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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녀의 눈은 분명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은호는 말끝을 흐렸다. 지난 10년간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어머니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머니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전제를 거셨는지 그녀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네가 나였다면, 넌 이 결혼을 선뜻 받아들이기라도 했을 거란 말이야?”
조금 전과 달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에 그는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너나 내게 지금 필요한 게 배우자나 결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가 턱을 치켜들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초롱초롱 빛나는 동그란 눈이 마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동물의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맑고 깨끗해 보여 그는 잠시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슬쩍 그녀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신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데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무슨 배짱으로 자꾸 결혼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 이미 여러 번 사기를 당했다 하면서도 또다시 세상에 얼마나 이상하고 위험한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를 잊고 있는 것인지. 그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이름, 나이, 직업 말고?”
“…….”
“이것 봐. 넌 단지 내가 어머니의 유산을 의미 없이 방치하는 것 같아 이러나 본데, 만약 내가 결혼 후 네게 육체관계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래?”
“그건…….”
은호의 숨결이 살짝 거칠어지는 것 같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잘 익은 자두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렇게 반응이 빨리 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녀가 식탁 위의 작은 꽃처럼 귀엽고 사랑스럽기는 했지만 눈에 띄는 미인이거나 또는 섹시한 여자들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세상 물정까지 너무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였다.
“남녀 사이의 결혼생활이란 게 낮만 존재하는 건 아니야. 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혹시 생각해 보지 않은 거야? 난 건장한 성인 남자야. 젊은 여자와 한 집에서 지내면서 그런 욕구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게다가 만약 내가 잠자리에서 좀 특별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혼 기간 동안 내 요구에 모두 맞춰 줄 수는 있는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내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함께 지내도 되는 건가?”
그의 질문에 그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부유하거나 유능하지 않을 수도 있어. 내가 유산을 받는 즉시 이혼을 요구하거나, 널 이 집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고. 그럼 어떻게 할래? 어디 갈 데는 있는 거야?”
은호는 그가 조금만 더 사납게 몰아붙인다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릴 것처럼 눈동자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자신의 감정 하나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결혼이라니.
“그리고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이 집 말이야. 어머니가 네게 남겨 주신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내 유산을 챙기기 전에 네 집을 먼저 챙겨야 하는 거 아니니?”
어머니는 자신처럼 이 집의 나무와 꽃들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제는 그도 그녀가 이 집에서 오래도록 살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아까 한 말 얼마든지 번복 가능하니까 다시 잘 생각해 봐.”
“…….”
“나갔다 올게.”
“다녀오세요.”
집을 나선 주원은 재훈과 만나기로 약속된 장소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가장 먼저 차가 필요하겠군.”
택시에 오르며 주원은 내일 당장 차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오랜만에 둘러보는 고향의 변화된 풍경에 조금 전 은호와 나누었던 이야기들까지 생각의 한 구석으로 접어 둔 채 날카로운 건축사의 눈으로 건물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가 호텔의 바 안으로 들어섰을 때 재훈은 이미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와 함께 고등학교 시절부터 건축에 관심을 가졌던 재훈도 지금은 어엿한 건축사로 서울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사사무실을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재훈은 가끔 영국에 들를 때면 일정이 아무리 바빠도 잊지 않고 주원에게 들렀었기에 한국에서 두 사람의 재회는 실로 오랜만이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축하한다.”
체격 좋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샤프한 검은 테 안경을 쓴 재훈이 자리에서 일어서 새삼스레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축하는, 너도 입상했잖아.”
“삼등이 어디 일등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게 가당키나 할까?”
“그래도 작업에 참여할 가능성은 있는 거잖아?”
“운이 아주 좋다면. 시공사 입찰도 있고 착공에 들어가려면 몇 달은 기다려야 할 테니 너무 초초하게 기다리진 않으려고. 넌 착공 전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거지?”
“짐 챙기러 잠깐 다녀오기는 해야겠지만, 그냥 여기에 있기로 결정했어.”
“아버지와는 상의한 거야?”
“아버지께 회사 그만두겠다는 얘기는 했어.”
“허락하셔?”
“해볼 테면 한번 해봐라, 어디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 이런 눈빛이시지 뭐.”
재훈은 주원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너희 사무실 근처에 건축사사무실 많지?”
“몇 군데 있지. 왜? 너 우리 사무실 근처에 사무실 내려고?”
“알아보려고.”
