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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프롤로그(2)


몇 초 후면 저 큰 손이 얼굴을 강타할 거다. 아프겠지? 그까짓 거, 한 대 맞으면 되지.
눈을 질끈 감고 큰 아픔을 예상하던 그녀는 얼굴을 강타하는 충격이 없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두 개의 팔이 실 타래처럼 꼬여 있었다. 그녀에게로 향하던 굵고 묵직한 팔과 그 팔을 막아 낸 감청색의 팔이 서로 악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힘에서 점점 밀리던 큰 덩치의 남자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팔을 막아 낸 남자가 풍기는 위협적인 포스에 큰 덩치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너, 너는 또 뭐야?”
“나? 이 여자 남편 될 사람.”



1-1


한 바탕의 소동이 지나간 이 사장의 빈소. 좀 전까지만 해도 멱살까지 잡히고 우악스러운 주먹에 맞을 뻔도 했지만 겁에 질린 모습은 보이지 않던 여자는 덩치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당당하고 강한 척했지만 곱게 자란 아가씨로서는 처음 겪는 일일 테지. 일혁의 눈이 초점을 잃은 여자의 눈과 마주했다.
“괜찮아?”
그의 물음에 보민이 바닥을 짚으며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 받자고 한 일 아니야.”
그 조폭같이 생긴 남자들이 들어와 손이 닿는 대로 물건을 던지고 온갖 못된 짓을 하는데도 주위의 어느 누구도 말리거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눈치를 보며 수군댈 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 남자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감사를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보민은 그에게 고마웠다.
“그래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대단한 일을 도와줬다고 계속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보는데 그녀의 얼굴 위로 이 사장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꼭 자기처럼 딸을 키웠군.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이 사장이었는데.
좀 전에 여자를 때리려고 든 손을 막아 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곰같이 생긴 놈이 너는 뭔데 상관이냐 하는데,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 이 여자의 남편이 될 사람이라는 거였다.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그 말을 그 순간에 욱해서 간단하게 내뱉다니.
“아까 내가 한 말은…….”
“무슨 말이요?”
“그러니깐 내가 네 남편이 될 거라고 했던 말.”
“아, 그냥 하신 말씀 아니세요?”
순진한 건지 순진한 척하는 건지.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저 눈빛. 분명히 장 변호사가 이야기했을 텐데.
“나, 박일혁이야.”
“……아! 아버지 유언장에 나오는 그 박일혁 씨?”
그의 이름을 듣고서야 기억이 났다는 티가 역력한 저 표정. 그래 내가 그 박일혁이다. 그의 고개가 끄덕인다.
“어.”
장 변호사님이 아버지가 남긴 그 얼토당토않은 유언장의 내용을 알려 주었을 때 보민은 그냥 웃었다. 참 아버지다운 생각이어서. 얼굴도 알지 못하는 남자랑 결혼이라니.
그리고 장 변호사님이 연락해 남자가 이 유언을 거절했다는 말을 전해 줬을 때 백 번 천 번 상대방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결혼이 어디 어린아이 장난도 아니고. 거기다 어린 동생까지 있는 여자가 뭐가 좋다고 덜컥 결혼이라는 엄청난 도박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분명히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고 들었는데. 보민은 의아함을 숨기지 않고 바로 그를 향해 물었다.
“저랑 결혼 안 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랬지.”
“그런데 왜?”
왜냐고 묻는다면 그도 진짜 모르겠다. 아마 이 사장 때문이겠지. 이래서야 이 사장이 눈도 못 감고 밤마다 자신을 찾아와 눈물 바람일지도 모른다.
“당신 아버지랑 나 꽤 절친한 사이였어. 당신 자매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을 거야. 나를 방패막이로 사용해.”
그녀도 알고 있다. 아버지의 특허권이 꽤나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아버지가 그녀와 그녀의 동생을 생각해서 그런 이상한 유언장을 남겼다는 것도.
물론 이 남자 뒤에 숨는다면 편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한 결혼이 얼마나 유지가 되겠는가. 그 결혼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닐 텐데 처음부터 이 남자에게 기대 버린다면 결혼이 끝나고 나서 그녀는 혼자 설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해져야 한다. 어린 동생을 위해서 혼자의 힘으로 서야 했다. 그녀는 그의 달콤하고 매혹적인 유혹을 뿌리쳤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사양하는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이 조소를 띠었다. 아니 이 여자가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당신네들을 노리고 하이에나 떼처럼 접근하는 무리가 넘쳐 날 거라고,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여자야.
