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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소가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문을 연 순간 하우가 맞이한 건 흑의를 입은 무사들이었다.
잔치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하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하우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하우는 역천을 저질렀으니, 가주 천은 그 죄의 대가를 받아라.”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고함에 하우천이 놀라 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뇌리에 스친 건 점쟁이가 한 말이었다.
이리의 그림자.
그게 눈앞의 존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팔 년…… 만이구나.”
하우천을 보고 있던 남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팔 년을 기다려 온 원수가 눈앞에 있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오, 하우가주 천은 역천의 벌을 받으시오.”
“폐하의 명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게 신하의 도리지만, 나에게는 서가의 비월이 만든 명으로밖에 안 들리는구나.”
그 말이 끝나자 하우천의 뒤로 나타난 병사들이 비월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비월을 보고 있던 하우천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작게 말했다.
“안채로 가거라. 월과 천후를 대피시켜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움직이자 하우천이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을 빼 들었다.
“하우를 닫게 할 생각으로 온 것이라면, 이 정도는 각오했겠지.”
대검이 앞으로 향하고, 하우의 병사들이 비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비월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 또한 그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땅을 울리는 고함과 함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한편, 밖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비명으로 바뀌자 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이 몸을 일으키자 같이 일어난 이수가 말했다.
“무슨 소리일까요? 제가 확인을…….”
“이수! 이리 와!”
문을 열며 나가려는 이수의 팔을 월이 잡아당겼다.
콰쾅.
굉음과 함께 문이 단칼에 부서졌다. 연기와 함께 나타난 흑의의 남자가 둘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찾았다. 킥킥. 보아하니 화려하게 꾸민 년이 하우천의 딸년이렷다?”
“이수 물러나!”
공포로 굳어 버린 이수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월이 머리에 쓰고 있던 너울을 집어 던졌다. 언제나 하우천과 훈련을 해 왔지만 실전은 처음이었다. 혼례복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킥킥. 네년 목 하나면 난 출세하는 거야.”
음습하고 불쾌한 기운이 남자에게서 흘러나왔다. 흑의 밖으로 나오는 광기에 월의 몸이 떨렸다.
두려움을 최대한 참아 가며 월이 침착하게 남자를 노려봤다.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눈앞의 남자는 월을 얕보고 있었다. 그 점을 그녀는 노리기로 했다.
휙 소리와 함께 남자의 검이 월을 향해 휘둘러지자 월은 이수를 밀며 몸을 숙였다. 검에 잘린 옷소매가 남자의 시선을 가리자, 그 틈을 노린 월이 머리에 꽂아 놓았던 비녀를 뽑아 남자의 손목을 찔렀다.
“아아악.”
비명과 함께 남자가 검을 떨어뜨리자 월이 힘껏 그것을 발로 찼다. 검이 굴러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몸을 빼려는 찰나, 남자의 거친 손이 흐트러진 머리채를 붙잡아 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머리가 울렸다. 세상이 비틀리는 느낌에 월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난 남자의 행동은 여전히 무자비했다.
“이년이!”
격분한 남자는 월의 목을 움켜잡았다. 컥 소리와 함께 온몸을 휘감는 고통에 월의 몸이 꺾였다.
“이대로 목을 부러뜨려 주마.”
있는 힘껏 목을 누르며 남자가 이를 갈았다. 월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옆에 보이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있는 힘껏 밀어낸 터라 잡히지 않았다.
빨갛던 얼굴이 하얗게 변하자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월을 죽이는 데 남자의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때 남자의 뒤로 몰래 다가온 그림자가 있었다.
쾅!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던 남자의 머리를 이수가 들고 있던 조각상으로 후려쳤다.
“아가씨!”
남자가 조각상에 맞고 쓰러지자, 월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그를 밀어냈다. 이수의 비명을 들으며 월은 모든 것을 망각했다.
단 한 번의 실전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는 사실마저도…….
남자의 검은 크고 무거웠지만 목을 찌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컥.”
짧은 비명을 끝으로 남자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월은 자신이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월이 사시나무처럼 떨며 바닥에 주저앉자 이수가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
“괜찮아요, 아가씨. 괜찮아요.”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이수가 반복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몸을 떨고 있는 월의 시선은 시체 너머 방 밖을 향해 있었다.
