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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조건
1화
프롤로그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은호는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았다. 지난 닷새 동안을 밤낮으로 울고도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그녀에게는 울 자격이 없었다. 적어도 울어야 하는 그보다 더 슬프게 울 수는 없었다.
“은호 양도 들어와요.”
서재의 문이 삐걱 열리더니 박 변호사가 얼굴을 내밀고 은호를 불렀다.
“저요?”
“그래요.”
“제가 왜?”
“들을 자격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빨리 들어와요.”
박 변호사가 문을 열어 두었지만 은호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재 안에 그가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이토록 아픈데 그는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게다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그녀 자신이 서재 안으로 들어간 것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어서요.”
은호는 마지못한 발걸음을 천천히 서재 안으로 옮겼다.
넓은 창을 통해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지만 서재 안의 공기는 왠지 썰렁하다 못해 한기가 느껴졌다. 이렇듯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지 고작 닷새가 지났건만 그녀에게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다시 주저앉으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뻑뻑한 눈에 힘을 주자 눈 밑이 경련하듯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앉아요.”
박 변호사가 손짓으로 그녀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괜찮아요.”
“앉아.”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서재 책상의 의자가 핑그르르 돌았다. 은호의 동그란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그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호는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앉아서 듣는 게 좋을 거야.”
깎아 놓은 듯 잘생겼다는 표현 이상으로 그를 설명하기 적당한 다른 표현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정도로 잘생겼다. 주원이 의자에서 일어서 모델처럼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며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를 처음 본 날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그의 시선은 참 거만하다. 정확히는 시선이 온기 없이 차가운 것이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하면서도 도도했다. 그 시선이 그녀를 이유 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계속하시죠, 박 변호사님.”
“네.”
은호는 소파에 앉은 주원의 앞자리에 앉아 두 손을 다소곳이 무릎 위로 모았다.
“이 집은 채은호 양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은 두 분이 내년 5월 이전에 결혼을 하시게 된다면 차주원 씨에게 모두 상속이 되겠지만, 만약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복지단체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은호는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 집을, 이렇게 으리으리하게 큰 집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에게 남기셨다고? 은호는 지금 박 변호사가 한 말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말인지를 깨달은 순간 반사적으로 주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유언장에 의거한 정확한 기한은 내년 5월 31일까지입니다.”
주원을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이었다. 10년 전 그날 은호는 아주머니를 따라 이 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왜소한 체격에 짧은 커트머리, 그리고 이미 봄이 시작되었음에도 두툼한 스웨터로 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의 열두 살 소녀가 바로 당시의 채은호 그녀였다.
아주머니와 은호를 태운 차는 고아원에서 출발한 뒤 한참을 달려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어느 으리으리한 집 앞에 멈춰 섰다. 먼저 차에서 내린 아주머니가 버튼을 누르자 새하얀 대문이 커다란 새의 날갯짓처럼 우아하게 안쪽으로 접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은호의 눈은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벌써 놀라기엔 일렀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잘 손질된 넓은 잔디와 키가 큰 나무가 담장 안쪽으로 빼곡히 줄지어 선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넓고 정갈한 정원을 지나자 이번에는 달콤한 초콜릿색 벽돌로 지어진 예쁜 2층 집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란다.”
“…….”
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동화 속에나 존재할 것 같았던 귀족의 집에 자신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네가 지내게 될 집이야.”
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도 그리 오래 지내게 되지 못할지 모른다. 그래, 차라리 잠깐 지내게 될 곳이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은호는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짐 전부가 들어 있는 검은색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꼭 움켜쥐었다.
“들어가자.”
“네.”
은호는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을 들어서 중문을 지나자 반들거리는 나무가 무척 편안해 보이는 넓은 거실이 나왔다. 은호는 순간 여름방학 때면 엄마 손을 잡고 내려갔던 외할머니 집이 떠올랐다. 외할머니 집에도 이곳처럼 햇볕이 잘 드는 넓은 마루가 있었는데…….
그녀가 아홉 살 때 엄마의 외도로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성인이 된 후에야 고모를 통해 두 분이 법적인 부부가 아닌 동거인, 사실혼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의 모습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사람은 엄마였다.
