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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의 연애담>
1화
PR. 저마다의 사정
1. 그 남자, 차규영의 사정
어릴 적부터 남다른 외모로 인해 그는 노소를 불문하고 여자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하여 저를 보면 지나치게 두꺼운 입술을 들이미는 불쾌한 스킨십이라든가 여장을 시키는 등의 행동을 유도하는 그들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진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단호하게 내칠 만큼 차갑지는 않았다. 그때의 그는 힘없는 어린아이였다. 결코 그녀들의 손안을 벗어날 수 없는.
그러나 조금씩, 나이를 먹을수록 그는 변해 갔다.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을 하지 않는 여자들에 대해 그는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인식이 점점 커져 ‘증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중학교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웬만한 고등학생들과 비슷한 체격에, 생각도 깊고 풍기는 분위기 또한 남다른 그는 폭발적인 타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만 고스란히 물려받아 굳이 나서지 않아도 이목을 끄는 탁월한 미모가 빛을 발했다. 교내에서 그를 모르는 학생들이 없을 만큼, 그는 타인을 압도하는 우월한 외모로 유명해졌다. 때문인지 그를 노리는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부 잘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그는 동화 속 백마 탄 왕자님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그녀들의 관심을 극도로 꺼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야흐로 열네 번째로 맞는 그의 생일.
그는 아침부터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선물을 치우느라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교내에서 예쁘기로 1, 2등을 다투는 여자아이 두 명이 서로의 선물을 먼저 받으라며 싸움 아닌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코앞에서 목격한 이후 그는 처음으로 ‘여자’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여자라는 생물체는, 그에게 있어서 꽤 성가실 뿐더러 이롭지 않은 존재다…… 라고.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그가 자신과 다른 성性을 가진 존재를 피하기 시작한 것은.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빛이 나는 외모로 인해 그는 TV에 나오는 유명 아이돌도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근처 학교의 학생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놀랍게도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이들의(특히 여자들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되도록 조용히, 그리고 아무 탈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팠던 마음이 간절했으므로 그는 고등학교 재학 3년 내내 여자친구들과 열 마디 이상을 나누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별명이 바로 ‘얼음 왕자’.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웃지 않는 싸늘한 얼굴에, 차가운 말투. 그것이 더 멋지게 보였는지 여학생들은 그에 더욱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결심했다. 대학교만큼은, 기필코 여자라는 생물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여대’는 존재해도 ‘남대’는 찾기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여자들이 바글거리는 대학에 진학했던 그의 주변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여자친구를 사귈 의사가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옆자리를 두고 각종 암투를 벌이는 여자들을 지켜보다 못한 그는 결국 군대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소, 소문이 사실이야? 정말 내년에 군대에 가?”
입대를 얼마 두지 않은 어느 날.
일명 그의 ‘추종자’라 불리며 유세를 떠는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같은 학교 여학생 몇몇이 강의가 끝이 나 집에 갈 준비를 하던 그에게 다가왔다. 평소 그의 냉기에 놀라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못 붙이던 그녀들의 갑작스런 등장에 그가 당황하여 입을 다물고 있자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여학생들은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개중엔 그의 옷깃과 바지 자락을 부여잡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흐엉엉! 너 없으면 우린 무슨 낙으로 살아!”
“가지 마! 그냥 면제는 안 돼?”
“우리 졸업할 때까지 입대 미뤄! 응?”
초상이라도 난 듯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여학생들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얘들이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같은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저를 우상처럼 생각하는 그녀들이 부담스러워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하나둘씩 그녀들을 떼어 내고 단호히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웬 여학생 하나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촉!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 강의실에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숨 막히는 정적이 흐름과 동시에 20년간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고이 지켜 왔던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오염되기 시작했다.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었다.
차마, 그녀의 행동을 막을 겨를도 없이.
덕분에 그의 입술은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서 있자 그의 첫 뽀뽀를 빼앗아 간 여학생은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떨어져 나갔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근처 여학생들은 이에 질세라 두툼한 입술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촉! 촉! 촉! 촉!
