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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정말! 이제 걸리네요.”
도연이 환하게 웃으며 다시 차 문을 열고 나오자 그가 느긋한 포즈로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뻔한 오늘 장 본 것들을 지킬 수 있었네요.”
“그거 다행이네요.”
도연이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하자 그가 서글서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 곳에서 차가 망가지면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정말…… 고마워요.”
“천만에요.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쁜데요.”
그가 쏟아지는 햇빛 아래서 청량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도연의 머리가 순간 멍해졌다. 그의 미소는 정말이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그대로 홀려 버릴 듯한 묘한 페로몬을 지닌…….
마치 데이비드 힐 같은.
“으음. 뭔가 보답을 하고 싶은데…… 저…….”
그의 미소를 올려다보며 도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당장 감사의 표시를 할 만한 게 있나 하고 미간을 좁히고 생각했지만 차에는 방금 장 본 것들과 지갑, 핸드폰밖에 없었다.
돈을 주는 것도 이상하잖아?
도연이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리자 그가 여전히 미소를 담은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배선된 거에 문제가 좀 있어서 살짝 만져 준 것뿐이니까,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
“아뇨. 그렇다고 해도 내가 미안해서 그래요.”
도연이 손을 내젓자 그가 잠시 그녀를 내려다봤다. 선글라스 너머로 비치는 눈동자가 똑바로 자신을 향하자 도연은 왠지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킬까 봐 도연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높게 올려 묶은 윤기 있는 까만 머리칼에 닿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가 말했다.
“음……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네?”
그의 목소리에 도연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차를 몰고 장을 볼 정도면 당신은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같고, 난 이 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식당이고 뭐고 아는 데가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니 당신이 알고 있는 맛있는 곳에서 식사를 사 주지 않겠어요? 난 지금 배가 무척 고픈데.”
미소를 띤 채 상냥하게 묻는 그의 말에 도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그럼 제가 괜찮은 식당으로 안내할게요.”
“그럼 됐네요.”
그도 입술을 끌어 올리며 환하게 웃자 도연도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마주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 다행이야.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사는 건 끔찍이 싫어하는 성격이라 만약 이대로 보답을 하지 못한다면 아마 밤에 잠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제안은 그리 부담스럽지도 않고, 그의 말처럼 자신은 이곳의 숨은 식당들도 한 번씩 탐방해 봤을 정도로 잘 아는 편이었으니까.
도연이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 짓고 있는데 순간 선글라스 너머의 그의 눈동자가 짙어지는 듯했다.
……뭐지?
그의 시선에 도연은 순간 부드럽고 강한 실크 같은 공기가 자신을 둘러싸는 기분이 들었다. 거부할 수도 없을 만큼…… 아니 솔직히 거부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분 좋은 느낌이 온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칭칭 둘러쌌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의 공기가, 지금 우리 주위를 부유하는 공기의 색이 방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듯한 느낌.
쏟아지는 지중해의 햇볕에 피부가 발갛게 익어 가는 것도 모르고 도연과 그의 시선이 얽혀 들었다. 선글라스 너머의 그의 깊은 눈동자가 마치 빨려 들어갈 듯 독특한 분위기로 빛났다. 그때 그가 관능적인 입술을 휘어 올렸다.
“내가 뒤따라갈 테니 먼저 출발해요.”
“아, 네. 그래요.”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도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서둘러 차로 돌아오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바보같이, 정신이 빠져선 뭐 하고 있는 거야?
방금 전 홀린 듯 남자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도연은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차로 지나쳤던 그 여자들처럼 그에게 대놓고 호감을 드러내 놓고 있던 건 아닌지, 자존심마저 상하는 기분이었다. 오늘 처음 본 남자인데…….
벨트를 매며 창밖을 보니 그 남자도 자신의 차로 걸어가고 있었다. 군살이라곤 전혀 없이 탄탄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도연은 머릿속이 엉망으로 얽히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의 그 느낌은 뭐였을까?
1초? 10초? 30초…… 어쩌면 1분?
상대방에게 온전히 시선이 빼앗겨 버린다는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 겪었다. 그것도 방금 처음 만난 상대에게.
