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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리고 어머니에게 남겨진 건물들은 지어진 지 이미 2, 30년 이상 된 낡은 건물들이었지만 외할아버지에게는 자신의 분신과 다름없던 건물들이었다. 당신이 잘 거두지 못해 외동딸인 어머니가 몸이 약하다고 생각을 하셔 항상 어머니에게 미안해하셨고, 아버지를 소개했던 자신의 행동을 적당히 취하신 날에는 농담처럼 후회하셨다. 그래서 평생 피땀으로 일군 건물들을 서울 시내에만도 여러 채 소유하셨지만 항상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다 떠나셨다. 그건 모두 자신이 떠난 뒤 어머니에게 어려움이 닥칠까 염려하셨던 뜨거운 부정이었으리라. 그 건물들이 누군가의 눈먼 욕심에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니…….
“너 정말 한국에 정착할 거라면 유산 문제 먼저 해결해라.”
재훈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 * *

오후에 경찰서에 갔다 온 은호는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지만 식당에서 주원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정말 주원이 이상한 남자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고, 재승의 꾐에 넘어가 자신이 주원에게 이상한 아이로 찍혀 버린 것 같기도 해 내일은 주원의 얼굴을 어떻게 대해나 걱정스럽기만 했다.
어차피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기에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보라색의 롱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아주머니가 그녀의 생일날 선물했던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머니도 똑같은 디자인과 색깔의 카디건이 가지고 있었다.
카디건을 걸치고 정원으로 걸어 나가자 눈이 부실만큼 환한 보름달이 정원을 예쁘게 비추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유난히 아주머니 생각이 더 떠올랐다. 그녀는 은은하게 퍼지고 있는 호랑가시나무의 꽃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러 아주머니가 유난히 정성으로 돌봤던 금송 곁으로 다가갔다.
“금송, 넌 그냥 나무가 아닌 것 같아. 가만히 서 있어도 이렇게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는 게 너무 잘생겼단 말이야. 이 집은 터가 좋은 건가?”
은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나무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었다. 두껍고 투박한 나무의 껍질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양털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나중에 자식을 낳아 기른다면 지금 같은 심정일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있을 무렵 누군가 등 뒤에서 어깨를 붙잡는가 싶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누, 누구세요?”
“…….”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가 주원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술에 많이 취한 듯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진한 양주의 냄새가 그녀의 폐부 깊숙이까지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저, 은호예요.”
“…….”
“이 카디건 때문에 아주머니로 착각하셨나 봐요.”
중심을 잡지 못한 그의 몸이 그녀 쪽으로 슬며시 기울어졌지만 그녀를 끌어안은 팔은 점점 더 그녀의 몸의 죄어오고 있었다.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잠깐…….”
“네?”
“잠깐만 이대로 있자.”
은호는 잠시 망설이다 자신을 끌어안은 그의 손 위로 손을 포겠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부모님에 대한 자신의 지친 그리움을 감싸 안듯…….
“난 너한테 어떤 감정도 없어.”
오랜 침묵에 그가 자신에게 기댄 채 잠이 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려는 찰나 주원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얼굴을 봤다고……. 감정이 생기는 게 더 우스운 일이겠지.”
그가 나직하게 내쉬는 한숨이 그녀의 목덜미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알아요.”
“하지만 네가 필요해졌어.”
“…….”
“아내로…….”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휘감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술주정일지도 모르는 이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갑자기 왜……?”
얼마 후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그땐 이미 그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간질이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은호는 어머니에게 잠시 기대고 싶은 그의 지친 마음을 향해 손을 내밀어 주고 싶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머니의 유산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증명이 된 셈이니.
자신의 어깨 위에 걸쳐진 그의 몸 때문에 몸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받쳐 든 채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등을 향해 팔을 둘렀다. 너무 넓고 듬직한 등이었지만 그녀는 어린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여 주기 시작했다.
“너 정말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는 거야?”
잠든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드는 바람에 은호는 그의 등을 감싸 안은 상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1년 후, 10년 후에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1년 전과 똑같은 질문에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지쳐 보였다. 무엇을 위해, 그리고 무엇에 의해 그의 마음은 이토록 혹사당하고 있는 것일까?
