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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조건
1화
프롤로그(1)
그 일대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청담동에 위치한 한 빌딩. 이 8층 빌딩의 소유주는 2년 전만 해도 업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었다.
최단 기간 동안 엄청난 현금 동원력으로 이 금융 업계에서 단숨에 일인자로 올라선 사람이 바로 이 빌딩의 주인 박일혁 사장이다.
이름만 알려져 있지 그에 대한 어떤 자세한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다 보니 소문만 무성했다. 어느 모 국회의원의 숨겨 둔 자식이라더라. 아니다, 미국 유학파로 주식으로 대부자가 된 사람이라더라 등등.
그를 직접적으로 만나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그가 일하는 꼭대기 층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철문으로 둘러싸인 성이나 다름없다.
이른 아침부터 검정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그 철벽을 노크했다. 안에서 중저음의 목소리로 허락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남자는 조심히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를 따라 들어간 사장실 안은 온통 검정색과 무채색으로 가득했고 색을 띠고 있는 거라고는 그의 목에 단단히 메어져 있는 짙은 파랑색의 넥타이가 전부였다. 기척이 들리자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김 실장.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그게, 이학중 사장이 죽었다고 합니다.”
지구가 내일 멸망한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남자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뭐라고?”
“어제 저녁 퇴근길에 뺑소니차에 치여 죽었다고 합니다.”
“범인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장님 변호사이신 장 변호사님이 유언장에 대해서 대표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1시간 후에 찾아오신다고 합니다.”
“알았어. 나가 봐.”
조심히 문이 닫히자 일혁은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 그리고 갑자기 아파 오는 눈을 감았다.
일혁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온몸으로 터득한 것이 있다면 사람과 관계라는 것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친절을 가장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접근하는 관계, 진실로 포장된 거짓이 가득한 관계들. 그는 관계라는 것을 뒤집어쓴 것들에 신물이 났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돈을 빌려 줄 때 사람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제출한 서류를 통해서만 심사하고 돈을 빌려 주거나 일을 처리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단 한 사람, 고객 가운데 만나서 밥도 먹고 간혹 실없는 대화도 하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학중 사장이었다.
이 사장의 죽음을 듣고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의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그만큼 그의 마음속에 이 사장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 컸다는 말이겠지.
김 실장이 나가고 나서도 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그가 지난날의 회상에 잠겼다. 처음 돈을 빌리러 왔을 때, 반말하는 자신을 향해 이 사장이 했던 말에 이상하게 꿀 먹은 벙어리가 돼 버리고 말았었지.
‘아니. 젊은 사람이 배가 많이 고픈가 봐. 왜 이리 말을 잘라먹어. 자고로 젊은 사람이 밥을 잘 먹어야지. 나랑 밥이나 먹으러 가세.’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왔으면서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며 여유롭기까지 하던 모습.
일혁은 이상하게 그 후로도 밥을 같이 먹자고 권하고 술 한잔하자고 찾아오던 이 사장을 뿌리치지 못하고 끈질긴 권유에 마지못해 나가는 척하며 따라 나가곤 했었다.
그와 함께 밥을 먹는 동안은 식사 시간이 편했던지 평소엔 잘 챙겨 먹지도 않던 자신이 과식을 하기 일쑤였다. 또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없었는데 그가 주는 술잔을 무조건 받아 마시다 주량을 넘겨 비틀거리기도 했었지.
조용한 사장실에 인터폰이 울리고 밖에서 장 변호사가 왔다는 김 실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1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 꿈쩍도 않고 앉아 과거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들어온 장 변호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박 대표님. 안녕하셨습니까?”
“네, 장 변호사님도 안녕하셨습니까? 그나저나 장 변호사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장 변호사가 서류 가방에 들어 있던 노란 봉투 안의 서류 꺼내 그의 앞에서 펼쳐 보였다.
“이 사장님께서 남기신 유언장입니다.”
