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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 불꽃>





1화


Prologue





이상한 숲이었다.
마치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 외따로 존재하는 공간처럼 그곳에서는 시간을 비껴 간 나무와 꽃들이 만발했다. 여름이 한창인 지금은 벌써 지고 없어야 할 봄꽃들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고, 겨울에만 잎을 드리우는 토트라 나뭇가지 위로 새하얀 잎들이 무성했다. 만개한 꽃들과 울창한 수목 위를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태고의 새들이 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다녔다. 새들의 거친 날갯짓에 숲 한가운데 자리한 풀밭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라지곤 했다.
까악까악, 머리 위에서 요란하게 울어 대는 새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이 풀밭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바위 위에 마주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어린아이였다.

「……태초에 이 땅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무우족은 육체적, 정신적, 지적, 모든 면에서 보통 인간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무우족의 수명은 보통 삼백 세를 넘으며, 길게는 오백 년을 넘게 사는 이들도 있다.
무우족의 시작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몇 가지 가설들만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중 가장 큰 지지를 받는 설은 죄를 짓고 지상으로 쫓겨난 신의 아들이 무우족의 시조라는 것이다. 무우족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뛰어난 능력들과 긴 수명을 지닌 것은, 이들의 핏속에 녹아 있는 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이 가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그 증거로 신의 자손인 무우족은 인간의 혈통에 구속될 수 없어서 이름을 하나밖에 쓰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무 제국의 사람들도 이 전통을 따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약 이천여 년 전, 무우족의 선조들은 무 제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각 세대 가운데 가장 명철하고 강인한 자가 혈족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어 다스렸다. 무 제국의 황제는 대대로 작게는 제국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크게는 대륙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해 왔다.」


꽤 오랜 시간 이어지던 노인의 말소리가 끊어졌다. 잠시 후, 다시 이어지는 말소리는 무거운 내용 탓인지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위대한 무우족의 후손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뛰어난 능력과 함께 무서운 저주도 짊어져야 함을 뜻한다. 이들의 뛰어난 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신은 무우족의 모든 자손들에게 하나의 굴레를 씌웠다. 무우족은 삼십 세 즈음해서 육체적 성장을 끝내고, 완전한 성체와 능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보통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얻은 대가인 것처럼 이들은 인간적인 감정들을 하나둘 잃어 간다.
그리하여 보통 인간 수명의 한계인 일백 세를 넘어서면서부터 이들은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고, 타인의 감정도 와 닿지 않는, 숨 쉬되 살아 있지 않는 존재들로 변해 간다. 이들의 심장은 열정도, 슬픔도, 절망도,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점점 굳어져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을 하게 된다.
인간적인 감정을 모두 잃어버린 무우족의 영혼은 공허해지고, 그 영혼의 빈자리는 어둠의 기운이 조금씩 잠식해 간다. 어둠에 영혼이 완전히 먹혀 버린 무우족은 모든 이성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 죽음과 파괴를 몰고 오는 악한 존재로 변한다.
무우족의 모든 후손들은 명심하라. 만약 그대의 형제 중 누군가가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어둠의 기운에 영혼을 빼앗기면 그는 더 이상 혈족의 형제가 아니다. 이런 자는 모든 혈족의 적으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이토록 두렵고 사악한 ‘무우족의 저주’를 끊어 버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인데, 어둠의 기운이 영혼을 완전히 삼켜 버리기 전에 ‘운명의 상대’를 찾아 죽어 가는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것이다. 신이 태초부터 예정하신 자신의 ‘운명의 상대’를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만이 굳어 가는 심장을 다시 살리고, 영혼에 깃든 어둠의 기운을 온전히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이다.」