부서진 문밖은 이미 지옥이었다. 쌓여 있는 시체 사이로 겁에 질린 아낙이 살려 달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아낙의 등을 흑의의 인영이 주저 없이 베었다.
쓰러지는 아낙의 피 사이로 이수와 월을 본 인영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다! 저기에 하우의 자식이 있다!”
하얗게 질린 이수가 연신 월의 이름을 불렀다. 반면 몸을 떨고 있던 월은 이수의 부름에 점점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저지른 살인에 무너질 때가 아니었다. 인영의 고함에 순식간에 다섯 명의 병사가 모여들었다.
우선은 이수를 지켜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몸을 피해야 했다.
꼭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이수를 떼어 내며 월이 벽에 세워 놓았던 검을 뽑았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월이 자세를 잡았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이수, 방 안에 마련되어 있는 곳 알지? 거기에 들어가 있어.”
“안 돼요. 아가씨께서 들어가세요. 제가 어떻게든 유인을…….”
“저들은 이미 날 봤어.”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월은 잡고 있는 검에 힘을 주었다.
월을 향해 병사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월이 병사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 순간, 병사들과 월을 향해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몸에 단검이 날아들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몸이 하늘에 붕 떴다 땅에 곤두박질쳤다.
단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월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 도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단단히 소검을 잡고 있던 월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챙!
바닥에 떨어진 소검에서 나는 소리가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는 것같이 무겁게 울렸다.
왈칵 월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주영.”
“아가씨, 어디 안 다치셨습니까?”
그는 하우천의 무사이자 월의 검 스승인 주영이었다. 주영이 한달음에 달려와 묻자 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소. 아버지는? 아버지는 괜찮으십니까?”
“지금 항전 중입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천후 도련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모르겠소. 조금 전에 나갔는데…….”
“아가씨께서는 몸을 숨기십시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말을 준비해 놓았으니 그 길로 빠져나가십시오.”
주영의 말에 월은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주영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버님을 봬야겠소. 천후를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이수는 여기 남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몸을 숨겨.”
평소에는 배운 대로 말과 행동을 최대한 아꼈지만,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밀어붙이는 성격은 하우천과 똑같았다.
천후만을 데리고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이곳에 놔두고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고, 오라버니가 실종된 후부터 하우천은 월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가야 했다.
안채로 들어가며 월은 입고 있던 혼례복을 벗어 던졌다.
“아가씨!”
이수와 주영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혼례복 대신 무복으로 갈아입은 월이 바닥에 떨어뜨린 소검을 들었다.
“이수, 숨어 있어. 아버지만 모시고 이쪽으로 올게.”
“아가씨. 안 돼요. 위험해요”
“최대한 숨어서 다닐 거야. 천후가 가장 중요해. 천후 꼭 부탁할게.”
주영을 먼저 보낸 월은 서둘러 하우천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이수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떨리는 숨을 길게 들이쉰 이수는 몸을 숨기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툭.
이수의 발에 월이 벗어 놓은 혼례복이 걸렸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밖의 소란을 보고 있던 이수는 서둘러 혼례복을 챙겨 품에 안은 후, 병풍 뒤에 있는 작은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공간이 보이자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 * *
비월의 검이 하우천의 허벅지를 베었다.
벌써 여덟 번째, 단번에 목을 벨 수 있음에도 비월은 미소까지 보이며 하우천을 압박하고 있었다.
숨을 길게 내쉰 하우천이 주변을 둘러봤다.
아수라장이었던 주변은 비월의 병사들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된 지 오래였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체들, 그 안에는 단순히 혼례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무고한 사람들까지는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쿨럭!”
기침과 함께 하우천의 입가에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차갑게 보고 있던 비월이 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말린 건 어쩔 수 없소.”
냉정한 비월의 말에 하우천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우는 끝났다.
본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 분가는 같이 망하거나 새롭게 이곳을 지배할 다른 가문에 충성하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하우천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가문이 망하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었지만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월과 천후.
두 아이만 살아 있다면 희망은 있다. 아니 이미 사라져 버린 가문에는 미련이 없다.
하우천은 자신이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다는 걸 느꼈다. 비월에게서 도망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를 잡아 놓아야 자신들의 두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결심이 끝난 하우천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노려보고 있는 비월과 시선을 맞추었다.