짧았지만 강한 여운이 남는 접촉. 머리를 텅 비게 만든 기습 뽀뽀 세례에 그는 경련까지 일으키며 주저앉았다. 무려 3분간. 그녀들의 무지막지한 습격을 막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던 스물의 그는 그 이후, 여자라는 생물체가 그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에 붉은 돌기가 돋는 특이 체질로 변했다.
여자에 대한 그의 반감이 한층 더 심화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여자란 생물체는 이롭지 않을 뿐더러, 피해야 하는 걸로도 모자라 소름이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도망치듯 갔던 군대에서 돌아와 일 년이나 휴학을 한 것은 여전히 그에게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크게 마음을 먹고 다시 복학하여 4학기를 보냈지만 증상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괜찮을까 싶어 미국으로 유학도 2년이나 다녀왔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어느 순간 포기하고야 말았다.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어도 1분 이상 여자와의 마찰을 견딜 수 없었으니까…….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그의 씨를 물려줄 종족 번식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저를 두고 싸우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여자란 필요악. 그에게 있어서, 여자란 생물체는 그러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흘러, ‘현재’.
“개강 파티?”
유학을 다녀옴으로 인해 아주 조금은, ‘증상’을 숨기는 요령을 터득한 그는 과거와는 달리 같은 과 여학생들과 몇 마디 나눌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대학 졸업장은 필요했기에 숨 돌릴 틈도 없이 복학 준비를 하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급한 용무라길래 올해 4학년 과대를 맡게 되었다는 같은 과 여학생을 만나 커피를 마시던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말을 꺼내는 그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네! 선배. 오랜만에 오셨잖아요! 보고 싶다고 애들이 난리예요.”
개강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소리였다. 술자리만 생기면 자신에게 들이대는 수많은 여학생들로 인해 개강 파티에 대한 추억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난 그런 거 싫…….”
“싫어하시는 거 잘 알죠! 그런데 선배, 저 좀 봐주세요. 선배가 이번에 복학한다는 소식 듣고 애들이 선배 안 오시면 개강 파티에 안 오겠다고 하는데, 그럼 제가 새내기들한테 뭐가 되겠어요? 제발 부탁드려요. 그날 하루만 얼굴 살짝 비쳐 주시면 그 이후로 절대로 피곤하게 안 할게요! 약속해요!”
“…….”
“선배. 네? 저 좀 살려 주세요. 부탁이에요.”
결코 강제는 아니나 들리는 말은 꽤 강압적이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들어줘야 해, 말아야 해. 두 손을 쓱쓱 비비며 그에게 빌고 있는 과대는 재학 시절 그나마 그에게 들러붙지 않은 눈치 빠른 여학생 중 하나였다. 거의 울음을 터뜨릴 기세로 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는 몇 분 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20분. 그 이상은 힘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추, 충분해요! 오케이, 20분!”
“……!”
“그럼, 전 참석하시는 걸로 알고 갑니다! 꼭 오셔야 해요!”
과대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흔들다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녀의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멀뚱히 서 있던 그는 불쾌한 마찰로 인해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근처 화장실로 뛰어갔다.
쏴아아.
수도꼭지를 열자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과대의 손길이 스쳤던 양손을 가져다 대며 그는 씻고 또 씻었다.
“…….”
비누까지 묻혀 바드득, 바드득 소리를 내며 손을 비비는 병적인 행동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몇 번을 씻어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이 불쾌한 기분은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다. 예전보단 확실히 나아졌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그를 괴롭히는 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길.”
그는 고개를 들어 얼굴을 구기며 거울 앞에 서 있는 창백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여자와의 접촉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남자.
거울에 비춘 스물여덟의 규영은, 그러했다.
2. 그 여자, 윤희수의 사정
대학 4학년을 코앞에 둔 학생들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특히 앞으로의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취업준비생인 경우엔 더더욱.
미래를 뒷받침해 줄 빵빵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남다른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닌 그녀에겐 오직 교수님이 추천해 준 제약회사와의 인턴십 프로그램만이 전부였다.
