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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외출>





<프롤로그>





벌써 반년 가까이 깨어나지 못하는 긴 잠에 빠진 아란을 성하는 어두운 눈으로 바라봤다. 슬며시 붙잡은 손에 맴도는 따뜻한 온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동그란 눈을 떠서 자신을 바라봐 주지 않는 아란을 향한 원망이 나약한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 이혼해요.

지독하게도 차분한 음성으로 아란은 그렇게 말했었다.

-이제 당신과 살 자신이 없어요.

아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성하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6개월 전에 들었던 아란의 마지막 그 말은 여전히 성하에게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면서도 상처 받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만했는지도 모른다. 아란의 입에선 절대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버거워도 주아란이 유성하가 없는 삶을 선택할 리가 없을 거라 그렇게 자만하고, 자신했다. 그러기에 생기를 잃은 선인장처럼 아란이 바싹 말라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란의 입에서 이혼이란 단어가 나온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지독한 악몽, 정말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그런 악몽이라 여겨질 뿐이었다.
“하…….”
탄식 같은 무거운 한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란을 보는 그의 갈색 눈은 더욱 짙어졌다. 그가 내뿜는 무거운 기운이 병실 공기까지 착 가라앉게 만들었다. 그때 드르륵, 소리가 나며 병실 문이 열렸다.
“선배.”
귓가에 들리는 혜영의 목소리에 성하는 아란의 손을 놓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왔어?”
“네. 아란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네요. 어서 깨어나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혜영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성하는 아란을 바라봤다. 그 역시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이 긴 잠에서 그녀가 깨어나길.
“주치의 선생 말로는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이제 대부분 다 사라졌다는데, 뇌부종도 많이 가라앉았고……. 그런데 이상하게 코마 상태가 너무 오래 가네요.”
아란의 얼굴은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리 심하게 흔들어도 그 잠에서 깨어날 수 없는 혼수 상태였다. 육체적으로는 거의 회복이 되었는데 어째서 아란은 이렇게 긴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마치 깨어나기 싫은 사람처럼 말이다. 혜영은 안타까웠다.
“아무튼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으니까 곧 깨어날 거예요, 우리 아란이.”
혜영의 말에 성하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볼게요, 선배. 힘내시고요.”
“그래, 바쁠 텐데 가 봐. 자주 들여다봐 줘서 고맙다.”
꽉 잠긴 목소리로 답하고, 성하는 묵묵히 아란의 곁을 지켰다. 어느새 창밖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왔다. 성하는 아란을 향해 손을 뻗어, 다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다행히도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한 온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추웠다. 칠흑 같은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란아, 아란아.”
쉼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여전히 아무런 답이 없었다. 어서 빨리 이 부름에 답을 해 주길, 성하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1>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병원에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알코올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소파, TV, 작은 창, 그리고 그 창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어딜까? 병원인 걸까?
입고 있는 옷을 보니 환자복이 맞았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파고들었다.
내 이름이 뭐지?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
머리가 깨질 듯이 밀려오는 통증에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등지고 서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존재하는 걸까?
남자의 얼굴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잘생겼다, 이런 단순한 표현이 아까울 정도로 매혹적인 사람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 그 머리카락 색과 잘 어울리는 갈색 눈동자, 긴 속눈썹, 쭉 뻗은 코.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과 너무 잘 어울리는 붉은 입술까지.남자의 모습은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밀려드는 통증을 잠시 잊고, 넋을 잃고 남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주아란! 아란이 너…… 정말 깨어난 거야?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다급하게 이것저것 묻는 남자의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반쯤 넋을 잃고 남자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이 남자 외모만큼이나 목소리 또한 완벽했다. 너무 낮지도 너무 높지도 않은, 그렇지만 조금은 차가운 고혹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굴까? 자신을 아는 걸까?
“저기…… 실례지만 누구세요?”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남자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것조차 너무 매력적인 남자라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장난이라면 재미없어. 아니면, 그런 식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게 민망해서 모른 척하는 거야?”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와 두 팔로 자신을 가두며 하는 남자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남자의 얼굴이 앞에 있을 뿐인데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후훗, 주아란. 기억이 안 난다면서 왜 날 볼 때 반응은 똑같지?”
