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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성인이 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부모님을 찾기 시작했다. 경찰서에 헤어진 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신청을 했고, 지역 신문에 간간이 광고를 싣고 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전단지를 만들어(부모님의 사진이 없어 모두 어릴 적 자신의 사진의 실었지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지만 기다리고 있는 엄마나 아빠에게 연락이 오기보다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녀만 상처를 입고 있었다.
최근에는 자신이 엄마라고 전화를 걸어온 한 중년 여성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국을 떠돌다 현재는 제주도에 살고 있어서 여비를 붙여 주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여러 가지 정황과 그녀와 어릴 적 기억 몇 가지가 분명하게 일치해 힘들게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비상금을 여비보다 넉넉하게 부쳤다. 그런데 연락이 끊겼다. 그래서 알아보니 이미 수십 명의 피해자가 접수된 사기 사건이었다. 다시 전단지를 나눠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엄마, 아빠가 그녀가 찾길 원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마음을 접어야 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띵동, 띵동.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생각에 빠져들려던 그녀를 이번에 현실로 끌어당긴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지난 1년간 우편물 등의 용건이 아니라면 이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머니가 살아 계실 때처럼 늘 집 안을 깨끗하게 청소했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정원의 잔디와 나무를 손질하고 화단을 가꿨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아주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사실 법적으로는 이미 1년 전 그녀의 소유가 되었지만 은호는 이 집을 자신의 집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아들과 남편에게 언젠가는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그녀가 이 집을 지켜갈 것이다. 그게 이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리고 지난 10년간 자신을 돌봐주신 아주머니에 대한 작은 보답이자 인사 방법이라 여겼다.
며칠 전 아주머니의 첫 번째 기일에 맞춰 주원이 올 거라는 미리 연락을 받아 둔 터였기에 주원이 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현관문을 연 은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오랜만이지?”
11년 전 그녀의 짧은 입양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던 태웅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아주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생신 때나 집안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아주머니가 그들 가족을 초대해 어쩔 수 없이 1년에 몇 번씩은 얼굴을 봐야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얼굴을 볼 일이 없는 사이였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녀에게 유일하게 다행으로 여겨졌던 사실이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바스러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나 누군지 몰라? 알면 좀 비켜.”
그녀가 계속 현관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자 태웅이 집게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주원이 들어오기 편하도록 대문을 열어 둔 것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후회해 봐야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지금 이 집에 저밖에 없어요.”
“알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태웅의 눈동자가 ‘감히 네까짓 게 이 집의 주인행세를 하려드는 것이냐’는 듯 기분 나쁘게 번들거렸다.
“그럼 저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오신 거군요?”
이 집안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훌쩍 큰 키에 씨름선수 같은 덩치의 태웅이었지만 은호는 기죽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훗. 그럼 내가 뭐 하러 이 집에 왔겠어?”
“그럼 여기에서 하세요.”
“뭐?”
“얘기를 들어야 할 사람이 저뿐이라면, 그냥 여기에서 하시라고요.”
“빡빡하게 굴긴.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한잔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누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태웅이 자신의 퉁퉁한 어깨로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밀어 버리고는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은호는 태웅에게로 빠르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여기 제 집이에요.”
“나도 알아.”
자리에 선 태웅이 짜증스럽다는 듯 대꾸하고는 자신의 팔을 세게 털어 단번에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무슨 명목으로? 돌아가신 큰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큰어머니 집에 잠깐 들른 조카에게 무슨 죄명을 씌울 건데?”
태웅이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11년 전 방문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헤죽거렸던 모습과 겹쳐 보여 은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방금 제 집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건방지고 뻔뻔스럽구나?”
“…….”
“그동안 이 집에 공짜로 기생을 했던 것도 모자라 버젓이 살아 있는 아들과 남편, 거기다 조카들까지 죄다 무시하고 이런 집을 물려받은 걸 보면 보통 계집애가 아닌 건 분명하다만, 사실 나 예전부터 너무 궁금했는데 너 도대체 큰어머니한테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이렇게 큰 집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너한테 남겨주신 거냐? 혹시 박 변호사랑 짜고 그 유언장에 무슨 장난이라도 한 거 아냐?”
“…….”
은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 거칠게 들이마신 숨을 그대로 머금고 서 있었다.
“소문에 듣자 하니 박 변호사가 여자 다루는 솜씨가 아주 수준급이라던데. 옛날에는 완전 선머슴 같더니만 요즘에는 제법 계집애 같아진 게 혹시 박 변호사랑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태웅이 은호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은호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이 집에서 당장 나가요!”
악다문 어금니 사이로 그녀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면 큰어머니의 약점이라도 잡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노인네한테 그런 유언장을 쓰게 한 거냐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아주머니 살아 계실 때 그쪽이 어떤 일을 벌였었는지 저도 모두 알고 있거든요?”
은호는 마음 같아서는 그의 팔을 물어뜯어서라도 쫓아내고 싶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안다는 거야?”
그의 얼굴이 그녀 가까이로 내려왔다.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함부로 지껄이고 다니면 무고죄로 고소할 줄 알아.”
“그쪽이 먼저 입 조심하면 저도 조용히 있죠.”