“후회할 텐데.”
“후회를 해도 제가 부딪쳐 보겠습니다. 오늘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까지 거절하는데 그도 더는 권할 생각이 없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이 여자는 인사를 하고 어질러진 빈소를 치우기 시작했다. 일혁은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나왔을 때 밖의 하늘은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가 고개를 올려 컴컴한 하늘에 있을 누군가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 사장, 나는 결혼하자고 했어. 당신 딸이 싫다고 한 거야.”
하늘은 그저 조용한 어둠으로 컴컴함만 가득했고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

첫째 날 자신 옆에서 함께 빈소를 지키던 동생 보율이는 아빠가 엄마 만나러 하늘나라에 갔다는 소리에 울지 않더니 그다음 날에도 아빠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엉엉엉 탈진할 정도로 울어 젖혔다. 아마 아빠가 하늘나라에 가서 잠시 엄마를 만나고 돌아올 거라 생각했나 보다.
“흑흑. 언니, 아빠도 엄마 있는 데 가서 안 오는 거야? 엉엉. 왜 안 오는 거야? 응?”
보민은 서럽게 우는 동생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동생의 울음을 멈출 수 있을까.
“보율아. 아빠가 우리랑 100밤도 넘게 살았으니깐 이제 엄마랑도 100밤 살아야지. 하늘에 있는 엄마가 외로우실 거 아니야.”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날개가 달린 천사라서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거짓말에 울음을 뚝 그치던 동생이 천사 엄마가 외롭다는 소리에 서러운 울음을 멈추고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로 물어 왔다.
“흑, 엄마 많이 외롭대?”
“아마도.”
“그래도, 흑, 나한테 말은 하고 가지. 나도 엄마 보고 싶은데.”
“그래. 언니도 엄마 많이 보고 싶다.”
“언니는 어디 안 갈 거지?”
“그럼, 언니는 아무 데도 안 가.”
그녀를 보며 물어 오는 어린 동생의 맑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절대로 품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서 보민이 동생을 꽉 껴안았다.
그렇게 보율이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다시 웃었다. 보민과 보율 자매는 그렇게 아버지를 마음에서 보내드렸다. 삼일장이 끝나고 두 아가씨는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잠든 보율이를 안고 대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고리가 그냥 돌아간다. 분명히 문을 잠갔던 것 같은데.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간 거실. 누군가 뒤진 흔적이 역력한 집의 모양새에 그녀는 문득 두려워졌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보민은 서둘러 경찰에 신고를 하고는 잃어버린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보석 상자는 그대로 있고 자신의 적금 통장도 그대로고 심지어 보율이 평생을 모은 큰 돼지 저금통도 그대로였다.
금전을 노린 강도가 아니라는 건데. 설마 하며 보민이 아버지의 서재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휑하니 비어 있는 책상이었다.
책상 위에 있어야 할 컴퓨터가 없어진 것을 보고 보민은 얼른 책장으로 향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아버지가 한 번도 빼먹지 않고 하루 일과를 적은 일기장들이 사라졌다. 보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고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더 이상 머물 수는 없겠다.’
단번에 생각을 정리한 보민은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부동산에 집을 내놨고 보율이와 살 작은 오피스텔도 서둘러 계약을 했다.
그러나 아직 특허권은 팔지 못했다. 아버지의 살아생전의 모든 노력과 열정이 담긴 것을 아무에게나 돈만 많이 준다고 팔 수는 없었다. 돈은 좀 적게 받더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사용될 수 있는 곳에 넘기고 싶은 그녀였다.
그게 아니면 아버지의 회사가 계속 특허권을 가지고 있어도 되겠지만 아버지의 회사는 연구에 치중되어 있어서 그 특허를 실전으로 사용하는 곳에 넘기는 것이 좋을 거라는 것이 장 변호사님의 말씀이셨다.
거기다 회사에서 아버지만 믿고 월급도 반납한 채 일했던 직원들이 있다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에게 월급만은 꼭 드리고 싶었다.