절대 끊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친구와의 절교, 그의 아내. 그리고 비월.
비월이 태어났을 때 제일 먼저 축하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하우천이었다. 친구의 뒤를 이어 뛰어난 무인이 되라며 어렵게 구한 보검을 건네줬던 사람 또한 그였다.
그리고 지금, 그 검이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믿지는 않겠지만 난 떳떳하네.”
하우천의 말에 비월의 눈썹이 꿈틀했다. 뿜어져 나오는 비월의 살기에 하우천은 더욱더 시선을 맞추었다.
마지막이었다.
증명할 수는 없어도 말해야 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일에 한해서 난 떳떳하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네.”
비월의 눈에 서리는 분노를 하우천은 담담히 받아 냈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자신의 목숨 하나로 모든 게 끝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비월에게 목숨을 내어 줄 생각이었다.
하우천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딸을 시집보내기에도 좋은 날이었지만 죽기에도 그리 나쁜 날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식을 살리기 위해 죽는 것이라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가주이기 전에 하우천은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결심한 하우천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래로 내려오던 시선은 어느 한 지점을 기점으로 멈추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의 눈앞에 월이 서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평온했던 몸이 빠르게 떨렸다.
왜 여기에 왔는가? 분명히 천후와 가문 밖으로 도망치라 했거늘 왜 저기에 있는가!
월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침착한 성격답게 조심히 오고 있었지만 위험했다.
하우천은 온몸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반응에 비월이 돌아보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지금 하신 그 말씀, 내 어머니 앞에서 한번 해 보시지요.”
다행히 하우천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비월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월이 비명을 지르려 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딸을 살려야 한다. 자신은 죽어도 되지만 월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했다.
찰나의 순간, 하우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였다.
“으아아악!”
기합성과 함께 들고 있던 검을 집어 던진 하우천이 비월의 팔을 잡았다. 몸에 난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비월을 밀어냈다.
돌발적인 행동에 비월은 힘으로 맞대응하였으나 먼저 움직인 하우천이 우위였다. 결국 비월의 몸이 무너졌다.
비월을 밀고 앞으로 나온 하우천이 월을 바라봤다. 생의 마지막으로 보는 딸의 모습을 하우천은 마음에 담고 또 담았다. 눈에서 왈칵 샘솟은 눈물이 얼굴을 타고 목으로 내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딸.
어미가 없어도 반듯하게 자라 그 누구보다도 자랑이었던 자신의 보물.
“도망쳐라! 최대한 멀리 그 누구보다도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라!”
하우천의 고함이 주변을 울렸다. 달려오던 월이 그 소리에 자리에서 멈추었다.
시선과 시선이 만났다. 월은 울었고 그는 웃었다.
‘제발 도망가라. 월아……. 제발.’
내동댕이쳐진 비월이 놓쳤던 검을 다시 잡아 하우천에 달려들었다.
뒤에서 비월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우천은 그를 막는 대신 멈춰 있는 월을 바라보았다.
월을 향해 하우천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가문이라는 것은 살아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걸로 목숨을 버리지 마라. 살아라! 나를 위한 최선은 살아…… 컥!”
심장을 뚫고 비월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류하는 피와 온몸을 지배하는 고통에 하우천이 피를 토했다.
“이제 그만 어머니께 사과하러 가시지요.”
비월의 말이 끝나자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이 빠져나왔다. 상처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입을 가린 채 비명을 삼키고 있는 월을 보며 하우천이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라면 안심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지겠지만 영특한 아이니 잘 헤쳐 나갈 것이다. 하우의 이름을 받은 딸이 아닌가. 지금처럼 현명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다만…… 오랫동안 곁에서 월과 천후를 지켜보고 싶었다. 월이 낳는 아이를 보며 기뻐하고,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천후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으면 했다. 아버지로서 둘의 앞날을 지켜 주고 싶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을 들어 허공을 저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비월이 월을 보게 된다. 죽는다는 공포보다도 월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더 강했다.
하우천은 있는 힘껏 월에게 떠나라며 팔을 저었다. 제발 자신의 뜻을 알고 월이 도망가기를,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랐다. 무너지는 가문은 아무것도 아니나 월은 그에게 세상 전부였다.
