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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하여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은 정말 엄마를 찾고 싶으면 마지막 방법이다 생각하고 돌아가기 전에 한번 물어나 보라고. 그리고 이거는 정말 빅 시크릿인데, 대한 신문사에 다니는 우리 사촌 언니가 매달 특집으로 다뤄지는 이달의 인물 란에 인터뷰할 사람이 차주원 씨로 최종 결정됐단다.]
“대한 신문 이달의 인물이면 매달 초쯤 신문 한 페이지 분량으로 사진이랑 기사가 나가는 그 특집 인터뷰 기사?”
[그래, 이 맹추야. 이달의 인물은 가족이나 친구 중 한 사람도 따로 박스 인터뷰 실리는 거 알고 있지?]
“그러니까 정말 주원 오빠로 결정이 됐다고?”
[그래, 인터뷰 요청도 벌써 수락한 걸로 알고 있어. 너야말로 정말 부모님을 꼭 찾고 싶은 건 맞는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녀가 기억하는 엄마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엄마가 헤어지기 직전 그녀에게 금방 다시 만날 거라고 말했다. 어릴 때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엄마가 미울 때도 있었지만 성인이 되고 난 뒤에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좋지 못한 사정으로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운함과 걱정이 순간순간 교차했다. 거기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는 만약 엄마에게도 무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겨 버린 것이라면, 그녀가 우물거리는 사이에 엄마와 재회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머릿속을 파고들어 그녀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내가 한 말 정말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봐. 그리고 너 아주머니가 그 집 너한테 남겨주신 것도 그렇고 너와 연관 지어서 유산 상속에 문제가 생긴 것도 계속 신경 쓰인다고 했었잖아. 이제 기한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래저래 마지막 방법이다 생각하고 꼭 얘기해라, 채은호.]
“그래, 생각해 볼게.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은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나직하게 대답했다.
[끊는다.]
은호는 멍한 기분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재승의 조언이 정말 말이 되는 얘기이긴 한 것일까? 1년 전 자신이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주원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당시에는 그가 너무 큰 충격에 경황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최근 그에 대한 인터뷰들을 접하다 보니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건축사 차주석은 건축계에서는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인 데다 영국에서 손꼽히는 종합 건축사 사무소 대표로 있었다. 그가 처음 영국으로 건너갔던 것은 아버지의 뜻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기자가 영국의 다른 기사를 빗대어 해 놓은 설명을 통해 그녀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서울시에서 국제적으로 공모한 공모전에서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1등으로 당선이 됐을 정도로 이제 그도 유능한 건축사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아주머니의 재산에 그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녀처럼 오갈 곳 없는 불쌍한 아이에게 집을 남겨 주는 것이 그의 양심에는 더 뿌듯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주원에게 다시 결혼 얘기를 꺼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은호는 짧게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은호는 달력을 집어 들었다. 봄이 시작되었나 싶었는데 이제 어버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시절에는 매년 아주머니에게 자신이 온실에서 직접 기른 카네이션으로 꽃바구니를 만들어 드렸지만 이젠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원도 얼마나 이 집에 머물게 될지 모르겠지만 돌아가고 나면 이 큰 집에는 다시 그녀 혼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큰고모를 찾아가 아빠의 연락처를 아는지 물었지만 고모는 지금 고모부가 실업자 신세라 힘들다며 자신의 신세 한탄만 늘어놓았다. 생활고에 자신의 동생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에는 관심을 가질 여력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지내고 있는 집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는지 이 집 식구들에게 부탁해 자신들에게 무이자로 작은 가게라도 내어줄 수 없는지를 넌지시 물어봐 달라고 했다. 만약 이 집이 그녀에게 남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언제든 찾아와 더 큰 부탁을 할지도 몰랐다.
결국 지금 더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은 그녀의 일생이 지금과 같은 외로움에 완전히 갇혀 버릴지도 모른다. 은호는 달력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재승의 말처럼 지금이 그녀에게는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똑! 똑!