“그분 유언이 저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사장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일주일 전에 에너지 특허권을 박 대표님께 남기고 싶다고 유언을 변경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박 대표님께 진 부채를 탕감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에너지 특허권이라. 이 사장이 그에게 빌려 간 푼돈보다 훨씬 더 가치가 큰 특허권이다. 요 근래 그 바닥에서 새로 개발한 에너지 특허권을 누가 가져가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고 에너지 관련 업계에서는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정되어 있는 석유는 언제 고갈될지 모르고 석유파동에 따라 가격이 들쑥날쑥하니, 이 업계 쪽에서는 다들 대체 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중에서 히트펌프 시스템 특허 기술은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생활 오폐수 등을 이용해 사용 가능한 고온의 열에너지를 얻는 장치로 흔히 알려져 있다.
또한 난방이나 급탕, 냉방에 이용하는 기계 장치로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장치보다 최대 30% 이상 에너지 절감과 이산화탄소 배출을 75%이상 줄일 수 있으니 잘만 개발하면 그야말로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인 것이다.
이번 연도만 해도 재생 에너지 사업부문에서 500억이 넘는 계약 체결이 예상되고 매년 30%씩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니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시장이다.
이 사장이 개발해 특허 받은 시스템은 다른 시스템보다 운전비가 매우 저렴했다. 이것을 개발하다 보니 회사원들 월급을 주지 못할 정도로 자금 동원력이 떨어져서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돈을 더 빌렸다고 들은 것 같다. 이제 그 특허권을 팔아서 빚을 갚기만 하면 됐었는데.
“그 특허권은 제가 이 사장님께 빌려 드린 돈보다 훨씬 값어치가 높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특허권을 박 대표님께 드리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 사장님의 첫째 따님 이보민 양과 결혼하셔서 이보민 양과 동생 이보율 양의 법적 대리인이 되어 주시는 겁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관계를 만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식사도 같이 하지 않는 그에게 결혼이라니. 거기다 자기 혼자 살기도 벅차 죽을 지경인데 두 여자의 법적 대리인이 되어 그들을 보살피라니.
황당무계한 유언장의 조건에 그는 당연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일혁의 거절의 말을 예상했다는 듯이 장 변호사가 열심히 설득을 시작했다.
“이 사장님이 유일하게 믿고 목숨보다 더 사랑하시는 따님들을 맡길 수 있는 분은 박 대표님뿐이라시면서 자신을 봐서라도 꼭 좀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특허권의 가치를 계산하다 잠깐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일혁이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혼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단칼에 거절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있었지만 장 변호사는 절망했다. 지금 특허권을 뺏어 가기 위해 이 사장의 딸들을 노리고 있는 세력이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을 지킬 수 있는 가장 나은 방법은 박 대표 같은 힘도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자매의 법적 대리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박 대표님께 빌린 돈은 특허권이 팔리는 대로 채무를 변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심란함만을 가득 안고 사장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뒤에서 들려오는 일혁의 물음이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럼 특허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는 겁니까?”
“일단은 첫째 따님이신 이보민 양에게 귀속되고 이보민 양과 결혼하셔서 법적 권리를 얻는 사람이 모든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장 변호사는 대답을 마치고 그대로 사장실을 나섰다.
그가 던지고 간 엄청난 유언에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그는 오후 스케줄을 취소하고 이 사장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는 서울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옆에 위치한 큰 장례식은 평일임에도 조문객이 넘쳐 났다.
세상에 오는 일은 예상할 수 있지만 세상을 떠나는 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노릇이니 산 사람이 나눠 놓은 평일이네 주말이네 하는 것들은 여기에선 의미가 없었다.
일혁이 안으로 들어서자 울음소리와 한탄과 후회를 담은 한숨 소리가 가득했다.
그에게 가장 불편한 곳을 찾으라고 하면 바로 이 장례식장이다. 죽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산 사람들이 기리는 이곳. 그의 얼굴이 저절로 굳어 갔다.
