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리의 그림자 1

1화

序章. 당신과 나의 시간


귀밑까지 오는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땅의 울림을 느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사막의 텁텁한 공기가 들어와 입 안을 쓰게 했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작렬하는 태양과 그 아래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가 한눈에 들어왔다.
고함과 비명이 한데 어우러지는 그곳을 무표정한 여자가 까마득한 절벽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에 가는 체구가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서 있는 것조차도 힘든지 한 줄기 땀이 여자의 얼굴을 타고 내렸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눈만큼은 또렷했다.
여자의 시선 끝, 회색 갑옷을 입은 젊은 장군이 적을 향해 폭풍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극의 끝에서 솟아오르는 이분법적인 감정에 여자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이곳에서 죽기를 바란다. 스스로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아 무너지기를, 그리고 그 모습을 살아남은 자신이 볼 수 있기를…… 그의 마지막을 보며 오랜 시간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장군을 보고 있던 여자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질끈 깨문 입술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와 함께하고 싶다. 지독한 악연 따위 다 외면해 버리고 저 사람의 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감히 꿈조차 꾸지 못했던 달콤한 미래를 같이 하기를 염원했다.
하지만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와 함께하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 치열하게 마음속에서 대립하였다.
장군을 보고 있던 여자가 몸을 숙여 바닥에 내려놓았던 커다란 활을 들어 올렸다.
상체만 한 활과 그에 버금가는 길이를 가진 화살.
천천히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녀가 쓰기에는 무겁고 벅찼지만,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었던 삶의 무게에 비하면 가볍게 느껴졌다.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전쟁터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과는 다르게 여자의 주변은 고요해졌다.
이제 시위를 놓고 쏘아 버리면 끝이었다. 화살은 단번에 그의 몸을 꿰뚫고 목숨을 앗아 갈 것이다. 생각은 모두 끝났다. 행동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위를 잡고 있는 몸은 미동도 없었지만, 눈은 흔들렸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나와 함께 가자.’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는 여자의 마음을 들쑤셨다. 눈을 가득 채우던 무언가가 조용히 뺨을 타고 내려왔다. 표적인 장군을 보는 여자의 눈이 부드럽게 변하였다. 굳어 있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나도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결론이 난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그를 향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흐트러진 시위를 다시 당겼다.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잡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활이 그에게로 날아갔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의 여자가 날아가는 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당신이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당신과 함께하리라.