주원의 방문에 씩씩하게 노크를 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요란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네.”
잠시 후 안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은호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짐은 다 푸셨어요?”
책을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던 듯 책꽂이 앞에 서 있던 주원이 마침 책 한 권을 빼내 들었다.
“아직.”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침대 옆에는 그의 커다란 여행용 가방이 단정하게 닫힌 채 세워져 있었다.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리거나, 사소한 심부름이라도 해드릴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동생처럼 편하게 생각하시고…….”
“없는데.”
그가 테이블로 걸어가 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단지 다리를 꼬고 앉을 뿐인데도 그의 모습은 마치 화보를 보고 있는 듯했다.
“저녁 식사는 집에서 하실 거죠?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약속 있어서 나갈 거야.”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그가 말했다.
“하긴 오랜만에 들어오신 거니까 바쁘시겠네요.”
“할 말이 뭐야?”
“네?”
“할 말 있어서 들어온 거 아니야?”
은호는 그가 앉은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지만 의자에 앉지는 않았다. 얼마나 재미있는 책을 보고 있는 것인지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는 이 남자에게 정말 다시 결혼 얘기를 꺼내야 하는 것일까?
“앉아.”
“네.”
“용건이 뭐야?”
은호는 그의 맞은편에 놓인 철제 의자에 앉아 무릎 위로 두 손을 포겠다.
“한국에는 언제까지 계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
“계시는 동안은 이 집에 계시는 거죠?”
그가 드디어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저 때문에 신경 쓰시거나 불편해하실 필요는 전혀 없다고요. 계시는 동안은 그냥 편하게 머무세요.”
그녀가 최대한 상냥하고 다소곳하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주원의 시선이 다시 책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계속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인지 기다란 손가락으로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은호는 그의 행동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괜찮은 척 씩 웃어 보였다.
“아직 대학생이지?”
“휴학 중이에요.”
“공부를 꽤 잘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대학에 입학할 때 입학금은 아주머니가 내 주셨지만 그 뒤로는 쭉 장학금을 타며 다니기는 했어요. 그런데…….”
은호는 천천히 입을 떼다 잠시 말을 멈췄다.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녀에게도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물론 슬픔을 양으로 따진다면야 그가 감당해야 했던 슬픔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겠지만 그녀에게도 아주머니와의 인연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고, 함께했던 시간들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그동안은 쭉 장학금을 타서 학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녔는데, 아주머니가 돌아가시고 이 집을 제게 남겨 주신 뒤로는 장학금을 타지 못했어요.”
그녀는 최고의 조경사로 명성을 날릴 꿈으로 조경과에 입학한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조경일이 즐거웠고, 아직도 알아가는 과정일 뿐이지만 그 일에서 보람을 느꼈다. 물론 힘든 점도 많고 현장 시공 쪽으로는 주로 남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분야이다 보니 취업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지만 정원을 돌보고 가꾸면서 자신의 실력이 아닌 식물의 놀라운 생명력과 그들이 그녀에게 돌려주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하루하루 놀라며 감탄하고 있었다. 지금은 경제적 여건과 부모님을 찾는 일 때문에 잠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조경사로서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집은 제가 혼자 관리하기에는 손길이 너무 많이 필요하고 또 관리비나 세금이 너무 많아서 제가 그걸 감당하기 위해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거든요. 그러자니 공부를 할 시간이 부족해서 장학금을 탈 수가 없었어요.”
고개를 든 은호의 시선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주원의 짙은 눈과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아름답기도 하고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듯 서늘한 구슬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아주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이 집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리하겠다고?”
그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네. 그래서 이 집을 누구에게 팔면 가장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하지만 원래는 오빠가 물려받아야 하는 집이었는데 제가 제 생각만 하고 누군가에게 파는 건 옳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오빠에게 먼저 부탁을 드려보고 거절하시면 부동산에 내놓으려고요.”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은호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꺼내 버린 이야기를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은호는 점점 빠르게 콩닥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숨을 멈췄다.