은호는 지지 않고 눈에 힘을 준 채 자신의 몸집보다 족히 배 이상은 큼직한 태웅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작 친아들인 주원이 형한테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고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으신 걸 보면 뭔가 아주 의심스러운데, 그 복지단체라는 것도 순전히 박 변호사에게 선정 권한을 일임하셨다면서?”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여기에서 이러지 말고 직접 경찰서에 가서 얘기를 하세요.”
“주원이 형도 분명 의심을 하고 있을 거야. 참, 오늘 주원이 형 온다면서? 같이 경찰서에 가 보자고 해야겠는걸.”
“그러시든지요.”
태웅이 그녀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은호도 지지 않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어주었다.
“경찰서에는 왜?”
그때 반쯤 열려져 있던 현관문을 열고 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주원을 본 순간 은호는 쿵하고 심장 위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1년 만이었다. 그를 다시 만나는 건. 11년 동안 고작 세 번째 만나는 거였지만 그의 모습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무척 피곤해 보였음에도 헉 하고 눈길이 갈 정도로 여전히 근사했다. 아니, 피곤함이 역력한 눈빛이 왠지 섹시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은호는 주원을 향해서만은 한없이 오글거리는 표현을 하고 있는 자신의 감정에 깜짝 놀라 흡, 숨을 멈췄다.
하지만 무호흡 상태에서 바라봐도 그려놓은 듯 윤곽이 뚜렷한 눈썹, 사내답게 시원한 콧날, 도도하지만 아름다운 입술, 그리고 상대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깊고 오묘하게 빛나는 까맣고 시원한 눈매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백마 탄 왕자님이 세상에 정말 존재했었다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주원과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오셨어요?”
단지 인사를 건네는 것뿐이었는데도 은호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메말라 있었다.
“잘 지냈지?”
그는 모습뿐 아니라 목소리도 여전했다. 부드러웠지만 전혀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네.”
“형?”
이미 거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태웅도 눈이 휘둥그레져 주원을 돌아보았다.
“일찍 왔네요?”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주원은 태웅을 발견하고도 그리 놀라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무슨 이유로 태웅이 이곳에 있는 건지를 묻듯 은호를 바라보았다.
“큰어머니 기일도 얼마 안 남았고 해서 그냥 한번 들러 봤어요.”
“어머니 기일인 게 네가 이 집에 찾아오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요. 큰어머니 생각도 나고 해서 한번 들러봤는데 저 계집애가 저를 못 쫓아내서 안달이잖아요.”
“여기 이제 채은호 집이야.”
그녀의 이름을 발음하는 그의 목소리가 못된 꼬마를 호명하듯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었다. 여전히 그녀가 여자라서 불만인 것인가? 하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그에게 그녀와 결혼을 하면 유산을 물려주시겠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거셨으니.
“형!”
“내가 쓰던 방은 그대로 있지?”
주원의 질문에 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서 쉴게.”
“네.”
“형, 잠깐만요.”
“피곤하다, 태웅아. 다음에 얘기하자.”
주원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지난 30년간 자신의 방이었던, 하지만 이제는 은호의 것이 된 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유언장에 명시되어 있는 기한이 이제 한 달가량 남았지만 어머니의 것에 욕심은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이혼에 합의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게 좋겠다는 두 분의 결정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어머니의 삶 이하 모든 것에서 반걸음 물러서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왜 어머니가 재산을 그에게 남기는 데 은호와의 결혼을 전제로 건 것인지는 의아하기만 했다.
지난 10년간 몸이 약한 어머니의 곁을 은호가 잘 지켰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했다. 어머니의 편지에 동봉된 사진 속에는 웃고 있는 어머니의 곁에 항상 같은 표정의 은호가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그림자 같았던 그녀의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그였기에 오늘이 고작 세 번째 만남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와의 만남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가 그동안 어머니가 자신에게 보내셨던 편지를 정리하며 다시 읽어보다 은호가 정말 사랑스럽고 착한 아가씨로 잘 자라고 있다는 표현이 유난히 잦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어머니 나름의 의도된 강조의 표현이었을까? 그런 사소한 표현들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머니가 사랑스럽고 착한 은호와 함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은호는 이기적이었던 자신을 대신해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곁을 지켜주었다. 사실 그녀라는 존재가 이 집에 있었기에 그는 지금껏 마음 편히 욕심냈던 모든 공부를 끝마치고 꿈을 펼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그녀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다는 사실에 조금도 이의가 없었다. 아니, 어머니는 그녀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어야 했다. 자격이 없는 그에게 물려주기 위한 억지 조건을 내거시는 오류를 범하기 전에.
그의 방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니가 계실 때처럼 단정하게 묶여 있는 커튼이며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잘 손질된 정원의 잔디와 나무들. 모든 것들이 마치 다시 1층으로 내려가면 어딘가에 어머니가 계실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했다. 주원은 창으로 다가가 활짝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싱그러운 초록의 내음이 그의 해묵은 그리움을 단숨에 씻어주는 것 같았다.
