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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다시 중얼거렸다.
“감기 걸리겠다. 그만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오빠?”
“…….”
“전…….”
“이제 추억은 이곳에 넣어 둬도 괜찮아.”
그가 쫙 편 손바닥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은호는 그의 손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 들어가자.”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 시간을 너무 끌었어.”
“…….”
“나 때문에 너까지 너무 오래 갇혀 있었던 거야.”
그의 시선이 느리게 정원을 훑었다. 은호의 시선도 소리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우리 그만 벗어나자. 같이…….”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을 향해 파고들었다.
[은호야,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들어가도 돼?]
협탁 위에서 몸을 부르르 떠는 핸드폰을 들어 올렸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글자였다.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은호는 평상시처럼 잠옷 차림으로 거실로 나가려다 주원이 떠올라 서둘러 흰색 면 티에 카키색 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들어와.”
현관문을 열어주자 문 앞에 서 있던 재승이 큼직한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웬 꽃이야?”
“처음 인사하는 자린데 빈 손으로 올 수가 있어야지.”
은호는 재승이 건넨 꽃다발을 받아 들었지만 어젯밤의 일이 생각나 저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누구한테 무슨 인사를 해? 게다가 지금 정원에 널린 게 꽃인데 이걸 돈 주고 샀단 말이야? 차라리 먹을 수 있는 걸로 사오지 그랬어. 그렇지 않아도 요즘 생활비가 빠듯해서 풀만 먹고 살고 있는데.”
은호가 투덜거리는 사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올린 재승의 얼굴은 평소보다 공들여 화장한 티가 역력한 모습이었다. 와인색으로 염색한 머리 또한 평소처럼 둘둘 말아 헐렁하게 정수리 위에 얹지 않고 공들여 웨이브를 준 채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에는 동방에서 작업할 때 불편하다며 절대 입지 않던 원피스를, 그것도 연한 핑크색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재승은 그야말로 화사한 봄 처녀 같은 모습이었다.
“나 어때?”
“예쁘네.”
“이 옷 며칠 전에 백화점 구경 갔다가 50% 세일해서 산 거야. 나 완전 사랑스럽지?”
“설마 우리 집에 오려고 이렇게 입고 온 건 아니지?”
그녀는 꽃과 친구를 번갈아 바라보다 여전히 뚜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이 차주원 씨랑 실제로는 처음 만나는 자리잖아.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거거든. 그런데 내가 전화로 한 얘긴 해봤어?”
재승이 옷차림에 어울리는 애교 넘치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응? 아니, 아직.”
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와 어젯밤 있었던 일을 재승에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지금 당장 그녀의 손목을 끌고 주원의 방으로 갈 게 분명했다.
“그런데 차주원 씨는 지금 어디 있어?”
재승이 목을 길게 빼고 주방과 서재 쪽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방에 있나 봐.”
은호는 힐끗 2층을 바라본 뒤 말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넌 지금 이 옷차림이 뭐니?”
“이게 왜?”
“얘 좀 봐, 내가 그렇게 얘기를 해도 한 귀로 흘려 버리니, 이리 와.”
“왜?”
“나랑 옷 좀 바꿔 입어야겠다.”
“글쎄 왜?”
“너 설마 이런 누더기, 아니, 선머슴 같은 차림으로 청혼을 하겠다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누가 온 거야?”
그때 2층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재승은 은호의 팔을 놓고 주원 앞으로 냉큼 걸어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인사는 건넸다.
“저 은호 친군데요, 윤재승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깔끔한 흰색 셔츠에 검은 바지차림의 주원은 바로 외출을 하려는 듯 손에 재킷을 들고 있었다. 거리에 넘쳐날 정도로 평범한 옷차림이었지만 그의 우월한 외모는 조금도 가려지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에 인터뷰하신 거 TV에서 봤어요.”
재승의 눈빛은 평소 은호가 알던 세상에 대한 냉정한 잣대와 판타지 세상을 왕복하던 윤재승의 것이 아니었다. 사자 앞의 한 마리 순한 양처럼 두 눈 가득 주원에 대한 찬양으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래요?”
“화면발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뵈니까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더 멋지신 것 같아요.”
“재승 양도 참 미인이시네요. 부모님께서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 주셨나 봐요.”
‘얼씨구…….’
“제 외모가 이름이랑 좀 안 어울리긴 하죠? 우리 은호는 이름이랑 외모가 정확하게 일치해서 사람들이 가끔 남자로 오해를 하기도 하는데, 저 같은 경우엔 사람들이 이름을 들으면 깜짝 놀라더라고요, 호호호.”