“나한테 부탁을 한다고?”
“네.”
“말해봐.”
“저랑, 결혼해 주세요.”
“뭐?”
그의 눈이 싸늘하게 가늘어졌다.
“나한테 집을 팔겠다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해달라고?”
“네.”
가스 불 앞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것처럼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지만 은호는 꿋꿋하게 대답했다.
“이 집을 파는 것과 내가 너와 결혼을 하는 게 무슨 상관인지 먼저 설명해 볼래?”
“전 공부를 계속해야 하고 다른 할 일도 너무 많은데 지금 이 집은 제게 집이 아니라 오히려 짐이에요. 아주머니가 이런 의도로 제게 이 집을 주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주머니는 아마 아주머니가 살아 계실 때처럼 제가 이 집에 애정을 가지고 지켜 줄 거라고 믿으셨기 때문에 제게 남겨주셨을 거예요. 전 어차피 오갈 곳도 없는 처지니…….”
그녀는 진심으로 아주머니와 함께 정원의 나무와 꽃을 돌보고 온실에 꽃을 심는 일이 즐겁고 행복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닌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이렇게 큰 집을 가지고 주인답게 살 능력이 없었다. 이 집에 살고 있는 동안은 고작 정원 관리사에 청소부였고, 납입 고지서에 헐떡이는 빚쟁이였다. 이 집에 계속 혼자 살다가는 아마 평생 지금처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주원과 이렇게 다시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도 전에 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잡지책에서 인터뷰하신 걸 봤는데 아트센터 공모전에 당선되셔서 공사가 시작되면 얼마간 더 한국에 머물며 일을 하셔야 한다고 들었어요.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만 저랑 결혼해서 손해를 보시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아주머니의 나머지 유산을 받으실 수도 있고, 전 이 집을 돌려 드릴게요. 그리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시게 되면, 그때 이혼을 하시겠다고 하시면 두말 않고 해드릴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할 정도로 덤덤했다. 물론 동정이나 완전한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진심을 다해 이야기를 한다면 그도 그녀의 고충을 조금은 헤아려 줄 줄 알았다.
그가 다시 책장을 한 장 더 넘겼다. 이번에는 그 행동이 무의식중에 나온 의미 없는 것이란 사실을 그의 굳은 표정이 잘 설명해 주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이 집에 전혀 애정이 없어 그녀가 이 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집은 그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결혼 선물로 지어준 집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큰 집에 그녀와 단둘이 살면서도 아주머니는 아픈 몸으로 매일 어루만지듯 닦지 않으셨던가. 그런 집이 그에게 전혀 의미 없는 곳일 리는 없었다.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날 위한 네 희생은 원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무조건 순수하고 희생적인 의도는 아니에요. 조금 전에 얘기했던 부탁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어요.”
“뭔데?”
“뉴스에도 나오시고 여기저기에서 인터뷰하신 걸 봤어요. 다음 인터뷰 때 저도 함께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인터뷰?”
“네.”
“왜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부모님을 찾고 싶어요. 아주머니가 살아 계실 때 여러 방법으로 함께 알아봐 주시기는 했지만, 여러 번 사기를 당하면서 제가 깨달은 결론은 두 분이 먼저 저를 알아보시고 찾으려 하기 전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거였어요. 오빠가 인터뷰하시는데 제가 결혼상대자라고 얼굴을 알리면 그 모습을 보시고 부모님께서 연락을 주시지 않으실까요? 제가 오빠처럼 좋은 분을 만나서 간절하게 부모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된다면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더라도 연락을 해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전혀 다른 의도 없이, 부모님을 찾게 도와 달라는 게 부탁의 전부라고?”
“네.”
은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결혼을 하자고 하다니…….”
어이가 없다는 듯 그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부분에 있어서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는 그리 오래 고민을 하지도 않고 말했다. 그리고 드디어 책을 덮었다.
“며칠 후에 신문사에서 인터뷰가 있어. 그때 데리고 가줄게.”