잘만 한다면 정직원으로도 채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3학년을 마치자마자 휴학까지 하며 지난 6개월간, 열심히 일했다. 커피를 타는 것부터 시작하여 회사 선배들을 따라 발품을 파는 일까지. 궂은일도 마다 않고 밤잠을 설쳐 가며 갖은 고생을 다해 일했건만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그녀에게 돌아온 건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희수 씨가 근래 보기 드문 뛰어난 인재라는 건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회사랑은 진욱 씨가 더 맞을 것 같아. 미안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연락할게요.’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성실히 일했던 6개월이라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당연히 정직원으로 채용되는 것은 자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승자가 진욱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들었다. 코피까지 터져 가며 상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닌 그녀완 다르게, 교묘히 어려운 일은 그녀에게 떠넘기며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에 열을 올리던 진욱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겠어. 회사에서 날 원한다는데. 뭐, 너도 수고했다.’
허탈한 표정으로 짐을 챙기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욱은 싱긋 웃었다. 진욱과의 질기고 질긴 악연이 무려 4년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로도 모자라 그에게 지기까지 했다는 것은, 그녀가 정신을 놓아 버리게 하기 충분했다.
잠깐이었지만 몸담았던 회사를 벗어나면서 그녀를 뽑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둥의 저주를 날리며 펑펑 울었다. 경력은 남겠지만 다시 취업 준비를 걱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휩싸인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그 후로 몇 달간, 무려 1년이나 휴학을 신청했으므로 해가 바뀌기 전의 몇 달 동안 그녀는 뼈아픈 좌절감을 느끼며 넋을 놓고 허송세월을 했다.
그러다 해가 바뀌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졸업이라도 해야 했기에 4학년 복학 신청을 한 그녀는 개강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절친한 친구 서영주를 만났다.
“개강 파티?”
자신이 아닌 진욱을 선택한 회사에 대한 원망 어린 감정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영주를 보자마자 불평불만을 쏟아 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 주던 영주가 돌연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탁 치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응! 이번 개강 파티는 꽤 재밌을 것 같더라구.”
영주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는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재밌을 것 같다니. 무슨 소리야. 그녀는 눈을 빛내는 영주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개강 파티에 대한 기억은 오직 ‘술’로 시작하여 ‘술’로 끝났던 것밖에 없었던 그녀의 심드렁한 물음에 영주는 서둘러 답했다.
“너, 차규영이라고 기억나?”
차규영?
“그게 누…… 아! 그 얼음 왕자?”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웬 남자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 얼음 왕자!”
영주는 그녀의 기억력에 박수를 쳐 줬다.
“갑자기 그 선배는 왜? 유학 간 지 꽤 됐지 않았나?”
유학으로 인해 한국에 없는 선배의 이야기를 꺼내는 영주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다. 물론 그 선배가 대학 생활을 갓 시작한 그녀의 눈에도 충격을 줄 만큼 훌륭한 외모의 유명인이었다는 사실은 기억나지만 친하지는 않았으니까. 몇 번 인사를 나눈 기억밖에 없었던 선배를 떠올리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주는 의아해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그랬지. 그런데 이번 학기에 학교에 돌아온다더라? 그것도 우리랑 같은 4학년으로!”
그래?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응! 더 충격적인 건, 이번 개강 파티에 온대.”
아아.
“과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었던 차규영이 개강 파티에 온다니!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응?”
재밌는 일은 무슨.
“하아아. 차규영이든 뭐든. 지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 선배가 내 취업을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흑. 망할 김진욱. 내 인생에서 도움이 안 되는 놈! 천하의 재수 없는 놈! 일 못해서 확 잘려 버려라!”
닭똥 같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버럭버럭 외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주는 음흉한 표정을 짓곤 입술을 움직였다.
“취업 때문에…… 많이 힘들지?”
“그래.”
“그럼, 공짜 술이나 얻어먹으러 갈까? 개강 파티. 가 보자!”
“싫어. 그런 데를 왜 가.”
학과생들 중 그녀가 일했던 제약회사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한 사람은 그녀와 진욱뿐이었다. 몇 달 전 끝난 그 프로그램의 최종 승자가 진욱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 그런 상황에서 개강 파티에 간다면 씁쓸한 위로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 더욱 상처받기 싫어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에게 들러붙으며 영주는 속삭였다.
