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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공짜 술이라니까? 기분도 우울한데 술로 마음을 달래.”
물론 살짝 솔깃하긴 했다.
“공짜잖아! 거기 가서 맘껏 마셔!”
영주는 그녀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응? 희수야, 나 혼자 가기 좀 그래서 그래. 가자. 응?”
어휴.
“못산다, 내가.”
그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저를 설득하는 영주의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영주의 얼굴이 태양보다 밝아졌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알겠어. 갈게.”
공짜 술이라는데 가서 맘껏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돈도 못 버는 신세니까.
꽤 서글픈 현실에 타협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던 영주가 신이 난 듯 손뼉을 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느새 식은 커피를 물 마시듯 들이켰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우울하다 못해 고달픈 여자.
스물넷의 윤희수는, 그러했다.
1화. 그날 밤, 침대에서
‘어떻게 된 거지?’
정확히 0.1톤이나 되는 동생이란 녀석이 두 눈을 깔아뭉개고 있는 느낌을 받으며 겨우 눈을 떴다. 그러자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새하얀 벽지에 몇 없는 가구.
건조하게 느껴지는 눈부신 전등이 달려 있는 넓은 천장.
그리고 그녀의 방보다 서너 배는 더 커 보이는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킹사이즈의 침대.
‘꿈인가?’
희수는 서둘러 두 손으로 눈을 비볐지만, 그럴수록 광경은 더욱 또렷해졌다.
으으.
어젯밤 잔뜩 마셨던 술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럽다.
‘여기가 어디야.’
아마 무정한 친구들이 이 이름 모를 장소에 술이 취한 그녀를 내버려 두고 간 것이 틀림없다 여기며, 희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 몸이 왜 이렇게 가……! 이, 이게 무슨 꼴이야!’
하늘거리는 실크 이불을 걷어 내던 희수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다 못해 일그러졌다. 그녀의 몸은 불행히도 중요 부위만 가리는 속옷 외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아아악!”
사색이 돼서 방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멀리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후, 희수와도 안면이 있는 냉랭한 얼굴의 남자가 나타났다.
헉!
희수는 시야에 들어온 남자를 발견하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남자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드디어 일어났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윤희수는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분명 자신을 저렇게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이번에 복학했다던 그녀의 학과 선배인 차규영이 틀림없다. 그녀는 얼른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며 규영을 향해 외쳤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제, 제가 왜 여기 있어요?!”
희수의 말을 들은 규영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
“하. 진짜 돌아 버리겠군.”
규영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날카로운 두 눈을 빛내며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서, 선배 왜 이러세요!”
뭔가 심상찮은 규영의 접근에 희수는 기겁하여 외쳤다.
“걱정 마. 잡아먹힌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예? 무슨 소…… 우악, 선배, 지금 뭐하는……!”
희수는 돌연 규영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리며 외치려다 행동을 멈췄다.
“그, 그게 뭐예요?”
셔츠를 벗어 던진 규영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키스마크에 희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규영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가 한 짓이잖아.”
희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다 피식 웃었다.
“에이, 선배. 아무리 제 입이 개미핥기 뺨치는 흡입력을 자랑할지라도 제가 무슨 드라큘라도 아니고 선배한테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뭐?”
“그나저나 여긴 대체 어디예요? 제가 왜 이 꼴로 여기 있는 거죠?”
“…….”
“선배?”
어이없다는 듯 손까지 내저으며 배시시 웃는 희수의 말에 규영은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다.
“정말…… 단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아니, 대체 뭘 기억하라는 거야.’
그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희수는 그의 목덜미에 있는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규영이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머릿속에 몇 가지 장면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으히히히! 뀨용 쏜배에……. 뀨!용!쏜!배에∼!’
중간 중간에 필름이 끊어지긴 했지만 분명 그때는 어젯밤 개강 파티. 술에 취해 한껏 달아오른 빨개진 얼굴로 히죽거리던 윤희수가 혀 꼬인 발음으로 차규영을 부르고 있었다.
‘선배님, 죄, 죄송해요. 얘가 미쳤나 봐요.’
‘어이, 닥쵸! 미이치긴 뭐가 미쵸오! 내가 얼마나 말짱한데! 으히히히!’
영화 속의 광년이마냥 낄낄거리며 혀를 꼬는 그녀를 보고 놀란 친구, 영주가 규영에게 연신 사과를 하는 것도 밀쳐 버리고는 웃는 제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희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잘 데려다줘라. 많이 취한 것 같다.’