11년 전 처음 은호를 만났던 그날도 지금처럼 파릇파릇 돋아난 잔디가 막 정원을 뒤덮었을 무렵이었다.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대신해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데리고 본인이 직접 지은 건물이나 지방의 유명한 건축물, 그리고 박람회장을 구경하러 다녔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세계 곳곳에 멋진 건축물을 짓는 건축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고, 어머니 역시 그의 꿈을 아낌없이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막상 두 분의 이혼이 결정되고, 자신마저 꿈을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그날은 무척 무거운 마음으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죄를 지은 것처럼 뜨끔거렸던 가슴의 통증이 방금 전의 일이었던 것처럼 그는 지금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지만 그가 난간에 서서 아래층을 바라봤을 때 어머니 곁에는 왜소한 체격에 짧은 커트머리, 그리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두툼했던 검은 스웨터 차림의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
이미 며칠 전 어머니로부터 그가 떠나고 나면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던 아이를 데리고 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처음 본 외모로는 한눈에 아이의 성별을 분간하는 것이 힘들었다. 다만 겁에 질린 듯 동그랗고 새까만 눈동자를 깜빡이지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티 하나 없이 하얗던 피부가 점점 붉게 상기되는 것이나 산딸기처럼 붉고 자그마한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자신이 마주 서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모습보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쿵쿵 굴러떨어지던 그 크고 새까만 눈동자가 당시 그 아이의 심정을 더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그는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가 계단을 모두 내려가 아이 앞에 섰을 때, 사실 그 꼬마는 굳이 성별을 확인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갸름한 얼굴에 작고 귀엽기만 했지만 그가 마주 섰을 때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때 그 꼬마가 소년이었다면 고개를 치켜들고 그의 눈을 마주봤었을까? 그 아이가 소년이었다면, 좀 더 씩씩하게 자신에게 인사를 건넸다면,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게 될 아이가 남자아이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듬직한 체격의 남자아이가 어머니 곁에서 의지가 되어 준다면 자신이 곁에 없어도 조금은 안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정원을 돌보는 일에도 여자아이가 아닌 남자아이의 힘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기우일 뿐이었다. 은호는 어머니에게 고작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나 힘들 보태줄 아이가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또 다른 의미의 가족이자 친구였다.
그 후 10년이 흐르고 두 번째 만남이었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봤던 은호의 모습은 10년 전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키가 많이 자란 것 같기는 했지만 여전한 길이의 짧은 커트 머리에 검은색의 셔츠와 검은색의 바지를 입은 호리호리한 모습이 마치 지나치게 예쁘게 생긴 사내아이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본 은호의 모습은 1년 전과 많이 달랐다. 그가 이제껏 보아왔던, 채은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커트 머리가 귀를 살짝 덮는 단발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몸에 달라붙는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상큼하고 여성스럽게 보였다. 이제야 그때의 열두 살 꼬마가 소녀였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스물세 살 아가씨의 모습보다 머릿속에 있는 열두 살 꼬마 은호에게 더 익숙했다.
똑! 똑! 그때 그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 은혼데요.”
“응.”
문이 빼꼼 열리더니 은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주원은 몸을 돌려 창문을 등지고 은호를 바라보았다.
“아직 식사 전이시죠?”
“기내식을 먹어서 별로 생각이 없는데.”
“네.”
그의 기우였을까? 은호의 목소리에 살짝 실망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태웅이는?”
“돌아갔어요.”
“그냥?”
“네.”
은호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 그와 마주섰을 때 두 뺨이 발갛게 달아 있던 꼬마 은호의 모습이 다시 생각났다.
“알았어.”
“그럼 뜨거운 차라도 한잔 가져다 드릴까요?”
“그냥 쉴게.”
“네.”
은호의 얼굴이 뒤로 물러나더니 소리 없이 방문이 닫혔다.
그의 시선이 은호가 닫고 나간 문에서 어머니의 손때로, 더는 어머니의 손때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반들반들 윤이 나는 책꽂이로 옮겨갔다. 그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그날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집에 오지 않으셨다. 그때부터 이 넓은 집은 오롯이 그와 어머니의 차지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손수 집의 안팎을 매일같이 쓸고 닦았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계셨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닿은 곳은 모두 어머니의 차지였다. 이 책꽂이 역시 어머니가 매일 정성껏 닦고 정리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 오래된 한옥의 기둥처럼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반들거리며 윤이 나는 정갈한 모습이 마치 어머니의 단아한 미소를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 이제야 돌아왔어요…….’
주원은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지듯 책꽂이를 정성스레 어루만졌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일에 대한 열정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만을 해바라기 했던 어머니,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했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일과 야망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공부를 모두 마친 후 그 역시 귀국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어머니의 곁이 아닌 아버지와 같은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큰 꿈을 품고 떠났던 그곳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어머니에게 보여 드릴 작은 결과 하나를 거머쥐었는데 어머니는 더 이상 이곳에 계시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사실 어머니 기일에 맞춰 귀국을 한 것이긴 했지만 이번 귀국 중 그에게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국제적으로 아이디어 설계 공모를 냈던 예술센터 건립에 그가 출품한 작품이 1등으로 선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록이 된 대형 건축사사무소에서 일을 했지만 조만간 독립을 할 생각이었기에 이번 당선이 그에게는 특별한 계기이자 발판으로 여겨졌다. 아버지에게는 시상식 겸 해서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그의 독립은 이제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가 지금껏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그 어마어마한 명성을 그대로 물려받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아버지도 짐작은 하고 계실 것이다. 다만 아버지의 그늘이 아닌 이곳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그의 계획에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은호는 거실로 내려와 소파에 앉았다.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주원을 잠시라도 자신의 고향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으로 지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없었다. 심지어 그가 한국에 얼마 동안 머물 것이며, 있는 동안은 쭉 이 집에 머물지 다른 숙소를 정해 놓은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시 들어가서 물어볼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은호야 나야.]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녀의 대학 친구에서 절친이 된 재승이었다.