재승의 간드러지는 웃음에 주원도 따듯한 미소로 화답을 했다.
“그런데 어디 나가시려던 길이었나 봐요?”
“네, 일이 있어서. 은호랑 재미있게 놀다 가세요.”
“네, 다음에 또 뵐게요.”
재승은 주원이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다음 은호의 팔을 붙잡고 그녀를 방으로 끌어당겼다.
“우와, 사진으로 봤을 때는 귀티 나게 잘생겼다 정도였는데, 실제로 보니까 심장이 다 떨린다.”
“떨려서 그렇게 웃음이 간드러졌구나?”
“에이 왜 그래?”
재승이 고양이처럼 은호의 팔에 자신의 볼을 비볐다.
“그런데 언니가 그러는데 인터뷰 일정 모레에서 내일 오후로 당겨질 것 같다던데, 언제 얘기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할게.”
“몸 쓰는 일은 누가 안 시켜도 그렇게 잘하면서 넌 왜 이렇게 말 주변이 없니?”
재승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은호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그런 얘기는 상황을 봐서 해야지.”
“그럼 이따가 꼭 해.”
주원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까지만 해도 재승은 시간이 나거나 근처를 지나칠 때면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편하게 이 집에 놀러 왔었다. 아주머니 역시 은호의 친구 중 유일하게 이 집에 놀러오는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은호의 바빠진 아르바이트 스케줄 때문에 언제 한번 들러보나 틈만 노리다 오늘에야 겨우 들른 길이었다.
재승은 자신의 집처럼 편하게 거실로 나와 테이블 아래 놓여 있는 빈 꽃병에 물을 담은 뒤 자신이 가져온 꽃을 꽂았다. 아주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항상 거실 꽃병에 싱싱한 꽃들이 꽂혀 있었다. 대부분 정원에서 꺾어온 꽃이나 그 계절에 흔한 꽃이었지만 그 덕분에 집 안에는 언제나 은은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 은호는 더 이상 거실에 꽃을 놓지 않았다.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것도 적응이 되지 않았는데, 마치 사는 사람마저 바뀐 것처럼 분위기까지 삭막해진 집 안의 분위기가 재승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부지런한 은호 덕분에 정원의 꽃들은 항상 싱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은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낮에는 시내의 꽃집에서,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집 근처의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정원을 돌보는 일에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아인데, 그간 몇 차례의 사기로 틈틈이 모아둔 돈을 모두 날리더니 최근에는 마음을 비우듯 온실의 꽃을 돌보는 일에만 열중을 하고 있었다.
큰 화원이 아니라 정원 한곳에 반 지하 식으로 만들어진 작은 온실이었지만 기르는 사람의 정성 덕분인지 은호의 온실에서 자란 꽃들은 모두 줄기가 곧고 꽃이 풍성했다. 사실 휴학 중인 지금은 온실에 기르고 있는 모종들이 상하지 않고 잘 자라 좋은 가격에 넘길 수만 있다면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 은호에게 나을 수도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람도 느낄 수 있고, 경제적으로 도움까지 되니 그녀에게는 이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재승이 보기에도 지금 은호에게는 돈보다 다른 게 더 필요해 보였다. 자신이 의지할 누군가를 만나는…….
다시 은호의 방으로 돌아온 재승의 눈에 달랑 스킨, 로션만 놓여 있는 은호의 휑한 화장대가 보였다.
“넌 화장도 안 해?”
“귀찮아.”
“난 스무 살이 넘은 여자가 화장을 안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건 범죄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범죄면 세상에 범죄자가 너무 많아지는 게 아닐까?”
재승은 자신의 농담에 너무 진지하게 대꾸하는 은호를 무시하고 반 이상 남은 로션을 뒤집어 유통기간을 확인했다. 제조 년 월이 2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2년간 겨우 로션 반통을 사용했단 말인가? 그녀는 곁눈질로 은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얗고 화사한 피부에 어울리지 않게 무늬 없는 흰색 면 티에 카키색 바지를 입고 있는 은호의 모습에 재승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재승은 대전의 큰 화원 집 딸로 태어나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랐다. 위로 언니가 둘 있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부모님은 물론이고 언니들에게도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그 덕에 이제껏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녀에게 부족함이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니, 부모와 떨어져 자란 아이를 실제 만나 본 것은 은호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은호를 보면 그동안 자신이 누렸던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생각에 항상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제라도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다. 자신처럼 은호 역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무 예쁜 나이를 보내고 있었고, 조금만 꾸민다면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양말을 신던 은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너 생일 얼마 안 남았지? 내가 화장품 사줄까?”