1화
PR. 저마다의 사정
1. 그 남자, 차규영의 사정
어릴 적부터 남다른 외모로 인해 그는 노소를 불문하고 여자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하여 저를 보면 지나치게 두꺼운 입술을 들이미는 불쾌한 스킨십이라든가 여장을 시키는 등의 행동을 유도하는 그들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진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단호하게 내칠 만큼 차갑지는 않았다. 그때의 그는 힘없는 어린아이였다. 결코 그녀들의 손안을 벗어날 수 없는.
그러나 조금씩, 나이를 먹을수록 그는 변해 갔다.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을 하지 않는 여자들에 대해 그는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인식이 점점 커져 ‘증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중학교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웬만한 고등학생들과 비슷한 체격에, 생각도 깊고 풍기는 분위기 또한 남다른 그는 폭발적인 타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부모님의 우월한 유전자만 고스란히 물려받아 굳이 나서지 않아도 이목을 끄는 탁월한 미모가 빛을 발했다. 교내에서 그를 모르는 학생들이 없을 만큼, 그는 타인을 압도하는 우월한 외모로 유명해졌다. 때문인지 그를 노리는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부 잘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그는 동화 속 백마 탄 왕자님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그는 그녀들의 관심을 극도로 꺼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야흐로 열네 번째로 맞는 그의 생일.
그는 아침부터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선물을 치우느라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교내에서 예쁘기로 1, 2등을 다투는 여자아이 두 명이 서로의 선물을 먼저 받으라며 싸움 아닌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코앞에서 목격한 이후 그는 처음으로 ‘여자’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여자라는 생물체는, 그에게 있어서 꽤 성가실 뿐더러 이롭지 않은 존재다…… 라고.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그가 자신과 다른 성性을 가진 존재를 피하기 시작한 것은.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빛이 나는 외모로 인해 그는 TV에 나오는 유명 아이돌도 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가 다니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근처 학교의 학생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놀랍게도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이들의(특히 여자들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되도록 조용히, 그리고 아무 탈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팠던 마음이 간절했으므로 그는 고등학교 재학 3년 내내 여자친구들과 열 마디 이상을 나누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별명이 바로 ‘얼음 왕자’.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웃지 않는 싸늘한 얼굴에, 차가운 말투. 그것이 더 멋지게 보였는지 여학생들은 그에 더욱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결심했다. 대학교만큼은, 기필코 여자라는 생물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여대’는 존재해도 ‘남대’는 찾기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여자들이 바글거리는 대학에 진학했던 그의 주변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여자친구를 사귈 의사가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옆자리를 두고 각종 암투를 벌이는 여자들을 지켜보다 못한 그는 결국 군대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소, 소문이 사실이야? 정말 내년에 군대에 가?”
입대를 얼마 두지 않은 어느 날.
일명 그의 ‘추종자’라 불리며 유세를 떠는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같은 학교 여학생 몇몇이 강의가 끝이 나 집에 갈 준비를 하던 그에게 다가왔다. 평소 그의 냉기에 놀라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못 붙이던 그녀들의 갑작스런 등장에 그가 당황하여 입을 다물고 있자 순식간에 그를 둘러싼 여학생들은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개중엔 그의 옷깃과 바지 자락을 부여잡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흐엉엉! 너 없으면 우린 무슨 낙으로 살아!”
“가지 마! 그냥 면제는 안 돼?”
“우리 졸업할 때까지 입대 미뤄! 응?”
초상이라도 난 듯 그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여학생들로 인해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얘들이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같은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저를 우상처럼 생각하는 그녀들이 부담스러워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하나둘씩 그녀들을 떼어 내고 단호히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웬 여학생 하나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촉!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 강의실에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숨 막히는 정적이 흐름과 동시에 20년간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고이 지켜 왔던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오염되기 시작했다.
너무도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었다.
차마, 그녀의 행동을 막을 겨를도 없이.
덕분에 그의 입술은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서 있자 그의 첫 뽀뽀를 빼앗아 간 여학생은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떨어져 나갔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근처 여학생들은 이에 질세라 두툼한 입술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촉! 촉! 촉! 촉!