모르는 이에게는 그저 쓰러지기 직전에 허우적대는 걸로 보이겠지만,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서 가라.’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온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생의 마지막 힘으로 그는 버텨 냈다.
아직도 월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피가 식어 가고 정신이 흐릿해졌지만 시선만큼은 똑바로 월에게로 향했다. 죽어서라도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딸의 모습을 하나씩 세심하게 머릿속에 넣었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손을 움직여 월에게 떠나라는 손짓을 하였다.
아직 지켜 줘야 할 여리고 약한 딸인데 마지막까지 이런 못난 모습이나 보여 주고 있는 아비였다.
반드시 살아남기를……. 무능한 아비 따위 잊어버리고 견디어 내기를…….
자리에 굳어 있던 월은 그제야 그의 뜻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레 월이 모습을 감추자 비로소 안도한 하우천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쿵 소리와 함께 하우천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모습을 비월은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았다. 생의 마지막, 도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하우천은 작게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가 죽었어도 개운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지독한 공허만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비월은 그 어떤 만족도 느끼지 못했건만, 죽은 하우천은 만족한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비월은 주저 없이 검을 들어 하우천의 목을 베었다. 그토록 원하던 복수를 이루어 냈음에도 변하지 않는 그의 표정에 주변 무사들이 몸을 떨었다.
“시신을 보관해라. 목은 모든 일이 정리된 후 성벽에 걸겠다. 나머지 식솔은?”
“알아보고 있습니다. 되도록 빨리 보고하겠습니다.”
바로 옆에 있던 무사가 밖으로 뛰어가고, 하우천을 보고 있던 비월의 시선이 그를 따라 밖으로 향했을 때였다.
“음?”
비월의 눈이 좁아지자 무사 중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봤나?”
비월의 말에 무사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아니다.”
무사의 말에 비월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정리해라.”
“네!”
우렁찬 대답이 들리고 비월이 밖으로 나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작은 인영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하우천이 죽었을 때 있었던 사람이라면 하우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초조한 마음에 비월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소가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문을 연 순간 하우가 맞이한 건 흑의를 입은 무사들이었다.
잔치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하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하우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하우는 역천을 저질렀으니, 가주 천은 그 죄의 대가를 받아라.”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고함에 하우천이 놀라 방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뇌리에 스친 건 점쟁이가 한 말이었다.
이리의 그림자.
그게 눈앞의 존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팔 년…… 만이구나.”
하우천을 보고 있던 남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팔 년을 기다려 온 원수가 눈앞에 있었다.
“황제 폐하의 명이오, 하우가주 천은 역천의 벌을 받으시오.”
“폐하의 명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게 신하의 도리지만, 나에게는 서가의 비월이 만든 명으로밖에 안 들리는구나.”
그 말이 끝나자 하우천의 뒤로 나타난 병사들이 비월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비월을 보고 있던 하우천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작게 말했다.
“안채로 가거라. 월과 천후를 대피시켜야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움직이자 하우천이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을 빼 들었다.
“하우를 닫게 할 생각으로 온 것이라면, 이 정도는 각오했겠지.”
대검이 앞으로 향하고, 하우의 병사들이 비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비월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 또한 그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땅을 울리는 고함과 함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한편, 밖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비명으로 바뀌자 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이 몸을 일으키자 같이 일어난 이수가 말했다.
“무슨 소리일까요? 제가 확인을…….”
“이수! 이리 와!”
문을 열며 나가려는 이수의 팔을 월이 잡아당겼다.
콰쾅.
굉음과 함께 문이 단칼에 부서졌다. 연기와 함께 나타난 흑의의 남자가 둘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찾았다. 킥킥. 보아하니 화려하게 꾸민 년이 하우천의 딸년이렷다?”
“이수 물러나!”
공포로 굳어 버린 이수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월이 머리에 쓰고 있던 너울을 집어 던졌다. 언제나 하우천과 훈련을 해 왔지만 실전은 처음이었다. 혼례복 때문에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킥킥. 네년 목 하나면 난 출세하는 거야.”
음습하고 불쾌한 기운이 남자에게서 흘러나왔다. 흑의 밖으로 나오는 광기에 월의 몸이 떨렸다.
두려움을 최대한 참아 가며 월이 침착하게 남자를 노려봤다.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눈앞의 남자는 월을 얕보고 있었다. 그 점을 그녀는 노리기로 했다.
