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코발트 블루>
「~」는 한국어, “~”는 영어입니다.
1화
프롤로그
“6천.”
“7천.”
“안 돼. 6천5백.”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맞은편에 앉은 금발의 남자를 향해 싱글거리자, 보기 좋은 매끈한 이마가 찡그려졌다.
“후우…… 좋아. 콜.”
인상을 찌푸린 채 대답하자 갈색 머리 남자가 브라보를 외치며 술잔을 부딪쳤다.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칼의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돈도 많은 녀석이. 고작 열흘 휴가에 이렇게까지 뜯어 가야겠어?”
고혹적인 푸른 눈동자가 갈색 머리 남자를 향했다.
“돈 많기로 하면 내가 형에게 비할 바가 되겠어? 잘난 형을 둔 내 고뇌는 어쩌고? 그거에 대한 보상금으로는 턱도 없는 금액이야.”
“하, 말이나 못하면……. 그 대신 제대로 못 하기만 해 봐. 저번처럼 대충 모자 쓰고 클럽 같은 데에 나다니면 위약금 청구할 거니까.”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이는 금발 남자에게 싱글거리던 동생이 물었다.
“걱정 마. 한두 번 해 보는 일도 아니고. 그나저나 병이 도진 걸 보면 또 갑갑증이 인 모양이지?”
“뭐, 좀…… 그래.”
금발 남자가 제 머리칼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그의 코발트블루 빛깔을 머금은 눈동자가 지친 듯 힘이 없어 보여 동생은 더 묻지 않고 빈 술잔에 위스키만 채워 줬다.
“푹 쉬고 와. 그럼 평소처럼 조금은 나아지겠지.”
동생의 위로하는 듯한 말을 들으며 푸른 눈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쯤은…….”
확실히, 지쳐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걸 해도 힘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오로지 낯선 곳으로의 휴가만이 그의 지친 영혼을 달래 줄 수 있다는 걸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형제는 말없이 술잔을 나눴다.
그에게 주어진 짧은 휴가에 대한 비밀을 공유한 술잔이 부딪치고 투명한 위스키 잔 안에서 황금색 액체가 영롱하게 빛났다.
01
코발트빛 짙푸른 바다와 석면으로 지은 새하얀 건물들. 우유 거품 같은 부드러운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수채화 붓으로 물을 많이 섞어 연하게 희석시킨 듯한 블루 컬러로 물들인 하늘. 강렬한 햇빛…….
한여름으로 치달은 지중해의 미코노스 섬은 가히 지상낙원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다.
딱 하나, 길 한가운데서 고장 나 멈춰 버린 렌터카를 제외하면.
「아,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도연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멈춰 선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차 안에서 매끈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시동을 걸려 해도 달칵거리는 헛도는 소리만 들릴 뿐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그리스 섬 한복판에 차가 퍼져 버리다니!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렌터카 직원 에밀리를 생각하니 더욱 짜증이 났다.
「아아! 정말.」
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온 도연이 신경질적으로 차 바퀴를 발로 뻥 찼다.
「아야!」
화풀이를 하려다가 되레 발만 더 아파 인상이 확 구겨졌다. 짜증 나! 도연이 절망적인 기분으로 차 키를 집어 던지려는 순간 옆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누구?
도연이 고개를 돌리자 무척 고가로 보이는 은빛의 매끈한 차 한 대가 쨍한 햇빛을 받으며 번쩍이고 서 있었다.
이런 섬에 저런 차가?
렌터카 목록에 저런 차가 있던가,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짙게 선팅 된 창문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세상에.
도연은 순간 숨을 삼켰다.
창문이 내려가자 선글라스를 낀 짙은 네이비 컬러의 셔츠를 입고 있는 금발의 잘생긴 서양 남자가 나타났다. 고급 패션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의 수려한 외모에 도연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움직이지 못했다. 물론 그녀가 놀란 건 그저 잘생기기만 한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차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목소리도 근사하네.
금발의 남자가 친절하게 묻자 도연은 수려한 외모에 더불어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참으로 완벽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순간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영어 발음은 전형적인 미국식 영어였다.
미국인인가? 잠깐. 그런데 저 남자 분명…….