그냥 돌아갈까? 화환만 보내면 됐지. 굳이 조문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합리화시키며 돌아선 그의 다리를 누가 간질간질 잡아당겼다. 고개를 내리니 밑에서 작은 형상 하나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뭔가? 검은 상복을 입고 하얀 리본 핀을 꽂은 귀염상의 여자아이가 그의 바지를 잡아당기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한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아저씨, 바빠요?”
“아니.”
“잘됐다.”
웃으며 잘됐다고 하는 꼬마 숙녀는 그에게 빨간 사과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뭔가? 모르겠다는 그의 표정을 본 꼬마 숙녀는 처음 보는 그에게 사과를 부탁했다.
“사과 좀 깎아 주세요.”
“…….”
평소의 그였다면 무시하며 지나쳤을 텐데 꼬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사과를 손수 깎아 포크까지 꽂아 오물오물하는 저 입 앞에 대령해야 될 것 같았다.
“아저씨. 나 사과 먹고 싶은데?”
꼬마 아이는 그의 다리에 매달려 얼굴을 부비며 그를 애처롭게 올려다봤다. 안 되겠다. 엄마 아빠라도 찾아 주고 가야지. 일혁이 그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조금 있다 깎아 줄게. 근데 엄마는 어디 계시니?”
“엄마? 나 엄마 없는데. 엄마는 하늘나라에 갔어요.”
항상 차분하기만 하던 그가 아이에게 상처를 건드리는 질문을 한 것 같아 순간 당황을 했다. 아이가 상복을 입고 있으니 당연히 가까운 누군가가 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눈치도 없이.
“그럼 아빠는? 아빠는 어디 계시니?”
“이제 아빠도 없는데.”
이런, 아이에게 또다시 잘못된 질문을 던졌다. 이제는 묻기도 미안해진다. 일혁이 신중하게 조용히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여기는 누구랑 왔어?”
“언니!”
“가자. 데려다 줄게.”
그의 품에 안긴 아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했다.
“안 돼. 언니가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는데?”
빈소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아이를 안심시키고 그는 아이가 안내하는 장소로 향했다. 아이가 손짓하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조용하고 엄숙해야 하는 빈소가 고함 소리와 욕하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러니깐 너희 애비가 빌려 간 내 돈 어쩔 거냐고?”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여자 한 명을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서 있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둘러싸여 있는 여자는 전혀 겁에 질려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신다고 해도 당장 드릴 돈이 없습니다. 조만간 아버지께서 발명하신 특허권이 팔리면 충분히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특허권? 그 소리에 일혁의 눈이 재빨리 빈소의 영정 사진으로 향했다. 아! 이럴 수가. 언제나 약속도 없이 찾아와 넉살 좋게 웃어 보이던 이학중 사장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와 이 꼬마 아가씨가 이학중 사장의 딸들이란 말인가. 운명의 신이 짠 판 위에서 체스의 말처럼 놀아난 그는 기가 막힌 우연에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우선은 그의 품에서 터지기 일보 직전의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꼬마 아가씨부터 달래고 저 사태를 처리해야겠다. 뒤따르던 김 실장에게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맡기고 성큼성큼 여자에게로 걷기 시작했다.
두목인 듯 보이는 제일 덩치가 큰 남자가 여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럼 그 특허권이라는 거 당장 팔아. 김진수 사장이 산다고 접촉한 거 알아. 김 사장한테 팔면 되겠네.”
멱살이 잡혔는데도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럴 순 없어요. 아버지의 특허권을 제대로 대접해 주는 회사에 팔 거예요.”
여자가 겁을 먹기는커녕 더 당당하게 말하자 남자는 멱살을 더 세게 쥐어 잡았다. 숨이 막히는지 안 그래도 밀가루같이 하얗던 여자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했다.
“돈 많이 주는 데 팔면 되지. 무슨 말이 이리 많아!”
“싫, 싫어요.”
보민이 끝까지 굴하지 않자 덩치 큰 남자가 결국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보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1화
프롤로그(1)
그 일대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청담동에 위치한 한 빌딩. 이 8층 빌딩의 소유주는 2년 전만 해도 업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었다.
