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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주원이 현관문을 활짝 열자 봄 햇살을 듬뿍 받아 예쁘게 반짝이는 나뭇잎과 싱그러운 흙냄새가 은호의 코끝을 간질였다. 주원도 그녀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냄새를 맡은 듯 가슴이 가볍게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현장에서 흙을 만지고 나무를 정리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사랑으로 그것들을 만진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일을 하는 모습으로만 보였다. 그런데 나뭇잎을 바라보는 주원의 시선에서는 그들에게 느낄 수 없었던 애정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와 그는 많이 다른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문뜩 꼭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나온 잎이 참 예쁘죠?”
현관 바로 옆의 키 작은 나무에 작게 돋아 난 어린잎을 바라보며 은호가 말했다.
“그래.”
그 순간 나뭇잎을 바라보는 주원의 시선에서 쓸쓸함을 발견한 건 은호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녀오세요.”
집은 나서는 주원을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호는 현관문이 닫히자 마저 정리를 끝낸 뒤 이번에는 온실로 향했다.
그녀에게 꽃을 돌보고 만지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었다. 감촉도, 향기도, 꽃을 바라보는 기쁨도 어느 것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후까지 온실에서 꽃을 돌보며 시간을 보낸 그녀는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집으로 들어가 대충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주원이 볼 수 있도록 자신의 행방을 알리는 메모를 식탁 위에 남긴 뒤 꽃집으로 향했다.
정성스럽게 포장한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그녀가 클럽 입구로 들어서려는 순간 무늬 없이 헐렁한 흰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그녀의 모습을 비웃듯 훑어 내린 직원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섰다.
“아가씨, 잠깐.”
“왜 그러세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남자가 이번에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은호의 옷차림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전 이 꽃 배달 온 거예요. 이 클럽 단골손님인 것 같던데 이 꽃만 전해 드리고 금방 나올게요.”
그녀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이에도 과감한 노출로 자신의 몸매를 뽐내는 여자들이 속속 클럽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10분 안으로 안 나오면 끌어냅니다.”
“네, 알았어요.”
뿌연 연기와 뒤섞여 정신없이 번쩍이는 조명과 건물이 흔들릴 듯 요란하게 울리는 음악소리에 클럽 안으로 들어선 은호의 이마가 저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입구에서 낮게 으르렁거렸던 직원의 협박 때문에 마음은 조급했다. 누가 배달을 시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시끄러운 클럽 안에서 전화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금방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힘들 것이었다. 게다가 클럽이라고는 친구들 생일에 한두 번 와본 것이 전부였지만 이곳처럼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클럽은 처음이었다.
“여보세요?”
11시가 넘은 시간 화장실 쪽으로 자리를 옮겨 건 전화를 드디어 상대방이 받았다.
[왜 이렇게 안 와요?]
“지금 클럽 안인데, 어디에 계신데요?”
[무대 중앙을 보고 섰을 때 왼쪽, 그러니까 출입문에서 무대를 똑바로 지나쳐 있는 테이블 중 가장 큰 테이블에 있어요. 빨리 뛰어오세요.]
소음에 뒤섞여 정확하진 않았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그다지 기분이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배달이 예약했던 시간보다 늦어져 프러포즈에 차질이 생겼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은호는 서둘러 클럽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무대를 바라보자 건물뿐 아니라 그녀의 머릿속까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때 방금 통화에서 설명을 들었던 것처럼 무대 왼쪽의 긴 테이블 앞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은호는 테이블들을 돌아 뒤쪽으로 걸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 오라는 듯 무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은호는 난처한 시선으로 클럽 안을 쓱 둘러보았다. 지금 클럽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사람들과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웨이터들 때문에 테이블들을 돌아 꽃이 상하지 않게 가는 길이 그다지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갑자기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무대가 한산해진 지금 빨리 무대 가운데를 지나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은호는 상대방을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쏴아.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무대 한가운데를 막 지나치려는 순간 건물에 구멍이라도 뚫려 폭우가 새어 들어오고 있는 것처럼 천장 위에서 그녀의 머리 위로 물벼락이 내리쳤다. 물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은호의 시선이 재빨리 가슴 앞으로 정성스럽게 감싸 안은 장미꽃에 꽂혔다. 그녀 딴에는 막는다고 막아 보았지만 갑자기 쏟아져 내린 물벼락에 장미를 싸고 있던 포장 안으로 물이 가득 들어차며 장미는 말 그대로 홍수에 잠긴 꽃처럼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이었다. 은호는 장미를 주문한 남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알듯 말듯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호의 귀에는 더 이상 클럽 안에 흐르고 있는 음악 소리나 사람들의 웅성거림, 어느 것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무대 위에서 춤을 추다 놀라 멈춰 선 사람들도 그녀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하나둘 자리로 돌아갔다. 은호는 지금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꽃이라도 저 남자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당장 클럽 밖으로 뛰쳐나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치 자신을 겨냥한 듯 물을 쏟은 직원에게 쫓아가 멱살이라도 잡아야 하는 것인지…….