“잠든 거 아니었어요?”
“잠이 들고 싶어도, 내가 기대기엔 네가 너무 작은 것 같지 않니?”
“제가 작은 게 아니라 오빠가 큰 거 아니에요? 전 지금까지 작아서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다고요. 그리고 아주머니도 제가…….”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정하지도,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뭔가 알듯 모를 듯 묘한 눈빛으로.
“혹시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그 순간 그의 오른손이 그녀의 뒤통수에 닿는가 싶더니 자신 쪽으로 머리를 끌어당기며 입술을 덮쳐 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심장의 쿵쾅거림이 두 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이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던 그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 안으로 파고든 그의 혀와 함께 뜨거운 타액이 그녀의 마른 입 안을 적셔 오자 씁쓸한 양주의 맛이 혀를 마비시킬 것 같았다. 은호는 입술을 떼어내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혀가 천천히 입 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은호는 요란하게 들썩이는 자신의 심장 때문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반응을 깨달았는지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나랑 결혼할래?”
은호는 숨을 몰아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꿈이 아니라면 그와 자신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입장이 바뀐 것 같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성까지 마비된 상태는 아니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신 거예요?”
“네 말대로 어머니 유산이 아닌 능력으로 기부를 바꿔 보려고.”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는 것과는 달리 그의 표정과 눈빛은 평소와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갑자기 유산이 필요해지신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 은호는 물었다. 그의 아버지 재산이 아직은 그의 것이 아니라지만 그 정도 명성과 부를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가 외아들인 그를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얼마나 능력 있는 건축사인지 그녀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필요하다기보다는 지키고 싶어졌어.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특별한 건물이었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 손에 허물어지게 할 수는 없으니까.”
주원이 금송 곁으로 다가가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빛과 금송의 그늘에 의해 적당히 음영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이 마치 이세상의 생명체가 아닌 것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나무 예전에는 아주 작았었는데…….”
“아주머니가 무척 예뻐하셨던 나무예요. 그날,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도 직접 물을 주셨어요.”
“어머니와 내가 이 정원에 함께 심은 마지막 나무야.”
그의 목소리에 녹아 있는 짙은 그리움에 은호는 이유 없이 목이 메여왔다. 지금도 그날 아침 아주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한 것 같았다. 기침이 너무 심해 그녀가 주겠다고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끝내 자신이 주겠다고 고집을 피우셨다. 그렇게 금송에 마지막 물을 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운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다. 아주머니는 그날 아침 이 금송에 대고 주원에게 할 작별 인사를 대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가 지금 이렇게 돌아와 아주머니의 품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남긴 작별 인사가 지금 그에게도 느껴지고 있을까…….
“그랬군요.”
은호는 코끝이 찡해와 고개를 들어 금송 잎 사이에 걸린 뽀얀 달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얼마나 취해 있는 상태인지 알 수 없었고, 결혼하자고 한 말 또한 농담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그의 청혼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도 앉지 그래?”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얘기는 내일 하고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은호는 울음을 삼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마신 것 같긴 한데, 취하진 않았어.”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앉아 바람을 쐬니까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어머니도 여기 앉아서 이렇게 쉬시는 걸 좋아하셨니?”
“아니요.”
은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머니는 금송을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셨다. 자신의 부주의로 나무가 상할까, 햇볕을 가릴까 그렇게 애틋한 눈길로 금송을 바라보셨던 아주머니의 마음을 은호는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그 금송에 기대앉았던 적 없으세요. 그냥 바라만 보셨어요. 매일.”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은호는 카디건 자락을 매만지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아무런 감정도 없다면서 왜 그러신 거예요?”
“조금 전에……. 키스?”
키스라는 단어를 내뱉은 사람은 주원이었지만 은호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리깔았다.
“너 생각만큼 순진하지는 않구나.”
“네?”
“남자한테 왜 키스했냐고 묻는 여자 흔치 않거든.”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화를 내야 하는데 그의 감정만큼이나 지금 그녀의 감정도 복잡했다.
