무거웠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은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기다리던 사람이 보였다.
그는 무심한 척 들어와 주방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검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은하가 아픈 몸을 이끌고 따라가서 물었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고 봉투 안에서 양파, 당근, 애호박, 시금치, 참치캔 등을 꺼냈다. 마지막엔 하얀 약봉지도 보였다.
“들어가 있어.”
그는 은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차분한 손놀림으로 재료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은하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확인 차원에서라도 ‘지금 죽 끓여 주려는 거예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분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낯선 집에서 낯선 이를 위해 요리를 해 주려는 그를 두고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안아?”
은하가 아무 말이 없자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정말 그녀를 안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왔다. 은하는 그제야 흠칫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알았어요. 가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은하를 보았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려는 것 같았다. 은하는 하는 수 없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제야 몸을 틀고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온 은하는 넋이 나간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무뚝뚝한 듯 다정하게 대해 주는 그가 너무 낯설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 간절히 바라온 것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을 만큼, 그의 존재는 너무 컸다.
한참 뒤, 그가 쟁반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와서 쟁반을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참치야채죽과 물, 그리고 약이 놓여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수저를 건넸다.
“…….”
수저를 받아 든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죽도, 죽집에서 파는 죽도 아닌, 그가 직접 만든 죽이었다. 그의 정성과 마음과 손길이 담긴 죽이었다. 누군가, 아픈 자신을 위해 죽을 끓여 준 것이 언제였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간만이었다.
“잘 먹을게요.”
은하는 이상하게 뭉클한 가슴을 억누르며 죽을 한 수저 떠먹었다. 맛있었다. 간도 딱 맞았다. 은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맛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를 뜨지 않고 그녀의 앞에 계속 앉아 있었다. 죽을 한 입씩 넘길 때마다 왠지 모르게 목이 메었다. 오늘은 그녀가 그를 치료해 주어야 하는 날이었는데, 그녀가 대신 치료를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죽을 다 비우자 그는 직접 약봉지를 뜯어서 알약 두 알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잘 몰라서 그냥 몸살 약으로 샀어.”
“……고마워요.”
은하는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시다가 잠시 멈칫했다.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집에 미지근한 물은 없었다. 그가 일부러 물까지 끓여서 준비해 준 것 같았다. 은하는 그가 이토록 섬세한 사람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은하는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기태는 그녀가 말을 뱉을 새도 없이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은하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뱉어 버렸다.
“가지 마요.”
기태가 발을 멈추고 섰다. 은하는 본인이 말을 뱉고도 당황을 해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잠깐만. 그냥, 잠깐만.”
그녀는 혹시나 그가 다른 뜻으로 오해를 해서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뒤늦은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그는 여전히 무심한 투로 말했다.
“아직 안 가.”
“…….”
“기다려.”
그는 다시 그 말만 남겨 놓고 방을 나갔다. 은하는 문득 방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열한 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열한 시. 기태가 유일하게 가면을 벗는다는 그 시간. 그러고 보니 그 시간에 함께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잠시 후, 기태가 한 손에 머그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머그잔을 그녀의 침대 옆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머그잔에는 흰 우유가 담겨 있었다. 은하는 그 머그잔을 들어 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양손 가득 퍼졌다. 그녀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그녀의 침대 밑에 다리를 뻗고 앉아 테이블에 등을 기대었다. 두 사람은 침대 위와 아래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시 찾아온 정적 속에,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렸다. 은하는 새삼 그 소리가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열두 시가 되면 그가 가 버릴까 봐 불안해졌다.
“……왜.”
은하가 먼저 용기를 내어 그 정적을 깼다.
“왜 이렇게까지 해 준 거예요?”
예상은 했지만 그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은하가 체념하듯 얼핏 웃음을 흘렸을 때였다.
“나는.”
“…….”
“사과 같은 거 잘 못 해.”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은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어제 일을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은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열쇠고리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십자수로 되어 있었는데, 십자수에는 ‘hakuna matata’라는 글자가 꽤 서툴고 투박한 모양으로 적혀 있었다.