최단 기간 동안 엄청난 현금 동원력으로 이 금융 업계에서 단숨에 일인자로 올라선 사람이 바로 이 빌딩의 주인 박일혁 사장이다.
이름만 알려져 있지 그에 대한 어떤 자세한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다 보니 소문만 무성했다. 어느 모 국회의원의 숨겨 둔 자식이라더라. 아니다, 미국 유학파로 주식으로 대부자가 된 사람이라더라 등등.
그를 직접적으로 만나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그가 일하는 꼭대기 층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철문으로 둘러싸인 성이나 다름없다.
이른 아침부터 검정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그 철벽을 노크했다. 안에서 중저음의 목소리로 허락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남자는 조심히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를 따라 들어간 사장실 안은 온통 검정색과 무채색으로 가득했고 색을 띠고 있는 거라고는 그의 목에 단단히 메어져 있는 짙은 파랑색의 넥타이가 전부였다. 기척이 들리자 책상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김 실장.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그게, 이학중 사장이 죽었다고 합니다.”
지구가 내일 멸망한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남자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뭐라고?”
“어제 저녁 퇴근길에 뺑소니차에 치여 죽었다고 합니다.”
“범인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장님 변호사이신 장 변호사님이 유언장에 대해서 대표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1시간 후에 찾아오신다고 합니다.”
“알았어. 나가 봐.”
조심히 문이 닫히자 일혁은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 그리고 갑자기 아파 오는 눈을 감았다.
일혁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온몸으로 터득한 것이 있다면 사람과 관계라는 것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친절을 가장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접근하는 관계, 진실로 포장된 거짓이 가득한 관계들. 그는 관계라는 것을 뒤집어쓴 것들에 신물이 났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돈을 빌려 줄 때 사람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제출한 서류를 통해서만 심사하고 돈을 빌려 주거나 일을 처리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단 한 사람, 고객 가운데 만나서 밥도 먹고 간혹 실없는 대화도 하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학중 사장이었다.
이 사장의 죽음을 듣고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의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그만큼 그의 마음속에 이 사장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 컸다는 말이겠지.
김 실장이 나가고 나서도 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그가 지난날의 회상에 잠겼다. 처음 돈을 빌리러 왔을 때, 반말하는 자신을 향해 이 사장이 했던 말에 이상하게 꿀 먹은 벙어리가 돼 버리고 말았었지.
‘아니. 젊은 사람이 배가 많이 고픈가 봐. 왜 이리 말을 잘라먹어. 자고로 젊은 사람이 밥을 잘 먹어야지. 나랑 밥이나 먹으러 가세.’
자신에게 돈을 빌리러 왔으면서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며 여유롭기까지 하던 모습.
일혁은 이상하게 그 후로도 밥을 같이 먹자고 권하고 술 한잔하자고 찾아오던 이 사장을 뿌리치지 못하고 끈질긴 권유에 마지못해 나가는 척하며 따라 나가곤 했었다.
그와 함께 밥을 먹는 동안은 식사 시간이 편했던지 평소엔 잘 챙겨 먹지도 않던 자신이 과식을 하기 일쑤였다. 또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없었는데 그가 주는 술잔을 무조건 받아 마시다 주량을 넘겨 비틀거리기도 했었지.
조용한 사장실에 인터폰이 울리고 밖에서 장 변호사가 왔다는 김 실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1시간 동안이나 그 자리에 꿈쩍도 않고 앉아 과거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들어온 장 변호사가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박 대표님. 안녕하셨습니까?”
“네, 장 변호사님도 안녕하셨습니까? 그나저나 장 변호사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장 변호사가 서류 가방에 들어 있던 노란 봉투 안의 서류 꺼내 그의 앞에서 펼쳐 보였다.
“이 사장님께서 남기신 유언장입니다.”