휙 소리와 함께 남자의 검이 월을 향해 휘둘러지자 월은 이수를 밀며 몸을 숙였다. 검에 잘린 옷소매가 남자의 시선을 가리자, 그 틈을 노린 월이 머리에 꽂아 놓았던 비녀를 뽑아 남자의 손목을 찔렀다.
“아아악.”
비명과 함께 남자가 검을 떨어뜨리자 월이 힘껏 그것을 발로 찼다. 검이 굴러가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몸을 빼려는 찰나, 남자의 거친 손이 흐트러진 머리채를 붙잡아 바닥에 내리찍었다.
쾅!
머리가 울렸다. 세상이 비틀리는 느낌에 월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가 난 남자의 행동은 여전히 무자비했다.
“이년이!”
격분한 남자는 월의 목을 움켜잡았다. 컥 소리와 함께 온몸을 휘감는 고통에 월의 몸이 꺾였다.
“이대로 목을 부러뜨려 주마.”
있는 힘껏 목을 누르며 남자가 이를 갈았다. 월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옆에 보이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있는 힘껏 밀어낸 터라 잡히지 않았다.
빨갛던 얼굴이 하얗게 변하자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월을 죽이는 데 남자의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때 남자의 뒤로 몰래 다가온 그림자가 있었다.
쾅!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던 남자의 머리를 이수가 들고 있던 조각상으로 후려쳤다.
“아가씨!”
남자가 조각상에 맞고 쓰러지자, 월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으로 그를 밀어냈다. 이수의 비명을 들으며 월은 모든 것을 망각했다.
단 한 번의 실전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는 사실마저도…….
남자의 검은 크고 무거웠지만 목을 찌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컥.”
짧은 비명을 끝으로 남자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월은 자신이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월이 사시나무처럼 떨며 바닥에 주저앉자 이수가 다가와 그녀를 껴안았다.
“괜찮아요, 아가씨. 괜찮아요.”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이수가 반복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몸을 떨고 있는 월의 시선은 시체 너머 방 밖을 향해 있었다.
부서진 문밖은 이미 지옥이었다. 쌓여 있는 시체 사이로 겁에 질린 아낙이 살려 달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아낙의 등을 흑의의 인영이 주저 없이 베었다.
쓰러지는 아낙의 피 사이로 이수와 월을 본 인영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다! 저기에 하우의 자식이 있다!”
하얗게 질린 이수가 연신 월의 이름을 불렀다. 반면 몸을 떨고 있던 월은 이수의 부름에 점점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저지른 살인에 무너질 때가 아니었다. 인영의 고함에 순식간에 다섯 명의 병사가 모여들었다.
우선은 이수를 지켜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몸을 피해야 했다.
꼭 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이수를 떼어 내며 월이 벽에 세워 놓았던 검을 뽑았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월이 자세를 잡았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이수, 방 안에 마련되어 있는 곳 알지? 거기에 들어가 있어.”
“안 돼요. 아가씨께서 들어가세요. 제가 어떻게든 유인을…….”
“저들은 이미 날 봤어.”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월은 잡고 있는 검에 힘을 주었다.
월을 향해 병사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월이 병사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 순간, 병사들과 월을 향해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몸에 단검이 날아들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몸이 하늘에 붕 떴다 땅에 곤두박질쳤다.
단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월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 도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단단히 소검을 잡고 있던 월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챙!
바닥에 떨어진 소검에서 나는 소리가 심장이 바닥에 내려앉는 것같이 무겁게 울렸다.
왈칵 월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주영.”
“아가씨, 어디 안 다치셨습니까?”
그는 하우천의 무사이자 월의 검 스승인 주영이었다. 주영이 한달음에 달려와 묻자 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소. 아버지는? 아버지는 괜찮으십니까?”
“지금 항전 중입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천후 도련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모르겠소. 조금 전에 나갔는데…….”
“아가씨께서는 몸을 숨기십시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말을 준비해 놓았으니 그 길로 빠져나가십시오.”
주영의 말에 월은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주영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버님을 봬야겠소. 천후를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이수는 여기 남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몸을 숨겨.”
평소에는 배운 대로 말과 행동을 최대한 아꼈지만,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밀어붙이는 성격은 하우천과 똑같았다.