“정말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
“하지만 절 누구라고 소개하실 건데요?”
“어릴 때 입양된 동생이라고 하면 될 거야.”
“절 아직도 어린아이로 보시는 모양이네요. 하지만 이 집도 돌려 드리고 싶어요.”
다시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집은 다른 사람에게 팔라고 하실 건가요?”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더니 그의 얼굴이 불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은호는 훅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너 혹시 나 좋아하니?”
“네? 그게 무슨…….”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얼굴이 자꾸 빨개지는 건데?”
심장 소리가 그에게도 들릴 것만 같았다. 은호는 숨을 멈춘 채 조심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방이 좀 덥네요.”
그녀의 대답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너무 완벽하다. 게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하던 모두 근사하기까지 했다. 어떤 여자도 그와 단둘이 이 꽉 막힌 방 안에 마주 앉아 있다면, 그것도 그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온다면 멀쩡하게 얼굴을 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변변한 연애 경험도 없는데다 어릴 적부터 아주머니에게 그에 대해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들로 그를 심장 한가운데 살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어딘가에 기생하는 벌레 때문에 그곳이 좀 먹고 상품 가치를 잃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에 살고 있는 그는 그녀를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 정원을 함께 산책해 주었고, 아주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릴 때는 울지 않게 그녀를 감싸 주었다.
심지어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주기도 했다. 아주머니 없이, 아주머니의 손때로 가득한 이 집에서 그녀가 지난 1년을 혼자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녀 안에, 그리고 이 집 안 구석구석에 그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가 지금 그에게 결혼을 제안하는 진짜 이유도 그녀의 심장이 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은 제가 안면 홍조가 좀 있어요.”
“넌 지금까지 계속 한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고,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이 방 안의 온도는 줄곧 일정한 상태야. 그런데도 네 볼이 자꾸 빨개진다는 건 감정의 변화가 원인인 것 같은데.”
“그건 오빠가 자꾸 절 당황스럽게 하시니까, 지금도 갑자기 이렇게 가까이에서 쳐다보시니까 놀라서…….”
그의 눈이 위험스럽게 가늘어졌다.
“그렇단 말이지?”
“네.”
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집은 나한테 팔아. 하지만 넌 지낼 곳이 없을 테니, 이 집에서 지금처럼 정원과 온실을 관리하면서 지내는 걸로 하자. 일종의 숙식제공 아르바이트지.”
“네?”
은호는 멍하니 주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그의 사진을 볼 때면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가 외모가 좀 차갑고 말수가 적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간혹 오해를 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따듯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고. 그녀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는 아주머니의 말씀처럼 그녀의 처지를 냉정하게 관망만 할 사람도, 부모님의 뜻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잠깐 동안 자신에게 재승이 빙의 되었던 것인가? 주원은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그녀는 인생을 걸어야 하는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니…….
“이제 모두 해결됐지?”
“네.”
“안 나가고 뭐 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그의 몸이 길게 보였다.
“정말 그러네요.”
만족스럽게 웃어 보여야 하는데 갑자기 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정말 안면 홍조증이 있었던가?
“저녁엔 늦게 들어올지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문단속 잘하고 자.”
“네.”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원의 방을 나왔다.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생각과는 달리 기분이 묘하게 찜찜했다. 자신이 주원 앞에서 모자란 아이처럼 행동을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일까? 설마 그가 정말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아, 모르겠다.
주원은 고교 동창인 재훈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맞춰 나갈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을 지나쳐 주방으로 들어섰을 때 식탁에 엎드려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은호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뽀송뽀송한 하얀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처럼 작고 여려 보였다.
“지금 나가시려고요?”
인기척을 느꼈는지 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노트를 덮었다.
“뭐 해?”
“가계부 쓰고 있었어요.”
“가계부?”
“네.”
