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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욕 2화
#01
띠리리리리리리리리리.
알람 소리에 눈을 뜬 수민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다. 알람을 끄고 몸을 일으켜 전등을 키자 어두컴컴한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다세대 건물 반지하에 있는 작은 단칸방에는 오늘도 햇빛이 들지 않는다. 손바닥만 한 창문이 붙어 있긴 하지만 창밖엔 꽉 막힌 회색빛 시멘트 벽이 보일 뿐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아 늘 방 안은 어두웠다.
수민은 조용히 자신의 잠자리를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화장실과 같이 있는 좁은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낡은 철제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오래된 계단이 보였다.
‘아…… 햇빛.’
계단을 올라오고 나서야 환한 햇빛이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수민은 급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셔 손차양을 만들었다. 눈처럼 하얀 얼굴은 햇빛을 자주 보지 못하는 생활로 인해 더 창백해 보였다.
면 티셔츠와 청바지 위에 감색 카디건을 걸친 그녀의 몸매는 앙상할 정도로 가늘었다. 여린 어깨와 가느다란 다리가 보호본능을 일으킬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수민은 늘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낮부터 저녁까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도착하자 알바생인 유진이 웃으며 인사했다.
“왔어?”
“응. 바빴어?”
“그냥 그래. 아, 저 사람 또 왔어.”
검은색 앞치마를 두르는 수민 곁으로 다가온 유진이 슬쩍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유진이 눈짓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늘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체크무늬 셔츠에 회색 재킷을 입은 남자는 수민이 자신 쪽을 바라보자 당황한 듯 그녀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얼른 돌렸다.
“너 오는 시간 알았는지 이젠 너 오기 직전에만 온다. 정성이 갸륵하지 않니? 한번 만나 주지그래.”
“언니도……. 어서 가 봐. 학원 늦지 않아?”
“아! 맞다. 가 봐야지.”
유진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서둘러 앞치마를 벗었다.
“그럼 나 갈게. 수고해!”
“응. 잘 들어가.”
가방을 메고 부랴부랴 나가던 유진이 문을 열면서도 체크무늬 셔츠 남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눈짓을 했다.
‘후…….’
파이팅 포즈까지 취하며 문을 나서는 유진을 보며 수민이 쓰게 웃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짝사랑하기도 하고 TV 드라마를 보며 혼자 설레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까마득하리만치 오래된 일이었다.
남자는 두렵고, 무서운 존재다.
그 사실을 그녀에게 각인시켜 준 한 남자가 떠오르려 하자 수민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마.’
숨을 들이켠 수민은 포스 앞에 서서 각종 커피머신이 늘어선 조리대를 행주로 닦았다. 떠올리기만 해도 그녀의 심장을 움켜잡는 한 남자를 머릿속에서 지워 내려 괜히 이것저것 정리하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아, 네.”
수민이 본능적으로 대답하며 몸을 돌려 포스 앞으로 갔다.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아직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경직된 얼굴로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허브티 한 잔 주세요.”
“4,500원입니다.”
지폐를 받기 위해 손을 내미는데 순간적으로 닿은 남자의 손이 눈에 띄게 흠칫거렸다. 수민이 고개를 들자 귀까지 빨개진 남자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는 듯 당황해하고 있었다.
“여기 영수증이랑 잔돈이요. 쿠폰 찍어 드릴까요?”
“아…… 네, 네.”
남자는 얼른 지갑에서 도장이 잔뜩 찍힌 쿠폰을 내밀었다. 받아 드는 가느다란 하얀 손에 닿는 남자의 눈길이 열기를 품는다. 그 시선을 무시하며 수민이 도장을 찍은 쿠폰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끄덕거리며 뒤돌아서는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훔쳐본다. 찰나에 닿는 시선들마다 진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수민은 표정 변화 없이 허브티를 만들기 위해 뒤돌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수시로 느낀 그 시선에 적당히 대응할 수 있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엔 전화번호를 묻거나 만나자는 의사를 전해 올 때마다 난처하고 당황스러웠는데 지금은 그저 없는 일처럼 흘려보낼 수 있게 됐다. 그런 시선이나 말에 일일이 신경 쓰고 살기엔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허브티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민이 남자의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돌아서자 그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남자의 그런 시선을 마냥 순진하게 받아들이기는 무리였다. 빚을 갚기 위해 일했던 룸살롱에서 겪은 일들로 이미 남자라는 족속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까…….
지난 3년간 수민과 그녀의 여동생 세린은 어머니의 막대한 병원비와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 때문에 밤낮없이 일을 해야 했다. 암 치료를 받고 있는 어머니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세린의 대기업 직장을 지켜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지만 무리였다.
‘네 얼굴 정도면 충분한데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쥐꼬리만큼 벌지 말고, 좀 크게 벌고 싶지 않아? 생각 있으면 찾아와.’
그나마 시급이 괜찮단 이유로 하고 있던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중에 손님으로 온 남자가 명함을 주고 갔었다. 그 근방은 룸살롱과 클럽이 즐비한 유흥가라 그런 손님들은 그 전에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늘 받자마자 버리던 명함을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상황이 그녀를 한계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명함을 지갑에 넣어 두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수민은 빚쟁이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오는 상황에 이르자 결국 명함을 들고 룸살롱을 찾아가게 됐다.
첫날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만 한참 서성거리다 돌아왔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서성거리다가 결국 계단을 내려가 위압적일 정도로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간 건 서성거린 지 딱 일주일 되던 날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
그 남자가 떠오르자 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에 수민은 과거를 헤매던 기억을 얼른 끊어냈다.
그 꿈 때문일까?
그 남자의 체취가 생생히 떠오르고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주문처럼 읊조리며 개수대에서 컵을 씻는 수민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카페에서 어둑어둑한 집으로 돌아온 수민은 김치를 꺼내 놓고 식은 밥에 물 말아서 대충 끼니를 해결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으려면 빨리 먹고 나가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상을 치우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열렸다.
“어? 세린아. 너 어떻게…….”
3개월간 라오스로 파견을 나갔던 세린이 커다란 가방을 들고 들어서자 수민이 눈을 크게 떴다.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연락 좀 하고 오지. 그랬으면 맛있는 거라도 해 놨을 텐데.”
“놀래켜 주려고. 언니는 어디 가는 길이야?”
세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은 조금 빠진 것 같았지만 하나로 묶은 긴 머리와 생긋 웃는 얼굴은 세린답게 당당해 보였다
“나? 난 편의점 알바 나가려고……. 잘 지냈어? 거기서 많이 힘들었지?”
“고생은. 별로 힘든 것도 없었어. 어쨌든 언니는 야간 알바 그만두라니까 왜 아직 안 그만둔거야? 새벽엔 술 취한 진상 손님도 많고 위험하잖아.”
“이번 주까지만 할 거니까 걱정 마. 언니 갔다 올게, 쉬고 있어.”
한 달 만에 만나는 동생이 반가웠지만 아르바이트 시간에 늦을 수는 없어 수민이 빠르게 집을 나서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