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맞았나?’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비월이 화살이 나간 방향으로 몸을 내밀었다. 비월을 따라온 무사들 또한 멀리서 들리는 말의 비명에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비월이 본 건 말과 함께 도망가려는 사내아이의 모습이었다. 일말의 주저함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시위를 메기고 있던 화살로 말을 노린 후, 쉴 틈 없이 바로 숲 속으로 활을 쏘았다.
말의 비명과 구르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하지만 소리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하우의 자식들만 처리되면 복수는 우선 일단락이 된다. 이제는 이곳을 발판 삼아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하우의 씨를 없애야 했다.
“따라와라.”
분명히 하우에는 그가 모르는 비밀 통로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찾아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결국 말을 타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하우천의 자식들이 도망가지 않을까 불안했다. 오늘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야 했다. 비월이 단숨에 준비된 말에 올랐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가 출발하자 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같은 시간, 월은 천후의 등에 박혀 있는 화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화살은 월이 지금까지 보아 온 그 어느 것보다 크고 단단했다. 그렇기에 도주용으로 길러 온 말을 단번에 쓰러뜨리고, 천후의 갑옷을 한 번에 뚫을 수 있었다.
월은 떨리는 손으로 천후의 상체 갑옷을 조금 열어 보았다.
“아…… 아아악!”
월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말을 한 번에 죽인 화살은 천후의 작은 몸 또한 한 번에 꿰뚫었다. 그리고 월 또한 그 화살에 죽었을 것이다.
천후가 갑옷을 입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다행히 활은 천후의 갑옷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그렇기에 월은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기 싫은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안도하는 순간 찾아온 불행은 억지로 끌어모았던 월의 모든 의지를 삼켜 버렸다. 하지만 하우천이나 이수 때와 달리 울음을 터트리기보다는 숨을 내쉬고 견디었다.
동생을 살릴 수 없다면 적어도 그의 마지막은 누나로서 같이 있어야 했다.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동생의 마지막만큼은 함께해야 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삼키며 월은 천후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역류하는 피를 토하느라 아무 말도 못 하는 동생의 얼굴을, 어깨를, 팔을 쓸었다.
“괜찮아, 내 동생. 곧 괜찮아질 거야.”
월의 말에 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월 또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피에 흠뻑 젖은 천후의 손을 월이 꼭 붙잡았다. 천후가 손을 잡아당기자 그의 뜻을 알아차린 월이 천후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갖다 댔다. 쿨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월의 눈이 커졌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얼굴을 적셨다. 체온이 빠져나가는 동생의 손을 꼭 잡은 월은 연신 숨을 불어 주었다. 하지만 식은 손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천후와 시선을 맞춘 월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월의 대답을 들은 천후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우천도, 이수도, 그리고 천후도 모두 월을 향해 같은 말을, 그리고 믿는다며 미소를 보내 주었다.
“누나만 믿어. 걱정하지 마.”
감당하기 어려운 그들의 소망에 월이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미소뿐이었다.
쿨럭거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가쁘게 내쉬던 숨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축 늘어진 손을 잡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용히,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격하게 월이 통곡하였다. 낮게 울부짖는 소리는 참혹했고, 동생의 시신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월의 모습은 처절했다.
이젠 진짜 혼자였다. 하지만 무섭다며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연이어 일어나는 고통에 눈이 충혈되었다. 질끈 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 얼굴이 죽은 자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힘겹게 천후의 손을 뗀 월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조심스레 천후의 얼굴을 쓰다듬은 후 단검으로 동생의 머리카락을 잘라 냈다. 천후의 머리카락을 잘 갈무리해 품에 넣은 월은 짐을 꺼내 작은 보따리를 만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입을 악문 월이 침착하게, 빠른 손놀림으로 주변을 정리하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한 울림과 함께 먼지가 날리는 것이 보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월이 천후를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월이 구르듯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작은 틈에 몸을 숨긴 그녀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후, 도착한 비월이 말에서 내려왔다. 화살이 꽂혀 있는 천후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선으로 보았다.
‘하우천의 아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비월이 천후의 옆에 앉았다.