“그냥 나랑 동업하는 건 어때?”
“아니. 처음부터 내 손으로 차근차근 시작하고 싶어.”
“이거 긴장해야겠는데.”
“그래, 긴장해야 할 거다.”
“그럼 아트센터 일 전에 다른 일로 실력 발휘를 하겠네?”
“그런가.”
재훈은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주원을 바라보았다.
주원은 학창시절부터 특별한 녀석이었다. 눈에 띄는 외모에 전교 1, 2등을 놓친 적이 없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지만 공부만 하는 샌님이 아니라 운동도 즐길 줄 아는 녀석이어서 주변에는 늘 친구들이 넘쳐 났다. 그때는 그도 그 수많은 친구들 중 하나였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건축박람회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주원은 자신의 아버지가 국제적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차주석이라는 사실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털어놓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원이 어머니를 혼자 두고 갑자기 영국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그는 도무지 주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외아들인 주원이 자신의 어머니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곁에서 줄곧 지켜봐 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녀석은 방학 때는 물론이고 졸업 후에도 한국에 들르는 일이 없었다. 녀석의 집안 형편이 궁핍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의 집에 한번이라도 들러 본 친구였다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단지 녀석은 가끔 전화를 걸어와 통화가 끝날 무렵에 시간이 나면 자신의 어머니에게 한 번씩 들러 달라는 부탁을 마지막 인사처럼 남길 뿐이었다. 몸이 약한 어머니를 혼자 두고 타국에 있다는 사실이 주원에게는 응어리처럼 가슴속에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주원은 그렇게 강한 듯 여린, 냉정한 듯 속 깊은 녀석이었다.
몇 달만의 만남이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던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슬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는 찰나 바의 문이 열렸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재훈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었다.
“저게 누구야?”
주원도 재훈이 의미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얇은 어깨끈의 빨간색 원피스 차림의 여인이 바 안을 노골적으로 둘러보며 걸어 들어오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주원 씨?”
주원이 예전에 영국에서 잠시 만났던 세라였다. 주원의 눈이 싸늘하게 가늘어졌다.
“재훈 씨와 함께였군요?”
“여기는 어쩐 일이야?”
주원이 자신의 앞으로 걸어온 세라에게 물었다.
“그렇게 차갑게 대할 건 없잖아요? 재훈 씨, 오랜만이네요.”
“네, 오랜만이에요.”
재훈도 마지못해 세라에게 인사를 건네기는 했지만 주원과 세라가 이미 헤어진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세라에 대한 기억을 그다지 좋았다고 표현할 수 없었기에 얼굴에 좀처럼 반가운 표정을 지을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불쑥 주원의 어머니 집에서 본 적 있는 은호라는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은 체구에 꽤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가끔 주원의 집에 들러 마주칠 때마다 성별이 모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안 사실인데 그 아이가 주원의 어머니 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병수발을 도맡아 했단다. 제 혈육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회피하거나 전문 간병인을 붙이는 모습이 흔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을 돌봐준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듯 묵묵히 그 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다시 은호를 볼 일이 없었지만 아마 다시 만나게 된다면 예전과는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사실 그동안 주원이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세라와 만나는 동안 사사건건 부딪혀서 그런지 헤어진 뒤로는 어떤 여자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고집불통 주원이 녀석에게는 은호 같은 조용하고 책임감이 강한 여자가 어울릴 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조건과 외모가 뛰어나다지만 저렇게 일에만 매달리는 무뚝뚝한 사내를 어떤 여자가 끝까지 참아주고 좋아할 수 있을까? 세라처럼 그의 조건에 목을 매는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은호처럼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지낼 수 있는 진중하고 속 깊은 여자라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재훈은 지금 자신의 생각을 주원이 알게 된다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까 싶어 피식 웃으며 머릿속의 생각을 지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주원의 옆으로 다가와 의자를 빼내 앉는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의 그림자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긴 누굴 만나러 온 거야?”
“이 호텔에 묵고 있어요. 그냥 잠도 안 오고 해서 한잔하려고 내려왔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이나 집에 있지 않고 호텔에 머문다고?”
“부모님들은 다 장례식장에 계시고, 전 아파트같이 갑갑한 곳은 체질에 맞질 않아서요.”
“호텔도 마찬가진 거 같은데.”