그는 컵을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한가득 따라 들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봄의 시작인데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화창한 것 같았다. 아니, 한국의 봄은 원래 이랬던가? 식탁 가까이로 걸어간 그의 눈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호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작은 화분이 보였다. 정원의 싱그러운 나무들과 예전처럼 손질이 잘된 잔디를 봤을 때도 묘한 기분이 들었는데, 식탁 위에 놓인 작은 화분 속에 앙증맞은 빨간 꽃봉오리를 보자 잠시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집에 계속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보였다. 어머니였다면 이 커다란 식탁에 어울릴 만한 좀 더 크고 화려한 꽃을 심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작은 화분만으로도 그의 가슴속에는 잔잔한 파동이 일고 있었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간 뒤에도 어머니가 생각 날 때면 집 근처의 공원을 산책하곤 했었다. 잔디 냄새, 나무 냄새, 흙냄새가 어머니의 향기처럼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곳에서 한 한국 여자를 만났다. 어머니처럼 여성스럽고 가녀린 외모에 꽃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꽃이 좋아 플로리스트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유학 중이라고 했다.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 혹은 한국에 대한 짙은 그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그녀가 진심으로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얻기 위해 꽃을 이용하려던 것뿐이었다. 그 뒤로 그는 오히려 꽃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은호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진심으로 꽃과 식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귀여운 꽃이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잎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조화처럼 색이 짙고 싱싱해 생화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제가 접목시킨 꽃이에요. 정말 사랑스럽죠?”
그녀의 얼굴 가득 자랑스러움과 만족의 미소가 번졌다.
“조경과라고 했지?”
“네.”
언젠가 어머니가 보내온 편지 속에 그녀의 학교 교정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은호의 이런 모습을 보며 어머니도 그녀가 선택한 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것이리라.
“열두 살이면 부모님뿐만 아니라 친척들도 대부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분들도 찾아보긴 한 거야?”
“전 부모님 손에서 버려진 게 아니에요. 고모 집에 잠시 맡겨졌던 거지. 그런데 큰고모가 형편이 너무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절 고아원에 맡기셨어요.”
그녀의 표정에 의미심장한 빛이 감돌았다.
“사실 처음에 부모님을 찾기 시작했을 때는, 제가 버려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냥 제 부모님이기 때문에, 절 낳아주신 부모님이기 때문에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가 먼저 찾으려 한다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우린 함께 있지 않아도 가족이고, 어쩌면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래, 시간……!
그도 그때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적은 줄 알았더라면 성공을 잠시 미뤄뒀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친부모와의 이별을 겪고 어머니의 임종을 곁에서 홀로 지켜본 그녀가 지금 무모할 정도의 절박한 선택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이 상황을 어쩌면 그는 무조건 응원해 주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은호의 말처럼 함께 있지 않아도 가족이지만 함께 있으면 더 행복한 것인 가족일 테니까.
이케다 다이사쿠가 말했다. 가장 큰 불행을 맛본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어쩌면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 이상의 더 큰 아픔도, 불행도,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더구나 이 아이에게는 더 이상 헤어질 가족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은호는 이제 행복해질 권리를 가진 것이다. 만약 그 권리를 찾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는 기꺼이 도울 의사가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 나머지 유산은 정말 그냥 복지 단체에 환원하실 거예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뜻이 그렇다면.”
“그 건물들은 모두 외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으신 건물들이라고 들었어요.”
주원은 은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작고 여려 보였지만 문득문득 심지가 깊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그렇게 의미 있는 유산을 통해서만 사회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요?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들 하던데……. 그리고 어쩌면 아주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지으신 그 건물을 오빠가 꼭 물려받기를 바라고 계실지도 몰라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제 생각이에요.”
“가끔 내가 아니라 네가 우리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으세요? 그리고 비웃으셔도 좋은데, 만약에 제가 오빠였다면 전 그 유산을 그냥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 같아요. 아주머니가 정말 오빠에게 주고 싶지 않으셨다면 아마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고 그냥 사회에 환원하시겠다고 하셨을 거예요.”
“그래서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라는 전제를 거셨다고?”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