“그분 유언이 저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사장님께서 사고를 당하시기 일주일 전에 에너지 특허권을 박 대표님께 남기고 싶다고 유언을 변경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박 대표님께 진 부채를 탕감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에너지 특허권이라. 이 사장이 그에게 빌려 간 푼돈보다 훨씬 더 가치가 큰 특허권이다. 요 근래 그 바닥에서 새로 개발한 에너지 특허권을 누가 가져가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고 에너지 관련 업계에서는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정되어 있는 석유는 언제 고갈될지 모르고 석유파동에 따라 가격이 들쑥날쑥하니, 이 업계 쪽에서는 다들 대체 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중에서 히트펌프 시스템 특허 기술은 화석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생활 오폐수 등을 이용해 사용 가능한 고온의 열에너지를 얻는 장치로 흔히 알려져 있다.
또한 난방이나 급탕, 냉방에 이용하는 기계 장치로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장치보다 최대 30% 이상 에너지 절감과 이산화탄소 배출을 75%이상 줄일 수 있으니 잘만 개발하면 그야말로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인 것이다.
이번 연도만 해도 재생 에너지 사업부문에서 500억이 넘는 계약 체결이 예상되고 매년 30%씩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니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시장이다.
이 사장이 개발해 특허 받은 시스템은 다른 시스템보다 운전비가 매우 저렴했다. 이것을 개발하다 보니 회사원들 월급을 주지 못할 정도로 자금 동원력이 떨어져서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돈을 더 빌렸다고 들은 것 같다. 이제 그 특허권을 팔아서 빚을 갚기만 하면 됐었는데.
“그 특허권은 제가 이 사장님께 빌려 드린 돈보다 훨씬 값어치가 높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특허권을 박 대표님께 드리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이 사장님의 첫째 따님 이보민 양과 결혼하셔서 이보민 양과 동생 이보율 양의 법적 대리인이 되어 주시는 겁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관계를 만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식사도 같이 하지 않는 그에게 결혼이라니. 거기다 자기 혼자 살기도 벅차 죽을 지경인데 두 여자의 법적 대리인이 되어 그들을 보살피라니.
황당무계한 유언장의 조건에 그는 당연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일혁의 거절의 말을 예상했다는 듯이 장 변호사가 열심히 설득을 시작했다.
“이 사장님이 유일하게 믿고 목숨보다 더 사랑하시는 따님들을 맡길 수 있는 분은 박 대표님뿐이라시면서 자신을 봐서라도 꼭 좀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특허권의 가치를 계산하다 잠깐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일혁이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혼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단칼에 거절의 말을 들을 줄 알고 있었지만 장 변호사는 절망했다. 지금 특허권을 뺏어 가기 위해 이 사장의 딸들을 노리고 있는 세력이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을 지킬 수 있는 가장 나은 방법은 박 대표 같은 힘도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자매의 법적 대리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박 대표님께 빌린 돈은 특허권이 팔리는 대로 채무를 변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심란함만을 가득 안고 사장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뒤에서 들려오는 일혁의 물음이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럼 특허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는 겁니까?”
“일단은 첫째 따님이신 이보민 양에게 귀속되고 이보민 양과 결혼하셔서 법적 권리를 얻는 사람이 모든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장 변호사는 대답을 마치고 그대로 사장실을 나섰다.
그가 던지고 간 엄청난 유언에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그는 오후 스케줄을 취소하고 이 사장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는 서울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옆에 위치한 큰 장례식은 평일임에도 조문객이 넘쳐 났다.
세상에 오는 일은 예상할 수 있지만 세상을 떠나는 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노릇이니 산 사람이 나눠 놓은 평일이네 주말이네 하는 것들은 여기에선 의미가 없었다.
일혁이 안으로 들어서자 울음소리와 한탄과 후회를 담은 한숨 소리가 가득했다.
그에게 가장 불편한 곳을 찾으라고 하면 바로 이 장례식장이다. 죽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산 사람들이 기리는 이곳. 그의 얼굴이 저절로 굳어 갔다.