“차라리 다행이다. 나 순진한 아가씨 인생 망치는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거든. 우리 아버지처럼은…….”
그의 생각을 틀렸다. 그의 아버지는 적어도 결혼할 당시까지는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멋진 집을 결혼 선물로 직접 지어 주시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도 그랬듯 감정은 변할 수 있는 거니까.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장담할 수 는 없는 거니까…….
“사실 지금 오빠가 한 말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술 취한 사람 상대하는 거 좋아하지 않으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갈게요. 정말 마음이 바뀌신 거라면 내일 맑은 정신으로 다시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은호는 단호하게 돌아섰다. 그가 힘들 거란 건 알지만 그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원래 이별은 아픈 거니까, 그에게도 혼자 감당해야 할 적당한 아픔은 필요할 것이다.
“잠깐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결혼하자는 말 진심이야.”
“…….”
“널 어머니로 착각해서 안았던 것도 아니고. 취하지 않았다고 했잖아.”
“그럼 왜 그러신 거예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어. 아니, 아버지, 어머니, 나와 너 모두를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건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어. 내가 어머니 유산 포기했던 이유는 처음부터 내게 주지 않으셔도 어머니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게 너라면 더 깨끗하게 포기가 됐겠지. 꿈에라도 어머니가 너와 내가 결혼하길 바란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어. 나랑 엮이면 네가 많이 힘들어질 거야.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네게, 아니, 네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나 때문에 너한테 시련을 감당하게 하는 건 너무 비인간적인 일일 테니까.”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으셨어요? 제가 정말 오빠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는지?”
“아니, 나 자신을 확인해 보고 싶었어. 네 남자로 있는 동안은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을지.”
은호는 지금 상황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계속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저 달빛이, 아니, 이 집에 남아 있는 아주머니의 향기가 그들에게 마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은 아니더라도 남편이라면 최소한 자신의 아내를 지켜줄 마음은 가져야 할 것 같아서.”
“…….”
그녀가 원하는 남편의 조건에 거창한 건 없었다. 그녀를 외롭게 혼자 두지 않는 남자, 그녀가 아프거나 힘들어할 때 함께 마음 아파해 주는 남자, 그녀를 아내로서 자랑스럽게 여겨주는 남자. 그녀가 원하는 남편의 조건은 이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외롭게 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픔에 관심은 보여도 함께 아파해 주지 않을지 모른다. 그녀를 아내로서 자랑스러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원하는 남편의 조건에 하나도 맞지 않는 남자, 그녀가 원하는 남편의 조건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남자, 하지만 그녀가 거절할 수 없는 남자. 은호는 눈을 감았다.
“선택은 이제 너한테 달렸어. 네가 거절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게.”
어릴 적부터 청혼을 받는 순간만큼은 너무나 근사한 거라고, 눈물이 날만큼 황홀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주원의 청혼은 그녀를 너무 당황스럽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내일 얘기할게요.”
“그런데…….”
그가 막 발을 떼려는 그녀의 발목을 다시 잡았다.
“이거 한 가지는 분명하게 듣고 가. 나랑 결혼하면 많이 힘들 거야. 네가 그렇게 껄끄러워하는 태원이 형제와도 사촌이 되는 거고, 난 보통의 남편들이 아내에게 어떻게 하는지 보고 자란 게 별로 없어. 그래서 좋은 남편이 되겠다는 약속도 할 수 없어. 만약 네가 결혼에 대해 작은 환상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거절하는 게 좋을 거야.”
은호는 주원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 의도를 꿰뚫어 보듯 그의 눈을 응시했다. 부탁인지, 협박인지, 아니면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낸 그녀의 입에서 분명한 거절 의사가 나오길 바라는 것인지. 하지만 그의 깊은 눈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얼굴 위로 온화하게 웃고 있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늦었다, 그만 들어가서 자.”
은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돌아섰다. 달빛을 받으며 걸어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제발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길 바라며…….

“일어나셨어요?”
주방에 들어서는 주원에게 은호가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식사하셔야죠?”
