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성질은 조금 나쁜 듯 보였지만 아름다운 그 남자를 말하는 걸까? 아직도 그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란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남자가 정말 내 남편이야?”
“응.”
“나랑 어떻게 결혼했지? 그 남자에 비해서 나는 너무…….”
“평범하다고?”
자신의 생각을 읽는 혜영의 말에 아란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기억을 잃어도 자기비하는 여전하네. 너 하나도 안 평범해. 기억 돌아오면 알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특별한 앤지.”
“왜? 나 돈이 많았니?”
“돈은 성하 선배가 많지. 엄청 잘나가는 작곡가잖아.”
“나는? 나는 뭘 했는데?”
남편의 직업이 작곡가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자신의 직업 역시 궁금해졌다. 특별하다 말하는 걸 보니 엄청나게 멋진…….
“좋은 아내였지.”
이어지는 혜영의 답에 아란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별로 마음에 드는 답은 아니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건데. 그러니까 이제 다시 잘 살아. 선배 그동안 마음 많이 졸였어.”
마음을 많이 졸인 남자치고는 태도가 좀 차가웠다. 자신을 대하던 남자를 떠올리며 몰려오는 잠을 쫓기 위해 눈가를 매만졌다.
“피곤한가 보다. 그래, 그럴 만도 해. 6개월 만에 깨어났으니. 얼른 쉬어. 나중에 또 들를게.”
“괜찮은데. 궁금한 것도 많고.”
“선배 곧 올 거야. 궁금한 건 선배한테 물어봐. 나도 또 들를게. 나 이 병원 산부인과에 있어.”
그래서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구나. 이제 좀 의문이 풀렸다. 일어서는 혜영을 향해 아란은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또 보자.”
“그래.”
아쉬운 얼굴로 혜영이 병실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며 아란은 침대에 몸을 눕혔다. 피곤은 한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아니, 아무런 기억이 없어 멍하다고 해야 할까.남편 이름은 성하. 성은 모르겠고, 잘나가는 작곡가라 했다. 거기다 엄청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성격은 조금 차가운 듯하다. 이게 아란이 남편이란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하긴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저 정도 아는 게 어디야.”
자신은 참 단순한 성격을 가진 듯했다. 머리 아픈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싫었다. 이건 타고난 성격 같았다. 길게 고민하기를 포기하고, 아란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몰려오는 잠을 이기기가 너무 힘들었다.
성하는 잠이 들어 있는 아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마음이 잘 진정이 되지 않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아란이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이. 게다가 자신을 보는 아란의 눈빛엔 조금의 애정도 없었다. 너무 따뜻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던 그녀만의 특별한 그 눈빛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외모를 꽤 흥미롭게 바라보는 그런 눈빛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함께 하기 힘들다며 이혼해 달라고 하던 순간에도 아란은 그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너무 절절한 사랑이 느껴져 그 말을 하는 그녀가 오히려 더 안쓰럽게 느껴졌었는데.
“하아.”
어두컴컴한 공기만큼이나 무거운 한숨이 성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아내분이 사고가 나기 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까?”
담당의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성하는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등의 파란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성하는 세게 창틀을 붙잡았다.
“아깐 아내분이 계셔서 말씀을 못 드렸는데,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거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했을 때,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경우 말입니다. 단순 사고로 인한 기억상실이면 뇌가 정상적인 기능을 되찾으면서 자연스레 기억이 돌아올 테지만, 만약 후자라면 조금 더 세심하게 환자분을 살피셔야만 합니다.”
그렇게까지 힘들었던 걸까? 기억을 지우고 싶을 만큼.
“차라리 잘된 걸까?”
씁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성하는 창틀에서 손을 떼었다. 잘되었다, 생각을 하면서도 아란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성하는 다시 천천히 아란의 곁으로 걸음을 옮겨 그녀를 바라봤다.
무엇이 옳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녀를 놓아주어야 하는 걸까?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가슴에 차올랐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못 놓아줘.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이기적이라고 욕을 해도 좋았다. 다시 주아란이 유성하를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기억이 모두 돌아와도 자신을 떠날 수 없게.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더욱더 미치도록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나지막한 성하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병실 안에 울리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에 아란은 스르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머리에 닿아 있던 따뜻한 손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흐릿한 의식에 미치도록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배시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바보같이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아름답다, 정말.”
“그 말 별로 안 좋아해, 나는.”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에 아란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성하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넌 늘 그렇게 나한테 말했었지만.”
“그랬어요?”
역시 사람이 기억을 잃어도 성격은 변하지 않나 보다.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운 아란은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짐을 바라봤다.
“저건 뭐예요?”
“짐 챙겼어. 집에 가려고.”
“집이요?”
“가자. 돌아가야지, 우리 집에.”
성하의 말에 아란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집에 돌아가는 건가? 자신의 집은 어땠을까? 기분이 묘했다. 그가 말한 집이란 단어에.
“그 집엔 누가 살고 있어요?”
“너랑 나.”
“우리 둘뿐이에요? 다른 식구들은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내 가족은?”
아란의 질문에 성하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난 원래 없었고, 너도 혼자된 지 좀 되었어.”
“우리 부모님 돌아가셨어요?”