그 헤어짐의 이유가 정말 엄마의 외도였는지, 아빠의 의처증이었는지는, 아니면 궁핍했던 경제적인 상황이나 아빠의 잦은 외박이 문제였던 것인지는 어린 그녀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곁을 가장 먼저 떠난 사람은 엄마였다. 영영 이별하는 건 아니라고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기고 엄마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녹슨 초록 대문을 나갔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당시 별다른 직업도, 모아둔 돈도 없었던 아빠는 그리 오랜 시간 고민을 하지도 않고 어떤 기약도 없이 그녀를 큰고모 집에 맡긴 뒤 사라졌다. 3년간 행방불명이 된 아빠를 기다리며 세 명의 고모 집을 차례로 전전하다 결국 고모들의 합의로 그녀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리고 한 달 전 입양이 되었다. 아들만 두 명을 키운다는 평범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너무 어리지 않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다. 마치 버려졌던 강아지가 입양되듯 그녀는 어떤 선택권도 없이 그 집으로 보내졌다.
입양이 된 첫날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그녀를 입양한 집은 그리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화목하지도 않았다. 아저씨는 그날 저녁 늦게까지 술을 드시고 집으로 돌아오셨고,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아주머니는 옆에 서 있는 그녀의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이 든 아저씨에게 쉬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방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지고 서늘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구도 작은 침대와 텅 빈 책상이 전부였다. 몇 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인지 먼지가 뽀얗게 쌓인 가구들이 마치 앞으로 이 집에서 지내게 될 그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아주머니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에게 가족들을 어떻게 부르라는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찍 그녀를 깨워 자신을 도와 청소와 설거지를 하라고 한 뒤, 방과 후에는 눈치껏 다른 가족들의 심부름을 하라고만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를 제외하고 다른 가족 중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저씨는 매일 저녁 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셨고, 덩치 큰 두 아들은 그녀를 보면 피식피식 웃으며 지나칠 뿐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입양이 되어 들어온 것이었지만 가족이 아닌 양어머니의 잔심부름이나 하는 아이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렇게 고아원에서보다 더 끔찍한 한 달이 겨우겨우 지나갈 무렵 그녀에게 최악의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던 양부모의 아들들이 호시탐탐 그녀가 잠이 든 틈을 타 욕보이려 했던 것이다. 뭔가 무겁고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는 느낌이 목덜미를 지나 쇄골 근처를 헤매고 있을 때 그녀는 눈을 떴다. 자신의 작은 몸을 으깰 듯 올라 타 있는 대학생 아들보다 방문을 등지고 서서 헤죽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고등학생 아들과 시선이 먼저 마주쳤다.
모든 상황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지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은호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나고 자신이 책상 위로 팔을 뻗어 스탠드로 큰 아들의 머리를 내려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바로 그들의 부모가 그녀의 방으로 뛰어왔고, 다음날 그녀의 파양이 결정됐다. 그것이 그녀의 짧은 입양 생활의 전부였다.
파양이 결정되고 대문 밖으로 내쫓긴 그녀는 자신을 다시 데리러 올 거라는 고아원의 차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하늘이 미치도록 파랗고 높아 고개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녀 앞에서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은호는 고개를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차는 고아원의 낡은 봉고차가 아니라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검은색의 커다란 승용차였다. 그녀는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꼬마야, 왜 여기에 서 있는 거니?”
마치 선녀의 날개옷처럼 하늘거리는 파란 블라우스에 긴 스커트를 입은 아주머니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
은호는 대답 대신 자신의 낡은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이 집에 볼일이 있는 거니?”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다정하게 묻는 아주머니에게서 엄마에게 나던 것과 비슷한 향긋한 화장품 냄새가 풍겨왔다.
“혹시 길을 잃은 거야?”
그때 아주머니의 뒤로 고아원의 낡은 봉고차가 다가와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섰다.
“야! 얼른 타.”
“아는 사람이야?”
아주머니가 봉고차를 돌아본 뒤 은호에게 다시 물었다. 은호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 달간의 짧은 입양 생활만큼이나 고아원의 생활은 그녀에게 두렵고 끔찍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게다가 엄마는 그녀가 고아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고모들은 아빠가 돌아오면 그녀가 고아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는 할까? 그러면 아빠는 그녀를 데리러 올까? 어떤 질문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면, 이번처럼 또 이상한 집에 입양이 될 수도 있는 거라면 달아나고 싶었다.
“빨리 안 타고 뭐 해?”
“싫어요.”
은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한 달 만에 파양이나 당한 주제에, 빨리 타지 못해!”
“싫어요.”
“싫으면 네가 어쩔 건데?”
강제로라도 태우려는 듯 고아원 직원이 운전석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그녀의 상황을 지켜보며 곁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고아원 직원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다정하게 물을 때와는 달리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상관하실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주머니의 옷차림을 찬찬히 훑어 내린 뒤 직원이 비꼬듯 말했다.
“혹시 이 집에서 파양 된 아이인가요?”
“그렇수다.”
“그럼 다시 고아원으로 데리고 가는 건가요?”