짧았지만 강한 여운이 남는 접촉. 머리를 텅 비게 만든 기습 뽀뽀 세례에 그는 경련까지 일으키며 주저앉았다. 무려 3분간. 그녀들의 무지막지한 습격을 막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던 스물의 그는 그 이후, 여자라는 생물체가 그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온몸에 붉은 돌기가 돋는 특이 체질로 변했다.
여자에 대한 그의 반감이 한층 더 심화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여자란 생물체는 이롭지 않을 뿐더러, 피해야 하는 걸로도 모자라 소름이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도망치듯 갔던 군대에서 돌아와 일 년이나 휴학을 한 것은 여전히 그에게 무서운 존재로 인식되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크게 마음을 먹고 다시 복학하여 4학기를 보냈지만 증상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괜찮을까 싶어 미국으로 유학도 2년이나 다녀왔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어느 순간 포기하고야 말았다.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어도 1분 이상 여자와의 마찰을 견딜 수 없었으니까…….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그의 씨를 물려줄 종족 번식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저를 두고 싸우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여자란 필요악. 그에게 있어서, 여자란 생물체는 그러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은 흘러, ‘현재’.
“개강 파티?”
유학을 다녀옴으로 인해 아주 조금은, ‘증상’을 숨기는 요령을 터득한 그는 과거와는 달리 같은 과 여학생들과 몇 마디 나눌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대학 졸업장은 필요했기에 숨 돌릴 틈도 없이 복학 준비를 하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급한 용무라길래 올해 4학년 과대를 맡게 되었다는 같은 과 여학생을 만나 커피를 마시던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말을 꺼내는 그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네! 선배. 오랜만에 오셨잖아요! 보고 싶다고 애들이 난리예요.”
개강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소리였다. 술자리만 생기면 자신에게 들이대는 수많은 여학생들로 인해 개강 파티에 대한 추억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난 그런 거 싫…….”
“싫어하시는 거 잘 알죠! 그런데 선배, 저 좀 봐주세요. 선배가 이번에 복학한다는 소식 듣고 애들이 선배 안 오시면 개강 파티에 안 오겠다고 하는데, 그럼 제가 새내기들한테 뭐가 되겠어요? 제발 부탁드려요. 그날 하루만 얼굴 살짝 비쳐 주시면 그 이후로 절대로 피곤하게 안 할게요! 약속해요!”
“…….”
“선배. 네? 저 좀 살려 주세요. 부탁이에요.”
결코 강제는 아니나 들리는 말은 꽤 강압적이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했다. 들어줘야 해, 말아야 해. 두 손을 쓱쓱 비비며 그에게 빌고 있는 과대는 재학 시절 그나마 그에게 들러붙지 않은 눈치 빠른 여학생 중 하나였다. 거의 울음을 터뜨릴 기세로 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는 몇 분 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20분. 그 이상은 힘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추, 충분해요! 오케이, 20분!”
“……!”
“그럼, 전 참석하시는 걸로 알고 갑니다! 꼭 오셔야 해요!”
과대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흔들다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녀의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멀뚱히 서 있던 그는 불쾌한 마찰로 인해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근처 화장실로 뛰어갔다.
쏴아아.
수도꼭지를 열자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에 과대의 손길이 스쳤던 양손을 가져다 대며 그는 씻고 또 씻었다.
“…….”
비누까지 묻혀 바드득, 바드득 소리를 내며 손을 비비는 병적인 행동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몇 번을 씻어도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이 불쾌한 기분은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다. 예전보단 확실히 나아졌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그를 괴롭히는 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길.”
그는 고개를 들어 얼굴을 구기며 거울 앞에 서 있는 창백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여자와의 접촉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남자.
거울에 비춘 스물여덟의 규영은, 그러했다.
2. 그 여자, 윤희수의 사정
대학 4학년을 코앞에 둔 학생들의 마음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특히 앞으로의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취업준비생인 경우엔 더더욱.
미래를 뒷받침해 줄 빵빵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남다른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닌 그녀에겐 오직 교수님이 추천해 준 제약회사와의 인턴십 프로그램만이 전부였다.