주원이 처음 공원에서 세라를 봤을 때 그녀는 한 떨기 백합 같은 이미지였다. 긴 생머리를 가지런히 풀어 내리고 무릎 길이의 단정한 살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순백의 카라를 한 다발 안고 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그녀를 지나치려는 그에게 죄송하다며 길을 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이미 그의 아버지와 그에 대한 정보를 대학에서 입수한 후 고의적으로 그곳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그 후로도 그의 관심을 사기 위해 수시로 그곳에 나타났고, 순진하게도 그런 우연을 필연이라 여겼던 주원은 그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을 했다.
하지만 첫 만남의 모든 것이 그의 관심을 사기 위해 세라가 고의적으로 연출한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그녀의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다행인지 그쯤 그는 일로 너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이미 그녀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소홀해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두 사람의 관계가 더는 이어질 수 없음을 의미하듯 그가 야근을 마치고 새벽에 귀가를 하던 어느 날 호텔에서 다른 남자와 나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그날 오후 그가 세라에게 이별을 고했고 그들은 그렇게 원래 인연이 아니었던 듯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이별 후에도 가슴이 아프거나 그녀가 그립지 않았던 것으로 보건데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세라 역시 그와 이별 후 곧바로 자신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으며 너무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하지만 그 남자의 집안이 그녀가 기대했던 것만큼 부유하지 않았던 것인지 그리 오래지 않아 이별을 하고 주원의 아버지를 찾아와 다시 시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털어놓고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보다 주원 씨 입상 축하해요.”
“고마워.”
누구도 귀담아듣고 있지 않는 형식적인 인사와 대답이었다.
“아버님께서 무척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아버지 앞에서 그녀의 가식은 여전한 것인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는 그녀와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마음을 그에게 내비치셨다.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곁에 세라가 함께 있다면 그가 흔들림 없이 영국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신 것 같았다. 자신이 아닌 그녀의 가식에 더 마음을 쓰고 있는 아버지의 태도가 떠올라 주원은 기분이 씁쓸해지는 것 같았다.
“한국에는 언제까지 있는 거예요?”
“왜?”
“돌아갈 때 같이 가면 좋잖아요.”
“돌아갈 계획 없어.”
“네? 회사는요?”
“아버지 회사에서 독립할 거야.”
“공모전 상금이 어마어마하다고는 들었어요. 하지만 큰 회사를 세울 만큼은 아닐 것 같은데요. 게다가 어차피 아버님 걸 모두 물려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커다란 회사를 두고 구멍가게 같은 사무실을 따로 열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나중엔 신경만 쓰일 거예요.”
“날 걱정해 주는 거라면 고맙군.”
“주원 씨도 그렇고 아버님도 표현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각별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버님은 나이가 드실수록 주원 씨가 곁에 있어야 더 마음이 든든하시고 의지가 될 거예요. 그런 걸 다 아는데 어떻게 제가 모른 척할 수가 있겠어요?”
“주원이 한국에 계속 머물 거라는데요.”
두 사람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재훈이 거들고 나섰다.
“정말이에요?”
세라가 화들짝 놀라며 주원을 향해 아예 몸을 돌려 앉았다.
“이곳에 정착할 거야.”
“여기, 한국에 정착하겠다고요?”
“그래.”
“왜 하필 한국이에요? 전 싫어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
“아버님은요? 상의도 하지 않고 한국에서 시작하겠다니, 아버님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버지 허락에 따라 움직일 나이는 진작 지난 것 같은데.”
“어머님 몸이 많이 약하신 걸 알면서도 주원 씨를 영국으로 부르신 건 다 의도하시는 바가 있으셨기 때문에 그러셨던 거예요. 아시잖아요? 아버님 사업을 물려줄 사람은 주원 씨밖에 없고, 곁에서 직접 가르치고 끌어주고 싶어서 그러셨던 거란 거. 저도 이렇게 놀라고 있는데, 아버님이 허락하실 리가 없어요. 아니, 그런 행동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실 거예요.”
세라가 웨이터에게 얼음물을 부탁했다.
이미 과거의 형태가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바스러져 버렸건만 세라는 자신들의 사이를 다시 붙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인가? 주원은 잔을 들어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만약 한국 여자와 결혼이라도 해서 이곳에 정착을 하겠다고 한다면 또 얘기가 조금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한동안 손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던 세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귀국하기 전날 아버님을 만나 뵀는데 아버님은 주원 씨가 빨리 결혼해 정착하길 바라고 계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제게 하신 건 우리가 다시 시작하길 바라신다는 뜻 아니었겠어요? 만약 저와 결혼해서 한국에 정착을 하겠다고 한다면, 좀 더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위해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셔서 우리를 이해해 주시지도 모르겠네요.”
