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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로망스
1화
프롤로그
두두두두두.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신이 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일곱 남녀의 시선이 일제히 음흉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현태를 향해 쏠렸다. 나이 스물아홉에 모처럼 예전 기분 좀 내 보자며 시작한 게임은 예상외로 흥미진진했다. 누가 걸렸을지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선 다들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진짜 긴장이 되었다. 이번에도 불발일까?
“1번.”
번호를 부르자마자 테이블 중앙 쪽에 앉아 있던 세정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털썩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었다. 다들 작당을 한 것도 모른 채 나한테 왜 이러냐는 얼굴이다.
“5번한테…… 뽀뽀해.”
“5번 누구냐? 뽀뽀해. 뽀뽀해.”
5번? 5번이 누구지? 뽀뽀하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번쩍 고개를 치켜든 세정은 바로 옆자리부터 어지러운 시선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불과 30분 만에 7번이나 걸리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이미 주량을 초과해 버린 탓에 아까부터 속도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 그만하자고 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드는 녀석들의 얼굴을 하나씩 차례로 지나쳐 가던 세정이 확인하지 않은 두 사람을 남겨 놓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구와 승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설마 또 너는 아니겠지. 세정의 흐릿한 눈길이 승주에게로 닿았다. 깔끔하게 매고 있는 넥타이 하며 힘을 준 머리카락, 게다가 여전히 잘생긴 얼굴. 그렇지. 넌 여전히 끔찍할 만큼 잘생겼지.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술기운 탓인지 불쑥 솟아올랐다.
“넌, 아니지?”
그가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툭 던지듯 묻자 승주가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어? 아니라는 건가? 취기가 오른 눈을 깜박이며 세정은 나직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또 승주와 걸렸다면 미션 대신 벌칙을 택하느라 저 큰 잔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 놓은 것을 마셔야 할 판국이다.
뽀뽀를 해 줘야 하는 상대가 진구 녀석이라면 그까짓 뽀뽀 해 줘 버리면 그뿐이었다. 알몸으로 옆에 재운다고 해도 절대 감흥조차 일지 않을 진구였으니 이깟 일로 스캔들이 나기는커녕 다들 흥미도 잃고 말 것이다.
세정이 비틀거리며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왁자지껄한 가게 안의 소음에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어서 끝내 버릴 셈으로 세정은 멀뚱멀뚱 자신을 보고 있는 진구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진구.”
“응?”
“뭐 해? 이리 안 오고?”
“나? 내가 왜?”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구가 손을 흔들더니 외쳤다.
“나 아닌데?”
가뜩이나 어지럽던 시야가 중심을 잃은 채 흔들거렸다. 네가 아니라고? 진구에게 고정되었던 눈길이 천천히 승주에게로 향하였다. 일곱 번 중 다섯 번. 확률로 치면 무려 70%가 넘는 말도 안 되는 일. 설마…….
“내가 5번이야.”
머릿속이 하얘졌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설마는 늘 발등을 찍는 법이니까. 승주는 낮은 한숨과 함께 막대를 내밀었고 믿고 싶지 않지만 분명 5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너, 아니라며?”
“네가 아니냐고 물었잖아. 아니냐고 묻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한 것뿐이야.”
이건 대체 어느 나라 말일까.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하는 세정과 승주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너와. 왜 이렇게나 많이.
“쟤들 또 걸렸어. 니들 오늘 진짜 인연이다.”
“그래. 오늘은 니들의 날인 것 같은데 아주 찐하게 뽀뽀 한 번 해 줘 버려라.”
나이 서른을 목전에 둔 녀석들이 참 신이 났다.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었을까. 그녀의 불편한 심정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한 채 아우성인 녀석들을 노려보다 세정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열기로 한껏 달아오른 눈자위를 꾹꾹 눌렀다.
왕게임에서 3번 연속으로 걸릴 확률을 계산해 보고 싶었지만 머리만 아프다. 오늘은 일진이 사납다며 일찍 들어오라던 엄마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세정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벌주 잔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설마 또 마시게?”
뜨악한 표정으로 세정의 손을 붙든 건 현태였다. 사이좋게 커플 게임에 참여해 우승까지 해놓고도 여전히 데면데면한 승주와 세정의 사이를 좀 풀어 보고자 일부러 게임을 시작한 거였는데 매번 걸릴 때마다 술을 마시는 벌칙을 택하는 세정이 때문에 일은 영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야. 웃자고 하는 게임에 죽자고 달려들지 좀 마라. 뽀뽀 한 번 해 주는 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그래? 네 입술은 뭐 금테 둘렀냐? 너 이미 취했어. 그거까지 마시면 죽을지도 몰라.”
“그럼 죽어 보지 뭐.”
“이야. 오세정 저 독한 계집애.”