그런데 이상하다. 만약 사고로 물이 쏟아진 거라면 웨이터나 직원 중 누군가 무대를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그녀의 다음 행동만 주시하고 있을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전화는 뒷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덕에 젖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호는 젖은 손을 대충 청바지에 문지른 뒤 전화기를 꺼냈다.
“여보세요?”
그녀의 전화기에 뜬 전화번호는 장미를 주문한 남자의 번호였다.
[그 꽃 그냥 버리세요. 꽃값은 택시비까지 생각해서 계좌로 부쳐 드릴 테니까, 핸드폰으로 계좌번호 보내시고요.]
전화가 끊겼다. 은호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출입문으로 향하려는 듯 테이블 뒤로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는 클럽 안에서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만 유일하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은호는 저 남자가 자신의 프러포즈 계획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애꿎은 그녀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은호는 미친 듯이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았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나?”
“설마 이 물, 그쪽이 나한테 뿌리라고 한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남자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진공포장처럼 몸에 옷이 달라붙은 그녀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은호는 기죽지 않고 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꽃 배달이나 하기에는 아까운 몸매네.”
그 순간 은호는 남자의 머리 위로 장미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포장지 안에 가득 고여 있던 물을 남자의 머리 위에 그대로 부어버렸다. 곧 멋스럽게 소매를 접어 올린 남자의 깨끗했던 양복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싸구려로 전락해 버렸다.
“뭐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남자가 당장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듯 팔을 뻗었지만 은호는 재빨리 그의 팔을 막아냈다.
“아, 내가 꽃을 적정 수준 이하의 너무 싸구려 꽃으로 주문했더니 배달하는 애도 질이 이따위고, 꽃을 받아야 할 사람은 진작 수준 이하의 꽃 냄새에 일찌감치 멀리 도망을 가버렸나 보구나.”
은호는 눈을 부릅떴다. 꽃을 심고 키워 본 사람만이 안다. 하루하루 물을 주고 햇볕과 온도로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아주 조금씩 자라난 초록 생명이 어느 날 선물처럼 꽃봉오리를 피운다는 사실을. 그 기다림과 기대, 그리고 기쁨을 이 쓰레기 같은 남자는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전 그 여자 분이 왜 안 나타났는지 알 것 같네요.”
은호의 말에 남자는 그녀의 손에서 꽃다발을 빼앗아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고 자신의 발로 그것을 밟아 뒤꿈치로 비비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에 진작부터 그들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음악 소리는 여전히 요란했지만 신기하게도 바로 옆에 선 사람의 숨소리는 그녀의 귓가에 들리는 거 같았다. 아무래도 갑자기 요란한 음악 소리에 노출된 그녀의 귀에 잠시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당신은 이 꽃들에게 사과를 해야 돼. 당신처럼 쓰레기 같은 남자가 주문만 하지 않았어도 아주 멋진 남자의 손에서 아주 예쁜 여자의 손으로, 사랑의 맹세로 전해졌을 테니까.”
“사랑의 맹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 꽃값 받기 싫은 모양이지? 하긴 지금 너는 꽃값이 아니라 나한테 세탁 비를 물어줘야 돼.”
“세탁 비? 지금 당장 경찰서로 가보죠. 누가 누구한테 피해 보상을 해야 하는 건지?”