어린아이. 비월이 어머니를 잃었을 때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였다.
하우만 아니었다면 살아남았을 아이.
마음 한편으로 치밀어 오르는 죄책감을 억지로 눌렀다. 어차피 그날 이후로 비월 또한 자신을 버렸다.
죄의 대가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런 각오 없이 이런 잔인한 일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후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비월의 뒤로 안채의 상황을 보러 갔던 무사가 달려왔다.
몸을 숙인 그가 비월을 향해 보고하였다.
“안채에 딸로 추정되는 이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훼손이 심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주변에 있는 장신구와 남아 있는 옷, 전반적인 신장의 길이로 봤을 때 확실합니다.”
무사의 말에 비월이 몸을 일으켰다.
하우는 이제 없다.
오랜 시간 열망하고 계획했던 일 하나가 드디어 끝났다.
“이제…… 끝났군.”
비월의 짧은 말에 무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축하드립니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린다는 말에 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질끈 물고 있던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목으로 이어졌다. 조금 전까지 폭풍처럼 흘러내리던 눈물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끝났다는 말과 함께 월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천후의 주변을 맴도는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월은 입을 꼭 틀어막은 채 숨을 죽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월은 몸을 일으켰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매섭게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고 있던 그녀가 천후의 시신이 있던 곳을 말없이 보았다.
천후의 흔적을 보던 월은 숲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비월의 군대가 휩쓸고 간 하우는 끔찍했다. 코를 찌르는 냄새를 옷으로 막으며 청원은 월의 시신이 있다는 안채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런 감정도 없었던 여인이라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건만 시신을 보니 기분이 불편해졌다. 불에 까맣게 그슬려 형체만 남아 있는 시신에서 청원은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죄책감일까? 가슴이 먹먹했다.
어차피 비월에게 복수를 하라고 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결말이었다. 그가 하우에 가지고 있는 증오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청원의 가문으로 인사를 왔던 하우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한눈에 사람을 끄는 매력은 없었지만, 나지막이 말하는 어조와 또렷한 눈동자가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여인이었다.
정략혼인의 상대가 아니었다면 편하게 대화를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청원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어 가는 혼인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게 되었다.
청원의 뒤를 따라온 시종이 준비해 온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시신을 가리는 하얀 천을 시종에게서 받아 든 청원은 월의 시신에 그것을 직접 덮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안 되오.”
청원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월의 시신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안타까움이라거나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비월에 의해 목이 잘리기 전, 미안하다는 가벼운 사과라도 할까 싶어 한 걸음이었다.
“미안하오. 변명하자면 내 오랜 벗을 위해서였소. 적어도 지금 생에서는 당신보다 그 녀석이 더 귀했소. 그래서…… 아니지. 무슨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
말을 하다 말고 청원이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정적이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시신이 불쌍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일까? 답을 알 수 없는 감정에 청원이 허우적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오. 만약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말이오.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어찌 되었든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지켜 주겠소. 더 많이 아끼고 누구보다도 사랑하겠소. 그때는 꼭 그렇게 하리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리를 계속 지키기에는 청원의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거짓으로나마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을 해 버렸지만 그래도 쏟아 내고 나니 한결 가벼워졌다.
말을 모두 끝낸 청원이 비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주변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수선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이 세상에 하우가 없어지고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바람에 실려 날리는 색색의 꽃, 군데군데 터지고 있는 화려한 폭죽,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한 사람들의 환호성.
한 달 전, 이곳을 소유하고 있던 하우가문이 서가문의 비월에 의해 멸문되었다. 죄명은 반란죄, 허울뿐인 황명이었지만 그 또한 명이었기에 하우는 멸문되었다.
드디어 오늘, 하우를 처단하는 데 최고의 공을 세운 서가의 가주가 이 지역의 새로운 주인으로 오는 날이었다.
선두에 서 있는 젊은 사내.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늠름한 무사들.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된 젊은 가주였다.
새로운 주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심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달라진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다투듯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기쁨을 넘어서 광기까지 엿보였다.