[그 사기꾼은 잡았어?]
재승은 대뜸 얼마 전 그녀의 엄마를 사칭해 경비를 챙기고 연락을 끊었던 사건을 꺼내 물었다.
“응, 오늘 경찰서에서 연락 왔어.”
[생각보다 금방 잡혔네? 다행이다. 하여튼 요즘 경찰들 엄청 바쁘겠어. 그렇게 질 나쁜 사람들이 세상에 넘쳐나니, 쯧쯧.]
“그러게.”
[그러니까 내가 전단지에 너무 세세하게 적는 건 위험하다고 했잖아. 너를 보면 난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무서운데……. 그런데 너 조금 전에 HBN뉴스 봤어?]
“왜? 또 무슨 엄청난 사건이라도 일어났어?”
은호는 형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지. 차주원 씨가 뉴스에도 나왔더라고.]
언젠가 그녀의 집에 놀러와 서재에 걸린 주원의 사진을 보고 그의 빛나는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재승은 그 뒤로도 간간이 주원의 소식을 묻곤 했었다. 그런데 단 한 번 본 사진으로 그의 모습을 이토록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은호는 새삼 재승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완전 유명 인사네.”
[그래, 나 너희 집에 놀러가서 사인이라도 받아 둬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우리 과 친구들이랑 그 뉴스를 같이 봤는데, 건축이랑 전혀 상관도 없는 내 친구들도 다 차주원 씨를 알고 있더라고. 난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았다니까.]
“정말?”
[당연하지. 그런데 그게 다야?]
“그럼 또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
재승은 지방에서 크게 화원을 하시는 아버지의 권유로 조경과에 입학을 해 한동안 은호와 함께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끼와 넘치는 상상력으로 다시 만화 예술로 학과를 옮겨 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전공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게 특별한 친구였다.
[너, 엄마 찾아야 하잖아?]
“응.”
[너도 전국 방송에 나가서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이 됨과 동시에 부모님이 직접 보실 확률도 높아지지 않겠어? 그러니까 차주원 씨한테 부탁해 봐. 오늘처럼 전국 방송으로 나가는 인터뷰할 때 같이할 수 없겠냐고?]
“어떻게 일 때문에 인터뷰를 하는데 같이할 수 없냐고 물어보냐? 더구나 친하거나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야, 이 바보야! 이미 아는 사이니 더 특별한 사이로야 차차 만들어 가면 되지.]
재승이 윽박지르듯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은호는 자신이 점점 재승의 꼬임에 빠져들고 있는 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묻고 있었다.
[너희 아줌마 유산은 너랑 결혼을 해야만 차주원 씨한테 가는 거라며?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그걸로 한번 말이라도 꺼내 보라고. 더구나 한국에 얼마나 머물지도 모르는데, 나 같으면 술 마시고라도 미친 척 한번 얘기해 보겠다.]
“하지만 어떻게?”
[네가 이 한 몸 희생해 유산을 받도록 결혼을 해줄 테니까 다음에 인터뷰할 때 약혼자나 뭐 좀 각별한 사이로 같이 인터뷰 정도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
“재승아, 그게…….”
[세상에 돈 싫다는 사람은 없더라.]
“아니야, 그럴 거였다면 아마 작년에 내가 넌지시 의사를 물어봤을 때 고민하는 기색이라도 보였을 거야. 그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 잘라 말하고 일어났었다니까.”
[정말?]
“그래. 그리고 그다음 날 바로 영국으로 떠나더라.”
[오, 역시! 그만한 인물이 네 손에 쉽게 들어가기엔 본인 스스로도 아쉬움이 많이 남았겠지.]
“피.”
[으이그, 맹추야! 그럼 너 같으면 게이 남자가 치마 입고 다니면서 자기한테 오빠라고 부른다고 아무리 유산이 절실해도 서류상으로라도 결혼을 하고 싶겠냐? 세상에 눈이 얼마나 많고, 또 차주원 씨는 예술과 실용성을 접목해 현실 세계에 실체를 토해내는 위대한 건축가신데. 기억이 안 나나 본데 작년에 넌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머리 스타일에 만날 우중충한 남방에다 세트처럼 여러 벌인지 한 벌인지 도무지 분간도 안 되는 청바지만 입고 다녔다고. 사실 나도 그땐 가끔 너랑 다니면 창피했었거든. 게다가 우리 동네 아줌마들이 그 아담하니 이쁘게 생긴 총각이 내 애인이냐고 물어보시면 정말 친구고 뭐고 인연을 딱 끊고 싶더라.]
“어, 그랬어? 정말 미안하다.”
은호는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볼썽사납게 보였다는 사실에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승의 말을 끊기 위해 서둘러 사과부터 했다.
성인이 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부모님을 찾기 시작했다. 경찰서에 헤어진 가족 찾기 프로그램에 신청을 했고, 지역 신문에 간간이 광고를 싣고 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전단지를 만들어(부모님의 사진이 없어 모두 어릴 적 자신의 사진의 실었지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지만 기다리고 있는 엄마나 아빠에게 연락이 오기보다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녀만 상처를 입고 있었다.