은하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 기태의 앞에 내밀었다. 기태가 그것을 받아 들고 이게 무엇이냐는 듯 은하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
“그런 뜻이에요.”
그는 여전히 은하를 쳐다보았다.
“가져요. 선물이에요.”
“…….”
“가끔, 마음을 다스리기가 너무 힘들면 그걸 손에 꼭 쥐어 보세요. 정말 괜찮아질 거예요.”
기태는 무표정한 얼굴로 열쇠고리만 바라보다가 이내 짧은 실소를 흘렸다.
“진짜라니까요. 제가 여덟 살 때 만든 건데, 지금까지 갖고 다니잖아요. 이상하게 이게 있으면, 정말 다 괜찮은 것 같았거든요. 아니, 그랬어요.”
“그럼 계속 갖고 다녀.”
은하는 열쇠고리를 돌려주는 기태의 손을 밀어냈다.
“날 한 번만 믿어 봐요. 모양은 이래도, 정말 기태 씨를 지켜 줄 거예요.”
기태는 열쇠고리를 가만히 보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은하는 뿌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지만, 은하는 그 침묵이 싫지 않았다. 그저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기태는 정면만 보고 앉아 있었고, 은하는 기태를 보고 앉아 있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천천히 졸음이 밀려왔다. 간만에 달콤한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은하는 내려가는 눈꺼풀을 자꾸만 힘주어 들어 올렸다. 이대로 잠들어버리면, 그는 소리 없이 떠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시야가 흐려졌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어느새 눈앞에 까만 어둠이 내려앉고 그녀를 괴롭히던 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졌을 무렵, 탁한 안개 사이로 얼핏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고마워, 고은하.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은하는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에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침이 왔다. 은하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가뭄 든 밭처럼 갈라져 버린 입술과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은 좀처럼 바깥에 내보일 것이 못 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도 곤욕이었다.
은하는 얕은 숨을 토해 내며 휴대폰을 들었다. 어느새 시간은 열 시가 넘어 있었고 조 소장을 비롯한 연구원들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은하는 조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소장님. 꼭 나가려고 했는데…….”
미안해하는 은하에게 조 소장은 너그럽게 웃으며, 오늘 예약된 환자는 물론 기태의 상담도 자신이 다 잘 처리해 놓을 테니 걱정 말고 주말까지 푹 쉬라고 했다. 은하는 일단 알았다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난번 일로 더 틀어진 마당에 상담까지 펑크를 내면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 같았다. 어쩌면 기태는 이번 기회에 잘됐다며 그녀를 아예 잘라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어떨까.
마음은 아프고 자존심에 상처도 받을 것 같았지만, 어쩔 도리 또한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도 손기태라는 사람이 궁금했고 그를 진심으로 치료해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자신을 밀어내는 사람에게 더 다가갈 힘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니, 문득 그의 차가운 눈빛과 냉담했던 태도가 생각나 다시금 마음이 아렸다.
은하는 얼른 병원에 갔다 오자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한 발 내딛자마자 방 안이 빙그르 돌면서 머리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은하는 다시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부드러운 침대 시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난밤에 잠을 설친 탓에 몸살이 더욱 심해진 것 같았다.
입가에서 실소가 툭툭 터져 나왔다. 그 작은 숨에서마저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은하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옅은 실소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힘들게 부여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툭 놓아 버렸다.
은하는 아주 까만 방 안에 홀로 갇혀 있었다. 위를 보아도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그 어느 곳에도 빛 한 점 없는 아주 컴컴한 어둠이었다.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벽을 두드리며 살려 달라고 소리치다가,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곳은 감옥이라는 것을.
쾅쾅쾅쾅. 그때였다. 그녀는 분명 허탈하게 두 손을 놓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은하는 서둘러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온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소리가 정확히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체불명의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쾅쾅쾅쾅.
그 소리와 동시에 은하의 눈이 번뜩 뜨였다. 어두웠다. 감옥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다만 오른쪽에 창문이 있었고, 그 틈으로 가녀린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꿈이었구나, 안도한 순간 다시금 그 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 소리만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분명 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이 가운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불을 켜니 시계가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반나절 이상 쓰러져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순간 은하의 귀를 때린 초인종 소리였다. 초인종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혼자 살기 시작한 이래 무엇을 시켜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초인종 소리를 거의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누군가 이 집에 찾아온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긴장되고 두려운 가슴을 추스르며 인터폰을 확인한 은하는 깜짝 놀랐다.