같은 시각, 낡고 더러운 천으로 얼굴과 몸을 가린 걸인이 비틀거리며 사람들 사이로 걸어왔다. 상처투성이에 더러운 발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옆으로 몸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하우로 들어가는 행렬에 가까이 닿자 얼굴을 쓰고 있던 넝마를 조심히 걷어 냈다.
더러운 겉모습을 한 넝마 안의 인물은 십 대 중반의 앳된 여자였다. 입술과 얼굴 곳곳에 나 있는 상처가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걸인에게 흥미를 잃고 시선을 다시 새로운 주인에게로 옮겼다.
사람들과는 다르게 여자의 시선은 하우로 들어가는 입구에 고정되었다.
크게 뜨여진 눈, 벗겨지고 상처 입은 여자의 손이 피딱지가 얹어져 있는 입술을 가렸다.
하우가의 가주였던 하우천, 그리고 그의 자식이었던 하우월과 하우천후.
사고로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맏아들을 제외한 모든 이의 목이 그곳에 매달린 채 썩어 가고 있었다.
입술을 가리고 있던 여자의 손 사이로 붉은 것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상처를 추슬러도 나아진 것은 없는 것처럼, 시간이 흘렀어도 죽은 사람들 또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 달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손이 매달려 있는 머리를 어루만지듯 허공을 헤매었다. 머리의 밑으로 서가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비명을 지르듯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자가, 아니 월이 통곡했다.
서가의 사내가 하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히고 그를 향해 환호성을 질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뿔뿔이 흩어졌다. 상황이 정리되어 가자 월은 다시 너덜너덜한 넝마를 쓰고 빠르게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으음?”
장사하기 위해 물건을 꺼내 놓던 장사꾼이 빠르게 사라지는 월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야 나오는 건가? 자네도 여전하군. 아까 나왔으면 대박을 터트리는 건데!”
고개를 갸웃대는 장사꾼을 보며 이웃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행동에 장사꾼이 ‘흥’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잘나신 귀족님네 일이야 나 같은 천한 것이 알겠나? 그저 내가 팔고 싶을 때 파는 거지. 그리고 하우나 서가나 물건이나 잘 팔아 주면 되는 거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보게. 말조심하게. 죽고 싶은 건가!”
이웃의 외침에 장사꾼은 코웃음을 치며 월이 사라진 골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건가?”
“분명히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말이야. 하아! 생각났다! 하우가의 부가주!”
손바닥을 치는 장사꾼의 외침에 이웃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예끼, 이 사람아. 말은 바로 하라고. 아까 그 거지가 하우월이면 저기, 저쪽에 매달려 있는 건 누구란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이웃의 말에 장사꾼은 벽에 매달려 있는 세 개의 목을 쳐다봤다.
“하긴…… 말이 안 되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오려고 해도 목은 필요한 법이니까.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하우가의 부가주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지. 그 거지처럼 백발이 아니라.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모양일세.”
장사꾼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건을 빠르게 내오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갈과 흙이 월의 여린 맨발을 찢고 상처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월은 정신이 완전히 나간 상태로 걷고 있었다.

‘도망쳐라. 그리고 살아남아라.’
‘나 대신 살아 줘. 알았지?’
‘내 몫까지 살아 줘. 누나. 내 삶까지 누나가 대신 살아 줘야 해.’

매서운 바람과 함께 넝마에 숨겨져 있던 월의 백발이 밖으로 꺼내졌다. 흘러내리는 눈물은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웠다. 소리 낼 수 없는 울음이 채찍처럼 여자의 심장을 때리고, 맑기만 했던 여자의 정신을 들쑤셨다.
여자를 스치고 사라졌던 바람이 하우를 한 바퀴 휘놀고는 위로 날아올랐다.

그 후 팔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열여섯이었던 하우월은 스물넷이 되었고, 스물이었던 비월 또한 스물여덟이 되었다. 그사이 숨겨져 있던 모든 일이 주단국의 최남단, 이민족과의 대립으로 황폐화되어 버린 사막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二章. 스물넷의 이수


어두운 사막의 사이로 무사들의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낮에는 너무 뜨거워 싸울 수 없기에 사막에서의 전투는 해가 지면서 바로 시작이 되었다.