“안타깝지만 그러네요. 이유도 없이 덜컥 멈춰 버렸어요.”
도연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현재 상태를 그에게 설명하면서도 도연은 시선으로 그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저 닮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유명 할리우드 배우 ‘데이비드 힐’과 매우 흡사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비슷한데, 만약 맞다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 데이비드 힐이 촬영이 아니고서야 이런 휴양지로 휴가를 올 리는 없잖아. 하지만 역시 닮았어…… 대놓고 물어보는 건 실례일까?
도연이 빠르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아. 그래 주면 고맙고요.”
도연은 선뜻 그의 친절에 응하기로 했다. 적어도 남자가 여자보다는 이 거대한 고철덩어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 테니까.
그녀가 하얀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겸연쩍게 웃자 그가 그녀의 차 바로 앞에 제 차를 댔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도연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앉아 있을 때보다 무척 키가 컸고 날렵하고 탄탄해 봬는 상체에 적당히 핏 되는 셔츠와 화이트 진 차림이었다. 서양인답게 작은 머리에 조각 같은 얼굴, 거기에 긴 팔다리와 어딘가 우아한 관능미를 풍기는 여유로운 움직임은 사람의 시선을 절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어지간한 몸매로는 소화하기 힘든 화이트 진이 저렇게 잘 어울리다니.
아마 이 남자는 저 은색 빛깔의 비싸 보이는 외제차를 제외하고도 유명 배우를 닮은 수려한 외모만으로도 상당히 인기가 있을 것이다. 다만 갈색머리인 그 배우와는 달리 이 남자는 광택이 도는 금발이지만…… 아.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도연은 홀린 듯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가까이 다가온 다음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시만 실례.”
“아, 그래요.”
도연이 살짝 옆으로 비켜서자 그가 그녀의 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가 가까이에서 스쳐 지날 때 머스크계열의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닌가? 스킨?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남자와 무척 잘 어울리는 향기였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은밀한 유혹이 느껴지는 향기.
긴 다리를 접어 운전석에 올라탄 그가 차 키로 시동을 걸었다. 달칵, 달칵거리는 공허한 마찰 소리만 들리자 그는 고개를 숙여 계기판을 확인했다. 그러자 남자의 금빛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몇 가지를 더 확인한 그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보닛을 좀 열어 보죠.”
“네.”
도연은 그가 자신을 지나쳐 보닛으로 다가가는 것을 순순히 바라보다가 뒷좌석에 놔둔 장을 봐 온 봉투들로 시선을 옮겼다.
빨리 가서 냉동실 안에 넣어야 되는데…….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에 한창 녹고 있을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니 도연은 자신의 머릿속도 흐물흐물 녹는 기분이었다.
텅.
보닛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근육이 잘 잡힌 팔을 날렵한 허리에 댄 채 보닛 안을 확인했다. 한참 살펴보던 남자가 자신의 차로 돌아가더니 트렁크에서 연장 박스를 가지고 왔다.
“고칠 수 있겠어요?”
“음. 아마도요.”
슬쩍 다가와서 묻는 도연에게 그가 싱긋 웃어 주며 말했다. 남자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반소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의 섬세한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남성적으로 갈라졌다. 그 모습에 자꾸 시선이 뺏겨 도연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온몸으로 페로몬을 발산한다는 남자가 이런 남자를 말하는 거구나.
자신도 모르게 자꾸 시선을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여자들의 이런 시선이 익숙하겠지.
도연이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리자 지나가는 차 안에서 그에게 시선을 빼앗겨 고개를 뒤로 돌려서까지 보는 여자들을 발견했다.
역시 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네.
호기심을 담은 여자들의 시선에 도연은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도 왠지 자신도 그렇게 보일 것 같아 뜨끔한 기분이었다. 일부러 그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서 보닛 안을 살펴보고 만져 보는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이내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시동 걸어 보겠어요?”
“아, 네.”
그가 보닛을 내리며 말하자 도연이 얼른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걸어 보니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명쾌하게 시동이 걸렸다.
「~」는 한국어, “~”는 영어입니다.
1화
프롤로그
“6천.”