“거 참 오지랖 한번 넓으시네. 바쁘니까 비키기나 해주쇼.”
“아이가 고아원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이 아이가 원한다면 제가 데려가고 싶군요.”
직원의 눈을 피해 달아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은호의 발목을 붙잡는 소리였다.
“그러려면 우선 고아원으로 가서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눠야겠죠?”
“정말이슈?”
“앞장서시죠.”
그리고 일주일 후 은호는 다시 고아원을 나서 아주머니의 집으로 보내졌다. 정확히는 아주머니가 그녀를 데리러 고아원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녀를 입양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녀가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 것이지만 그런 곳이 없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아빠나 엄마를 찾길 원한다면 도와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주머니의 뜻밖의 제안 때문이 아니라 처음 만났던 날 아주머니에게서 났던 화장품 냄새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은호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아주머니를 따라 다시 고아원을 나섰다.
“주원아.”
그녀가 거실 창에 곱게 드리워진 새하얀 커튼이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척 매끄러워 보이는 천으로 싸인 커다란 소파에 감히 앉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을 때 아주머니가 2층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주원아, 잠깐만 내려와 볼래?”
주원이라는 이름이 남자아이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은호는 다시 얼어붙었다. 아주머니는 지난번 그녀가 잠시 입양되었던 집의 사람들과 친척 관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집의 아들들과 얼굴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에 내내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웠다. 그런데 아주머니에게도 아들이 있는 거라면 차라리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원이는 아줌마 아들이란다.”
한순간에 몰려드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리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경황이 없어서 하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은호야.”
아주머니의 사과에도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부잣집 아주머니도 지난번 아주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그녀를 보살펴 준다는 건 고아원 원장을 속이기 위한 말이었을 뿐 지난번 같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가 가해질지도 몰랐다.
“왜요?”
잠시 후 들려온 짧은 대답과 함께 2층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훌쩍 큰 키에 얼핏 보기에도 무척 눈에 띄는 외모의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열두 살의 어린 소녀 눈에 스무 살의 남자는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 완전히 독립된 한 명의 성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어른이 아니었다. 무늬 없는 흰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도도한 듯 거만하게 내리깐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마치 중세시대의 왕족을 연상케 했다.
“엄마가 말했던 은호란다, 채은호. 그리고 은호야, 이쪽은 아줌마 아들 주원이야, 차주원.”
아주머니의 따듯한 손이 어깨를 감쌌지만 은호는 멍하니 주원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마주 서기 전까지 그녀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안녕?”
먼저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지만 얼른 고개를 숙인 은호는 그를 다시 바라보지 않았다. 자신의 키가 그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작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태에서 아주 살짝 더 숙여 보인 뒤 꼭 다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우리 어머니랑 잘 지내길 바란다.”
잠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그의 입에서 의미가 모호한 말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 은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얼굴이 아닌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고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아줌마 아들은, 주원이는 아버지를 따라 다른 나라로 가서 살 거란다. 조금 있다가, 떠날 거야.”
아주머니의 눈을 바라보지 않아도 목소리에 배인 슬픔이 그녀의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은호라고 했나?”
주원이 잠시 그녀를 내려다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아이니?”
은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 스타일이 짧은 커트인 것은 순전히 고모들의 선택이었다. 결벽증에 가깝게 성격이 깔끔했던 큰고모가 먼저 집 안에 긴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며 그녀를 미용실로 데려가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생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나머지 고모들도 여자아이들은 머리 손질에 필요 이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그녀의 커트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뀐 뒤로 그녀는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이 아닌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날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남자아이처럼 보이기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은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이 주원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숨을 씩씩거렸다.
“그럼 여자?”
다시 묻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과 웃음기가 배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은호는 고개를 치켜들고 지금 그가 진심으로 묻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지 않아도, 가쁘게 숨을 씩씩거려도, 여전히 심장은 너무 세게 콩닥거리고 있었다.
“은호는 열두 살이고, 예쁜 소녀란다.”
“…….”
아주머니의 설명에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은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볼까 망설이던 순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자아이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왜죠? 그 순간 은호는 묻고 싶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왜 그녀가 남자아이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던 건지 사진 속의 그에게 묻고 또 물었다.
“다시 얼굴 보는 일 없을 테니 이제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그녀의 키에 맞춰 다리를 굽히며 그가 말했다.
“…….”
은호는 아무 말 없이 조금 전의 질문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주원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도한 귀족이, 아니, 잘생긴 악마가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심장이 멎을 만큼 근사한 미소였다.
“잘 있어라, 채은호.”