주원은 아버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그의 결혼인지, 세라인지, 세라의 배경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세라를 이토록 신임하시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세라의 어머니가 어느 날 불쑥 영국에 다녀간 뒤부터였다. 하필 그날 주원은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일을 끝내고 돌아갔을 때 세림 조경 상무이자 사장의 아내라는 세라 어머니의 명함이 아버지를 통해 그의 손에 전해졌다.
아버지는 늘 영국이 좋다고 말씀을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가 될지 모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길 바라는 그날이 갑자기 찾아오게 되더라도 세림 조경처럼 건축과 밀접하면서도 탄탄한 회사가 그들을 뒷받침해 준다면 어떤 어려움도 문제없을 것이라 여기고 계신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세림 조경의 뒷배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건축의 신으로 불리는 분이 왜 뒷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아버지의 우려를 보란 듯이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이것이 그가 서울 아트센터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 얘기는 그만하지.”
주원은 세라의 말을 잘랐다.
“그런데 주원아, 은호 씨 아직 그 집에 있지?”
재훈도 주원의 어머니가 자신의 집을 은호에게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장례식 날 가장 먼저 도착해 은호를 도왔었기에 그 후 영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 은호에 대해 안부를 묻기도 했었다.
“응.”
“그럼 너 빨리 결혼해야 하는 거 아냐?”
재훈이 흘깃 세라의 표정을 살핀 뒤 물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상태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농담일지도 모르겠지만 속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세라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정착할 거라며? 그럼 그냥 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아. 은호 씨랑 결혼만 하면 네 독립에도 꽤 도움이 되잖아?”
“훗, 도움?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주원도 재훈의 말장난에 슬쩍 맞장구를 쳤다.
“어우, 강남 땅값이 얼만데. 도움 정도가 아니지. 이건 뭐, 거의 그녀가 네 회사를 세워 준다고 봐야지 않나?”
재훈이 능청스럽게 말을 보탰다.
“그게 무슨 얘기예요, 재훈 씨?”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던 세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실은 주원이 아버지가 결혼하실 때 어머니께 직접 지어 선물하셨던 집이, 지금은 어떤 착하고 예쁜 아가씨의 집이 되었는데요. 이 녀석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그 아가씨랑 주원이를 못 엮어 줘서 그렇게 마음 아파하셨답니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주원이 녀석이 마음을 바꿔 그녀랑 결혼만 하면 이 녀석한테 엄청난 재산이 떨어지거든요.”
“그 여자가 그렇게 부자예요?”
“모르긴 몰라도 그녀가 주원이에게 줄 수 있는 건물이 강남에만 몇 채는 될걸요. 건물이 몇 채인지 건물 안의 상가 개수를 세 보면 아마도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 순간 거칠게 숨을 쉬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세라의 커다란 가슴이 주원의 눈에 들어왔다.
“뭘 더 고민해. 은호 씨야 착하지, 귀엽지, 똑똑하지, 어리지. 거기다 부자잖아. 주원아, 그만한 여자 서울에서 다시 찾기 어렵다. 다른 놈이 낚아채 가기 전에 빨리 붙잡아. 그리고 방금 세라 씨가 그랬잖아. 네가 한국 여자랑 결혼만 한다면 아버지도 네 독립을 격려해 주실 것 같다고. 그런데 뭘 더 망설이는 거야?”
재훈의 오버스런 부추김을 주원은 피식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우린 그만 일어나자.”
재훈이 양주를 연거푸 따라 마시고 있는 세라를 슬쩍 바라본 뒤 주원에게 말했다.
“그래.”
“주원 씨.”
자리에서 일어서는 주원을 세라가 불렀다.
“그 은호라는 여자, 저한테도 소개해 줄 수 있죠?”
지금 세라의 표정으로 예상컨대 그녀는 채은호라는 여자에 대해 알든, 그렇지 않든 그의 아버지에게 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그는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단, 그녀로 인해서 은호가 상처를 받는 일은 생기지 않도록 약간의 신경은 써야겠지만…….
“왜 그래야 하지?”