“고은하!”
문밖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은하. 은하는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 온전한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것을,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보았다. 오랜 시간 친구가 없었던 만큼, 그렇게 불릴 일도 없었다.
은하는 어쩌면 이것 또한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이 너무 혼미한 나머지, 꿈과 현실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녀가 어느새 문 앞에 섰다. 천천히 올리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잠금 장치의 해제 버튼을 눌렀다. 덜컥, 문이 열렸다. 아주 미약한 빛 정도만 간신히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좁았던 그 틈이, 조금씩 더 벌어졌다.
이윽고 다소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선뜻 말을 뱉지 못했다. 그 침묵이 고통 속에 잠을 설쳤던 지난밤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남자가 한 발 내디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은하는 따라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문이 닫혔다.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는 더욱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은하의 숨에서, 그의 숨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만이 그 어색한 정적의 빈틈을 채웠다.
“……지 마.”
“…….”
“포기하지 마.”
느닷없이 찾아온 그는,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은하는 습관처럼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자꾸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 매혹적인 검은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 포기하지 마.”
7.
‘그 여잔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돈 따위에 팔지 않을 거라고.’
기태는 그날 현식에게 얘기를 듣고 그녀를 오해하고 차갑게 보내 버린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만두라고 했다는 현식의 말도 신경이 쓰였다.
기태는 이미 여러 번 그녀에게 그만두라고 말했고, 그러길 바라는 마음도 분명 있었지만, 막상 그녀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녀가 정말 그만두면 어쩌나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자신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안했다. 솔직한 마음은 그랬다. 내일 그녀가 오면 사과는 못 하더라도 조금은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다정하게 대해 주어야 할지가 막막했다. 너무 갑작스럽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는 이런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라 자신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니 그것에 대해 생각한 일밖에 없었다. 그는 그렇게 내일을 기다리며 약간은 불안하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홉 시에 그녀는 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시계만 들여다보며 9라는 숫자에 시침이 가까이 가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던 그는, 아홉 시 반이 되도록 아무도 오지 않자 방문을 열고 나갔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지만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직 그녀의 연락처도 몰랐다.
그때 멀리서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기태는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방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쩌지도 못하고 앉아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기우가 들어왔다. 잠시나마 활기로 일렁이던 기태의 눈동자가 금세 차게 식었다.
“웬일로 나와 있어?”
기우는 이윽고 무언가 생각난 듯 짧은 웃음을 터뜨린 뒤 말했다.
“아! 은하 씨.”
“…….”
“오늘 못 온대. 몸이 아파서.”
기태는 순간 가슴이 툭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네가 기다릴 거란 생각은 못 해서 말 안 했는데. 기다렸나 보지?”
기태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다시 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료사, 바꾸고 싶으면 바꿔.”
“…….”
“출근까지 못 할 정도로 아픈 걸 보면, 은하 씨도 많이 힘든가 본데. 네 성격에 차이는 건 싫을 거 아니야.”
기태는 묵묵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솟아올랐다.
“누가 너 같은 놈을 맡으려 할진 모르겠지만.”
기태는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떨림을 억누르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설마 했던 불안이 현실로 다가올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됐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려 애쓰며 벌렁 뒤로 누웠다.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검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 위로 자꾸만 낯익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그려지자마자 여지없이 불편한 떨림이 가슴을 스치고 지났다. 그는 낯익은 얼굴과 불편한 떨림을 떨쳐 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잠시 후, 기태는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코트 하나와 차 키를 챙겨 들고 방을 나왔다. 기우가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갔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왜 하는지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따지다 보면 그녀에게 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놔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낯선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주소는 연구소의 소장에게 전화를 해서 알아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 앞이었고, 그의 손은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안에서 아무 인기척이 없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 불안하고 초조해졌고 떨리는 손으로 문까지 두드리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이 열렸다.