그와의 짧은 첫 만남은 그게 전부였다. 아주머니는 남편과 10여 년의 긴 별거 끝에 이혼을 했다고 했고, 외아들인 주원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아주머니는 매일 아들과 통화를 하며 서재에 걸린 그의 사진을 닦았다. 그리고 은호도 아주머니의 사진첩과 서재에 걸린 사진을 통해 매일 그를 만나며 지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의 사진을 바라볼 때면 아주머니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아니,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미소를 봤을 때처럼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두 사람 이야기 나누세요.”
박 변호사가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박 변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서재 안이 더 고요하고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은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무릎 위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너도,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10년 전 그의 목소리가 젊은 남자의 씩씩하면서도 부드러운 저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매력적으로 나직하지만 약간은 건조하게 느껴지는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녀만큼이나 울어서 목소리가 갈라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말이 되지 않는 얘기라는 그의 생각에는 그녀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는데 유언장에 적힌 내용이 믿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다시는 현실에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진 속 잘생긴 남자가 더 근사하고 남자다운 모습으로 지금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대학생이지?”
“네.”
“그럼 성인이니 혼자 지낼 수는 있겠지?”
“네?”
“난 내일 돌아갈 거야. 이제 이 집에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씩씩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주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요?”
“뭐가?”
“아주머니 유언장 내용……. 그냥 이렇게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요?”
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원을 바라보았다. 잘못돼도 뭔가 한참 잘못된 이 상황 속에 그녀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나겠다니…….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녀보다 지금의 상황에 더 황당해해야 할 그의 목소리에선 어떤 불만이나 의아함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듯 차분하기까지 했다. 은호는 자꾸만 더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을 그가 지금 이성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판단을 내리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었다. 자신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전 상관없어요.”
“뭐가?”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그의 시선이 10년 전과 변함없는 길이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짧은 커트머리를 쓰다듬듯 동그랗게 흘러내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은호는 문득 지금도 자신이 남자아이로 보이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지금의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이면 충분히 그렇게 보이고도 남을 것이겠지만 그의 눈빛만으로 생각을 추측하기란 불가능했다.
“뭘?”
방금 전의 일들을 그새 모두 잊은 듯 그의 목소리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혼이요.”
“결혼?”
“네.”
“유산 때문에 너한테 프러포즈라도 하라고?”
비웃듯 그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프러포즈를 하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 오빠가 아주머니의 유산을 상속받는데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아요.”
다시 그녀의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스물두 살이요.”
“그래서 스물두 살에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그것도 남의 인생 때문에?”
“유산뿐만 아니라 이 집, 이 집도 아주머니와 가족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의미잖아요. 제가 갖게 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어머니의 선택이야.”
“하지만 제 선택은 다른걸요.”
“그 선택은 1년 후, 10년 후, 그리고 더 이후의 네 모습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거야.”
주원도 박 변호사를 따라 방을 나갔다. 은호는 서재 안에 덩그러니 남아 지금의 상황을 곱씹고 또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 남편의 조건
[……서울시는 지난 1월 28일 UIA(국제건축가연맹)를 통해 국제아이디어 설계 공모를 냈고, 4월 15일 작품접수를 마감한 결과 내국인 337명과 세계 각국에서 408명이 참가 등록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서울시는 박윤석 대한건축사무소 대표, 제임스 그렉 베를린 대학교 공대 학장, 조경 건축가 잭 스미스 등 12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통해 4월 20일부터 사흘간 총 45개국의 작품에 대한 엄정한 심사를 펼쳤습니다. 박윤석 심사위원은 ‘제출된 작품들이 대부분이 완성도와 디자인, 작품성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춰 심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으며, 특히 이번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된 차주…….]
Rrrrrrrrr…….
언제부터 켜져 있었던 것인지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TV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은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그제야 자신이 소음 속에서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에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일어서려다 얼른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뒤 리모컨을 찾아 TV를 끄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채은호 씬가요?]
“네. 그런데요?”
[경찰섭니다. 지난번에 접수하셨던 전화사기 피의자가 잡혔습니다. 서로 방문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그래요?”
[오늘 시간이 괜찮으시면 방문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은호는 힘없이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대한민국의 가장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 중 한 사람인 자신에게 사기를 친 나쁜 사람이 잡혔다는 사실에 기쁘고 속이 후련해 환호라도 질러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이상하게 기운이 빠져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1화
프롤로그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은호는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았다. 지난 닷새 동안을 밤낮으로 울고도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그녀에게는 울 자격이 없었다. 적어도 울어야 하는 그보다 더 슬프게 울 수는 없었다.
“은호 양도 들어와요.”