“됐어.”
“그럼 뭐 필요한 거 없어?”
“너 자선 사업가 아니잖아. 그냥 영원히 내 베프로만 있어 주면 돼.”
“어우, 닭살.”
재승은 어깨를 움츠리고 손으로 자신의 팔을 빠르게 문질렀다. 하지만 그런 친구의 반응은 관심 밖인지 은호는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수첩을 집어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적어?”
“아무것도 아니야.”
은호는 씩 웃으며 얼른 수첩을 덮었다.
“뭔데?”
“사실 온실 카네이션 전부 도매로 계약했거든.”
“우와, 전에 알바했던 그 꽃집이랑?”
“응.”
“잘됐다. 그런데 돈은 꽃을 넘겨야 받을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당장 수중에 들어올 돈도 아니네. 그럼 은호야, 오늘 아르바이트 있는데 같이 가 볼래?”
“어딘데?”
“건축 비엔날레 행사장. 거기 인공 폭포 근처 잔디가 지난번 비 때문에 군데군데 쓸려 내려갔나 보더라고. 그래서 주최 측에서 아르바이트를 급하게 구한대.”
“그러게 잔디를 정성껏 꼭꼭 밟아 주지 않고 대충 얹어 두기만 하니 봄비에도 힘없이 쓸려 내려가지.”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겼는데도 은호의 말투에는 못마땅함이 역력했다.
“갈 거지?”
사실 작년에도 똑같은 아르바이트에 참여를 했었다. 건축과 조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이맘때면 건축 비엔날레 행사장 근처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녀 때문에 재승까지 덩달아 끌려갔던 적이 있긴 했지만, 그래 봐야 그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화초 나르는 일이나 화단 정리, 혹은 잔디 심는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작년에는 햇볕이 너무 따갑다고 재승의 투덜거려 다시는 함께 가자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는데, 은호는 조금 의외였다. 그래도 이렇게 화창한 봄날에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당연하지. 근데 너는?”
“나도 갈 거야.”
“설마 그 차림으로?”
은호가 재승의 화사한 원피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네 옷 좀 빌려 입자.”
“그래.”
은호는 옷장에서 검은색 티셔츠와 청바지 하나를 꺼내 재승에게 건넸다.
“검은색 옷은 햇볕 받으면 진짜 뜨거운데. 너 일부러 이 옷 준 거지?”
건네받은 옷을 자신의 몸에 대어 보던 재승이 투덜거렸다.
“아니야. 싫으면 다른 옷 줘?”
“됐어. 그래도 검은 색 옷은 좀 날씬해 보이기는 하니까.”
“너 지금도 충분히 날씬해. 이따 뜨겁다고 우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다른 색 옷 줄게.”
“됐다니까.”
한 시간 후 은호는 행사장 탈의실 안에서 재승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너 설마 나한테 이 옷을 입으라는 거야?”
“이 옷이 어때서?”
은호는 새빨간 원피스에 흰 재킷, 그리고 빨간 리본이 달린 챙이 넓은 흰색 모자를 바라보며 거친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 옷이 어떠냐고? 물론 옷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단지 내가 입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겠지.”
“그건 네 편견이야. 사실 누가 봐도 네 나이의 젊고 생기 넘치는 아가씨한테는 잔디 입히는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이런 도우미 아르바이트가 더 잘 어울린다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잔디 심는 아르바이트 인력은 모두 충당이 된 상태였다. 그냥 돌아서려는 찰나 행사장의 매니저가 급하게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행사장 입구를 안내할 도우미가 두 명 필요하다고 말했다. 은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재승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옷은 키도 크고 날씬하고 예쁜 언니들이 입어야지. 난 키도 크지 않고, 예쁘지도 않아. 사람들이 웬 청년이 여자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은호야, 넌 전혀 남자 같지 않아. 게다가 네가 매일 운동화만 신고 다니니까 키가 더 작아 보이지, 평균 키라고.”
재승이 당장 탈의실을 뛰쳐나갈 듯 흥분하고 있는 은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바로 네가 내가 남자 같다고 말해줬던 것 같은데.”