미렝 장로는 읽기를 그치고 자신의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어린 소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갓 열 살이 된 아이는 영민해 보이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이가 오늘 그가 처음으로 언급한 ‘무우족의 저주’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휴우,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좋겠지. 때가 되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일인 것을…….’
아이의 이름은 지무칸, 현 무 제국의 황제 마하칸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오늘은 아이가 한 달에 한 번씩 성지로 그를 찾아와 혈족과 제국의 역사를 배우는 날이었다.
아이의 얼굴 위를 떠돌던 미렝 장로의 시선이 자신의 앞에 펼쳐진 혈족의 역사서 위로 돌아갔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그만큼이나 오래된 필체로 차마 어린아이에게 말해 줄 수 없는 혈족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무우족의 자손들이 ‘운명의 상대’를 찾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됐다. 저주가 시작되면 무우족은 자신의 영혼을 서서히 좀 먹어 가는 어둠의 기운과 싸우며 끝없는 시간을 이 땅 위에서 살아가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대한 무우족으로서의 명예와 의무만이 그들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그들을 이 땅 위에 묶어 두는 이유가 됐다. 과거의 수많은 무우족 황제들과 그 형제들은 영겁같이 이어지는 허무와 고독의 시간들을 견디다가 영혼의 마지막 한 조각이 완전히 어둠에 사로잡히기 직전에 스스로 소멸을 택해 생을 마쳤다. 그들에게 이것은 명예로운 선택이었다.
오직 ‘운명의 상대’를 통해서만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무우족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긴 수명에도 불구하고 수가 점점 줄어 갔고, 지금에 와서는 황제와 몇몇 전사들만이 남게 되었다.
어린 지무칸을 바라보는 미렝 장로의 주름진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무칸은 근 삼백 년 동안 무우족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이였다. 아이는 저 작은 어깨에 제국과 혈족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그의 두 눈에 수많은 감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앞으로 험난한 시간을 살아가야 할 아이를 향한 안타까움. 서서히 사라져 가는 혈족의 미래에 대한 염려. 자신들에게 이토록 무거운 굴레를 씌운 신에 대한 원망.
미렝 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 다 부질없는 생각들인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차라리 빨리 죽을 수만 있다면, 저 세상에서 신을 만나 원망을 하든 애원을 하든, 안 되면 떼라도 한 번 써 볼 텐데…… 쓸모없는 이 목숨은 왜 이리 질긴 것인지…….’
까악까악.
두 사람의 머리 위를 커다란 새 한 마리가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지나갔다.
“……자, 지무칸 님,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마침내 굳게 다물어져 있던 미렝 장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낮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때까지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던 지무칸이 입을 열었다.
“장로님, 결국 모든 무우족은 ‘운명의 상대’를 찾아야 한다는 말인데, 그럼 제게도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말인가요?”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의 눈이 호기심과 흥분으로 반짝였다.
미렝 장로는 입가를 늘이고 웃었다. ‘저주’보다 ‘운명의 상대’에게만 온통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직은 순진한 어린아이다워서였다.
“물론입니다. 부친인 마하칸 님이 진샤이 님을 만나신 것같이 지무칸 님도 꼭 ‘운명의 상대’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늙은 장로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짙푸른 바람 한 줄기가 시간이 비껴 간 깊은 숲 속의 공터를 쓸고 지나갔다.

무 제국의 수도 지안, 황궁 안.
낮 동안 땅 위를 가득 메웠던 열기와 습기도 해가 지고 나자 한풀 꺾였다.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달들은 자취를 감췄고, 영롱한 별들만이 한여름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머리 바로 위에서 빛을 발하는 별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유난히 가깝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한창 물이 오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정원에는 벌레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정원 끄트머리에는 새하얀 돌을 쌓아 만든 황궁의 벽이 등불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무칸, 오늘 혈족의 성지에 다녀왔다고?”
“네, 미렝 장로님을 만나서 무우족의 역사를 공부했어요. 그런데…….”
아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보다 훌쩍 큰 아비를 올려다봤다.
“오늘 장로님이 ‘운명의 상대’에 대해 말씀해 주셨어요.”
“훗, 노인네, 성질도 급하구나. 아직 어린 너를 데리고 무슨 말을 한 거냐?”
무 제국의 황제 마하칸은 아들의 대답에 헛웃음을 흘렸다. 옆에 선 어린 아들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번져 갔다. 하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지무칸의 얼굴은 못내 심각했다.
“그런데 전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말이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 ‘운명의 상대’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나요?”
“아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눈보다 네 심장이 먼저 알아볼 테니까. 죽어 가던 심장이 다시 살아나고, 영혼이 뒤흔들리는 경험은 꽤 강렬하거든. 모를 수가 없지.”
소중한 기억을 더듬는 마하칸 황제의 입가로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나는 세상의 끝을 보러 마지막 여행을 떠났단다. 길고 긴 여행이었어. 결국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눈을 감고 잠이 들었지. 영원히 깨지 않을 생각이었단다. 너무 피곤했거든. 그런데 네 어머니가 몇 해 동안이나 잠들어 있던 나를 흔들어 깨웠단다. 그리고…… 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지.”
그는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돌려 어린 아들과 눈을 맞췄다.
“지무칸, 아들아, 꼭 기억해야 한다. 신의 은총이 네게 임해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쳐서는 안 돼. 명심해라. 네 ‘운명의 상대’는 신이 시작부터 너를 위해 예비하신 단 하나뿐인 영혼의 반려자다. 절대 놓쳐서는 안 돼.”
그 여름밤의 별빛과 함께 아비의 다짐은 어린 지무칸의 영혼 속에 깊게 새겨졌다.