서재의 문이 삐걱 열리더니 박 변호사가 얼굴을 내밀고 은호를 불렀다.
“저요?”
“그래요.”
“제가 왜?”
“들을 자격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빨리 들어와요.”
박 변호사가 문을 열어 두었지만 은호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재 안에 그가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이토록 아픈데 그는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게다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그녀 자신이 서재 안으로 들어간 것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어서요.”
은호는 마지못한 발걸음을 천천히 서재 안으로 옮겼다.
넓은 창을 통해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지만 서재 안의 공기는 왠지 썰렁하다 못해 한기가 느껴졌다. 이렇듯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지 고작 닷새가 지났건만 그녀에게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다시 주저앉으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뻑뻑한 눈에 힘을 주자 눈 밑이 경련하듯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앉아요.”
박 변호사가 손짓으로 그녀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괜찮아요.”
“앉아.”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서재 책상의 의자가 핑그르르 돌았다. 은호의 동그란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그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짙은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호는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앉아서 듣는 게 좋을 거야.”
깎아 놓은 듯 잘생겼다는 표현 이상으로 그를 설명하기 적당한 다른 표현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정도로 잘생겼다. 주원이 의자에서 일어서 모델처럼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며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를 처음 본 날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그의 시선은 참 거만하다. 정확히는 시선이 온기 없이 차가운 것이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하면서도 도도했다. 그 시선이 그녀를 이유 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계속하시죠, 박 변호사님.”
“네.”
은호는 소파에 앉은 주원의 앞자리에 앉아 두 손을 다소곳이 무릎 위로 모았다.
“이 집은 채은호 양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은 두 분이 내년 5월 이전에 결혼을 하시게 된다면 차주원 씨에게 모두 상속이 되겠지만, 만약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복지단체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은호는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 집을, 이렇게 으리으리하게 큰 집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에게 남기셨다고? 은호는 지금 박 변호사가 한 말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말인지를 깨달은 순간 반사적으로 주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유언장에 의거한 정확한 기한은 내년 5월 31일까지입니다.”
주원을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이었다. 10년 전 그날 은호는 아주머니를 따라 이 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왜소한 체격에 짧은 커트머리, 그리고 이미 봄이 시작되었음에도 두툼한 스웨터로 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커다란 눈망울의 열두 살 소녀가 바로 당시의 채은호 그녀였다.
아주머니와 은호를 태운 차는 고아원에서 출발한 뒤 한참을 달려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어느 으리으리한 집 앞에 멈춰 섰다. 먼저 차에서 내린 아주머니가 버튼을 누르자 새하얀 대문이 커다란 새의 날갯짓처럼 우아하게 안쪽으로 접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은호의 눈은 보름달처럼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벌써 놀라기엔 일렀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잘 손질된 넓은 잔디와 키가 큰 나무가 담장 안쪽으로 빼곡히 줄지어 선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 넓고 정갈한 정원을 지나자 이번에는 달콤한 초콜릿색 벽돌로 지어진 예쁜 2층 집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란다.”
“…….”
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동화 속에나 존재할 것 같았던 귀족의 집에 자신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네가 지내게 될 집이야.”
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도 그리 오래 지내게 되지 못할지 모른다. 그래, 차라리 잠깐 지내게 될 곳이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은호는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짐 전부가 들어 있는 검은색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꼭 움켜쥐었다.
“들어가자.”
“네.”
은호는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을 들어서 중문을 지나자 반들거리는 나무가 무척 편안해 보이는 넓은 거실이 나왔다. 은호는 순간 여름방학 때면 엄마 손을 잡고 내려갔던 외할머니 집이 떠올랐다. 외할머니 집에도 이곳처럼 햇볕이 잘 드는 넓은 마루가 있었는데…….
그녀가 아홉 살 때 엄마의 외도로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성인이 된 후에야 고모를 통해 두 분이 법적인 부부가 아닌 동거인, 사실혼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에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의 모습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사람은 엄마였다.
그 헤어짐의 이유가 정말 엄마의 외도였는지, 아빠의 의처증이었는지는, 아니면 궁핍했던 경제적인 상황이나 아빠의 잦은 외박이 문제였던 것인지는 어린 그녀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곁을 가장 먼저 떠난 사람은 엄마였다. 영영 이별하는 건 아니라고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기고 엄마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녹슨 초록 대문을 나갔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당시 별다른 직업도, 모아둔 돈도 없었던 아빠는 그리 오랜 시간 고민을 하지도 않고 어떤 기약도 없이 그녀를 큰고모 집에 맡긴 뒤 사라졌다. 3년간 행방불명이 된 아빠를 기다리며 세 명의 고모 집을 차례로 전전하다 결국 고모들의 합의로 그녀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리고 한 달 전 입양이 되었다. 아들만 두 명을 키운다는 평범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너무 어리지 않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다. 마치 버려졌던 강아지가 입양되듯 그녀는 어떤 선택권도 없이 그 집으로 보내졌다.