一章. 열여섯의 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진 화려하고 넓은 방의 상석에서 중년의 남자가 긴장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래선 화려한 차림의 점쟁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 있었다.
점쟁이가 뜸을 들이자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남자가 재촉하였다.
“이보게. 무언가 말을 해 보게. 우리 가문에도 그렇지만, 주단에도 중요한 혼담이란 말일세. 어떤가!”
남자의 재촉에 점쟁이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봤다.
방의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공간,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가리려는 듯 청색 발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혼담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작은 인영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목소리의 점쟁이가 인영에게 물었다.
“부가주님 주변에 이리의 이름을 가진 이가 있는지요?”
점쟁이의 말에 상석의 남자가 놀란 듯 청색의 발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내 주변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소.”
“무슨 일인가? 이리의 이름이라니. 도대체 궁합이 어찌 나왔기에! 도대체 혼약을 맺어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맺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남자의 외침에 점쟁이는 고개를 숙였다.
다섯 개의 제국과 십여 개의 중소국가로 이루어진 대륙. 그중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주단에선 두 개의 무인가문과 두 개의 문인가문이 막대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무가인 하우와 문가인 소가의 혼담이 오가는 중이었다.
사주단자가 오고 가고,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 궁합을 알아본 혼담은 하우가의 가주인 하우천과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오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었지만 사내들보다도 능력이 뛰어나고, 그에 버금가는 노력까지 하는 귀한 딸이었다. 맏아들이 사고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지금, 하우천을 도와 가문의 일까지 맡아서 하고 있는 금지옥엽이었다. 그렇기에 소가가 명문이라고 해도 궁합이 좋지 않다면 단번에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우가의 부가주님과 소가의 도련님 궁합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도련님과 부가주님 사이에 이리의 그림자가 자꾸 보이고 있지요. 주변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면 혼사를 서두르십시오. 그리되면 그림자는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궁합은 좋다는 말이었다. 하우천은 알았다는 소리와 함께 점쟁이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그의 손짓에 점쟁이는 뒷걸음질로 문을 나왔다.
점쟁이의 모습에 지나가던 하인들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주단에서 점쟁이는 천대받는 존재, 필요할 때는 빨리 오라며 부르지만 원하는 것을 이루면 쫓겨나듯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땅에 떨어진 복채를 주워 든 그가 몸을 숙인 채, 가문 밖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보게. 잠시 멈추시게.”
작고 날씬한 체구로 보아 자신을 부른 사람은 방에 있던 부가주인 듯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귀족 여인들이 쓰는 너울조차 하지 않은 채 급하게 달려온 그녀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네. 하아, 힘들다.”
귀족 앞에서 고개를 들고 서 있으면 목숨이 위험하기에 점쟁이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인 일이신지요?”
성을 알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에 부가주의 뒤에 있던 여시종이 흠칫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가장 격하게 반응을 보여야 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녀가 눈짓하자 여시종이 작은 보따리를 점쟁이에게 내밀었다.
“내 부족하지만 돌아갈 때 요기라도 하라고 마련하였네. 듣자 하니 걸어서 이 주일은 족히 걸리는 곳에서 왔다면서? 원래는 탈것이라도 마련해 주고자 했으나 그것까지는 허락을 받지 못했네. 대신 이야기를 해 놓았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편히 부탁하게.”
겉치레가 아닌, 호의. 신을 받은 후, 처음으로 느끼는 호의에 점쟁이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저 같은 천것에게 이런 건 과합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내 혼담을 위해 온 것이 아닌가. 내 아직 어리나 고생해서 온 사람을 박대하라 배우진 않았네. 비록 가문 안의 여인이라 가법(家法)을 어기며 자네에게 호의를 베풀지는 못하나, 이런 작은 것 정도는 해 주고 싶네. 부디 받아 주게.”
그리 말하며 보따리를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점쟁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부가주를 쳐다봤다.
“어디 천것이 아가씨를 쳐다보는 거냐!”
점쟁이의 행동에 놀란 여시종이 소리치려는 것을 부가주가 저지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녀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달 아가씨.”
성을 알 수 없던 목소리가 젊은 남자의 저음으로 바뀌자 부가주와 여시종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지만 둘이 놀란 건 남자의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우월.
하우천의 장녀이자 부가주의 직책을 맡고 있는 그녀의 진짜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가족들과 가까운 하인뿐이었다. 가문 내의 소수 사람만 아는 것을 눈앞의 점쟁이는 단번에 알아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부가주에게 점쟁이가 고개를 숙였다.
“달 아가씨께서는 본래의 이름과 함께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그 이름이 아가씨를 지켜 줄 것이고, 또 본래의 이름으로 되돌아올 길을 열어 드릴 것입니다.”
천기를 누설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점쟁이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근 십여 년 만에 받아 보는 순수한 호의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은 미래, 눈앞에 아가씨와의 인연이 끝나질 않길 진심으로 빌었다.
“많은 이의 생명과 삶을 짊어지시게 될 것입니다. 늑대의 시작은 독이 될 수 있으나 그 끝은 또한 모르는 일이듯, 선택하셔야 할 때가 오신다면, 남쪽의 사막으로 오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게 아가씨를 지켜 줄 것입니다.”
불길한 소리를 했다며 여시종이 대문 밖에 왕소금을 뿌릴 동안 그녀는 말없이 점쟁이가 나간 문을 쳐다봤다.
둘의 인연은 먼 훗날에 다시 생길 일.
반년 후, 하우월과 소가 장남의 혼례가 시작되었다.