그냥 돌아갈까? 화환만 보내면 됐지. 굳이 조문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합리화시키며 돌아선 그의 다리를 누가 간질간질 잡아당겼다. 고개를 내리니 밑에서 작은 형상 하나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뭔가? 검은 상복을 입고 하얀 리본 핀을 꽂은 귀염상의 여자아이가 그의 바지를 잡아당기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한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아저씨, 바빠요?”
“아니.”
“잘됐다.”
웃으며 잘됐다고 하는 꼬마 숙녀는 그에게 빨간 사과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뭔가? 모르겠다는 그의 표정을 본 꼬마 숙녀는 처음 보는 그에게 사과를 부탁했다.
“사과 좀 깎아 주세요.”
“…….”
평소의 그였다면 무시하며 지나쳤을 텐데 꼬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사과를 손수 깎아 포크까지 꽂아 오물오물하는 저 입 앞에 대령해야 될 것 같았다.
“아저씨. 나 사과 먹고 싶은데?”
꼬마 아이는 그의 다리에 매달려 얼굴을 부비며 그를 애처롭게 올려다봤다. 안 되겠다. 엄마 아빠라도 찾아 주고 가야지. 일혁이 그의 다리에 매달려 있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조금 있다 깎아 줄게. 근데 엄마는 어디 계시니?”
“엄마? 나 엄마 없는데. 엄마는 하늘나라에 갔어요.”
항상 차분하기만 하던 그가 아이에게 상처를 건드리는 질문을 한 것 같아 순간 당황을 했다. 아이가 상복을 입고 있으니 당연히 가까운 누군가가 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눈치도 없이.
“그럼 아빠는? 아빠는 어디 계시니?”
“이제 아빠도 없는데.”
이런, 아이에게 또다시 잘못된 질문을 던졌다. 이제는 묻기도 미안해진다. 일혁이 신중하게 조용히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여기는 누구랑 왔어?”
“언니!”
“가자. 데려다 줄게.”
그의 품에 안긴 아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했다.
“안 돼. 언니가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는데?”
빈소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아이를 안심시키고 그는 아이가 안내하는 장소로 향했다. 아이가 손짓하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조용하고 엄숙해야 하는 빈소가 고함 소리와 욕하는 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러니깐 너희 애비가 빌려 간 내 돈 어쩔 거냐고?”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여자 한 명을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서 있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둘러싸여 있는 여자는 전혀 겁에 질려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신다고 해도 당장 드릴 돈이 없습니다. 조만간 아버지께서 발명하신 특허권이 팔리면 충분히 빚을 갚을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특허권? 그 소리에 일혁의 눈이 재빨리 빈소의 영정 사진으로 향했다. 아! 이럴 수가. 언제나 약속도 없이 찾아와 넉살 좋게 웃어 보이던 이학중 사장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여자와 이 꼬마 아가씨가 이학중 사장의 딸들이란 말인가. 운명의 신이 짠 판 위에서 체스의 말처럼 놀아난 그는 기가 막힌 우연에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우선은 그의 품에서 터지기 일보 직전의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꼬마 아가씨부터 달래고 저 사태를 처리해야겠다. 뒤따르던 김 실장에게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맡기고 성큼성큼 여자에게로 걷기 시작했다.
두목인 듯 보이는 제일 덩치가 큰 남자가 여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럼 그 특허권이라는 거 당장 팔아. 김진수 사장이 산다고 접촉한 거 알아. 김 사장한테 팔면 되겠네.”
멱살이 잡혔는데도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럴 순 없어요. 아버지의 특허권을 제대로 대접해 주는 회사에 팔 거예요.”
여자가 겁을 먹기는커녕 더 당당하게 말하자 남자는 멱살을 더 세게 쥐어 잡았다. 숨이 막히는지 안 그래도 밀가루같이 하얗던 여자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했다.
“돈 많이 주는 데 팔면 되지. 무슨 말이 이리 많아!”
“싫, 싫어요.”
보민이 끝까지 굴하지 않자 덩치 큰 남자가 결국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보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