가스레인지 앞에서 부지런히 팔을 움직이던 그녀가 정수기 앞에서 컵에 물을 따르는 그의 옆을 재빨리 지나쳐 식탁으로 쪼르르 걸어갔다.
“황태 콩나물 해장국 괜찮으세요.”
그녀의 말 대로 황태와 콩나물이 한데 어우러진 시원한 냄새가 코끝에 진동해왔다.
“식기 전에 얼른 앉으세요.”
은호가 친절하게 식탁 의자까지 빼놓으며 그에게 앉기를 권했다. 영국에 사는 동안 누군가 챙겨주는 사람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술을 마신 다음날은 으레 빈속으로 출근을 했었다. 이제 그런 습관에 길들여지다 못해 익숙해져 껄끄러운 입 안과 쓰린 속을 음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말갛게 웃는 얼굴로 그에게 앉기는 권하는 은호의 성의를 그냥 무시할 수 없어 그는 식탁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예전에 아주머니가 끓어주신 국을 한번 먹어본 적이 있기는 한데 제가 직접 끓여본 건 처음이라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그다지 식욕이 돌지 않았지만 기대에 차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은호의 시선을 느끼며 그는 숟가락을 들어 국의 국물을 한 수저 떠먹었다. 쩍쩍 갈라진 사막의 바닥 같았던 그의 목덜미를 시원하게 미끄러져 내려간 국물이 쓰린 속을 재빨리 진정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입술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괜찮으세요?”
“응.”
“다행이다.”
“너도 같이 먹어.”
“네.”
은호는 그제야 자신의 국도 한 그릇 떠와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제가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생각나시는 음식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아주머니가 요리하실 때 옆에서 많이 거들어봐서 제 요리 레시피가 아주머니가 해주셨던 음식들과 약간씩은 비슷할 거예요.”
은호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코끝을 찡긋거렸다. 혼자 말하고 혼자 감상에 젖고, 아직도 영락없는 소녀였다.
은호도 숟가락을 집어 들었지만 우려와는 달리 황태 콩나물 국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는 주원의 모습을 훔쳐보느라 자신은 밥만 계속 떠먹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아주머니에게 주원이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다음날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더니 황태 콩나물국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워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젯밤 술에 취한 그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황태 콩나물국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집 근처 슈퍼에 가서 황태와 콩나물을 사왔다. 그런데 정말 아주머니의 말씀처럼 밥에는 숟가락도 대지 않은 채 그가 국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부모는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모습만큼 보기 좋은 모습이 없다더니 은호는 자신이 아주머니를 대신해 그의 쓰라림을 다독여 준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괜스레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더 드릴까요?”
은호가 얼른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괜찮아.”
“네.”
그녀는 다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자신의 입 안에서 맴돌고 있는 음식의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두 개의 숟가락이 만들어내는 달그락 소리가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따듯하게 해 주었다. 누군가와 함께 살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잘 먹었다. 먼저 일어날게.”
“저기, 오빠.”
“응?”
“어젯밤에…….”
“어젯밤에, 뭐?”
“주무실 때 불편하신 데는 없었어요?”
이걸 물으려던 게 아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려던 마음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슬그머니 몸을 움츠렸다. 낯설음이 서늘함이고 이별이 시림이라면, 좋아하는 건 따끈함이고 사랑은 뜨거움일지도 모른다. 그를 보는 내내 그녀의 마음 한 곳이 따끈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뜨끈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은호는 그 뜨거움 때문에 모든 게 다 너무 조심스럽기만 했다.
“없었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요.”
그녀가 다시 입을 열자 그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또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한국에 계시는 거예요?”
“글쎄.”
그는 정확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젯밤 정원에서 그녀에게 했던 청혼은 술에 취해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그는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었지만, 술에 취한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니까. 그래서 그는 지금 그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 돌아갈지도 모르면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는 건 정말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이니까. 은호는 이마를 찌푸리며 슬며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젯밤에 내가 했던 말, 대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거야?”
“네?”
은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젯밤에 했던 말이라니……?”
“결혼 말이야.”
뭐야? 술 취해 했던 주정이 아니었잖아? 은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번지려다 그녀의 피나는 노력으로 지워졌다.