* * *

주단의 서쪽에 있는 하우는 풍부한 자원과 안정적인 자치로 다른 지역에 비해 살기 편안한 곳으로 유명했다.
새하얀 매화꽃과 연분홍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에 하우가의 장녀 하우월이 소가의 장남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하우에서는 처음 있는 혼례, 더군다나 하우천이 홀로 애지중지 키워 온 딸이었다. 몇 해 연이은 가뭄으로 식량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저장해 놓은 음식을 아낌없이 꺼내 놓았다.
혼례 준비로 분주한 사람들, 그 와중에 음식을 훔쳐 먹다 혼나는 어린 시종까지. 모처럼의 잔치에 사람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구에서 나오는 가죽과 철의 향 대신 곳곳에 준비한 꽃과 향나무의 향기가 하우가의 곳곳을 화사하게 바꾸었다. 바깥채가 소란스러운 만큼 신부가 있는 안채 또한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상의는 몸에 딱 붙었으나 치마와 양 소매는 넓고 길게 늘여 있었다. 평생 복이 있으라는 의미의 붉은 비단으로 만든 혼례복에는 부부의 금실을 기원하는 원추리 꽃과 보리수나무가 은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하얀 꽃을 말려 곱게 빻은 가루를 솜으로 얼굴에 얇게 펴 발랐다. 그 후, 홍화가루를 갠 물을 얇은 붓에 묻혀 입술에 곱게 바르고, 연분홍의 꽃가루를 양 뺨에 살짝 발라 생기를 불어넣었다.
소가에서 예물로 보낸 수정 비녀와 하우가에서 마련한 혼례 장식이 월의 올린 머리 곳곳에 꽂혀 맵시 있게 꾸며 주었다.
“아가씨, 눈을 떠 보세요.”
화장을 위해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완전히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에 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대신 하우의 후계이자 월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 하우천후가 월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누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님 같아. 그렇지? 이수야.”
“천후야! 하지 마! 무슨…….”
“아니에요, 아가씨. 정말로 고와요.”
“이수! 너까지 진짜! 이러지 마. 부끄러워.”
얼굴까지 새빨개진 월이 둘에게 눈을 흘겼다. 그럼에도 둘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천후를 낳고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월은 자신을 치장하기보다는 집안을 관리하는 데 힘썼다. 그렇기에 오늘과 같은 치장은 처음으로 해 보는 것이었다.
“누나.”
월의 무릎에 천후가 얼굴을 묻었다. 이제 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 동생이었다. 월은 혼례복의 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손을 꺼내 조심스레 천후의 머리를 매만졌다.
“철이 바뀔 때마다 누나가 좋아하는 과일을 들고 꼭 갈 거야.”
울음을 꾹 참은 채 또박또박 말하는 천후를 향해 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위로를 해 주면 좋으련만…… 왠지 입을 열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울어 버릴 거 같아 월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솔직히 누나가 혼인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랑 계속 같이 살면 안 되는 거야?”
은근슬쩍 나오는 말에 어린 천후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천후가 고개를 들었다. 두 눈 가득 그렁그렁 맺힌 눈물에 월의 표정이 흐려졌다.
말없이 천후의 눈물을 닦아 주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여름이 되면 그분께 말씀드려 다시 올게. 울지 마.”
“도련님, 울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께서 우시면 고운 화장이 다 지워져요.”
“이수도 슬프잖아! 내가 모를 줄 알고!”
천후의 말에 월의 뒤에 있던 여시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순간 달라진 분위기에 월이 난감한 듯 뒤의 여시종, 아니 이수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다시 천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우천후. 오늘은 누나에게 좋은 날이야. 난 이수도, 너도 모두 축하해 줬으면 좋겠어. 축하해 주고 기뻐해 줘. 이 누나가 떠나는 게 아니라 믿음직한 분을 우리 가족으로 모셔 오는 거로 생각해 주면 안 되겠니?”
월의 부탁에 천후는 눈가에 그렁그렁했던 눈물을 훔치고는 그녀의 목을 꼭 껴안았다.
“누나, 나 이만 나가 있을게.”
도망치듯 나가 버리는 천후의 모습을 보고 있던 월이 검지로 눈 끝에 맺힌 눈물을 훔쳤다.
“이수도 울지 마. 솔직히 나도 무서워.”
태어나고 자란 곳을 처음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어린 동생을 위해 티를 내진 않았지만, 월은 미약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월의 눈물로 지워진 화장을 고치며 이수가 입을 열었다.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면 봄도 금방 오겠지요. 지금은 따라갈 수 없지만 다음 봄에는 꼭 아가씨를 따라갈 거예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이수가 고개를 돌렸다. 도박에 미친 아비의 손에 팔릴 뻔한 자신을 구해 준 게 월이었다. 일곱 살밖에 안 되었던 월은 자신 또래의 이수를 구하는 데 그날 받은 생일선물을 주저 없이 써 버렸다. 그때부터 둘은 주인과 시종 관계를 떠나 세상에서 가장 서로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구 년을 친자매와 같이 지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혼례에 이수는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내년에는 꼭 데리고 간다는 월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이수는 하우천을 직접 보겠다며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소가로 가시게 되면 검은 놓으시는 건가요?”
이수의 물음에 월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벽 한쪽에 세워져 있는, 하우천이 열 살 때 선물해 준 소검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문가의 안주인이 될 여인이 검을 연습한다고 하면 곤란할 테니까.”
검을 선물 받은 이후로 꾸준히 연습해 온 월이었다. 실전 경험만 없을 뿐, 검술은 어쭙잖은 무인보다야 낫다는 소리를 듣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과는 달리 이번에 가져가는 혼수품 중에 검은 없었다.
“아까워요. 꾸준히 익히셨던 건데…….”
이수의 말에 월은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아쉽기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 혼사가 하우가와 동생인 천후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최소한의 미련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밖에서 혼사를 돕는 아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준비는 다 되어 가오? 곧 신랑분이 오실 시간이네.”
“다 되었어요.”
대답한 이수가 빠르게 월의 모습을 살폈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고개를 끄덕인 이수가 월의 얼굴에 진홍색의 얇은 너울을 씌웠다.
이수가 씌워 주는 너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월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같은 시각, 하우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지 못한 채 월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 * *