“아버님께서도 당신이 얼마나 괜찮은 여자와 만남을 고려하고 있는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한국에서 독립을 하겠다는 계획도 그렇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여자와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아버님이 얼마나 충격을, 아니, 배신감을 느끼시겠어요? 어쩌면 지금 주원 씨 자리를 그 태원이라는 사촌에게 넘겨주실지도 모르겠네요.”
“그게 무슨 말이야?”
“태원 씨가 며칠 전 아버님 회사에서 근무하겠다고 찾아왔었다면서요? 아버님은 저한테 비밀이 없으시거든요.”
세라가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아버지 걱정보다 당신 부모님 걱정을 먼저 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주원의 충고에 세라의 얼굴에서 다시 미소가 사라졌다.
“그만 일어나자.”
그가 재훈에게 말했다.
“그래.”
주원은 세라를 남겨 두고 재훈과 함께 바를 나서 호텔의 현관 앞으로 나갔다. 재훈이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둔 상태였기에 두 사람은 시원한 저녁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잠시 서 있었다.
“너 아버지 회사도 그렇고, 정말 어머니 재산까지 모두 포기할 거야?”
“아버지 회사는 내가 아버지 회사에 붙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닐 거야. 너도 우리 아버지 알잖아. 결국엔 당신 아들이라도 실력으로 평가하실 거야.”
“너희 아버지야 워낙 칼 같은 분이시니까. 하지만 어머니 재산은? 외할아버지가 혼자 외동딸 키우시면서 힘들게 지키셔서 어머니에게 남겨주신 소중한 건물들이라고 네가 직접 얘기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너라면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 같아?”
재훈이 담배를 건넸지만 주원은 사양했다. 가끔 일이 풀리지 않을 때 피우긴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정취를 담배 냄새와 함께 즐기고 싶진 않았다.
“그냥 서류상으로 잠깐만 결혼했다가 다시 이혼해. 물론 은호 씨가 이해를 해줘야겠지만.”
“은호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 아이는 지금 그대로가 더 행복할 거야.”
“그럼 세라 씨는? 너에 대한 미련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것 같던데.”
“…….”
주원은 대답 대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 담긴 주원의 마음을 알기에 재훈이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네가 은호 씨랑 결혼하지 않으면 너희 어머니 복지 단체에 전부 기부하시겠다고 하셨지? 그래서 그런지 태웅인가? 네 사촌 동생이 얼마 전에 복지 재단을 하나 만들었다고 나한테 명함을 한 장 놓고 가더라.”
“복지 재단?”
“응. 재단 선정은 박 변호사님에게 일임하셨다고 했으니 벌써 태웅이가 로비 들어갔을 거다.”
“…….”
“너 그거 차태웅 그 버릇없는 놈만 좋은 일 시키는 건 줄 알아라. 어머님 생전에도 유언장을 바꿔치기 하려는 시도까지 했던 놈인데, 이제는 아주 대 놓고 손을 벌리고 있다.”
“무슨 소리야?”
“유언장 얘기는 너도 알잖아, 명함은 내가 내일 보여줄게.”
어머니의 병이 자신보다 작은아버지 가족에게 먼저 알려진 뒤 태웅은 문병을 온 것처럼 어머니께 찾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정원에서 잠시 산책을 하시고 있는 사이 도둑고양이처럼 어머니 방을 뒤져 자신이 미리 준비해 간 출력한 유언장에 어머니의 도장을 찍은 뒤 도장과 함께 보관하고 있었던 어머니의 진짜 유언장과 바꿔치기를 했다. 다행히 얼마 후 유언장을 확인하려던 어머니에게 발견이 되긴 했지만, 어머니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자신을 기만하려 한 태웅에게 지울 수 없는 마음을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때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였다면 감히 그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박 변호사님 그 정도로 속물 아니야.”
“나도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 박 변호사 얼마 전에 뇌물 국회의원 변호하는 대가로 외제차 받았다가 뉴스에도 나오고 그랬어. 그 건물 박 변호사 소임으로 넘어간다면 분명 헐값에라도 서둘러 팔아버릴 거야. 그럼 다른 용도로 개조되거나, 워낙 노른자위 땅이니 허물어질 수도 있다고. 너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이미 많이 노후 된 건물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면 허물어질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 건물들은 할아버지의 인생이었고 자랑이었는데…….
“태웅이 녀석까지 합세 들어가면 그 건물 허물어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늘 몸이 약해 집과 병원에서 멀리 벗어나 본 적이 없던 어머니와 타국에 나가 있던 아버지를 대신해 그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실질적으로 꿈을 심어준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