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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스타 2화
‘밥 먹자’라는 말처럼 쉽게 툭툭 내뱉는 연애하자는 민성의 말을 채영은 늘 항상 농담으로 치부해 버리곤 했었다. 솔직히 처음에 저 말을 들었을 땐, 거절하면서도 상당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민성이 별로 깊게 생각하고 내뱉는 말이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채영은 깨닫고 있었다. 자신에게 저 말을 내뱉고 나서도 얼마 가지 않아 다른 여자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리는 그였기에, 연애하자는 말이 절대 진심이 아니란 걸 저절로 알아 버렸다.
하여튼 여러모로 참 특이한 인간이었다, 이민성은. 아마도 다른 여자들에게도 연애하자는 말 참 쉽게 던지겠지. 그러면서 쉽게 여자를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민성의 연애는 결코 길게 가는 법이 없었다. 연애도 그에겐 일종의 놀이인 것같이 느껴질 정도로 참 쉽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막 군대를 제대한 스물두 살의 민성은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웠다. 짧은 머리, 반항적인 눈빛, 그리고 그 눈빛만큼이나 반항적인 성격을 가졌던 그때의 민성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그랬던 녀석이 연예계에서 오래 구르더니 성격이 점점 느물느물하게 변해 갔다. 차라리 어릴 땐 귀여운 맛이라도 있더니.
“유채영, 이거야!”
어느새 갯바위 쪽으로 슥 걸어가서는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오는 민성의 모습이 채영의 눈에 들어왔다. 해맑게 아이처럼 웃는 그 모습에 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민성을 따라 웃었다. 그래도 예전 모습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면 그의 잘생긴 얼굴에 소년같이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봐, 엄청 크지?”
좁은 양동이 안에 들어 있는 물고기를 가리키며 민성이 흥분한 목소리로 채영을 향해 물었다. 아주 강태공이 따로 없었다. 낚시를 하는 게 그렇게 좋을까?
“그래, 엄청 크다.”
“숙소로 가자. 아주머니한테 회 쳐 달라고 부탁해 놨어. 너 오늘 아주 횡재한 거야. 이 몸이 직접 잡은 자연산 참돔을 먹는 게 어디 쉬운 일인지 알아?”
뻐기듯이 하는 민성의 말에 채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쨌든 그를 찾아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빨간 노을이 질 무렵, 빨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회는 정말 일품이었다. 이민성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한 게 깨끗하게 잊힐 정도로 말이다.
“맛있어?”
연신 회를 집어 먹는 채영을 바라보던 민성이 살랑 불어오는 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응. 어떻게 네가 이런 걸 다 낚냐?”
“이 몸이 예전에 태어났으면 이태공으로 이름을 높였을 거다.”
뻐기는 민성의 말에 채영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낚시가 그렇게 좋아?”
“응.”
“왜 좋은데?”
“너 닮아서.”
민성의 말에 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낚시가 자신을 닮다니.
“뭐가 날 닮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게 널 닮았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민성의 말에 채영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칭찬인지 욕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으니까.
“칭찬이야.”
그런 채영의 속내를 읽었는지 민성이 생긋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칭찬이라면 고맙고.”
왠지 모르게 어색한 기분에 채영은 술이 찰랑거리는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싸한 알코올 향이 올라왔지만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모처럼 제대로 된 휴가를 즐기고 있는 기분이랄까? 이민성의 갑작스러운 잠수가 꽤 큰 도움이 될 때도 있다고 생각하며 채영은 히죽 웃으면서 다시 회를 한 점 집어 먹었다.
그때였다. 간만에 느끼는 달콤한 여유를 방해라도 하듯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대기 시작한 것은.
“누구야?”
핸드폰을 드는 채영의 모습에 민성은 한쪽 눈썹을 슬그머니 올리며 물었다.
“주혜리.”
채영은 이번에 기획사에 새로 들어온 신인 여배우의 이름을 말하고는 재빨리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응, 혜리야. 그래, 찾았어. 어, 내일 올라갈 거야. 그래. 내일 보자.”
간단하게 혜리와 통화를 마친 채영은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앞에 앉아 있는 민성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런 채영의 시선에 민성은 한쪽 눈썹을 삐죽 올리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참 여러 사람 걱정시켜.”
“주혜리가 내 걱정을 왜 하는데?”
채영의 말에 민성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자신의 걱정을 왜 하냐니? 주혜리가 이민성을 좋아하는 걸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이상형이 민성이라고 대놓고 떠들고 다니는 주혜리였으니까. 그런데 민성은 참 차갑게 주혜리의 감정을 외면하곤 했다. 대놓고 접근을 하든 말든 일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럴 때 보면 참 냉정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 좋아하잖아, 혜리가.”
“난 별로야, 그런 스타일.”
차가운 민성의 말투에 채영은 슬쩍 입을 삐죽였다. 자기가 보기엔 사람처럼 안 느껴질 정도로 예쁜 주혜리였다. 살아 움직이는 바비 인형이라고 칭송을 받을 만큼 예쁘고 서구적인 얼굴에 몸매마저 예술인 주혜리가 도대체 왜 별로라는 걸까? 더군다나 성격마저 활발하고 애교가 많은 것이 남자들이 딱 좋아할 만한 그런 스타일인데 말이다.