잘만 한다면 정직원으로도 채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3학년을 마치자마자 휴학까지 하며 지난 6개월간, 열심히 일했다. 커피를 타는 것부터 시작하여 회사 선배들을 따라 발품을 파는 일까지. 궂은일도 마다 않고 밤잠을 설쳐 가며 갖은 고생을 다해 일했건만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그녀에게 돌아온 건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희수 씨가 근래 보기 드문 뛰어난 인재라는 건 사실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회사랑은 진욱 씨가 더 맞을 것 같아. 미안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연락할게요.’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성실히 일했던 6개월이라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당연히 정직원으로 채용되는 것은 자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승자가 진욱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들었다. 코피까지 터져 가며 상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닌 그녀완 다르게, 교묘히 어려운 일은 그녀에게 떠넘기며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에 열을 올리던 진욱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겠어. 회사에서 날 원한다는데. 뭐, 너도 수고했다.’
허탈한 표정으로 짐을 챙기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욱은 싱긋 웃었다. 진욱과의 질기고 질긴 악연이 무려 4년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로도 모자라 그에게 지기까지 했다는 것은, 그녀가 정신을 놓아 버리게 하기 충분했다.
잠깐이었지만 몸담았던 회사를 벗어나면서 그녀를 뽑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둥의 저주를 날리며 펑펑 울었다. 경력은 남겠지만 다시 취업 준비를 걱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휩싸인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그 후로 몇 달간, 무려 1년이나 휴학을 신청했으므로 해가 바뀌기 전의 몇 달 동안 그녀는 뼈아픈 좌절감을 느끼며 넋을 놓고 허송세월을 했다.
그러다 해가 바뀌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졸업이라도 해야 했기에 4학년 복학 신청을 한 그녀는 개강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절친한 친구 서영주를 만났다.
“개강 파티?”
자신이 아닌 진욱을 선택한 회사에 대한 원망 어린 감정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영주를 보자마자 불평불만을 쏟아 냈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 주던 영주가 돌연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탁 치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응! 이번 개강 파티는 꽤 재밌을 것 같더라구.”
영주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는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재밌을 것 같다니. 무슨 소리야. 그녀는 눈을 빛내는 영주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개강 파티에 대한 기억은 오직 ‘술’로 시작하여 ‘술’로 끝났던 것밖에 없었던 그녀의 심드렁한 물음에 영주는 서둘러 답했다.
“너, 차규영이라고 기억나?”
차규영?
“그게 누…… 아! 그 얼음 왕자?”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웬 남자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 얼음 왕자!”
영주는 그녀의 기억력에 박수를 쳐 줬다.
“갑자기 그 선배는 왜? 유학 간 지 꽤 됐지 않았나?”
유학으로 인해 한국에 없는 선배의 이야기를 꺼내는 영주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다. 물론 그 선배가 대학 생활을 갓 시작한 그녀의 눈에도 충격을 줄 만큼 훌륭한 외모의 유명인이었다는 사실은 기억나지만 친하지는 않았으니까. 몇 번 인사를 나눈 기억밖에 없었던 선배를 떠올리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주는 의아해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그랬지. 그런데 이번 학기에 학교에 돌아온다더라? 그것도 우리랑 같은 4학년으로!”
그래?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응! 더 충격적인 건, 이번 개강 파티에 온대.”
아아.
“과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었던 차규영이 개강 파티에 온다니!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응?”
재밌는 일은 무슨.
“하아아. 차규영이든 뭐든. 지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 선배가 내 취업을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흑. 망할 김진욱. 내 인생에서 도움이 안 되는 놈! 천하의 재수 없는 놈! 일 못해서 확 잘려 버려라!”
닭똥 같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버럭버럭 외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주는 음흉한 표정을 짓곤 입술을 움직였다.
“취업 때문에…… 많이 힘들지?”
“그래.”
“그럼, 공짜 술이나 얻어먹으러 갈까? 개강 파티. 가 보자!”
“싫어. 그런 데를 왜 가.”
학과생들 중 그녀가 일했던 제약회사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한 사람은 그녀와 진욱뿐이었다. 몇 달 전 끝난 그 프로그램의 최종 승자가 진욱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 그런 상황에서 개강 파티에 간다면 씁쓸한 위로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 더욱 상처받기 싫어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에게 들러붙으며 영주는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