하얗다 못해 얼핏 푸른빛까지 띨 정도로 창백해진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기태는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일단 그녀가 너무 아파 보여서 마음이 쓰렸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정말 아파서 못 나온 것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나, 포기하지 마.”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온 그 말을, 기태는 참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말에 놀란 듯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이윽고 파리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포기 안 해요.”
“…….”
“안 해요, 절대.”
그 한마디 말이 뭐라고, 기태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위태로워 보이던 그녀가 한 발 뒤로 주춤하며 휘청거렸다. 놀란 기태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바로 다음 순간 향긋하면서도 은은한 비누향이 그의 코를 스쳤고 뜨거운 온기가 그의 가슴과 온몸에 닿았다. 미약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던 그녀가 그가 당기는 대로 끌려가 그의 품 안에 쓰러지듯 안긴 것이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덜컹거렸다.
“……미안해요.”
은하가 애써 몸을 떼어 내며 말했다. 기태는 다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오른손을 그녀의 작은 이마 위에 대 보았다. 델 듯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그는 짧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다르게 시선을 내리고는 어디에 둘지 몰라 했다.
기태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돌연 양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맘 같아서는 당장 문을 열고 응급실로 가고 싶었지만 그녀는 얇은 가운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그마저도 어깨 부분이 약간 흘러내려 가슴 굴곡이 보일 듯 말 듯 보이는 상태였다. 기태는 얼른 시선을 거두었지만 일순 그들의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분위기는 거두어낼 수 없었다. 은하도 그제야 자신의 차림새를 알아챈 듯, 내려간 옷을 조심스레 잡아 올렸다.
“…….”
오묘한 정적이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듯 내려왔다.
기태는 그녀를 안고 방으로 걸어가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은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낯설고 정신까지 혼미해서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기태가 등을 돌리고 섰다. 이대로 가 버리는 것인가 싶어, 은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잠깐 기다려.”
마침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멈칫한 상태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오로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들렸다. 순식간에 집이 휑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괜찮았다.
그는 분명, 기다리라는 말을 했으니까.
은하는 기태가 나간 사이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늘 병원에 가서 약이라도 받아 왔어야 했는데, 약을 먹기는커녕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랜 수면으로 육체적 피로가 풀리긴 했지만 아픈 것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때, 짧은 초인종 소리가 은하의 귓전을 울렸다. 그 소리 하나에, 무거웠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은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기다리던 사람이 보였다.
그는 무심한 척 들어와 주방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검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뭐예요?”
은하가 아픈 몸을 이끌고 따라가서 물었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고 봉투 안에서 양파, 당근, 애호박, 시금치, 참치캔 등을 꺼냈다. 마지막엔 하얀 약봉지도 보였다.
“들어가 있어.”
그는 은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차분한 손놀림으로 재료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은하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확인 차원에서라도 ‘지금 죽 끓여 주려는 거예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분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낯선 집에서 낯선 이를 위해 요리를 해 주려는 그를 두고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안아?”
은하가 아무 말이 없자 그가 뒤를 돌아보더니 정말 그녀를 안기라도 할 것처럼 다가왔다. 은하는 그제야 흠칫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알았어요. 가요.”
그는 아무 말 없이 은하를 보았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려는 것 같았다. 은하는 하는 수 없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제야 몸을 틀고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온 은하는 넋이 나간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무뚝뚝한 듯 다정하게 대해 주는 그가 너무 낯설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 간절히 바라온 것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을 만큼, 그의 존재는 너무 컸다.
한참 뒤, 그가 쟁반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와서 쟁반을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참치야채죽과 물, 그리고 약이 놓여 있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에게 수저를 건넸다.
“…….”
수저를 받아 든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인스턴트 죽도, 죽집에서 파는 죽도 아닌, 그가 직접 만든 죽이었다. 그의 정성과 마음과 손길이 담긴 죽이었다. 누군가, 아픈 자신을 위해 죽을 끓여 준 것이 언제였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간만이었다.
“잘 먹을게요.”