천후만을 데리고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이곳에 놔두고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고, 오라버니가 실종된 후부터 하우천은 월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가야 했다.
안채로 들어가며 월은 입고 있던 혼례복을 벗어 던졌다.
“아가씨!”
이수와 주영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혼례복 대신 무복으로 갈아입은 월이 바닥에 떨어뜨린 소검을 들었다.
“이수, 숨어 있어. 아버지만 모시고 이쪽으로 올게.”
“아가씨. 안 돼요. 위험해요”
“최대한 숨어서 다닐 거야. 천후가 가장 중요해. 천후 꼭 부탁할게.”
주영을 먼저 보낸 월은 서둘러 하우천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이수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떨리는 숨을 길게 들이쉰 이수는 몸을 숨기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툭.
이수의 발에 월이 벗어 놓은 혼례복이 걸렸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밖의 소란을 보고 있던 이수는 서둘러 혼례복을 챙겨 품에 안은 후, 병풍 뒤에 있는 작은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공간이 보이자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 * *
비월의 검이 하우천의 허벅지를 베었다.
벌써 여덟 번째, 단번에 목을 벨 수 있음에도 비월은 미소까지 보이며 하우천을 압박하고 있었다.
숨을 길게 내쉰 하우천이 주변을 둘러봤다.
아수라장이었던 주변은 비월의 병사들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된 지 오래였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체들, 그 안에는 단순히 혼례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무고한 사람들까지는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쿨럭!”
기침과 함께 하우천의 입가에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차갑게 보고 있던 비월이 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말린 건 어쩔 수 없소.”
냉정한 비월의 말에 하우천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우는 끝났다.
본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 분가는 같이 망하거나 새롭게 이곳을 지배할 다른 가문에 충성하는 게 기본이었다.
하지만 하우천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가문이 망하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었지만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월과 천후.
두 아이만 살아 있다면 희망은 있다. 아니 이미 사라져 버린 가문에는 미련이 없다.
하우천은 자신이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다는 걸 느꼈다. 비월에게서 도망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를 잡아 놓아야 자신들의 두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결심이 끝난 하우천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노려보고 있는 비월과 시선을 맞추었다.
절대 끊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친구와의 절교, 그의 아내. 그리고 비월.
비월이 태어났을 때 제일 먼저 축하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하우천이었다. 친구의 뒤를 이어 뛰어난 무인이 되라며 어렵게 구한 보검을 건네줬던 사람 또한 그였다.
그리고 지금, 그 검이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믿지는 않겠지만 난 떳떳하네.”
하우천의 말에 비월의 눈썹이 꿈틀했다. 뿜어져 나오는 비월의 살기에 하우천은 더욱더 시선을 맞추었다.
마지막이었다.
증명할 수는 없어도 말해야 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일에 한해서 난 떳떳하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러하네.”
비월의 눈에 서리는 분노를 하우천은 담담히 받아 냈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자신의 목숨 하나로 모든 게 끝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비월에게 목숨을 내어 줄 생각이었다.
하우천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딸을 시집보내기에도 좋은 날이었지만 죽기에도 그리 나쁜 날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식을 살리기 위해 죽는 것이라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가주이기 전에 하우천은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결심한 하우천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래로 내려오던 시선은 어느 한 지점을 기점으로 멈추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의 눈앞에 월이 서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평온했던 몸이 빠르게 떨렸다.
왜 여기에 왔는가? 분명히 천후와 가문 밖으로 도망치라 했거늘 왜 저기에 있는가!
월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침착한 성격답게 조심히 오고 있었지만 위험했다.
하우천은 온몸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반응에 비월이 돌아보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지금 하신 그 말씀, 내 어머니 앞에서 한번 해 보시지요.”
다행히 하우천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비월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월이 비명을 지르려 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딸을 살려야 한다. 자신은 죽어도 되지만 월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했다.
찰나의 순간, 하우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였다.
“으아아악!”
기합성과 함께 들고 있던 검을 집어 던진 하우천이 비월의 팔을 잡았다. 몸에 난 상처가 벌어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비월을 밀어냈다.
돌발적인 행동에 비월은 힘으로 맞대응하였으나 먼저 움직인 하우천이 우위였다. 결국 비월의 몸이 무너졌다.
