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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1)


문제의 발단은 분기별로 한 번씩 가져 오던 동창회 소식이었다.
송년회를 겸해 동창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메일로 받은 세정은 달력을 확인했다. 첫째 주 토요일. 하필이면 할아버지 제사와 같은 날이다. 할머니께 그날 함께 내려간다고 먼저 약속을 했으니 이번 동창회는 빠져야겠구나 싶었다. 그러고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동창회가 열리기 사흘 전. 여전히 단짝으로 지내고 있는 아름이 연락을 해 왔다.
- 이번엔 거의 다 모인다고 하던데 너도 갈 거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연락이 닿은 아이들과 꾸준히 만남을 해 온 터라 어지간해선 모임에 빠진 적이 없었다. 하필 할아버지 제사와 겹치지만 않았다면 분명히 참석했을 세정이었다.
“미안해. 이번엔 못 가겠다. 애들이랑은 나중에 따로 보자.”
- 야, 너 빠지면 애들 서운해할 텐데 같이 가자. 너 현정이 기억하지? 걔도 이번에 나온다고 했단 말이야.
“현정이? 걔 시집갔다고 했나?”
- 응. 벌써 애도 둘이나 있다더라. 워낙 예쁘장해서 학교 다닐 때도 인기 좋았잖아. 남편 따라 미국 가서 살다가 오랜만에 들어왔대. 만나러 갈 거지?
현정이라면 3학년 때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였는데 졸업 후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아 10년 동안 보지 못했다. 그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다니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마음이 흔들렸다.
- 참, 승주도 나온대. 얼마 전에 연수 마치고 들어왔다더라. 근데 승주는 그 여우 같은 애랑 아직도 만나고 있을까?
결정적으로 마음이 흔들린 건 그 대목에서였다. 승주의 이름에 전화기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이승주 이야기는 별로 반갑지 않아. 뭐, 여자 만나는 게 한두 번인가.”
생각과는 다르게 불퉁한 말이 튀어 나갔다.
- 넌 참 이상하더라. 왜 그렇게 승주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걔 너한테 뭐 죄지었니?
“아 몰라. 동창회 나가는 건 일단 생각해 볼게.”
- 꼭 나와. 승주가 진구한테 너 나오는지 물었다더라. 이참에 둘이 사이좋게 좀 지내 봐. 아주 만날 때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불편해 죽겠어.
“생각해 볼게.”
전화를 끊고 난 세정은 곧장 업무에 집중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이승주가 나에 대해 물었다고? 아니, 왜?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에 입사해 대리가 되는 동안 이승주는 군대를 다녀와 졸업을 하고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대기업에 들어가더니 지난해엔 회사 연수프로그램에 참여해 일본을 다녀왔다. 그만큼 인정을 받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러는 동안 가끔 모임에서 만났지만 친하게 구는 다른 애들과는 달리 두 사람 사이는 영 불편했다. 그 원인은 승주만 보면 거리를 두는 세정에게 있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왜였을까? 한 반에 있으면서 제법 친하기까지 했던 그들 사이가 왜 그렇게 틀어져 버렸을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남들에겐 별것 아닌 일이겠지만 자존심이 상했고 상처를 받았었다. 그를 좋아했던 감정을 더는 드러내지 않을 만큼 심하게.
볼 때마다 퉁명스럽게 대하고 잠시 얼굴을 마주치는 것조차 시큰둥해하는 자신이 승주는 왜 궁금했을까. 그건 며칠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마침내 대망의 동창회 날이 되었다.