은하는 이상하게 뭉클한 가슴을 억누르며 죽을 한 수저 떠먹었다. 맛있었다. 간도 딱 맞았다. 은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맛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를 뜨지 않고 그녀의 앞에 계속 앉아 있었다. 죽을 한 입씩 넘길 때마다 왠지 모르게 목이 메었다. 오늘은 그녀가 그를 치료해 주어야 하는 날이었는데, 그녀가 대신 치료를 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죽을 다 비우자 그는 직접 약봉지를 뜯어서 알약 두 알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잘 몰라서 그냥 몸살 약으로 샀어.”
“……고마워요.”
은하는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시다가 잠시 멈칫했다. 미지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집에 미지근한 물은 없었다. 그가 일부러 물까지 끓여서 준비해 준 것 같았다. 은하는 그가 이토록 섬세한 사람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은하는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기태는 그녀가 말을 뱉을 새도 없이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은하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뱉어 버렸다.
“가지 마요.”
기태가 발을 멈추고 섰다. 은하는 본인이 말을 뱉고도 당황을 해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잠깐만. 그냥, 잠깐만.”
그녀는 혹시나 그가 다른 뜻으로 오해를 해서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뒤늦은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그는 여전히 무심한 투로 말했다.
“아직 안 가.”
“…….”
“기다려.”
그는 다시 그 말만 남겨 놓고 방을 나갔다. 은하는 문득 방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열한 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열한 시. 기태가 유일하게 가면을 벗는다는 그 시간. 그러고 보니 그 시간에 함께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잠시 후, 기태가 한 손에 머그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머그잔을 그녀의 침대 옆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머그잔에는 흰 우유가 담겨 있었다. 은하는 그 머그잔을 들어 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양손 가득 퍼졌다. 그녀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그녀의 침대 밑에 다리를 뻗고 앉아 테이블에 등을 기대었다. 두 사람은 침대 위와 아래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시 찾아온 정적 속에,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렸다. 은하는 새삼 그 소리가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열두 시가 되면 그가 가 버릴까 봐 불안해졌다.
“……왜.”
은하가 먼저 용기를 내어 그 정적을 깼다.
“왜 이렇게까지 해 준 거예요?”
예상은 했지만 그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은하가 체념하듯 얼핏 웃음을 흘렸을 때였다.
“나는.”
“…….”
“사과 같은 거 잘 못 해.”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은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어제 일을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은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열쇠고리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십자수로 되어 있었는데, 십자수에는 ‘hakuna matata’라는 글자가 꽤 서툴고 투박한 모양으로 적혀 있었다.
은하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 기태의 앞에 내밀었다. 기태가 그것을 받아 들고 이게 무엇이냐는 듯 은하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
“그런 뜻이에요.”
그는 여전히 은하를 쳐다보았다.
“가져요. 선물이에요.”
“…….”
“가끔, 마음을 다스리기가 너무 힘들면 그걸 손에 꼭 쥐어 보세요. 정말 괜찮아질 거예요.”
기태는 무표정한 얼굴로 열쇠고리만 바라보다가 이내 짧은 실소를 흘렸다.
“진짜라니까요. 제가 여덟 살 때 만든 건데, 지금까지 갖고 다니잖아요. 이상하게 이게 있으면, 정말 다 괜찮은 것 같았거든요. 아니, 그랬어요.”
“그럼 계속 갖고 다녀.”
은하는 열쇠고리를 돌려주는 기태의 손을 밀어냈다.
“날 한 번만 믿어 봐요. 모양은 이래도, 정말 기태 씨를 지켜 줄 거예요.”
기태는 열쇠고리를 가만히 보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은하는 뿌듯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지만, 은하는 그 침묵이 싫지 않았다. 그저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기태는 정면만 보고 앉아 있었고, 은하는 기태를 보고 앉아 있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천천히 졸음이 밀려왔다. 간만에 달콤한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은하는 내려가는 눈꺼풀을 자꾸만 힘주어 들어 올렸다. 이대로 잠들어버리면, 그는 소리 없이 떠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시야가 흐려졌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어느새 눈앞에 까만 어둠이 내려앉고 그녀를 괴롭히던 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졌을 무렵, 탁한 안개 사이로 얼핏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고마워, 고은하.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은하는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