입양이 된 첫날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그녀를 입양한 집은 그리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화목하지도 않았다. 아저씨는 그날 저녁 늦게까지 술을 드시고 집으로 돌아오셨고, 그런 모습이 익숙한지 아주머니는 옆에 서 있는 그녀의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술에 취해 소파에서 잠이 든 아저씨에게 쉬지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방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지고 서늘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구도 작은 침대와 텅 빈 책상이 전부였다. 몇 년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인지 먼지가 뽀얗게 쌓인 가구들이 마치 앞으로 이 집에서 지내게 될 그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아주머니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에게 가족들을 어떻게 부르라는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다. 매일 아침 일찍 그녀를 깨워 자신을 도와 청소와 설거지를 하라고 한 뒤, 방과 후에는 눈치껏 다른 가족들의 심부름을 하라고만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를 제외하고 다른 가족 중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저씨는 매일 저녁 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셨고, 덩치 큰 두 아들은 그녀를 보면 피식피식 웃으며 지나칠 뿐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입양이 되어 들어온 것이었지만 가족이 아닌 양어머니의 잔심부름이나 하는 아이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렇게 고아원에서보다 더 끔찍한 한 달이 겨우겨우 지나갈 무렵 그녀에게 최악의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던 양부모의 아들들이 호시탐탐 그녀가 잠이 든 틈을 타 욕보이려 했던 것이다. 뭔가 무겁고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는 느낌이 목덜미를 지나 쇄골 근처를 헤매고 있을 때 그녀는 눈을 떴다. 자신의 작은 몸을 으깰 듯 올라 타 있는 대학생 아들보다 방문을 등지고 서서 헤죽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고등학생 아들과 시선이 먼저 마주쳤다.
모든 상황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지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은호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나고 자신이 책상 위로 팔을 뻗어 스탠드로 큰 아들의 머리를 내려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바로 그들의 부모가 그녀의 방으로 뛰어왔고, 다음날 그녀의 파양이 결정됐다. 그것이 그녀의 짧은 입양 생활의 전부였다.
파양이 결정되고 대문 밖으로 내쫓긴 그녀는 자신을 다시 데리러 올 거라는 고아원의 차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하늘이 미치도록 파랗고 높아 고개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그녀 앞에서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은호는 고개를 내렸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차는 고아원의 낡은 봉고차가 아니라 반들반들 윤이 나는 검은색의 커다란 승용차였다. 그녀는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꼬마야, 왜 여기에 서 있는 거니?”
마치 선녀의 날개옷처럼 하늘거리는 파란 블라우스에 긴 스커트를 입은 아주머니가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
은호는 대답 대신 자신의 낡은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이 집에 볼일이 있는 거니?”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다정하게 묻는 아주머니에게서 엄마에게 나던 것과 비슷한 향긋한 화장품 냄새가 풍겨왔다.
“혹시 길을 잃은 거야?”
그때 아주머니의 뒤로 고아원의 낡은 봉고차가 다가와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내며 섰다.
“야! 얼른 타.”
“아는 사람이야?”
아주머니가 봉고차를 돌아본 뒤 은호에게 다시 물었다. 은호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 달간의 짧은 입양 생활만큼이나 고아원의 생활은 그녀에게 두렵고 끔찍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게다가 엄마는 그녀가 고아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고모들은 아빠가 돌아오면 그녀가 고아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는 할까? 그러면 아빠는 그녀를 데리러 올까? 어떤 질문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면, 이번처럼 또 이상한 집에 입양이 될 수도 있는 거라면 달아나고 싶었다.
“빨리 안 타고 뭐 해?”
“싫어요.”
은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한 달 만에 파양이나 당한 주제에, 빨리 타지 못해!”
“싫어요.”
“싫으면 네가 어쩔 건데?”
강제로라도 태우려는 듯 고아원 직원이 운전석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그녀의 상황을 지켜보며 곁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고아원 직원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다정하게 물을 때와는 달리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상관하실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주머니의 옷차림을 찬찬히 훑어 내린 뒤 직원이 비꼬듯 말했다.
“혹시 이 집에서 파양 된 아이인가요?”
“그렇수다.”
“그럼 다시 고아원으로 데리고 가는 건가요?”
“거 참 오지랖 한번 넓으시네. 바쁘니까 비키기나 해주쇼.”