하지만 친구들의 만류가 들릴 턱이 없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길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승주에게 뽀뽀하느니 차라리 먹고 쓰러지더라도 술을 마시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달가운 사람은 없을 테니까.
탁. 잔을 두 손으로 집어 든 세정이 보란 듯이 꾸역꾸역 술을 마시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게슴츠레 눈을 뜨자 잔 너머로 어렴풋이 승주가 보였다. 어디까지 가나 해 보자는 심산인지 말릴 생각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있으니 괜한 오기가 솟구쳐 기어이 잔을 비우고 난 세정은 핑 도는 머리를 테이블에 기대었다. 이젠 한계였다. 속도 거북해졌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옆으로 넘어가 버릴 만큼 정신이 혼미해졌다. 정말 힘든 하루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는 말을 하려 손을 드는데 맥이 빠진 현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통에 막대를 담고 흔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제 마지막이다. 다들 취한 것 같은데 이 판만 하고 찢어지자.”
“그래. 시간도 늦었다. 얼른 끝내.”
드디어 끝이 보일 모양이다. 이제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싶었다.
“막판이니까 기왕이면 찐하게 한 번 가자.”
“좋아. 콜!”
“마지막은 벌주 없음. 무조건 미션 수행해라. 안 그러면 다음 모임에서 제외시켜 버릴 테니까.”
“이야. 이거 긴장되는데. 누구 하나 썸씽 생기는 거 아냐?”
자신의 옆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제 것을 훔쳐보느라 기웃거리는 것도 모른 채 세정은 뽑아 든 막대를 아무렇게나 쥐고는 한 손으로는 풀어 두었던 스카프를 챙겼다. 이제 마지막 판이니 누가 걸리든 관심 없었다. 더구나 연속으로 3번이나 걸린 제가 또 걸릴 확률은 로또복권에 맞을 만큼이나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3번, 2번한테 키스해. 그냥 키스 말고 딥 키스.”
왕을 뽑은 건 진구였다. 아무 생각 없이 흐릿한 눈길로 막대를 확인하던 세정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2번. 분명 손에 쥐고 있는 막대의 번호는 2번이었다.
“…….”
벌써 10년 넘게 볼꼴 못 볼 꼴 다 본 이 녀석들 중 누군가가 자신에게 키스를 할 거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졌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개그보다도 더 웃긴 그림이 될 것이 확실했다.
“오오. 이승주 3번.”
그만 가자고 일어서던 세정의 표정이 승주라는 이름에 확 일그러졌다. 이승주라니.
“2번 누구냐? 아름이 너야?”
“아니. 난 4번이야.”
“난 1번.”
서로들 제 번호를 알리는 친구들 틈에서 세정은 쥐고 있던 막대를 바닥에 툭 던져 버리고는 가방과 외투를 움켜쥐었다. 이승주라니.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늦었어. 그만 가자.”
“어차피 다 끝났는데 왜 이렇게 서둘러? 마지막 피날레는 화려하게 장식해야지.”
“어지러워서 찬 바람 좀 쐐야겠다. 먼저 나갈게.”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던 세정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막대를 주워 드는 승주가 들어왔다. 막대를 주워 번호를 확인한 그가 자신을 본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세정은 승주를 바라보았다.
“세정인 몇 번이야?”
누군가의 물음에 다시 한 번 막대를 확인한 승주가 예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을 맞춰 왔다.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싫은 티를 대놓고 냈으니 눈치가 있다면 알겠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지 너도 알겠지.
“그만 가자.”
그가 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세정은 외투와 가방을 챙겨 들고 돌아섰다. 다들 김빠진 얼굴로 그럴까 하며 자리를 정리하려 하는데 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세정.”
“…….”
“너 2번 맞잖아.”
“…….”
“잊었나 본데 마지막엔 벌주 없었다.”
멍한 눈길로 그를 돌아보는 세정에게로 그가 팔을 뻗었다. 인지할 사이도 없이 몸이 당겨지고 뺨을 감싸 오는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오오오. 야유를 퍼붓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이승주의 얼굴을 보면서 세정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숨 쉬는 법을 잠시 잊은 듯했다.
“!”
마침내 거짓말처럼 입술이 닿았다. 입술에 따끈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았다. 세정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바로 눈앞에 있는 승주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너……!”
이승주가 자신에게 뽀뽀했다는 사실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찰나였지만 그 강렬한 느낌에 넋을 잃은 세정은 그가 입술을 떼자마자 버럭 외쳤다. 하지만 실수였다. 승주는 뽀뽀를 끝낸 것이 아니었다. 말을 하려고 벌린 세정의 입술에 그가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아주 강하게.
맙소사. 혀가 들어왔다!