1. 달의 축제





죽은 자들의 육신으로 뒤덮인 벌판은 을씨년스러웠다.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자들의 신음 소리와 비릿한 피비린내가 간간이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지난 한 달 동안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간 전쟁이 이제 막 끝이 났다. 이 전쟁을 시작한 니센국의 국왕은 쓰러졌고, 그에게 이끌려 전투에 뛰어들어야 했던 니센국의 수많은 병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무 제국의 황제 지무칸은 이 참혹한 파괴와 살육의 현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그의 검은 갑옷은 적군의 피를 뒤집어써 핏빛으로 변했고, 손에 들린 칼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냉랭한 눈길로 전쟁터를 한차례 훑어본 그는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것을 신호로 거대한 승리의 함성이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와! 와!”
“무 제국 만세!”
“만세! 전쟁이 끝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무 제국 병사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격이 가득했다. 함성 소리는 오래도록 그칠 줄 모르고 적군의 시신들 위를 떠돌았다.
하지만 승리의 함성 한가운데 선 지무칸 황제는 아무 감흥도 묻어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날카로운 검신에서 핏자국을 닦아 냈다. 그의 무심하고 냉랭한 얼굴에는 방금 격렬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용장의 자랑스러움도, 살아남은 자의 기쁨도, 자신의 제국을 확장한 황제의 자부심도 보이지 않았다. 칼을 칼집에 갈무리해 넣은 지무칸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가슴을 짚었다. 규칙적이고 느린 심장의 움직임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아직도 뛰고 있긴 하는군.’
한 줄기 바람이 전장 위를 훑고 지나가며 비릿한 피비린내를 몰고 왔다.
‘윽!’
피 냄새를 맡자 지무칸의 몸 안에서 뜨겁고 야만스러운 기운이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이 아득히 빨려 들어갔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돌같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의 검은 동공이 붉게 변하더니 점점 눈 전체로 커져 갔다.
“으윽…….”
거친 신음 소리가 굳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지무칸은 자신의 내부를 휘젓는 사나운 기운을 제압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오래지 않아 고개를 든 그의 눈은 본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끝이 가까워져 오는가.’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아무런 살기도 감지하지 못한 지무칸은 무심한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무 제국의 황제여, 제발…… 제발 살려 주시오.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과한 욕심에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이끈 니센국 국왕의 숨이 지금까지도 붙어 있었나 보다. 처참한 몰골로 목숨을 구걸하는 니센국 국왕을 내려다보는 지무칸의 눈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어넣었던 칼을 다시 빼 들고 적장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았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니 부족하나마 목숨으로 죽은 이들에게 사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무칸은 무심히 등을 돌렸다. 전장을 가로지르는 그의 얼굴은 단단한 돌로 깎아 놓은 듯 차갑고 무표정했다. 마치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무 제국의 수도인 지안은 대륙 최대의 도시로, 그 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황궁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건축물이었다.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황궁은 모두 일곱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