은호도 지지 않고 소리치고 있는 순간 남자가 다시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동에 은호가 곧바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순간 다행히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키가 큰 남자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당신 옷 세탁 비는 내가 지불하지. 그런데 이 여자 옷 수선비는 당신이 지불해야 할 것 같은데.”
그녀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마치 주원의 목소리 같았다. 은호는 너무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지금 이 몰골을 하고 있는데 주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그녀에게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쿵쾅거리고 있는 것이 음악의 진동으로 흔들리고 있는 바닥인지 자신의 심장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은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깔끔하게 블랙 슈트를 입은 훤칠한 키의 주원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주변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의 무수한 시선도 그녀의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의 서늘한 시선은 장미꽃을 주문한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차갑고 냉정해 은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주원이 아닌 것만 같았다.
“뭐야?”
“너무 자연스럽게 소화를 하고 있어 눈치채지 못 했나 본데 이 여자가 입고 있는 이 옷, 영국에서 만들어 유럽 쪽에서만 팔리고 있는 명품이야. 당신의 중저가 양복으로는 이 숍의 티셔츠 하나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옷들만 파는 곳이지.”
남자가 가늘게 뜬 눈으로 최고급 호텔의 와인바 같은 곳에나 앉아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 주원의 옷차림을 꼼꼼히 뜯어보다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그녀의 옷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
주원의 시선도 그녀의 옷을 향해 천천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았던 눈빛이 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변하고 있었다. 은호는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그 미묘한 변화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왜 남의 일에 끼어들고 난리야?”
주원은 은호 옆으로 바짝 걸어가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그가 손으로 감싼 것은 젖어 있는 은호의 어깨였지만 진짜 감싸고 싶은 것은 흐릿하니 젖어 들고 있는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인지도 모른다. 11년 전 그 꼬마의 눈동자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그녀의 모습은 지금 당장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어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은 도발적이면서도 청순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제야 클럽 안의 남자들이 은호를 힐끔거린 것이 소란스러운 상황 때문이 아니라 몸에 빈틈없이 달라붙은 옷 때문에 적당하게 볼륨감 있는 가슴과 군살 없이 늘씬한 그녀의 허리 라인이 옷을 입지 않은 것보다 더 아찔하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젖어 있는 머리와 얼굴, 동그랗게 큰 눈은 어느 청순한 모델 못지않게 사랑스러웠다. 이 여자는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던 채은호가 아니었다. 어쩌면 어머니와 함께 정원의 꽃과 나무를 손질하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라 여겼던 순진한 아가씨 채은호는 이제 그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여자.”
주원은 자신의 재킷을 벋어 은호의 어깨를 감쌌다. 옷이 젖을까 염려하는 듯 은호가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는 두 손으로 은호의 양 어깨를 꼭 움켜잡았다.
“이 여자 내 약혼년데.”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두 명의 웨이터를 동반한 중년의 남자가 다급하게 주원에게 다가와 물었다.
“제 약혼녀가 아주 불쾌한 상황을 겪고 있는 것 같군요.”
“약혼녀시라고요?”
주원의 대답에 남자가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뭔가를 짐작한 듯 웨이터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웨이터들이 당황한 낯빛으로 장미를 주문한 남자의 양팔을 포박했다. 남자가 포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거칠게 몸을 비틀며 욕설을 퍼부었지만 두 명의 장정을 이겨내기엔 무리였는지 결국 출입구 쪽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제가 애들 관리를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 저희는 어떤 분인 줄 모르고, 그 남자 손님이 자기가 춤을 추겠다고 미리 물을 부탁해 놓은 상태라 여자 분에게 대신 뿌려 달라고 했을 때 별생각 없이……. 정말 죄송합니다.”
웨이터 중 한 사람이 재빨리 상황 설명을 한 뒤 사장과 주원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사과를 받아주겠냐는 눈빛으로 사장이 주원을 바라보았다.
“오늘 미팅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귀국 전부터 얼마나 기다리셨는데, 그리고 바로 도착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제 약혼녀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아,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우선 저희 VIP룸으로 모시겠습니다.”
“됐습니다.”
“그럼 저희 차로 모시겠습니다.”
사장이 입구 쪽의 직원을 향해 재빨리 손짓을 했다.