비월을 밀고 앞으로 나온 하우천이 월을 바라봤다. 생의 마지막으로 보는 딸의 모습을 하우천은 마음에 담고 또 담았다. 눈에서 왈칵 샘솟은 눈물이 얼굴을 타고 목으로 내려갔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딸.
어미가 없어도 반듯하게 자라 그 누구보다도 자랑이었던 자신의 보물.
“도망쳐라! 최대한 멀리 그 누구보다도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라!”
하우천의 고함이 주변을 울렸다. 달려오던 월이 그 소리에 자리에서 멈추었다.
시선과 시선이 만났다. 월은 울었고 그는 웃었다.
‘제발 도망가라. 월아……. 제발.’
내동댕이쳐진 비월이 놓쳤던 검을 다시 잡아 하우천에 달려들었다.
뒤에서 비월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우천은 그를 막는 대신 멈춰 있는 월을 바라보았다.
월을 향해 하우천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가문이라는 것은 살아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걸로 목숨을 버리지 마라. 살아라! 나를 위한 최선은 살아…… 컥!”
심장을 뚫고 비월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류하는 피와 온몸을 지배하는 고통에 하우천이 피를 토했다.
“이제 그만 어머니께 사과하러 가시지요.”
비월의 말이 끝나자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이 빠져나왔다. 상처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입을 가린 채 비명을 삼키고 있는 월을 보며 하우천이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라면 안심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지겠지만 영특한 아이니 잘 헤쳐 나갈 것이다. 하우의 이름을 받은 딸이 아닌가. 지금처럼 현명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다만…… 오랫동안 곁에서 월과 천후를 지켜보고 싶었다. 월이 낳는 아이를 보며 기뻐하고,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천후를 자랑스럽게 바라보았으면 했다. 아버지로서 둘의 앞날을 지켜 주고 싶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을 들어 허공을 저었다.
이대로 쓰러지면 비월이 월을 보게 된다. 죽는다는 공포보다도 월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더 강했다.
하우천은 있는 힘껏 월에게 떠나라며 팔을 저었다. 제발 자신의 뜻을 알고 월이 도망가기를,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랐다. 무너지는 가문은 아무것도 아니나 월은 그에게 세상 전부였다.
모르는 이에게는 그저 쓰러지기 직전에 허우적대는 걸로 보이겠지만,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서 가라.’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온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생의 마지막 힘으로 그는 버텨 냈다.
아직도 월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피가 식어 가고 정신이 흐릿해졌지만 시선만큼은 똑바로 월에게로 향했다. 죽어서라도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딸의 모습을 하나씩 세심하게 머릿속에 넣었다. 한없이 무거워지는 손을 움직여 월에게 떠나라는 손짓을 하였다.
아직 지켜 줘야 할 여리고 약한 딸인데 마지막까지 이런 못난 모습이나 보여 주고 있는 아비였다.
반드시 살아남기를……. 무능한 아비 따위 잊어버리고 견디어 내기를…….
자리에 굳어 있던 월은 그제야 그의 뜻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레 월이 모습을 감추자 비로소 안도한 하우천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쿵 소리와 함께 하우천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모습을 비월은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았다. 생의 마지막, 도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하우천은 작게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가 죽었어도 개운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지독한 공허만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비월은 그 어떤 만족도 느끼지 못했건만, 죽은 하우천은 만족한 듯 미소 짓고 있었다.
비월은 주저 없이 검을 들어 하우천의 목을 베었다. 그토록 원하던 복수를 이루어 냈음에도 변하지 않는 그의 표정에 주변 무사들이 몸을 떨었다.
“시신을 보관해라. 목은 모든 일이 정리된 후 성벽에 걸겠다. 나머지 식솔은?”
“알아보고 있습니다. 되도록 빨리 보고하겠습니다.”
바로 옆에 있던 무사가 밖으로 뛰어가고, 하우천을 보고 있던 비월의 시선이 그를 따라 밖으로 향했을 때였다.
“음?”
비월의 눈이 좁아지자 무사 중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봤나?”
비월의 말에 무사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아니다.”
무사의 말에 비월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정리해라.”
“네!”
우렁찬 대답이 들리고 비월이 밖으로 나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작은 인영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하우천이 죽었을 때 있었던 사람이라면 하우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초조한 마음에 비월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