최근에는 자신이 엄마라고 전화를 걸어온 한 중년 여성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국을 떠돌다 현재는 제주도에 살고 있어서 여비를 붙여 주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다. 여러 가지 정황과 그녀와 어릴 적 기억 몇 가지가 분명하게 일치해 힘들게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비상금을 여비보다 넉넉하게 부쳤다. 그런데 연락이 끊겼다. 그래서 알아보니 이미 수십 명의 피해자가 접수된 사기 사건이었다. 다시 전단지를 나눠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엄마, 아빠가 그녀가 찾길 원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마음을 접어야 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띵동, 띵동.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생각에 빠져들려던 그녀를 이번에 현실로 끌어당긴 것은 초인종 소리였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지난 1년간 우편물 등의 용건이 아니라면 이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머니가 살아 계실 때처럼 늘 집 안을 깨끗하게 청소했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 정원의 잔디와 나무를 손질하고 화단을 가꿨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아주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사실 법적으로는 이미 1년 전 그녀의 소유가 되었지만 은호는 이 집을 자신의 집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아들과 남편에게 언젠가는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그녀가 이 집을 지켜갈 것이다. 그게 이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리고 지난 10년간 자신을 돌봐주신 아주머니에 대한 작은 보답이자 인사 방법이라 여겼다.
며칠 전 아주머니의 첫 번째 기일에 맞춰 주원이 올 거라는 미리 연락을 받아 둔 터였기에 주원이 서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현관문을 연 은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오랜만이지?”
11년 전 그녀의 짧은 입양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던 태웅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아주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생신 때나 집안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아주머니가 그들 가족을 초대해 어쩔 수 없이 1년에 몇 번씩은 얼굴을 봐야 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얼굴을 볼 일이 없는 사이였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그녀에게 유일하게 다행으로 여겨졌던 사실이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바스러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요?”
“나 누군지 몰라? 알면 좀 비켜.”
그녀가 계속 현관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자 태웅이 집게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주원이 들어오기 편하도록 대문을 열어 둔 것이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후회해 봐야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지금 이 집에 저밖에 없어요.”
“알아.”
그녀를 내려다보는 태웅의 눈동자가 ‘감히 네까짓 게 이 집의 주인행세를 하려드는 것이냐’는 듯 기분 나쁘게 번들거렸다.
“그럼 저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오신 거군요?”
이 집안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훌쩍 큰 키에 씨름선수 같은 덩치의 태웅이었지만 은호는 기죽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훗. 그럼 내가 뭐 하러 이 집에 왔겠어?”
“그럼 여기에서 하세요.”
“뭐?”
“얘기를 들어야 할 사람이 저뿐이라면, 그냥 여기에서 하시라고요.”
“빡빡하게 굴긴.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한잔 대접하면서 얘기를 나누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태웅이 자신의 퉁퉁한 어깨로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밀어 버리고는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은호는 태웅에게로 빠르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여기 제 집이에요.”
“나도 알아.”
자리에 선 태웅이 짜증스럽다는 듯 대꾸하고는 자신의 팔을 세게 털어 단번에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
“무슨 명목으로? 돌아가신 큰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큰어머니 집에 잠깐 들른 조카에게 무슨 죄명을 씌울 건데?”
태웅이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11년 전 방문 앞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헤죽거렸던 모습과 겹쳐 보여 은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방금 제 집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건방지고 뻔뻔스럽구나?”
“…….”
“그동안 이 집에 공짜로 기생을 했던 것도 모자라 버젓이 살아 있는 아들과 남편, 거기다 조카들까지 죄다 무시하고 이런 집을 물려받은 걸 보면 보통 계집애가 아닌 건 분명하다만, 사실 나 예전부터 너무 궁금했는데 너 도대체 큰어머니한테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이렇게 큰 집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너한테 남겨주신 거냐? 혹시 박 변호사랑 짜고 그 유언장에 무슨 장난이라도 한 거 아냐?”
“…….”
은호는 너무 어이가 없어 거칠게 들이마신 숨을 그대로 머금고 서 있었다.
“소문에 듣자 하니 박 변호사가 여자 다루는 솜씨가 아주 수준급이라던데. 옛날에는 완전 선머슴 같더니만 요즘에는 제법 계집애 같아진 게 혹시 박 변호사랑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태웅이 은호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은호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이 집에서 당장 나가요!”
악다문 어금니 사이로 그녀가 나직하게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면 큰어머니의 약점이라도 잡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노인네한테 그런 유언장을 쓰게 한 거냐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아주머니 살아 계실 때 그쪽이 어떤 일을 벌였었는지 저도 모두 알고 있거든요?”
은호는 마음 같아서는 그의 팔을 물어뜯어서라도 쫓아내고 싶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뭘 안다는 거야?”
그의 얼굴이 그녀 가까이로 내려왔다.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함부로 지껄이고 다니면 무고죄로 고소할 줄 알아.”
“그쪽이 먼저 입 조심하면 저도 조용히 있죠.”