“오늘 사고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쪽 실수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내일 중으로 꼭 다시 연락을 주십시오.”
“연락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모셔다 드려.”
“네.”
그들이 클럽 밖으로 나왔을 때 사장이 지시를 해 둔 차가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 때문에 오셨던 거예요?”
“응.”
“그런데 저 때문에, 그냥 가시는 거예요? 전 괜찮은데…….”
“너 때문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주원은 은호와 함께 사장이 준비해 둔 차에 올랐다. 그의 재킷을 꼭 움켜쥐고 그의 옆자리에 앉은 은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클럽 회장이 호텔을 지을 계획이라며 영국에 있는 아버지 회사로 먼저 연락을 해왔다. 아버지는 한국에서는 일을 하지 않을 거라며 거절했지만 회장은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사람을 시켜 어제 입국장에서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무실을 내면 당장 일거리가 급하기 때문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먼저 일을 의뢰했던 사람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의뢰인이 조직과 클럽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에 그다지 내기키 않았던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아까 그 꽃은 뭐였어?”
오래였는지 잠깐이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주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문받은 꽃 배달한 거였어요.”
“꽃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거야?”
“아니에요. 아르바이트는 지난달에 그만뒀어요. 오늘은 꽃집 사장님한테 갑자기 사정이 생기셔서 부탁을 하신 거예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고작 남의 부탁 때문에 그런 곳엘 가?”
갑자기 솟구치는 화에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입을 열었지만 은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꾹 누르고 있었을 뿐 클럽 안에서부터 느껴졌던 뭔가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은 여전한 상태였다.
“그렇게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유지해야 했을 정도로 너한테 부담스러운 집이었다면 진작 팔지 그랬니?”
“오늘 같은 일은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팔다니요?”
줄곧 앞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획 그에게로 돌아섰다. 그도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은호의 눈동자 안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엉켜 있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다. 은호는 어머니의 설명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는 아이었다. 밝고 착하고 예뻤다. 그리고 어머니도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집을 팔 만한 배짱도, 욕심도 없는 것 같았다. 이 작은 체구로 그 버거운 집을 지탱하느라 그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때 제가 했던 말은, 실수였어요. 파는 건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은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그 순간 아직 젖어 있는 머리와 창백한 피부, 앵두 물을 들인 것처럼 빨간 입술이 그에게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착한 아이고, 함께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처럼 보살펴 주고 싶었고,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감정에 변화가 생긴다면 인정할 마음도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처럼 사느니 평생 혼자여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 집이 어떤 집인데…….”
‘너한텐 어떤 집인데?’
주원은 소리 내지 않고 물었다.
“저한테 그 집은 아주머니예요. 저를 돌봐 주셨고, 제게 꿈과 행복을 선물해 주셨고, 저를 키워주신 아주머니요. 지금도 그 집 곳곳에 아주머니가 살아 계신 것 같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오빠가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요.”
주원은 나비 날개처럼 위로 휘어져 꿈을 꾸듯 천천히 펄럭이고 있는 은호의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갯짓이 빨라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뺨 위로 투명한 구슬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나비가 눈물도 참 많다. 오랜 기다림과 고통을 혼자 묵묵히 참아냈으니 설움도 많은 것일까? 작은 일에도 슬퍼하거나 기쁨에 눈물을 흘렸던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이 은호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어머니, 당신 대신 제 곁에, 그 집에 이 아이를 남기신 건가요? 하지만 제가 이 아이를 보며 느끼는 감정들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인가요, 아니면 온전히 이 아이에 대한 감정인가요…….’
차에서 먼저 내린 사람은 은호였지만 대문을 연 손은 주원의 것이었다. 그는 문을 잡고 은호가 먼저 들어가길 기다리며 서 있었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한걸음쯤 떨어진 자리에서 몸을 바짝 웅크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그녀와 자신이 낯선 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그가 먼저 들어가지 않으면 밤새 이 상태로 있을 작정인 것인지 은호는 애꿎은 아랫입술만 질끈 깨문 채 그림처럼 서 있었다.
“들어가자.”
“…….”
그의 재촉에 은호가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 순간 그의 시야에 대문 옆에 붙어 있는 문패가 들어왔다.