1화
프롤로그
두두두두두.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신이 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일곱 남녀의 시선이 일제히 음흉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현태를 향해 쏠렸다. 나이 스물아홉에 모처럼 예전 기분 좀 내 보자며 시작한 게임은 예상외로 흥미진진했다. 누가 걸렸을지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선 다들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진짜 긴장이 되었다. 이번에도 불발일까?
“1번.”
번호를 부르자마자 테이블 중앙 쪽에 앉아 있던 세정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털썩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었다. 다들 작당을 한 것도 모른 채 나한테 왜 이러냐는 얼굴이다.
“5번한테…… 뽀뽀해.”
“5번 누구냐? 뽀뽀해. 뽀뽀해.”
5번? 5번이 누구지? 뽀뽀하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번쩍 고개를 치켜든 세정은 바로 옆자리부터 어지러운 시선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불과 30분 만에 7번이나 걸리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이미 주량을 초과해 버린 탓에 아까부터 속도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제 그만하자고 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흔드는 녀석들의 얼굴을 하나씩 차례로 지나쳐 가던 세정이 확인하지 않은 두 사람을 남겨 놓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구와 승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설마 또 너는 아니겠지. 세정의 흐릿한 눈길이 승주에게로 닿았다. 깔끔하게 매고 있는 넥타이 하며 힘을 준 머리카락, 게다가 여전히 잘생긴 얼굴. 그렇지. 넌 여전히 끔찍할 만큼 잘생겼지.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술기운 탓인지 불쑥 솟아올랐다.
“넌, 아니지?”
그가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툭 던지듯 묻자 승주가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어? 아니라는 건가? 취기가 오른 눈을 깜박이며 세정은 나직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또 승주와 걸렸다면 미션 대신 벌칙을 택하느라 저 큰 잔에 소주와 맥주를 섞어 놓은 것을 마셔야 할 판국이다.
뽀뽀를 해 줘야 하는 상대가 진구 녀석이라면 그까짓 뽀뽀 해 줘 버리면 그뿐이었다. 알몸으로 옆에 재운다고 해도 절대 감흥조차 일지 않을 진구였으니 이깟 일로 스캔들이 나기는커녕 다들 흥미도 잃고 말 것이다.
세정이 비틀거리며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왁자지껄한 가게 안의 소음에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어서 끝내 버릴 셈으로 세정은 멀뚱멀뚱 자신을 보고 있는 진구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진구.”
“응?”
“뭐 해? 이리 안 오고?”
“나? 내가 왜?”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진구가 손을 흔들더니 외쳤다.
“나 아닌데?”
가뜩이나 어지럽던 시야가 중심을 잃은 채 흔들거렸다. 네가 아니라고? 진구에게 고정되었던 눈길이 천천히 승주에게로 향하였다. 일곱 번 중 다섯 번. 확률로 치면 무려 70%가 넘는 말도 안 되는 일. 설마…….
“내가 5번이야.”
머릿속이 하얘졌다.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설마는 늘 발등을 찍는 법이니까. 승주는 낮은 한숨과 함께 막대를 내밀었고 믿고 싶지 않지만 분명 5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너, 아니라며?”
“네가 아니냐고 물었잖아. 아니냐고 묻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한 것뿐이야.”
이건 대체 어느 나라 말일까.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하는 세정과 승주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너와. 왜 이렇게나 많이.
“쟤들 또 걸렸어. 니들 오늘 진짜 인연이다.”
“그래. 오늘은 니들의 날인 것 같은데 아주 찐하게 뽀뽀 한 번 해 줘 버려라.”
나이 서른을 목전에 둔 녀석들이 참 신이 났다.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었을까. 그녀의 불편한 심정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한 채 아우성인 녀석들을 노려보다 세정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열기로 한껏 달아오른 눈자위를 꾹꾹 눌렀다.
왕게임에서 3번 연속으로 걸릴 확률을 계산해 보고 싶었지만 머리만 아프다. 오늘은 일진이 사납다며 일찍 들어오라던 엄마의 잔소리를 떠올리며 세정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벌주 잔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설마 또 마시게?”
뜨악한 표정으로 세정의 손을 붙든 건 현태였다. 사이좋게 커플 게임에 참여해 우승까지 해놓고도 여전히 데면데면한 승주와 세정의 사이를 좀 풀어 보고자 일부러 게임을 시작한 거였는데 매번 걸릴 때마다 술을 마시는 벌칙을 택하는 세정이 때문에 일은 영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야. 웃자고 하는 게임에 죽자고 달려들지 좀 마라. 뽀뽀 한 번 해 주는 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그래? 네 입술은 뭐 금테 둘렀냐? 너 이미 취했어. 그거까지 마시면 죽을지도 몰라.”
“그럼 죽어 보지 뭐.”