은호는 지지 않고 눈에 힘을 준 채 자신의 몸집보다 족히 배 이상은 큼직한 태웅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작 친아들인 주원이 형한테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고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으신 걸 보면 뭔가 아주 의심스러운데, 그 복지단체라는 것도 순전히 박 변호사에게 선정 권한을 일임하셨다면서?”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여기에서 이러지 말고 직접 경찰서에 가서 얘기를 하세요.”
“주원이 형도 분명 의심을 하고 있을 거야. 참, 오늘 주원이 형 온다면서? 같이 경찰서에 가 보자고 해야겠는걸.”
“그러시든지요.”
태웅이 그녀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은호도 지지 않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어주었다.
“경찰서에는 왜?”
그때 반쯤 열려져 있던 현관문을 열고 주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주원을 본 순간 은호는 쿵하고 심장 위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1년 만이었다. 그를 다시 만나는 건. 11년 동안 고작 세 번째 만나는 거였지만 그의 모습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무척 피곤해 보였음에도 헉 하고 눈길이 갈 정도로 여전히 근사했다. 아니, 피곤함이 역력한 눈빛이 왠지 섹시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은호는 주원을 향해서만은 한없이 오글거리는 표현을 하고 있는 자신의 감정에 깜짝 놀라 흡, 숨을 멈췄다.
하지만 무호흡 상태에서 바라봐도 그려놓은 듯 윤곽이 뚜렷한 눈썹, 사내답게 시원한 콧날, 도도하지만 아름다운 입술, 그리고 상대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깊고 오묘하게 빛나는 까맣고 시원한 눈매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백마 탄 왕자님이 세상에 정말 존재했었다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주원과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오셨어요?”
단지 인사를 건네는 것뿐이었는데도 은호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메말라 있었다.
“잘 지냈지?”
그는 모습뿐 아니라 목소리도 여전했다. 부드러웠지만 전혀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네.”
“형?”
이미 거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태웅도 눈이 휘둥그레져 주원을 돌아보았다.
“일찍 왔네요?”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주원은 태웅을 발견하고도 그리 놀라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무슨 이유로 태웅이 이곳에 있는 건지를 묻듯 은호를 바라보았다.
“큰어머니 기일도 얼마 안 남았고 해서 그냥 한번 들러 봤어요.”
“어머니 기일인 게 네가 이 집에 찾아오는 것과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요. 큰어머니 생각도 나고 해서 한번 들러봤는데 저 계집애가 저를 못 쫓아내서 안달이잖아요.”
“여기 이제 채은호 집이야.”
그녀의 이름을 발음하는 그의 목소리가 못된 꼬마를 호명하듯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었다. 여전히 그녀가 여자라서 불만인 것인가? 하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그에게 그녀와 결혼을 하면 유산을 물려주시겠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거셨으니.
“형!”
“내가 쓰던 방은 그대로 있지?”
주원의 질문에 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서 쉴게.”
“네.”
“형, 잠깐만요.”
“피곤하다, 태웅아. 다음에 얘기하자.”
주원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지난 30년간 자신의 방이었던, 하지만 이제는 은호의 것이 된 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유언장에 명시되어 있는 기한이 이제 한 달가량 남았지만 어머니의 것에 욕심은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이혼에 합의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게 좋겠다는 두 분의 결정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어머니의 삶 이하 모든 것에서 반걸음 물러서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왜 어머니가 재산을 그에게 남기는 데 은호와의 결혼을 전제로 건 것인지는 의아하기만 했다.
지난 10년간 몸이 약한 어머니의 곁을 은호가 잘 지켰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했다. 어머니의 편지에 동봉된 사진 속에는 웃고 있는 어머니의 곁에 항상 같은 표정의 은호가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그림자 같았던 그녀의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그였기에 오늘이 고작 세 번째 만남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와의 만남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가 그동안 어머니가 자신에게 보내셨던 편지를 정리하며 다시 읽어보다 은호가 정말 사랑스럽고 착한 아가씨로 잘 자라고 있다는 표현이 유난히 잦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어머니 나름의 의도된 강조의 표현이었을까? 그런 사소한 표현들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머니가 사랑스럽고 착한 은호와 함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은호는 이기적이었던 자신을 대신해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곁을 지켜주었다. 사실 그녀라는 존재가 이 집에 있었기에 그는 지금껏 마음 편히 욕심냈던 모든 공부를 끝마치고 꿈을 펼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그녀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다는 사실에 조금도 이의가 없었다. 아니, 어머니는 그녀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어야 했다. 자격이 없는 그에게 물려주기 위한 억지 조건을 내거시는 오류를 범하기 전에.
그의 방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니가 계실 때처럼 단정하게 묶여 있는 커튼이며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잘 손질된 정원의 잔디와 나무들. 모든 것들이 마치 다시 1층으로 내려가면 어딘가에 어머니가 계실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했다. 주원은 창으로 다가가 활짝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싱그러운 초록의 내음이 그의 해묵은 그리움을 단숨에 씻어주는 것 같았다.