“아이가 고아원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이 아이가 원한다면 제가 데려가고 싶군요.”
직원의 눈을 피해 달아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은호의 발목을 붙잡는 소리였다.
“그러려면 우선 고아원으로 가서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눠야겠죠?”
“정말이슈?”
“앞장서시죠.”
그리고 일주일 후 은호는 다시 고아원을 나서 아주머니의 집으로 보내졌다. 정확히는 아주머니가 그녀를 데리러 고아원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녀를 입양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녀가 돌아가고 싶다면 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보내줄 것이지만 그런 곳이 없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아빠나 엄마를 찾길 원한다면 도와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주머니의 뜻밖의 제안 때문이 아니라 처음 만났던 날 아주머니에게서 났던 화장품 냄새에 대한 환상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은호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아주머니를 따라 다시 고아원을 나섰다.
“주원아.”
그녀가 거실 창에 곱게 드리워진 새하얀 커튼이 바람결에 나풀거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척 매끄러워 보이는 천으로 싸인 커다란 소파에 감히 앉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을 때 아주머니가 2층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주원아, 잠깐만 내려와 볼래?”
주원이라는 이름이 남자아이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은호는 다시 얼어붙었다. 아주머니는 지난번 그녀가 잠시 입양되었던 집의 사람들과 친척 관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집의 아들들과 얼굴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에 내내 마음 한구석이 껄끄러웠다. 그런데 아주머니에게도 아들이 있는 거라면 차라리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주원이는 아줌마 아들이란다.”
한순간에 몰려드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리 설명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경황이 없어서 하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은호야.”
아주머니의 사과에도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부잣집 아주머니도 지난번 아주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그녀를 보살펴 준다는 건 고아원 원장을 속이기 위한 말이었을 뿐 지난번 같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가 가해질지도 몰랐다.
“왜요?”
잠시 후 들려온 짧은 대답과 함께 2층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훌쩍 큰 키에 얼핏 보기에도 무척 눈에 띄는 외모의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열두 살의 어린 소녀 눈에 스무 살의 남자는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 완전히 독립된 한 명의 성인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순한 어른이 아니었다. 무늬 없는 흰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도도한 듯 거만하게 내리깐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마치 중세시대의 왕족을 연상케 했다.
“엄마가 말했던 은호란다, 채은호. 그리고 은호야, 이쪽은 아줌마 아들 주원이야, 차주원.”
아주머니의 따듯한 손이 어깨를 감쌌지만 은호는 멍하니 주원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마주 서기 전까지 그녀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안녕?”
먼저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지만 얼른 고개를 숙인 은호는 그를 다시 바라보지 않았다. 자신의 키가 그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작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태에서 아주 살짝 더 숙여 보인 뒤 꼭 다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우리 어머니랑 잘 지내길 바란다.”
잠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그의 입에서 의미가 모호한 말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 은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얼굴이 아닌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고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아줌마 아들은, 주원이는 아버지를 따라 다른 나라로 가서 살 거란다. 조금 있다가, 떠날 거야.”
아주머니의 눈을 바라보지 않아도 목소리에 배인 슬픔이 그녀의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은호라고 했나?”
주원이 잠시 그녀를 내려다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아이니?”
은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 스타일이 짧은 커트인 것은 순전히 고모들의 선택이었다. 결벽증에 가깝게 성격이 깔끔했던 큰고모가 먼저 집 안에 긴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며 그녀를 미용실로 데려가 허리까지 내려오던 긴 생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나머지 고모들도 여자아이들은 머리 손질에 필요 이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그녀의 커트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 했다.
머리 스타일이 바뀐 뒤로 그녀는 학교에서 남자아이들이 아닌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날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남자아이처럼 보이기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은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이 주원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숨을 씩씩거렸다.
“그럼 여자?”
다시 묻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과 웃음기가 배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은호는 고개를 치켜들고 지금 그가 진심으로 묻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지 않아도, 가쁘게 숨을 씩씩거려도, 여전히 심장은 너무 세게 콩닥거리고 있었다.
“은호는 열두 살이고, 예쁜 소녀란다.”
“…….”
아주머니의 설명에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은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볼까 망설이던 순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자아이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왜죠? 그 순간 은호는 묻고 싶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왜 그녀가 남자아이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던 건지 사진 속의 그에게 묻고 또 물었다.
“다시 얼굴 보는 일 없을 테니 이제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그녀의 키에 맞춰 다리를 굽히며 그가 말했다.
“…….”
은호는 아무 말 없이 조금 전의 질문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주원이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도한 귀족이, 아니, 잘생긴 악마가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심장이 멎을 만큼 근사한 미소였다.