“조만간 영국에 한번 다녀오기는 할 것 같아. 짐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했거든.”
“아, 그럼 계속 한국에 계시는 거예요?”
“응.”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는 자신의 표정으로 주원이 어느 정도 그녀의 대답을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이 반갑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도 그녀는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집 관리에 들어가는 경비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질 테니까, 넌 다음 학기에 복학하도록 해.”
“제가 조경 관련해서 열리는 웬만한 공모전에는 모두 작품을 출품했는데요, 하나라도 수상하면 복학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수상 못해도 다음 학기 등록금은 내가 내줄게. 그 뒤로는 예전처럼 장학금 타도록 해.”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눈빛도 차갑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차갑지 않다는 사실을 은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른 봄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살갗에 닿는 느낌은 차갑지만 따듯한 햇볕 냄새를 품은 남자였다. 이 남자에게서도 언젠가 뜨거운 여름 냄새가 나는 날이 오겠지?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성공해서 갚아.”
“정말 괜찮아요. 저도 이제 스물세 살인데 제 등록금 정도는 제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어요. 오빠도 한국에서 일 시작하시려면 신경 쓰실 일 많으실 텐데.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가 빨리 복학하는 게 나 신경 쓰지 않게 하는 방법이야.”
“네.”
주원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표정 없이 반듯했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그려지자 그녀의 심장이 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원하는 남편의 조건에 잘생기거나 섹시한 남자는 없었다. 그런데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집에서 드실 거죠? 김치찌개하고 된장찌개 중에 어떤 게 더 좋으세요?”
“늦을 거야. 나 기다리지 말고 저녁 먹어.”
“네?”
“그래도 대답은 빠른 시간 안에 하는 걸로.”
그가 주방을 걸어 나갔다. 그녀의 심장은 아직도 콩닥거리고 있었다.

Rrrrrrrrrr…….
은호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은호 학생? 나 현주 엄마야.]
“안녕하세요?”
그녀가 지난달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던 꽃집의 사모님이었다. 며칠 전에는 그녀의 형편을 알고 먼저 전화를 걸어 그녀가 온실에서 키우고 있는 카네이션을 도매가로 전부 계약해 주겠다고까지 한 고마운 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말씀하세요.”
[사실은 오늘 아침에 현주 아빠가 꽃 정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많이 다쳤지 뭐야. 인대까지 다쳐서 지금 수술 중이야. 그래서 우리가 오늘은 계속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거든. 그런데 며칠 전에 꽃 배달 주문을 받아 둔 게 있는 데 그걸 깜빡했지 뭐야. 전화번호도 꽃집에 있고 해서 달리 부탁할 곳이 있어야지.]
“그래요? 그럼 제가 대신 배달 해 드릴게요.”
다행히 오늘은 바쁜 일도 없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여러모로 그녀를 돌봐주셨던 아주머니였기에 은호는 선뜻 대답했다.
[그래 줄 수 있겠어? 그런데 배달 시간이 좀 많이 늦어.]
“괜찮아요.”
[그럼 장미 100송이만 포장해다가 시내 허브 클럽으로 밤 11시까지 가져다줄 수 있을까?]
“밤 11시에 클럽으로요?”
[응, 거기에서 생일 파티를 한다는데, 그때 프러포즈를 할 계획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쪽으로 가져다 달라지 뭐야.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지?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제가 예쁘게 포장해서 배달해 드릴 테니까 걱정 마시고 아주머니는 아저씨나 잘 보살펴 드리세요.”
[고마워, 은호 학생. 돈은 꽃 받으면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준다고 했으니까 받으면 될 거야. 받은 돈으로 꼭 택시 타고 들어가고.]
전화를 끊은 은호는 주방 정리를 마친 뒤 거실과 복도를 청소했다. 뒷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주원이 깔끔한 블랙 슈트 차림으로 2층에서 걸어 내려왔다.
“지금 나가시는 거예요?”
“응.”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 햇살이 눈부신 듯 주원이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청소하는 거야?”
“네.”
은호는 주원을 배웅하기 위해 그를 따라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나갔다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