11년 전 처음 은호를 만났던 그날도 지금처럼 파릇파릇 돋아난 잔디가 막 정원을 뒤덮었을 무렵이었다.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대신해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데리고 본인이 직접 지은 건물이나 지방의 유명한 건축물, 그리고 박람회장을 구경하러 다녔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세계 곳곳에 멋진 건축물을 짓는 건축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고, 어머니 역시 그의 꿈을 아낌없이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막상 두 분의 이혼이 결정되고, 자신마저 꿈을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그날은 무척 무거운 마음으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죄를 지은 것처럼 뜨끔거렸던 가슴의 통증이 방금 전의 일이었던 것처럼 그는 지금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지만 그가 난간에 서서 아래층을 바라봤을 때 어머니 곁에는 왜소한 체격에 짧은 커트머리, 그리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두툼했던 검은 스웨터 차림의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
이미 며칠 전 어머니로부터 그가 떠나고 나면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던 아이를 데리고 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처음 본 외모로는 한눈에 아이의 성별을 분간하는 것이 힘들었다. 다만 겁에 질린 듯 동그랗고 새까만 눈동자를 깜빡이지도 않고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티 하나 없이 하얗던 피부가 점점 붉게 상기되는 것이나 산딸기처럼 붉고 자그마한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 자신이 마주 서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모습보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따라 한 계단 한 계단 쿵쿵 굴러떨어지던 그 크고 새까만 눈동자가 당시 그 아이의 심정을 더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그는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가 계단을 모두 내려가 아이 앞에 섰을 때, 사실 그 꼬마는 굳이 성별을 확인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갸름한 얼굴에 작고 귀엽기만 했지만 그가 마주 섰을 때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때 그 꼬마가 소년이었다면 고개를 치켜들고 그의 눈을 마주봤었을까? 그 아이가 소년이었다면, 좀 더 씩씩하게 자신에게 인사를 건넸다면,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게 될 아이가 남자아이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듬직한 체격의 남자아이가 어머니 곁에서 의지가 되어 준다면 자신이 곁에 없어도 조금은 안심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정원을 돌보는 일에도 여자아이가 아닌 남자아이의 힘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건 그의 기우일 뿐이었다. 은호는 어머니에게 고작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나 힘들 보태줄 아이가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또 다른 의미의 가족이자 친구였다.
그 후 10년이 흐르고 두 번째 만남이었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봤던 은호의 모습은 10년 전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키가 많이 자란 것 같기는 했지만 여전한 길이의 짧은 커트 머리에 검은색의 셔츠와 검은색의 바지를 입은 호리호리한 모습이 마치 지나치게 예쁘게 생긴 사내아이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본 은호의 모습은 1년 전과 많이 달랐다. 그가 이제껏 보아왔던, 채은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커트 머리가 귀를 살짝 덮는 단발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몸에 달라붙는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상큼하고 여성스럽게 보였다. 이제야 그때의 열두 살 꼬마가 소녀였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스물세 살 아가씨의 모습보다 머릿속에 있는 열두 살 꼬마 은호에게 더 익숙했다.
똑! 똑! 그때 그의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 은혼데요.”
“응.”
문이 빼꼼 열리더니 은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주원은 몸을 돌려 창문을 등지고 은호를 바라보았다.
“아직 식사 전이시죠?”
“기내식을 먹어서 별로 생각이 없는데.”
“네.”
그의 기우였을까? 은호의 목소리에 살짝 실망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태웅이는?”
“돌아갔어요.”
“그냥?”
“네.”
은호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처음 그와 마주섰을 때 두 뺨이 발갛게 달아 있던 꼬마 은호의 모습이 다시 생각났다.
“알았어.”
“그럼 뜨거운 차라도 한잔 가져다 드릴까요?”
“그냥 쉴게.”
“네.”
은호의 얼굴이 뒤로 물러나더니 소리 없이 방문이 닫혔다.
그의 시선이 은호가 닫고 나간 문에서 어머니의 손때로, 더는 어머니의 손때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반들반들 윤이 나는 책꽂이로 옮겨갔다. 그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그날 이후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집에 오지 않으셨다. 그때부터 이 넓은 집은 오롯이 그와 어머니의 차지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손수 집의 안팎을 매일같이 쓸고 닦았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계셨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닿은 곳은 모두 어머니의 차지였다. 이 책꽂이 역시 어머니가 매일 정성껏 닦고 정리했던 것들 중 하나였다. 오래된 한옥의 기둥처럼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반들거리며 윤이 나는 정갈한 모습이 마치 어머니의 단아한 미소를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 이제야 돌아왔어요…….’
주원은 어머니의 손을 어루만지듯 책꽂이를 정성스레 어루만졌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의 일에 대한 열정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만을 해바라기 했던 어머니,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했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일과 야망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공부를 모두 마친 후 그 역시 귀국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어머니의 곁이 아닌 아버지와 같은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큰 꿈을 품고 떠났던 그곳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어머니에게 보여 드릴 작은 결과 하나를 거머쥐었는데 어머니는 더 이상 이곳에 계시지 않았다. 그의 가슴이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사실 어머니 기일에 맞춰 귀국을 한 것이긴 했지만 이번 귀국 중 그에게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국제적으로 아이디어 설계 공모를 냈던 예술센터 건립에 그가 출품한 작품이 1등으로 선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록이 된 대형 건축사사무소에서 일을 했지만 조만간 독립을 할 생각이었기에 이번 당선이 그에게는 특별한 계기이자 발판으로 여겨졌다. 아버지에게는 시상식 겸 해서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그의 독립은 이제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가 지금껏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그 어마어마한 명성을 그대로 물려받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아버지도 짐작은 하고 계실 것이다. 다만 아버지의 그늘이 아닌 이곳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그의 계획에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은호는 거실로 내려와 소파에 앉았다.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주원을 잠시라도 자신의 고향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으로 지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없었다. 심지어 그가 한국에 얼마 동안 머물 것이며, 있는 동안은 쭉 이 집에 머물지 다른 숙소를 정해 놓은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시 들어가서 물어볼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은호야 나야.]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그녀의 대학 친구에서 절친이 된 재승이었다.