“하, 대낮에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네.”
낮게 중얼거린 도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차를 지나쳐 앞질러간 뒤 백미러를 확인하니 그가 따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선글라스를 낀 채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의 여유로운 모습에 도연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온몸에 알 수 없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차를 뒤쫓는 것뿐인데 마치 자신의 몸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이 점차 깊어지더니 심지어 그의 은빛 외제차가 따라온다는 사실에 모든 신경이 쏠려 길을 잘못 들기까지 했다.
하도연. 왜 이래?
이국에서의 낭만적인 로맨스를 바랄 만큼 외로웠던 거야?
“하아. 미쳤어.”
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잘못된 길을 빠져나와 그녀가 아틀리에로 삼고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스튜디오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린 뒤 뒤이어 차를 세운 그에게 다가갔다. 도연이 다가오자 그가 창문을 내렸다.
“우선 장을 본 게 있으니 잠깐 냉장고에 넣고 나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도연이 허리를 숙인 채로 빠르게 설명하자 그가 싱긋 웃었다.
“도와줄까요?”
“아뇨. 괜찮아요. 잠시만 기다려요.”
도연이 생긋 웃고는 자신의 차로 돌아가 뒷좌석에서 봉투들을 빼냈다. 그녀가 봉투들을 품에 안고 빈티지한 블루 색상의 대문을 열고 새하얀 건물로 들어가는 것을 선글라스 안의 연한 코발트빛 매혹적인 눈동자가 응시했다.


도연은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와 장을 봐 온 것들을 대충 냉장고 안에 밀어 넣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손이 바빴다. 빠르게 정리를 끝낸 뒤 냉장고 문을 닫는데 옆에 세워 둔 거울에 시선이 갔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본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아, 엉망이네.”
하나로 질끈 묶은 까만 긴 머리, 민소매 티셔츠 위에 겹쳐 입은 체크무늬 리넨 셔츠와 짧은 청 반바지를 달랑 입은 채였다. 얼굴은 단순히 장을 보러 나갔던 것이라 입술 하나 칠하지 않아 그야말로 맨얼굴이었다.
“……어떡하지?”
들어온 김에 옷을 갈아입을까? 하다못해 립스틱이라도…….
거울 앞에서 잠시 갈등하던 도연은 고개를 푸르르 흔들었다.
그냥 식사 한 끼 하는 것뿐이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에게 잘 보여서 뭘 하려고?
도연은 거울을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띠우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열고 나오자 그가 은색 보닛 위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느른한 관능미를 풍기고 있어 도연은 숨을 삼켰다.
그는 도연을 보고 보닛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면 내 차로 이동하죠. 그게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리 멀진 않은데, 음…… 뭐. 그래요.”
도연이 수긍하고 다가가자 그가 조수석 쪽으로 먼저 걸어가 문을 열어 줬다.
서양인들의 과도한 친절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그가 보여 주는 친절은 왠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아, 고마워요.”
도연은 생긋 웃고 차에 올라탔다. 차에 나고 나서야 차 내에 박힌 익숙한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이 차가 페라리의 신 모델이라는 걸 깨닫자 도연은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떠돌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우아하게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탄 남자가 익숙하게 자동 핸들 각도를 맞췄다. 도연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에게 슬쩍 물었다.
“미국인…… 맞죠? 이름이 뭔가요?”
차를 출발시키려던 그가 그녀 쪽을 힐끗 바라봤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의 눈빛이 묘해지더니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데이비드.”
“맙소사! 당신 정말 데이비드였어요?”
도연이 경악에 찬 눈빛으로 소리치자 그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쿡쿡 웃는 그를 보자 의아스러움을 느낀 도연이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재미있다는 듯 웃던 그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역시 당신도 그렇게 생각한 건가?”
“아니었……어요?”
도연이 아차 한 심정으로 되묻자 그가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걷어 올렸다. 푸른빛의 눈동자가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웠고, 선글라스를 벗은 그의 모습은 확실히 데이비드 힐과 똑 닮아 있었다.
이렇게 닮았는데…… 아니라고?
도연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가 느른한 미소를 담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