주단의 최남단에 있는 사막. 그 끝에 있는 푸른 바다.
그 바다를 경계로 거주하고 있는 이민족과 주단이 서로 대치하였다. 나라의 세력 차이 때문에 금방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전투는 몇 달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었다.
주단의 반대편에 보이는 한 무리의 병사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가 이쪽만큼이나 많아 보였다.
무사는 피고 있던 연초를 모래에 끄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 나섰다는 건 이번 전투는 이길 수 있다는 거요?”
물어보는 무사의 옆에는 매끄러운 몸 선을 가진 여자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남자들만 있다는 전쟁터, 그 가운데에 있는 여자는 이질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별 위화감을 못 느끼는 듯했다. 도리어 무사의 질문이 끝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여자에게 몰렸다.
“이번에 참가하지 않으면 밀린 돈을 주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허, 그놈들 급하긴 급했나 보네. 그런데 그 말을 믿는가?”
전쟁은 나라에서 나온 병사를 중심으로, 돈으로 고용된 무사가 보조를 맞추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이번 전투에는 병사들보다는 무사들의 수가 더 많았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오자, 작은 모래 알갱이가 눈을 뜨고 있던 무사들의 눈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얻지 못하면 반대편에서 얻어야겠죠. 하지만 이곳에서의 계약은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여자의 말은 낮지만 또박또박했고,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은 유난히 반짝반짝 빛났다.
주단의 패배가 확실하게 정해진 전쟁. 그럼에도 무사들이 계약을 깨는 대신 이곳에서 버티는 이유는 간단했다. 옆에 있는 여인과 그녀가 속해 있는 무사단이 아직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준비!”
맨 앞에 서 있던 장군이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이, 다음엔 무사들이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복면을 쓴 여자가 자신의 무기인 긴 검을 빼 들었다. 길게 숨을 쉰 그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무사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었다.
그녀가 눈을 맞춘 사람들은 그녀가 속해 있는 무사단의 동료들, 전투 전에 눈을 맞춘다는 건 살아 돌아오라는 그들만의 신호였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앞의 장수가 비명을 지르듯 고함을 쳤다. 하지만 장수의 말은 현재의 사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배당을 두 배로 주겠다는 장군의 제안만 아니었다면, 돈을 받고 움직이는 무사들이 패색이 짙은 전투에 계속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벌써 무사들이 받을 금액은 밀릴 대로 밀려 있었다. 돈을 주지 않는 전쟁터에서 무사들이 최선을 다해 싸울 리 없었다.
적당히, 죽지 않을 정도로만 검을 휘두르고 오면 그만이었다.
검을 쥐고 있던 장군의 팔이 위에서 가운데로 내려오고, 그와 동시에 병사들과 무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여자라는 걸 확인한 이민족이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커다란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몸을 돌려 무기를 살짝 피한 그녀는 주저 없이 이민족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살이 썰리는 소리와 함께 이민족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고, 그 틈에 여자의 검이 적의 목을 꿰뚫었다.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이민족을 지나 여자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여자가 있던 위치에 날아드는 채찍, 몸을 날려 채찍을 피한 그녀가 단숨에 거리를 좁혀 공격해 오는 적의 복부를 찔렀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명의 적이 쓰러졌다. 빠른 시간, 주변을 둘러본 여자는 품에 넣어 놓았던 단검을 꺼내 던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단검이 주단국 무사를 노리던 이민족의 머리를 꿰뚫었다.
이민족에 의해 죽을 뻔했던 무사가 단검이 날아든 방향을 쳐다봤다. 어느새 여자는 장소를 옮겨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사는 적을 해치우며 여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다섯 명의 이민족을 제거한 여자가 짧은 틈을 타 숨을 고르고 있는 때, 남자가 다가와 여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수, 고마워.”
남자의 말에 여자, 아니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민족 병사에게 밀리고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몸을 이동했다.
주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무사단 중 하나인 청풍단.
그리고 그 안에 소속되어 있는 무사, 이수.
그것이 하우월이었던 여자가 팔 년이라는 세월 동안 만들어 낸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