[그 사기꾼은 잡았어?]
재승은 대뜸 얼마 전 그녀의 엄마를 사칭해 경비를 챙기고 연락을 끊었던 사건을 꺼내 물었다.
“응, 오늘 경찰서에서 연락 왔어.”
[생각보다 금방 잡혔네? 다행이다. 하여튼 요즘 경찰들 엄청 바쁘겠어. 그렇게 질 나쁜 사람들이 세상에 넘쳐나니, 쯧쯧.]
“그러게.”
[그러니까 내가 전단지에 너무 세세하게 적는 건 위험하다고 했잖아. 너를 보면 난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무서운데……. 그런데 너 조금 전에 HBN뉴스 봤어?]
“왜? 또 무슨 엄청난 사건이라도 일어났어?”
은호는 형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지. 차주원 씨가 뉴스에도 나왔더라고.]
언젠가 그녀의 집에 놀러와 서재에 걸린 주원의 사진을 보고 그의 빛나는 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재승은 그 뒤로도 간간이 주원의 소식을 묻곤 했었다. 그런데 단 한 번 본 사진으로 그의 모습을 이토록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은호는 새삼 재승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완전 유명 인사네.”
[그래, 나 너희 집에 놀러가서 사인이라도 받아 둬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우리 과 친구들이랑 그 뉴스를 같이 봤는데, 건축이랑 전혀 상관도 없는 내 친구들도 다 차주원 씨를 알고 있더라고. 난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았다니까.]
“정말?”
[당연하지. 그런데 그게 다야?]
“그럼 또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
재승은 지방에서 크게 화원을 하시는 아버지의 권유로 조경과에 입학을 해 한동안 은호와 함께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끼와 넘치는 상상력으로 다시 만화 예술로 학과를 옮겨 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전공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게 특별한 친구였다.
[너, 엄마 찾아야 하잖아?]
“응.”
[너도 전국 방송에 나가서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이 됨과 동시에 부모님이 직접 보실 확률도 높아지지 않겠어? 그러니까 차주원 씨한테 부탁해 봐. 오늘처럼 전국 방송으로 나가는 인터뷰할 때 같이할 수 없겠냐고?]
“어떻게 일 때문에 인터뷰를 하는데 같이할 수 없냐고 물어보냐? 더구나 친하거나 특별한 사이도 아닌데.”
[야, 이 바보야! 이미 아는 사이니 더 특별한 사이로야 차차 만들어 가면 되지.]
재승이 윽박지르듯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은호는 자신이 점점 재승의 꼬임에 빠져들고 있는 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묻고 있었다.
[너희 아줌마 유산은 너랑 결혼을 해야만 차주원 씨한테 가는 거라며?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그걸로 한번 말이라도 꺼내 보라고. 더구나 한국에 얼마나 머물지도 모르는데, 나 같으면 술 마시고라도 미친 척 한번 얘기해 보겠다.]
“하지만 어떻게?”
[네가 이 한 몸 희생해 유산을 받도록 결혼을 해줄 테니까 다음에 인터뷰할 때 약혼자나 뭐 좀 각별한 사이로 같이 인터뷰 정도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
“재승아, 그게…….”
[세상에 돈 싫다는 사람은 없더라.]
“아니야, 그럴 거였다면 아마 작년에 내가 넌지시 의사를 물어봤을 때 고민하는 기색이라도 보였을 거야. 그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 잘라 말하고 일어났었다니까.”
[정말?]
“그래. 그리고 그다음 날 바로 영국으로 떠나더라.”
[오, 역시! 그만한 인물이 네 손에 쉽게 들어가기엔 본인 스스로도 아쉬움이 많이 남았겠지.]
“피.”
[으이그, 맹추야! 그럼 너 같으면 게이 남자가 치마 입고 다니면서 자기한테 오빠라고 부른다고 아무리 유산이 절실해도 서류상으로라도 결혼을 하고 싶겠냐? 세상에 눈이 얼마나 많고, 또 차주원 씨는 예술과 실용성을 접목해 현실 세계에 실체를 토해내는 위대한 건축가신데. 기억이 안 나나 본데 작년에 넌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머리 스타일에 만날 우중충한 남방에다 세트처럼 여러 벌인지 한 벌인지 도무지 분간도 안 되는 청바지만 입고 다녔다고. 사실 나도 그땐 가끔 너랑 다니면 창피했었거든. 게다가 우리 동네 아줌마들이 그 아담하니 이쁘게 생긴 총각이 내 애인이냐고 물어보시면 정말 친구고 뭐고 인연을 딱 끊고 싶더라.]
“어, 그랬어? 정말 미안하다.”
은호는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볼썽사납게 보였다는 사실에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승의 말을 끊기 위해 서둘러 사과부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