“7천.”
“안 돼. 6천5백.”
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맞은편에 앉은 금발의 남자를 향해 싱글거리자, 보기 좋은 매끈한 이마가 찡그려졌다.
“후우…… 좋아. 콜.”
인상을 찌푸린 채 대답하자 갈색 머리 남자가 브라보를 외치며 술잔을 부딪쳤다. 윤기 나는 금발 머리칼의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돈도 많은 녀석이. 고작 열흘 휴가에 이렇게까지 뜯어 가야겠어?”
고혹적인 푸른 눈동자가 갈색 머리 남자를 향했다.
“돈 많기로 하면 내가 형에게 비할 바가 되겠어? 잘난 형을 둔 내 고뇌는 어쩌고? 그거에 대한 보상금으로는 턱도 없는 금액이야.”
“하, 말이나 못하면……. 그 대신 제대로 못 하기만 해 봐. 저번처럼 대충 모자 쓰고 클럽 같은 데에 나다니면 위약금 청구할 거니까.”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이는 금발 남자에게 싱글거리던 동생이 물었다.
“걱정 마. 한두 번 해 보는 일도 아니고. 그나저나 병이 도진 걸 보면 또 갑갑증이 인 모양이지?”
“뭐, 좀…… 그래.”
금발 남자가 제 머리칼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그의 코발트블루 빛깔을 머금은 눈동자가 지친 듯 힘이 없어 보여 동생은 더 묻지 않고 빈 술잔에 위스키만 채워 줬다.
“푹 쉬고 와. 그럼 평소처럼 조금은 나아지겠지.”
동생의 위로하는 듯한 말을 들으며 푸른 눈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쯤은…….”
확실히, 지쳐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걸 해도 힘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오로지 낯선 곳으로의 휴가만이 그의 지친 영혼을 달래 줄 수 있다는 걸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형제는 말없이 술잔을 나눴다.
그에게 주어진 짧은 휴가에 대한 비밀을 공유한 술잔이 부딪치고 투명한 위스키 잔 안에서 황금색 액체가 영롱하게 빛났다.
01
코발트빛 짙푸른 바다와 석면으로 지은 새하얀 건물들. 우유 거품 같은 부드러운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수채화 붓으로 물을 많이 섞어 연하게 희석시킨 듯한 블루 컬러로 물들인 하늘. 강렬한 햇빛…….
한여름으로 치달은 지중해의 미코노스 섬은 가히 지상낙원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다.
딱 하나, 길 한가운데서 고장 나 멈춰 버린 렌터카를 제외하면.
「아,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도연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멈춰 선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차 안에서 매끈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시동을 걸려 해도 달칵거리는 헛도는 소리만 들릴 뿐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그리스 섬 한복판에 차가 퍼져 버리다니!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렌터카 직원 에밀리를 생각하니 더욱 짜증이 났다.
「아아! 정말.」
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온 도연이 신경질적으로 차 바퀴를 발로 뻥 찼다.
「아야!」
화풀이를 하려다가 되레 발만 더 아파 인상이 확 구겨졌다. 짜증 나! 도연이 절망적인 기분으로 차 키를 집어 던지려는 순간 옆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누구?
도연이 고개를 돌리자 무척 고가로 보이는 은빛의 매끈한 차 한 대가 쨍한 햇빛을 받으며 번쩍이고 서 있었다.
이런 섬에 저런 차가?
렌터카 목록에 저런 차가 있던가,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짙게 선팅 된 창문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세상에.
도연은 순간 숨을 삼켰다.
창문이 내려가자 선글라스를 낀 짙은 네이비 컬러의 셔츠를 입고 있는 금발의 잘생긴 서양 남자가 나타났다. 고급 패션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의 수려한 외모에 도연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움직이지 못했다. 물론 그녀가 놀란 건 그저 잘생기기만 한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차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목소리도 근사하네.
금발의 남자가 친절하게 묻자 도연은 수려한 외모에 더불어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참으로 완벽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순간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영어 발음은 전형적인 미국식 영어였다.
미국인인가? 잠깐. 그런데 저 남자 분명…….
“안타깝지만 그러네요. 이유도 없이 덜컥 멈춰 버렸어요.”