윤미란……. 어머니 이름이었다. 왜 아직까지 어머니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가 달려 있는 것인지 물으려던 그의 머릿속에 조금 전 은호의 말이 떠올랐다. 주원은 갑자기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또한 이 아이를 이 집에 남기면 당신의 추억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라는 걸 짐작하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자취를, 그리고 이 아이의 따뜻한 마음을 이렇게라도 그에게 남기고 싶었던 것이리라. 정말 은호와 함께라면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소중한 기억과 추억으로 다시 가슴에 새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뭔지 모를 복잡하고도 묵직한 기운이 그의 가슴 한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은호는 얼른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주원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선 주원이 대문을 닫자 다시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집 안에는 더욱 짙은 어둠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만이 빈 무대 위의 독백처럼 의미심장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은호는 얼른 현관 앞으로 뛰어가 정원의 불을 켜고 싶었다. 하지만 어두운 정원에 익숙하지 않을 주원을 내버려 두고 혼자만 서둘러 걸을 수는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쏜살같이 뛰어들어 갔을 길을 그녀는 걸음을 쪼개 주원의 반걸음쯤 뒤에서 걸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주원의 걸음 폭이 좁아지기 시작하는 것 같더니 이내 그녀와 보폭이 비슷해졌다. 주원이 말없이 자신을 배려하고 있다는 사실에 은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간질거리는 달큰한 기분, 그리고 어슴푸레하게 쏟아지는 달빛과 곁에 선 주원의 은은한 향기가 그녀를 취하게 한 듯 답답한 어둠마저도 꿈결처럼 감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
항상 그 자리에 돌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피해 다녔던 그녀였다. 모두 주원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과 보폭을 맞춰 걷지만 않았다면, 그의 향기에 자신이 이성을 놓지만 않았다면 절대 자신의 발로 그 단단한 돌을 걷어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으…….”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지만 그래도 신음이 새어나갔다.
“괜찮아?”
저절로 굽혀진 그녀의 등 위로 주원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 네.”
은호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때까지도 주원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걸을 수 있겠어?”
그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부축하려는 듯 다가오자 은호는 재빨리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하죠.”
씩씩하게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지만 발이 너무 아팠다. 이도 다시 악물렸다. 이를 세게 무니 이도 아프고 발가락도 아팠다. 그래도 그녀는 현관 앞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아파도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마음 편히 아프고 싶었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정원에 불 좀 켜놓고 들어갈게요.”
현관 앞에 서서 은호가 말했다.
“내가 할게.”
“얼마 전에 스위치 위치를 옮겼어요.”
“그래?”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들어가세요.”
“그래.”
주원이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의 커다란 재킷에 감추어진 그녀의 젖은 옷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아, 나도 빨리 불 켜 놓고 들어가야겠다.”
은호는 재빨리 현관 옆 기둥을 돌아 벽면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몸을 숨긴 그녀는 숨죽여 심호흡을 했다. 어서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기분을 알 리 없는 주원이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이 더 지난 뒤였다.
“하…….”
서둘러 불을 켜고 다시 현관 앞으로 걸어갔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문을 열어 놓고 그 앞에 서 있는 주원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걸음이 다시 돌처럼 굳었다.
“아직 안 들어 가셨네요?”
“…….”
“왜……?”
그는 말이 없었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내가 많이 불편하니?”
은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내가 편해?”
은호의 머리가 조금 전보다 느리게 흔들렸다.
“편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다행인 건가?”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문패, 왜 떼지 않았어?”
“저한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격?”
“아주머니 이름에 제가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것이…….”
“문패일 뿐이야. 어머니 이름이 적힌 문패를 뗀다고 이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잖아?”
“사실은, 오빠가 서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
“제 마음대로 아주머니 문패를 뗀다면, 오빠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서운한 마음이 들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부터 줄곧 아주머니를 위한 집이었고, 오빠에게도 이곳은 어머니의 집이잖아요. 그리고 전 한 번도 이 집을 제 집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걸요.”
“…….”
“이제 오빠가 해 주시면 되겠네요.”
은호는 씩 웃었다. 웃고 있었지만 마음 한 곳이 찌르르 요동쳤다.
“내일 떼자.”
은호는 주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차분했다.
“우선은 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