“그건 네가 너무 꾸미지 않기 때문에 놀려 주려고 그랬던 거지. 그러니까 우선 입어 보고 그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그리고 매니저도 그랬잖아. 잔디 입히는 아르바이트보다 도우미 알바비가 더 훨씬 더 많다고.”
은호는 잠시 망설였다. 요즘 가뜩이나 주머니가 얇았는데 어젯밤 클럽에서 꽃값을 받지 못해 그녀가 돈까지 물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정 이야기를 모두 한다면 아주머니이야 당연히 괜찮다고 하시겠지만 아저씨가 다쳐 경황이 없는 상황에 그녀의 일로 공연히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지금 그녀에게 망설임은 사치였다.
“알았어. 그 대신에 어울리지 않으면 솔직하게 말해 줘야 해.”
은호는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바지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 두고 얇은 어깨 끈으로 되어 있는 원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행히 원피스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이렇게 큰 행사장 도우미들을 볼 때면 멋진 각선미를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몸에 이 옷이 작거나 크지 않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익숙하지 않은 옷감의 감촉과 치마가 너무 짧아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은호는 원피스 위로 흰색 재킷을 걸쳐 입은 뒤 모자를 집어 들고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와, 잘 어울리는데? 여기 구두도.”
그녀를 보고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던 재승이 힐을 건넸다.
“농담하지 마.”
“웬 농담? 하여튼 이쪽으로 와봐.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얼굴에 아무것도 안 바르고 자외선 아래 몇 시간씩 서 있으면 기미가 온통 네 얼굴을 점령하게 될 거야. 더구나 넌 피부도 약하잖아.”
재승은 은호의 의견도 묻지 않고 자신이 바르고 있던 B. B 크림을 그녀의 얼굴에도 문질렀다. 재승이 갑작스럽게 달려들어 당황하긴 했지만 은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사실 언제부턴가 자신도 재승처럼 머리를 길러 보면 어떨까 고민했던 것이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은호의 입술 위에 붉은색 립글로스까지 얇게 펴 발라준 재승은 자신의 입술을 닿을 듯 말듯 가져다 대고 뽀뽀하는 시늉까지 해 보인 다음 만족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와, 예쁘다. 내가 알던 채은호 맞아?”
“정말 이상하지 않아?”
은호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전혀! 넌 피부도 하얗고 눈도 동그래서 조금만 꾸며도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되는데 왜 이렇게 꾸미질 않는 거야?”
은호는 재승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조금 전 재승이 건넨 굽이 높은 힐에 발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조심조심 거울을 향해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려는 순간 탈의실 문이 벌컥 열리고 매니저가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준비 다 됐으면 얼른 나와요.”
“네.”
재승은 은호의 팔을 붙잡고 매니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좀 가자.”
은호는 난생처음 신어보는 힐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 비해 재승은 묘기를 부리듯 사뿐사뿐 뛰기까지 하고 있었다.
“원래 있던 사람들이 오늘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나온 거니까, 오늘만 자리를 매워주면 될 거예요. 윤재승 씨는 도우미 경험이 있다니까 중국관 앞에 서 있으세요. 중국관은 규모가 커서 다른 도우미가 한 명 더 있어요. 그리고 채은호 씨는 핀란드 바빌리온 앞에 서 있으면 될 거예요. 핀란드 쪽은 인기관이 아니라서 관람하는 사람도 많지 않으니까 우선 팸플릿을 보고 중요한 사항만 기억해 두고, 혹시 손님이 모르는 걸 물어보면 전시장 안쪽 다른 관에 도우미들이 있으니까 가서 물어보고 대답해 드리도록 하세요.”
“네.”
그 밖에 꼭 알아 두어야 할 주의 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은호는 재승과 헤어져 핀란드 파빌리온 앞에 서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막아줄 챙이 넓은 모자가 있어 한 장소에 계속 서 있는 게 그리 고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정말 파빌리온을 관람하는 사람의 수는 적었다.
“이봐요.”
은호가 팸플릿에 적힌 핀란드 파빌리온의 특징 부분을 다시 읽고 있을 무렵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네?”
그녀를 부른 사람은 20대 중반쯤 됐을까, 캐주얼하지만 깔끔한 옷차림에 갈색의 체크무늬 백팩을 맨 젊은 남자였다.
“핀란드 파빌리온의 가장 큰 특징이 뭔가요?”
“팸플릿에 설명이 잘 나와 있으니까 한번 살펴보시고 천천히 관람하십시오.”
은호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자신이 들고 있던 팸플릿을 상대에게 건넸다.