얼마 전 크게 마음먹고 장만한 원피스는 확실히 제값을 했다. 마치 자신을 위해 일부러 만든 옷처럼 꽤 잘 어울렸다. 비싼 값을 지불한 만큼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그런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돈의 마력이랄까.
거울 앞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점검을 한 세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가볍게 향수를 뿌렸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오다 주방에서 나오던 엄마와 딱 마주쳤다.
“어디 나가?”
갑작스럽게 시골에 가기로 한 약속을 취소하는 바람에 할머니로부터 서운한 소리를 들었던 엄마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세정을 길게 훑어보았다. 그렇게 당부를 해도 선을 볼 때조차 건성으로 차려입고 나가더니 오늘 세정의 스타일을 보고는 눈길이 휘둥그레졌다.
“너, 남자 만나러 가니?”
“남자는 무슨. 동창회 가는 거야.”
“동창회? 그렇게 빼입고?”
“빼입기는……. 아무튼 할머니한텐 죄송하다고 전해 줘. 다음 달쯤 한번 가 볼게.”
“일찍 들어와. 꿈자리가 영 뒤숭숭한 게 식구 중에 누구 하나 사고 치겠어.”
“엄만 늘 꿈 타령이더라.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요. 아버지랑 조심해서 다녀와.”
출근할 때 신던 얕은 단화를 신고 나갔던 세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오더니 신발장에서 몇 번 신지 않았던 구두를 꺼내 신었다. 평상시엔 굽이 높은 구두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오늘은 어쩐지 이 구두를 신고 싶었다. 코트 아래로 쪽 뻗은 다리를 내려다보며 세정은 스스로 만족감에 젖어 씩 웃었다. 좋아. 이만하면 완벽해. 현관을 나서는 그녀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오늘 아침까지도 망설였던 세정이 마음을 바꾼 것은 전적으로 동창회 총무를 맡고 있는 현태의 전화 때문이었다.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어제 밤늦게까지 영화를 보고 자느라 늦잠을 자고 있던 세정은 비몽사몽 전화를 받았는데 대뜸 현태가 말했다.
- 파트너 데려와라.
“동창회라며 무슨 파트너야”
- 매번 같은 얼굴 보는 거 지겹지도 않냐? 송년회 겸해서 하는 거라 좀 특별하게 꾸며 볼까 해. 이제 우리도 다음 달이면 서른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청춘들이 언제까지 솔로로 지낼 수는 없잖아. 대부분 사귀는 사람 데려오기로 동의했으니까 너도 데려와. 커플 게임도 할 거니까 기대해. 상품이 어마어마하다고.
베개를 끌어안고 돌아눕던 세정은 갑작스러운 파트너 동반 소식에 잠이 확 깼다. 이번엔 불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느닷없는 파트너 동반이라니. 게다가 커플 게임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같이 갈 파트너가 없다는 생각에 힘이 쭉 빠졌다.
“관심 없어.”
심드렁한 세정의 대답에 현태가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 상품이 어마어마한데 후회 안 하겠어?
“상품? 뭐 비싼 거라도 주니?
- 이야. 이 속물근성의 오세정 봐라. 상품이 있다니까 그나마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네. 기대해도 좋아. 한 살림 단단히 잡을 수 있을 테니까.
정말이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했다. 같이 갈 근사한 남자만 있다면.
- 어때. 올 거야 말 거야? 다른 애들한테 소식 전하려면 나 바쁘다. 통화 오래 못 해.
“승주도 온대?”
반사작용처럼 승주를 물어 놓고 세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이 덜 깨긴 덜 깬 모양이다. 어쩌자고 승주 소식을 물었을까.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에 베개에 얼굴을 묻던 세정의 귀에 현태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너희 참 웃기다. 만나면 생전 모르는 사람들처럼 굴면서 뭘 서로 궁금해하냐? 승주 그 자식도 전화했더니 너 오냐고 확인하던데.
“…….”
- 승주 얼마 전에 미인대회 출신의 스튜어디스랑 소개팅했어. 꽤 잘되고 있나 보던데 아마 오늘 같이 올걸? 너도 근사한 놈으로 하나 데려와라. 다들 기대하고 있어.
통화를 마치고 났을 때 잠은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소개팅? 지난번에 사귀던 여자랑은 벌써 헤어진 걸까. 세정이 피곤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이승주 때문에 아침부터 머리가 어지럽다.
마지막으로 승주의 얼굴을 본 건 몇 달 전이었다. 모임이 끝나 갈 무렵 잠시 일본에서 귀국했다며 허겁지겁 달려왔던 그가 떠올랐다. 연수 마치고 돌아왔다고 하던데 아주 돌아온 것일까.
“아, 몰라. 나랑은 상관없어.”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쓴 세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스튜어디스? 인물을 안 따진다는 말을 하지 말든가…….”
언젠가 술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여자에게 끌리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대부분 녀석들이 예뻐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던 반면 승주는 말이 잘 통하는 여자, 끌림이 있는 여자를 원했었다. 그래 놓고 늘 만나는 여자는 어딜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미모의 여자들뿐이라니. 대체 이번엔 또 얼마나 예뻐서 이승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미인대회 출신이라는 그 스튜어디스가 내심 궁금해졌다.
그렇게 시작된 고민은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참석하자는 쪽으로 기울었고 온종일 세정은 부산을 떨었다. 목욕탕에 다녀오고 두 시간이 넘게 머리와 화장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제대한 자신의 사촌 동생. 연예인 뺨치는 외모에 180이 넘는 장신의 키. 동창회 파트너로 데려가기엔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어 보였다. 절대 스튜어디스에게 뒤처지지 않을 파트너다. 물론 커플 게임에서 빛을 발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금상첨화일 것이다.

현태네 대학 선배가 운영한다는 레스토랑은 벌써 몇 년째 동창회 장소로 쓰고 있었다. 건물은 3층까지 있었는데 3층을 통째로 쓸 수가 있어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얼마든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음식 맛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것이 흠이긴 했지만.
5시가 조금 지나 건물 앞 주차장에 고급 차 한 대가 멈췄다. 운전석에서 내린 잘생긴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고 세정이 싱긋 웃으며 내렸다. 건물로 들어가던 사람들이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제법 날이 쌀쌀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귀 뒤로 넘겨 주며 남자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라면 누구나 흐물흐물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한 미소였다.
“누나. 약속한 것 잊지 마라. 나 아버지 차 빌려 나오느라 고생한 거 알지?”
“알았으니까 너나 확실히 해. 춥다. 들어가자.”
“나만 믿으라니까. 누나 친구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어. 그럼 어디 구경 좀 해 볼까?”
팔짱을 끼고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 속속 모여드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친구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석규를 향하는 것을 보며 세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야? 애인?”
대답 대신 세정은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자신과 석규를 바라보는 여자들의 눈엔 부러움이 물들어 있었고 남자들의 시선엔 석규의 빼어난 외모에 대한 질투가 섞여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정은 주위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승주가 여기 어딘가에 와 있을 것이다.

승주를 발견한 것은 8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다들 오지 않으려나 보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테이블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세정의 눈길이 이끌리듯 입구로 향하였다. 그곳엔 막 들어선 승주가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