“이야. 오세정 저 독한 계집애.”
하지만 친구들의 만류가 들릴 턱이 없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눈길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승주에게 뽀뽀하느니 차라리 먹고 쓰러지더라도 술을 마시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달가운 사람은 없을 테니까.
탁. 잔을 두 손으로 집어 든 세정이 보란 듯이 꾸역꾸역 술을 마시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게슴츠레 눈을 뜨자 잔 너머로 어렴풋이 승주가 보였다. 어디까지 가나 해 보자는 심산인지 말릴 생각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있으니 괜한 오기가 솟구쳐 기어이 잔을 비우고 난 세정은 핑 도는 머리를 테이블에 기대었다. 이젠 한계였다. 속도 거북해졌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옆으로 넘어가 버릴 만큼 정신이 혼미해졌다. 정말 힘든 하루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는 말을 하려 손을 드는데 맥이 빠진 현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통에 막대를 담고 흔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제 마지막이다. 다들 취한 것 같은데 이 판만 하고 찢어지자.”
“그래. 시간도 늦었다. 얼른 끝내.”
드디어 끝이 보일 모양이다. 이제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니 다행이구나 싶었다.
“막판이니까 기왕이면 찐하게 한 번 가자.”
“좋아. 콜!”
“마지막은 벌주 없음. 무조건 미션 수행해라. 안 그러면 다음 모임에서 제외시켜 버릴 테니까.”
“이야. 이거 긴장되는데. 누구 하나 썸씽 생기는 거 아냐?”
자신의 옆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제 것을 훔쳐보느라 기웃거리는 것도 모른 채 세정은 뽑아 든 막대를 아무렇게나 쥐고는 한 손으로는 풀어 두었던 스카프를 챙겼다. 이제 마지막 판이니 누가 걸리든 관심 없었다. 더구나 연속으로 3번이나 걸린 제가 또 걸릴 확률은 로또복권에 맞을 만큼이나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3번, 2번한테 키스해. 그냥 키스 말고 딥 키스.”
왕을 뽑은 건 진구였다. 아무 생각 없이 흐릿한 눈길로 막대를 확인하던 세정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2번. 분명 손에 쥐고 있는 막대의 번호는 2번이었다.
“…….”
벌써 10년 넘게 볼꼴 못 볼 꼴 다 본 이 녀석들 중 누군가가 자신에게 키스를 할 거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졌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개그보다도 더 웃긴 그림이 될 것이 확실했다.
“오오. 이승주 3번.”
그만 가자고 일어서던 세정의 표정이 승주라는 이름에 확 일그러졌다. 이승주라니.
“2번 누구냐? 아름이 너야?”
“아니. 난 4번이야.”
“난 1번.”
서로들 제 번호를 알리는 친구들 틈에서 세정은 쥐고 있던 막대를 바닥에 툭 던져 버리고는 가방과 외투를 움켜쥐었다. 이승주라니.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늦었어. 그만 가자.”
“어차피 다 끝났는데 왜 이렇게 서둘러? 마지막 피날레는 화려하게 장식해야지.”
“어지러워서 찬 바람 좀 쐐야겠다. 먼저 나갈게.”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던 세정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막대를 주워 드는 승주가 들어왔다. 막대를 주워 번호를 확인한 그가 자신을 본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세정은 승주를 바라보았다.
“세정인 몇 번이야?”
누군가의 물음에 다시 한 번 막대를 확인한 승주가 예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을 맞춰 왔다.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싫은 티를 대놓고 냈으니 눈치가 있다면 알겠지. 내가 너한테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지 너도 알겠지.
“그만 가자.”
그가 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세정은 외투와 가방을 챙겨 들고 돌아섰다. 다들 김빠진 얼굴로 그럴까 하며 자리를 정리하려 하는데 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세정.”
“…….”
“너 2번 맞잖아.”
“…….”
“잊었나 본데 마지막엔 벌주 없었다.”
멍한 눈길로 그를 돌아보는 세정에게로 그가 팔을 뻗었다. 인지할 사이도 없이 몸이 당겨지고 뺨을 감싸 오는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오오오. 야유를 퍼붓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이승주의 얼굴을 보면서 세정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숨 쉬는 법을 잠시 잊은 듯했다.
“!”
마침내 거짓말처럼 입술이 닿았다. 입술에 따끈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와 닿았다. 세정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바로 눈앞에 있는 승주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너……!”
이승주가 자신에게 뽀뽀했다는 사실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찰나였지만 그 강렬한 느낌에 넋을 잃은 세정은 그가 입술을 떼자마자 버럭 외쳤다. 하지만 실수였다. 승주는 뽀뽀를 끝낸 것이 아니었다. 말을 하려고 벌린 세정의 입술에 그가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아주 강하게.
맙소사. 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