“팸플릿 말고 예쁜 도우미 아가씨가 직접 설명을 해주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그래요.”
호남형의 깔끔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핀란드 파빌리온의 대표적인 특징은 핀란드에서 자란 나무를 사용해 만들어진 친환경적 공간으로서, 특히 목재 재질이나 가공 면에서는 지구상에서 최고의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핀란드 산 홍송으로 지어졌습니다. 함수율이 12%이기 때문에 나무의 갈라짐이나 뒤틀림이 없고 침하 현상도 없으며…….”
은호가 팸플릿에 적힌 내용을 떠올리며 찬찬히 읊조리고 있는 순간에도 남자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 안 이목구비를 구석구석 뜯어보고 있었다.
“친환경적 공간이라, 우리 도우미 아가씨도 인상이 참 깨끗해 보이는 게 핀란드 관에 딱 어울리는 것 같네요.”
“칭찬이라면 감사합니다. 핀란드 파빌리온을 모두 둘러 보셨다면 다음으로는 근처의 중국관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중학교 시절 교복 치마를 입어본 뒤로 치마는 처음이었다. 거기다 낯선 남자가 이렇게 정면에서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걸어오는 것도 그다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은호는 아르바이트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꿋꿋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몇 시까지 해요?”
“모든 전시관은 6시까지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아가씨 몇 시까지 근무하냐고요?”
“죄송합니다, 손님. 저는 이곳의 안내를 맡고 있을 뿐이니 손님들의 개인적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이름이 채은호? 아, 얼굴이랑 너무 안 어울린다.”
“손님…….”
억지로 다시 웃으려니 입가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역시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웃는 천상 여자들이나 하는 아르바이트는 체질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가씨랑 웃는 모습이 정말 많이 닮은 사람이 있는데…….”
“손님!”
“나이는 어떻게 돼요?”
“손님 자꾸 이러시면…….”
“은호 씨?”
그때 누군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승준은 하던 말을 멈췄고, 은호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주원의 친구인 재훈이 서 있었다.
“정말 은호 씨 맞아요?”
은호와 눈이 마주친 재훈의 남자답고 갸름한 눈이 평소보다 훨씬 동그래졌다.
“안녕하세요?”
은호는 이토록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에 절망하며 재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은호에게 계속 말을 건네던 젊은 남자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재훈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하는 거예요?”
“네.”
“주원이도 알아요?”
주원이라는 이름에 은호는 반사적으로 재훈이 걸어온 뒤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늘 재훈의 일행은 주원이 아닌 것 같았다.
“모르실 걸요.”
“그렇구나. 그런데 지금 주원이 저쪽에서 인터뷰하고 있는데.”
“네?”
‘맙소사…….’
“인터뷰 끝나면 이쪽으로 올 거예요. 녀석이 개인적으로 홍송으로 지어진 핀란드 목조 주택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죠.”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지난번에 봤을 때랑 많이 달라진 것 같아 보이네요.”
재훈이 씽긋 웃어 보였다. 따라 웃는 은호의 입술이 어색하게 굳었다.
“하지만 잘 어울리네요.”
“뭐가?”
재훈의 뒤로 그보다 다리가 더 긴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서는 것이 모자의 챙 아래로 보였다. 은호는 챙을 아래로 더 잡아당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글쎄 은호 씨가 여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 뭐야?”
“은호? 채은호?”
“그래.”
“어디?”
모자로 가려진 얼굴 아래에서 은호의 시선은 주원의 구두에 꽂혀 있었다. 고개를 들어야 하는데 석고상처럼 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
재훈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은호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디어 아득할 정도로 잘생긴 주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입가에 천천히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주원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가늘어지고 있었다.
“채은호?”
그녀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발음하는 그의 목소리가 앞 글자에 비해 반음정도 높아진 것으로 보아 그도 지금 그녀만큼이나 놀라고 당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목적지가 여긴지 몰랐어요.”
은호는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서울 예술센터 공모전에서 1등한 차주원 건축사님이신가요?”
여전히 그들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저 완전 팬이에요. 부친이신 차주석 건축사님도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시고요.”
“누구시죠?”
“네, 저는 한강대학 건축과에 재학 중인 미래의 건축학도 최승준이라고 합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반가워요.”
주원은 승준이 정중하게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한번 만나 뵙고 싶어서 제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묵고 계신 숙소를 알아봤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정말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질 않네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엄살과는 달리 승준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르게 피었다 지고 있는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나머지 세 사람은 숨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여자 분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