도연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현재 상태를 그에게 설명하면서도 도연은 시선으로 그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저 닮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유명 할리우드 배우 ‘데이비드 힐’과 매우 흡사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비슷한데, 만약 맞다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 데이비드 힐이 촬영이 아니고서야 이런 휴양지로 휴가를 올 리는 없잖아. 하지만 역시 닮았어…… 대놓고 물어보는 건 실례일까?
도연이 빠르게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아. 그래 주면 고맙고요.”
도연은 선뜻 그의 친절에 응하기로 했다. 적어도 남자가 여자보다는 이 거대한 고철덩어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 테니까.
그녀가 하얀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겸연쩍게 웃자 그가 그녀의 차 바로 앞에 제 차를 댔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도연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앉아 있을 때보다 무척 키가 컸고 날렵하고 탄탄해 봬는 상체에 적당히 핏 되는 셔츠와 화이트 진 차림이었다. 서양인답게 작은 머리에 조각 같은 얼굴, 거기에 긴 팔다리와 어딘가 우아한 관능미를 풍기는 여유로운 움직임은 사람의 시선을 절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어지간한 몸매로는 소화하기 힘든 화이트 진이 저렇게 잘 어울리다니.
아마 이 남자는 저 은색 빛깔의 비싸 보이는 외제차를 제외하고도 유명 배우를 닮은 수려한 외모만으로도 상당히 인기가 있을 것이다. 다만 갈색머리인 그 배우와는 달리 이 남자는 광택이 도는 금발이지만…… 아.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도연은 홀린 듯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가까이 다가온 다음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시만 실례.”
“아, 그래요.”
도연이 살짝 옆으로 비켜서자 그가 그녀의 차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가 가까이에서 스쳐 지날 때 머스크계열의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닌가? 스킨?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남자와 무척 잘 어울리는 향기였다. 가볍지 않으면서도 은밀한 유혹이 느껴지는 향기.
긴 다리를 접어 운전석에 올라탄 그가 차 키로 시동을 걸었다. 달칵, 달칵거리는 공허한 마찰 소리만 들리자 그는 고개를 숙여 계기판을 확인했다. 그러자 남자의 금빛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몇 가지를 더 확인한 그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보닛을 좀 열어 보죠.”
“네.”
도연은 그가 자신을 지나쳐 보닛으로 다가가는 것을 순순히 바라보다가 뒷좌석에 놔둔 장을 봐 온 봉투들로 시선을 옮겼다.
빨리 가서 냉동실 안에 넣어야 되는데…….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에 한창 녹고 있을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니 도연은 자신의 머릿속도 흐물흐물 녹는 기분이었다.
텅.
보닛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근육이 잘 잡힌 팔을 날렵한 허리에 댄 채 보닛 안을 확인했다. 한참 살펴보던 남자가 자신의 차로 돌아가더니 트렁크에서 연장 박스를 가지고 왔다.
“고칠 수 있겠어요?”
“음. 아마도요.”
슬쩍 다가와서 묻는 도연에게 그가 싱긋 웃어 주며 말했다. 남자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반소매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뚝의 섬세한 근육에 힘이 들어가며 남성적으로 갈라졌다. 그 모습에 자꾸 시선이 뺏겨 도연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온몸으로 페로몬을 발산한다는 남자가 이런 남자를 말하는 거구나.
자신도 모르게 자꾸 시선을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여자들의 이런 시선이 익숙하겠지.
도연이 괜히 목덜미를 매만지며 시선을 돌리자 지나가는 차 안에서 그에게 시선을 빼앗겨 고개를 뒤로 돌려서까지 보는 여자들을 발견했다.
역시 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네.
호기심을 담은 여자들의 시선에 도연은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도 왠지 자신도 그렇게 보일 것 같아 뜨끔한 기분이었다. 일부러 그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서 보닛 안을 살펴보고 만져 보는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이내 그가 고개를 돌렸다.
“시동 걸어 보겠어요?”
“아, 네.”
그가 보닛을 내리며 말하자 도연이 얼른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고 차에 올라 타 시동을 걸어 보니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명쾌하게 시동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