하긴 생각해 보니 이민성이 만나 오던 여자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른 것 같기는 했다. 섹시한 여자보다는 단아한 느낌이 나는 여자들을 선호하던 민성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요즘 민성이 여자를 안 만난 지 꽤 된 것 같았다. 예전엔 정말 쉴 틈 없이 여자를 바꿔 가며 연애를 하더니, 요즘엔 왜 그렇게 조용히 혼자 지내는 걸까?
“그런데 왜 요즘 연애 안 해?”
갑작스럽게 고개를 쳐들은 궁금증을 못 이기고 채영은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민성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민성은 피식 웃으면서 채영을 바라보았다.
“연애해도 네가 별 관심을 안 보이니까.”
예상하지 못한 민성의 대답에 채영은 순간 당황했다.
“또 농담이지?”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볼 겸, 채영이 애써 웃음을 지으며 민성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민성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로 자신의 팔을 올리고는 손에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새까만 눈으로 집요하게 채영을 바라보는 민성이었다.
“난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러면서 던지는 민성의 말에 채영은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
“농담이란 말.”
“뭐?”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잖아, 너는.”
정곡을 찌르는 민성의 말에 채영은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이민성과 이런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건 정말이지 싫은 일이었다. 그 누구보다 어색해지기 싫은 사람이 바로 민성이었으니까.
“배부르다. 그만 일어날래.”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채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뒤돌아서려는데 민성이 또다시 저런 질문을 던졌다.
“몰라.”
일부러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한준혁만큼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할 남자를 아직 못 만났을 뿐. 준혁이 떠나버리고 멈춰 버린 이 심장이 다시 뛰는 날, 이 지겨운 기다림도 끝이 나지 않을까?
“진짜 재미없는 여자라니까. 졌다, 졌어.”
채영의 대답에 민성이 낮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채영을 뒤따라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였다.
“너 때문에 지루해졌으니까 네가 책임져. 재미있는 거 하러 가자.”
그러면서 언제 진지하게 굴었냐는 듯,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민성은 채영을 향해 말했다.
“재미있는 거?”
“그래.”
“뭔데?”
“밤낚시.”
씩 웃으며 하는 민성의 말에 채영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금방 이렇게 자신을 편안하게 대하는 민성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이게 이민성만의 ‘화해의 제스처’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참돔 또 낚아 줘.”
“이태공만 믿어.”
“그래, 믿으마.”
언제 어색했냐는 듯이 이런 식으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이었다. 어느새 노을도 지고, 초승달만 떠 있는 제주도의 푸른 밤길을 말이다.
*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민성 매니저 6년차인 채영은 너무나 손쉽게 낚싯바늘에 떡밥을 끼우고 있었다. 하지만 떡밥 끼우는 것처럼 고기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벌써 민성과 함께 하는 낚시가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흔하게 잡힌다는 피라미 한 마리 낚아 본 일이 없었다. 아마도 낚시의 신에게 엄청난 미움을 받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채영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찌를 바라보다가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채영은 몰래 하품을 하며 낚시에 집중하고 있는 민성을 흘낏 바라보았다. 낚시의 신이 직접 강림이라도 한 건지 민성은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낚시에 집중하고 있었다.
배우라 그런지 참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떨 때는 아이 같고, 어떨 때는 어른스럽고, 어떨 때는 참 차가운 그런 얼굴이었다. 하지만 배우로서 이민성을 봤을 때 채영이 제일 마음에 드는 얼굴은 지금처럼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새까만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매력적인 입술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는 지금 이 모습처럼 말이다.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낚시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알았는데, 민성이 어느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채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몰래 민성을 훔쳐보고 있다가 들킨 게 왠지 모르게 창피해 채영은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답했다.
“이런 잘난 남자 차 버린 거 말이야.”
생긋 웃으면서 하는 민성의 말에 채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헛소리는. 아깝긴 뭐가 아까워? 그리고 나, 잘난 남자 별로 안 좋아하거든. 나같이 평범한 여자가 잘난 남자 만나 봤자 피곤하기만 하지.”
“잘 모르는구나?”
“응?”
“너 안 평범해.”
직구를 날리는 민성의 발언에 채영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어지는 민성의 말은 채영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고 있었다.
“특이하지.”
“뭐?”
“너처럼 얼굴 큰 여자가 흔한 줄 아냐? 그리고 입도 거칠고. 아, 거기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하지? 여자라고 하기엔 좀 그래? 차라리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감인데. 너 힘도 세잖아?”
실실 웃으면서 하는 민성의 말에 채영은 조용히 주먹을 치켜들었다.
“처맞기 싫으면 그만 닥치지?”
“크큭, 진짜 특이해.”
“야!”
“쉿, 고기 다 도망간다.”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낸 민성은 피식 웃으면서 다시 낚시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민성을 바라보며 채영은 부들거리는 주먹을 조용히 꽉 쥘 뿐이었다. 낚시가 끝나면 민성에게 기필코 어퍼컷을 한 대 날리겠다고 굳게 마음먹으면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낚시찌를 바라보다가 민성은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는 허리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런데 허리를 왼쪽으로 돌리는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채영의 모습이 민성의 눈에 들어왔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많이 피곤했는지 낚시 의자에 앉은 채 졸고 있는 채영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게 느껴져 민성은 낚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흘러내리는 단발머리가 커튼처럼 채영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옆에선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가 않았기에.
조심스레 채영 앞으로 다가간 민성은 쪼그리고 앉아서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포동포동하게 올라와 있는 볼 살 ― 본인은 아직도 젖살이라고 우겼다 ― 때문에 서른 살이란 게 믿겨지지 않을 만큼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