결국 도둑이 들어서 더 이상 안전하지 않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진 빚과 직원들의 월급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서는 추억이 가득한 이 집을 팔 수밖에 없었다.
마당에는 그녀가 유치원 다닐 적에 아버지가 나무에 손수 만들어 주신 그네, 아버지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생일 선물로 구해 오신 아기 천사 동상, 어린 보율이를 위해 만들어 놓은 소꿉놀이 세트까지 전부다 아버지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이제 며칠 뒤면 이 집을 여기 두고 두 자매는 나가야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린 동생을 앉혀 놓고 집을 나가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녀에게는 참 힘든 일이었다.
“보율아, 우리 이사 갈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사다 주셨던 사과 인형을 안고는 이사라는 말에 어린 보율이가 눈을 사과처럼 동그랗게 떴다.
“왜? 우리 여기서 살아. 엄마가 읽어 주던 동화책이랑 아빠가 사 준 장난감이랑 전부 여기 있잖아.”
“동화책이랑 장난감 전부 다 가지고 이사 가면 되지?”
“싫어. 여기가 좋아. 여기가 좋단 말이야.”
커다란 눈망울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 저 눈에 눈물이 조금이라도 맺히려고 하면 그 눈물을 걷어 내시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셨는데. 언니인 자신은 단번에 울려 버리고 말았다. 보민이 보율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미안, 보율아.”
보민의 목소리가 울먹울먹하자 보율이 언니의 품에서 벗어나 그녀를 올려다봤다.
“언니 울어? 내가 이사 안 간다고 해서 우는 거야?”
자신이 울면 동생이 불안해할 거다. 보민이 재빨리 눈물을 닦아 내고 동생에게 웃어 보였다.
“울긴 누가? 언니 안 울어.”
보율이 그녀의 품에서 손을 꼼지락꼼지락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언니, 우리 이사 갈까?”
보민이 동생의 사과 같은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언니도 이사 안 가고 싶어. 여기 엄마 아빠랑 보율이랑 언니랑 살았던 곳인데. 가고 싶겠어? 하지만 이 집은 우리 둘만 살기에는 너무 크잖아. 그지?”
작은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인다. 보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중에 우리 보율이가 언니만큼 키가 크면 언니도 부자가 되어 있을 테니깐 그때 다시 여기 집으로 오자. 언니가 약속할게. 꼭 여기로 오는 거야. 알겠지?”
“좋아. 약속이야.”
보율이 작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보민이 작은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꼭 지키겠다는 다짐을 담아.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중요한 것이 생각난 보율이 보민을 향해 물어 왔다.
“그럼 유치원도 옮겨야 하는 거야? 민수가 나 많이 보고 싶어 할 건데?”
“아니야. 유치원은 계속 다녀도 돼. 여기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자.”
“그럼 좋아.”
이사 가는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되었고, 보율은 언니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아침밥을 먹여 동생을 유치원으로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온 보민은 중요하게 가지고 가야 할 것들만 챙겨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전부 팔려고 업체까지 부른 상태였다.
그녀의 눈이 거실에 자리 잡은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로 향했다. 엄마가 치던 피아노. 어릴 적에 그 옆에 앉아 엄마와 같이 딩동딩동하던 추억이 좋아, 엄마와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이 좋아 피아노를 전공했다.
하지만 저 큰 피아노는 그녀가 이사 갈 작은 오피스텔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이었다. 보율이 마지막으로 피아노 건반을 아쉬움이 가득 묻은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녀에게 이 피아노는 엄마였는데. 그녀가 피아노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속삭였다.
‘미안해, 엄마. 많이 미안해. 그런데 엄마는 언제나 내 맘을 알아줬으니깐. 이번에도 이해해 줄 거지?’
띠리리리리. 맞춰 놓은 핸드폰의 알람이 시끄럽게도 울렸다. 피아노 앞에서 일어난 보민이 시계를 확인하고 서둘러 보율을 데리러 파랑새 유치원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동생의 동그란 뒤통수에 매어 준 빨간 리본이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율의 머리를 묶어 주는 것은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묶어 보겠다고 나섰다가 동생을 처키 인형으로 만들어 놓으셨지. 거울을 보고 한바탕 난리가 난 동생을 달래느라 애먹었던 기억에 그녀의 얼굴 위로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