그건 자신뿐만 아니라, 어떤 여자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런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는데 어떻게 두근거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그쪽이 아름다워서.”
피식. 남자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그것조차 미치도록 섹시했다. 이 남자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니, 그 전에 내가 누군지 그걸 찾는 것이 더 시급했다.
“장난 그만해. 재미없다고 했지?”
“주아란? 그게 제 이름인가 봐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묻는 자신의 말에 남자의 갈색 눈에 동요의 빛이 일었다. 그러곤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붙잡는 남자였다.
“그만해. 자꾸 그럼 나 화낼 거야.”
“장난이 아니라 정말 기억이 안 나요. 내가 누군지. 그리고 또 그쪽이 누군지. 왜 여기에 내가 있는 건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하!”
남자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인터폰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는 서둘러 간호사를 호출했다.
“담당의 불러 줘요. 지금 당장. 아내가 깨어났는데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합니다.”
남자의 말에 아란은 머리가 멍해졌다. 방금 분명 아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저 남자가 자신의 남편?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도대체 자신은 얼마나 예쁘기에 저런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했을까? 다급하게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거기 놓인 거울을 들었다. 자신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거울에 나타난 자신의 얼굴은 지나치게 평범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하얀 얼굴, 피부가 깨끗하긴 했지만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게 생긴 것이, 예쁘기보단 귀여운 쪽에 가까운 아주 평범한 얼굴. 전혀 저 남자와 매치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정말 저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 맞는 걸까? 아란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했다. 너무 아무 기억이 없으니 놀랄 기력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멍하게 앉아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아란 씨.”
그게 자신의 이름이란다. 자신을 부르는 의사를 아란은 멍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지금이 몇 년도인지 기억하시겠어요?”
“글쎄요. 그것도 잘.”
“지금 나이는?”
“글쎄요.”
의사의 말에 아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느릿하게 답했다.
“이 사람 왜 이러는 겁니까?”
“아무래도 뇌 손상에 의한 기억상실증 같군요. 그때 제가 수술하면서 말씀드렸죠. 이런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끝을 흐리는 의사의 말에 남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6개월 만에 겨우 의식이 돌아왔는데, 이제는 기억상실증이라고요?”
이를 악물며 묻는 남자의 말에 의사 역시 곤란하다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의식을 찾은 걸 기적이라 생각하시고.”
남자는 의사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병실 밖으로 나갔다. 딱 보아하니 성질은 엄청 나쁜 것 같았다. 하긴 저 얼굴에 성격까지 좋으면 너무 부담스럽지. 아직도 아란은 저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주아란 씨.”
“네?”
“몇 가지 검사 좀 받을게요. 간호사 따라가시면 됩니다.”
몇 가지 검사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뇌 사진을 찍어 대고, 심리치료사라는 사람이 들어와 쉴 새 없이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댔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입원해 있던 1인실 병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그런데 아직도 검사할 게 남은 걸까? 병실에 의사 가운을 입고 서 있는 한 여자의 모습에 아란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좀 쉬고 싶었다. 6개월간 의식 없이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고 하더니, 그거 조금 움직였다고 무척이나 많이 피곤했다.
“검사가 아직 남은 거예요?”
목소리가 너무 쌀쌀맞았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여의사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민망해졌다.
“아니, 그게 좀 피곤해서요.”
“아란아.”
여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누구세요? 절 아세요?”
끝내 여자는 눈물을 쏟아 내며 자신을 끌어안았다. 아란아, 아란아, 하고 자신의 이름을 쉼 없이 부르면서 흐느끼는 여자였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여자가 눈물을 닦으며 아란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정말 나도 기억 못 하는 거야? 너랑 제일 친한 친구인 나를? 나 혜영이잖아. 윤혜영.”
“미안해요. 기억이 안 나요.”
아란은 이마를 긁적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친한 친구였던 것 같은데 기억을 못 하는 게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도대체 자신의 기억은 어디로 떠나 버린 걸까? 왜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걸까?
“괜찮아. 좋아질 거야. 다시 기억날 거야.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응?”
무섭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저 답답했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네. 고마워요.”
“말 편하게 해. 우리 친구라니까. 그것도 제일 친한 친구.”
여전히 눈가엔 눈물이 맺힌 채 환하게 웃는 여자의 말에 아란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응. 그럴게.”
“어쨌든 다행이다. 이렇게 깨어나서. 성하 선배가 많이 걱정했어.”
“그게 누군데?”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묻는 아란의 말에 친한 친구라는 혜영은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남편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