하우가 보이는 산의 중턱. 그곳에 검은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표정이 풀어질 법도 하건만 하우를 보고 있는 남자의 눈은 깊고 어두웠다.
한창 혼례 준비로 수선스러운 하우를 보고 있는 남자의 뒤로 다른 말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곧 하얀 백마를 탄 또래의 남자가 다가와 내려섰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고급 재질의 비단옷을 입고 있는 훤칠한 남자였다. 그의 등장에 검은 말에 타고 있던 사내도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비월, 아직도 황명이 안 왔는가?”
검은 말을 타고 있던 남자, 아니 비월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심을 흔드는 미모의 남자를 보며 비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월의 대답에 남자가 시선을 하우에게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비월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한테는 미안하다. 청원.”
“뭘? 아! 혼인을 말하는 것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라 별 상관은 없네. 다만 신부에게는 미안하군.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과는 다르게 청원의 표정은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보는 비월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하우를 칠 날은 많았다.
그럼에도 청원이 먼저 비월에게 혼인날에 거사를 행하라 제안하였다. 자신 대신 비월의 군대가 급습을 한다면 하우를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까지 알려 주었다. 그렇게는 못 한다며 비월은 거절했지만 청원은 냉정했다.

‘어차피 멸문된 가문의 딸이라면 혼인이 무산되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나은 일일세.’

청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비월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찜찜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청원은 그의 하나밖에 없는 벗이었다. 지옥과 같았던 유년 시절을 그와 함께 견디며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로 인해 청원이 난처해지진 않을까 싶어 신경이 쓰였다.
“이 일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하겠네.”
비월의 말에 청원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기지개를 쭉 켠 청원이 북적거리는 하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림으로 본 것이 한 번, 그리고 스치듯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다. 하우월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지만, 짧게 본 것으로는 그녀 또한 다른 여인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하우와의 인연을 자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직 아내라는 존재에 얽매여 가문에 묶이고 싶지 않았다.
대가문의 자식이라 정략결혼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현재의 청원에 있어서 하우월이라는 인물은 인생의 장애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비월에게 자신 대신 가라며 문을 열어 주었다. 억지로 혼인을 하느니 그 편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했다.
“대신 확실하게 정리하게. 이제 겨우 시작이지 않은가. 자네의 궁극적인 상대는 자네 아버지야. 알고 있지?”
청원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비월이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가벼운 대화를 하는 둘의 뒤로 흑의로 몸을 가린 인영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황명이 내려졌습니다.”
인영의 말에 비월이 숨을 들이마셨다. 비월의 옆에서 청원이 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나왔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비월에게는 천 년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멸문입니다!”
들려오는 대답에 비월이 굳게 주먹을 쥐었다. 그의 곁에 있던 청원이 비월의 어깨를 두드렸다.
드디어 원하는 답을 얻었다. 오랜 시간을 준비해 온 일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팔 년 동안 품어 왔던 원한을, 그리고 아버지와 싸우기 위한, 힘을 키우기 위한 터전을 얻게 되었다.
비월이 옆에 있는 청원을 보았다.
“이만 가 봐야겠네. 자네는…….”
“걱정하지 마라.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나 내려갈 테니 마음 놓고 정리하게.”
청원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는 터라 그와 같이 가는 것이 부담되었었다. 의사를 먼저 파악하고 빠져 주는 청원이 고마워 비월은 고개를 숙였다.
“일이 끝나면 사람을 보내겠네. 그럼 이만.”
말을 끝낸 비월은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잠시 후, 비월이 내려간 방향에서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고 하우를 향해 진격해 들어가는 군대의 모습이 보였다.
하우의 문이 열리고 아수라장으로 변하자 청원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리 담담하게 비월에게 복수의 문을 열어 줬어도 그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청원은 스스로 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너울을 걷어 올리며 하우월이 지었던 미소가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월에게 미안했지만, 어차피 주단에서 가문의 운명은 남을 짓밟거나 짓밟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몸을 돌린 청원이 말에 올랐다. 가볍게 말의 배를 찬 청원이 천천히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