“잘 있어라, 채은호.”
그와의 짧은 첫 만남은 그게 전부였다. 아주머니는 남편과 10여 년의 긴 별거 끝에 이혼을 했다고 했고, 외아들인 주원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아주머니는 매일 아들과 통화를 하며 서재에 걸린 그의 사진을 닦았다. 그리고 은호도 아주머니의 사진첩과 서재에 걸린 사진을 통해 매일 그를 만나며 지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의 사진을 바라볼 때면 아주머니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아니,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미소를 봤을 때처럼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두 사람 이야기 나누세요.”
박 변호사가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박 변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서재 안이 더 고요하고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은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무릎 위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너도,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10년 전 그의 목소리가 젊은 남자의 씩씩하면서도 부드러운 저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매력적으로 나직하지만 약간은 건조하게 느껴지는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녀만큼이나 울어서 목소리가 갈라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말이 되지 않는 얘기라는 그의 생각에는 그녀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는데 유언장에 적힌 내용이 믿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다시는 현실에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진 속 잘생긴 남자가 더 근사하고 남자다운 모습으로 지금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대학생이지?”
“네.”
“그럼 성인이니 혼자 지낼 수는 있겠지?”
“네?”
“난 내일 돌아갈 거야. 이제 이 집에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씩씩하게 잘 지내길 바란다.”
주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요?”
“뭐가?”
“아주머니 유언장 내용……. 그냥 이렇게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요?”
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원을 바라보았다. 잘못돼도 뭔가 한참 잘못된 이 상황 속에 그녀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나겠다니…….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녀보다 지금의 상황에 더 황당해해야 할 그의 목소리에선 어떤 불만이나 의아함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듯 차분하기까지 했다. 은호는 자꾸만 더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큰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을 그가 지금 이성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판단을 내리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었다. 자신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원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전 상관없어요.”
“뭐가?”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그의 시선이 10년 전과 변함없는 길이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짧은 커트머리를 쓰다듬듯 동그랗게 흘러내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은호는 문득 지금도 자신이 남자아이로 보이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지금의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이면 충분히 그렇게 보이고도 남을 것이겠지만 그의 눈빛만으로 생각을 추측하기란 불가능했다.
“뭘?”
방금 전의 일들을 그새 모두 잊은 듯 그의 목소리에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혼이요.”
“결혼?”
“네.”
“유산 때문에 너한테 프러포즈라도 하라고?”
비웃듯 그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프러포즈를 하라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 오빠가 아주머니의 유산을 상속받는데 걸림돌이 되고 싶진 않아요.”
다시 그녀의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스물두 살이요.”
“그래서 스물두 살에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그것도 남의 인생 때문에?”
“유산뿐만 아니라 이 집, 이 집도 아주머니와 가족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의미잖아요. 제가 갖게 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어머니의 선택이야.”
“하지만 제 선택은 다른걸요.”
“그 선택은 1년 후, 10년 후, 그리고 더 이후의 네 모습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거야.”
주원도 박 변호사를 따라 방을 나갔다. 은호는 서재 안에 덩그러니 남아 지금의 상황을 곱씹고 또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 남편의 조건
[……서울시는 지난 1월 28일 UIA(국제건축가연맹)를 통해 국제아이디어 설계 공모를 냈고, 4월 15일 작품접수를 마감한 결과 내국인 337명과 세계 각국에서 408명이 참가 등록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서울시는 박윤석 대한건축사무소 대표, 제임스 그렉 베를린 대학교 공대 학장, 조경 건축가 잭 스미스 등 12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통해 4월 20일부터 사흘간 총 45개국의 작품에 대한 엄정한 심사를 펼쳤습니다. 박윤석 심사위원은 ‘제출된 작품들이 대부분이 완성도와 디자인, 작품성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춰 심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으며, 특히 이번 공모에 1등으로 당선된 차주…….]
Rrrrrrrrr…….
언제부터 켜져 있었던 것인지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TV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은호는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그제야 자신이 소음 속에서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에 커피 잔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일어서려다 얼른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은 뒤 리모컨을 찾아 TV를 끄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채은호 씬가요?]
“네. 그런데요?”
[경찰섭니다. 지난번에 접수하셨던 전화사기 피의자가 잡혔습니다. 서로 방문을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그래요?”
[오늘 시간이 괜찮으시면 방문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은호는 힘없이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대한민국의 가장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 중 한 사람인 자신에게 사기를 친 나쁜 사람이 잡혔다는 사실에 기쁘고 속이 후련해 환호라도 질러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이상하게 기운이 빠져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