무거운 표정으로 끄덕여지는 남자의 얼굴에 아란은 어깨를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았다.
“그렇구나. 기억이 없어서 몰랐어요.”
그래서 슬픔 같은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마음이 살짝 아리긴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정말 세상 천지에 가족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네요.”
“그래. 그랬지.”
“그래도 그쪽이…… 아니, 뭐라고 불렀어요, 제가?”
“오빠, 선배, 당신, 자기야 등등. 네가 부르고 싶은 걸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기분에 따라 부르고 싶은 걸로 이 남자를 불렀나 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남자의 성은 유 씨였다. 대단한 발견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씩 알아가는 게 재미있었다.
“그럼 호칭은 제가 알아서 부를게요. 일단은 당신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까요?”
오빠, 여보 라는 표현은 너무 친근해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선배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했다. 이 남자가 자신의 선배였던 기억이 머릿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꽤 고심을 해 말을 꺼냈건만, 남자의 무덤덤한 답이 돌아온다. 뭐라고 부르든 별로 상관이 없나 보다. 자신을 대하는 남자의 태도가 조금 묘하긴 했다. 다정한 것 같기도 하고, 차가운 것 같기도 하고. 남편이라는데 왜 이렇게 이 남자에게 거리감이 들고…….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하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성하의 손길에 아란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뭐하는 거예요?”
“다행히 제법 많이 자랐네.”
커트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단발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자신의 머리는 이미 어제 거울을 통해 확인했다. 뇌수술 때문에 삭발을 했다는데 누워 있는 동안 머리로 영양분이 많이 갔는지 제법 많이 자랐다.
매끈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성하의 행동에 또다시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남편이란 사람에게 이렇게 두근거려도 되는 거야? 심장 떨려서 어떻게 살라고. 이런 느낌이라면 자신이 이 남자를 엄청 사랑한 게 분명했다. 결혼도 혹시 먼저 하자고 한 건 아니겠지? 제발 그것만은 아니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감이 맞을 것 같아 왠지 묻기가 두려웠다.
“날씨 꽤 추워. 잠들어 있는 동안 겨울이 되어 버렸다고.”
성하가 옆에 놓여 있던 털모자를 아란의 머리에 씌워 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준비해. 나가게. 퇴원 수속 다 밟아놓았어. 의사 말이 집에 돌아가는 게 기억을 찾는데 더 도움이 된다더라고.”
살짝 설레었다. 이 남자와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그 러브 스토리가 하나도 생각 안 나는 건 조금 슬펐지만, 차차 기억날 거라 믿으며 아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에 앉아서 멀뚱멀뚱 앞을 보고 있는데, 성하의 몸이 아란을 향해 다가왔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숨결에 아란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안전벨트 매야지.”
다음부턴 이런 건 그냥 말로 해 줬으면 좋겠다. 저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니 숨조차 쉬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예전에 자신은 어떻게 저 얼굴을 매일 마주 보고 살았을까. 심장이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몇 살이에요, 나?”
차에 시동을 걸고 부드럽게 운전을 하는 성하를 힐끗 보며 아란은 궁금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서른.”
“그쪽은?”
“서른둘.”
두 살 차이였구나. 운전하는 성하의 매끈한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 남자는 손도 참 예뻤다. 어쩜 손가락 하나하나가 저렇게 길고 고운지. 만져보고 싶은 그런 손이었다.
“만져.”
그런 아란의 시선을 느꼈는지 성하가 한쪽 손을 핸들에서 떼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네?”
“내 손 만지는 거 좋아했어, 너.”
어쩐지 저 손을 만지고 싶어서 미치겠더라니. 어쨌든 먼저 알아서 내밀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란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성하의 손을 붙잡았다. 부드러운 그 느낌에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러다 기억을 찾기 전에 심장부터 터지는 거 아니야? 괜한 걱정에 그의 손을 붙잡지 않고 있는 다른 한 손을 심장 쪽으로 뻗었다.
“그 버릇은 여전하네.”
“뭐가요?”
“긴장할 때 심장 부근 만지는 거.”
이것도 자신의 습관이었구나. 기억은 잃어도 습관은 변하지 않나 보다.
“우린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어요?”
“삼 년.”
“와, 꽤 오래 살았네요. 그런데 아이는?”
아이에 관한 질문에 남자의 갈색 눈이 살짝 흐려지는 듯했다.
“없었어.”
“그래요? 왜 아이를 안 가졌지?”
“바빴거든.”
“내가요?”
“아니. 내가.”
쳇. 그러면 그렇지. 하긴 잘나가는 작곡가라고 했으니 좀 바빴겠는가.
“우리 둘은 어떻게 결혼했어요? 맞선?”
“아니. 연애결혼. 대학 때 너랑 나, 같은 동아리였어.”
“아, 그럼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는데요? 우리 연애는 길게 했어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걸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이 사람밖에 없었고.
“연애는 길게 안 했어. 연애와 동시에 바로 결혼을 했지.”
“정말요? 신기하네. 누가 먼저 결혼하자고 했어요?”
이 질문은 괜히 했다 싶었다. 잠시 신호 대기에 걸린 틈을 타 자신을 힐끗 보는 성하의 시선에서 아란은 답을 찾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