기억 속의 규영은 무척이나 짜증이 난다는 눈빛으로 희수를 흘깃거리더니 영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주는 계속해서 규영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예, 죄송해…… 으악! 야!’
‘으히히히, 자바따아! 뀨용 쏜배 자바따!’
자꾸만 엉켜들려는 희수로 인해 조금 피곤해 보이던 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쯤, 희수는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잡았다. 깜짝 놀란 그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선 깔깔거리는 그녀는 주위의 모든 이들의 눈을 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윽고 장면이 바뀌었고, 그들이 있는 장소는 윤희수가 잠에서 깨어난 곳이었다.
‘대체 넌, 뭐지?’
규영은 침대에 누워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는 그녀를 미묘한 눈길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곱게 자라. 침대도 양보해 줬으니 잘…… 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규영은 한숨을 쉬더니 돌아서려다 갑자기 돌발 행동을 하는 희수를 발견하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갔다.
‘하아, 더워. 더워 더워 더워!’
‘윤, 윤희수!’
‘흐흐흐흐, 뀨용 쏜배, 쏜배는 안 더워요?’
‘어, 얼른 옷 안 입어?!’
‘하아아, 더워서 미치겠네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윤희수는 제 몸을 가리고 있던 웃옷을 스스로 벗기 시작했다.
‘쏜배에! 요기서 가치 자요옹! 쏜배에!’
‘안 떨어져? 안 떨……. 헉, 너, 너 이 손 안 치워?!’
‘으히히, 쏜배에! 쏜배 여기 왜 이렇게 뽈록해요오?’
‘뭐, 뭐?!’
‘쏜배에! 쏜배에!’
‘뭐, 뭐하는 거야, 당장 안 떨…… 으읍!’
꾸, 꿈이지? 꿈이어야 해. 꿈이라고 해 줄래요?
흑.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냥 없었던 일로 치면 안 될까요?
“표정을 보아하니 드디어 기억이 났나 보군.”
말을 멈추고 뭔가를 생각하던 희수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규영은 다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그며 입을 열었다.
“네, 네에.”
희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규영은 싸늘한 두 눈을 빛냈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는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지?”
희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이불을 몸에 돌돌 말아선 규영의 발 앞에 엎드리며 외쳤다.
“흐으윽, 선배! 죄송해요! 저 원래 주정 안 부리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선배에!”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희수는 다급해졌다.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용서해 주세요. 으헝헝헝. 선배, 잘못했어요!”
규영의 몸에 들러붙어 그의 집에 온 걸로도 모자라, 그의 침대를 차지하고 그의 목을 끌어당겨 침대 위로 눕히고는 자신의 더러운 입술로 그의 몸 곳곳을 탐험했던 죄인, 윤희수.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제발 그때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 모든 일을 돌리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조건 잘못했다며 사죄하는 수밖에.
“윤희수.”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찍어 가며 잘못했다 빌고 있는 희수를 몇 초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규영은 서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희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규영은 언제나 그렇듯 싸늘한 두 눈을 빛내며 말한다.
“책임져.”
희수는 주어, 목적어를 모두 빼먹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자 규영은 그것도 못 알아듣느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물고 빨고 했으니, 나 책임지라고.”
여자의 감이라는 게 있다.
뭐랄까. 오늘만큼은 술을 마시지 말자라는 뭐, 그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개강 파티의 윤희수는 거의 정신이 나가 있었다. 머릿속에선 이 투명하고도 빛깔 좋은 액체를 입안으로 들이부어선 안 된다고 외쳐 댔지만 불행히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시자, 마셔! 으하하하. 마셔, 마셔!’
동기들이 권하는 폭탄주를 벌컥벌컥, 후배들이 조심스레 권하는 병맥주를 벌컥벌컥, 마셔 댔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렇게 술을 마셔 댔던 건 분명 그녀의 전 남자친구인, 김 모 씨의 아들 진욱 군 때문임이 틀림없다. 같은 과 동기로 시작하여 1학년 때 잠시 사귀었던 진욱과의 끈질긴 인연은 4학년 졸업반인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같은 수업을 듣게 되었고, 또 어쩌다 같은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단 한 명만 뽑는 정직원 채용에서 희수와 진욱이 경쟁하게 된 것은 당연한 사실.
인턴으로 일하는 내내 여직원들과 낄낄거리며 일이라곤 몽땅 희수를 시켰던 진욱을 뽑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을 정직원으로 채용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희수의 자신 만만한 예상과는 달리 회사는 ‘사교성’을 이유로 들며 희수 대신 진욱을 정직원으로 채용했고, 진욱은 그런 희수를 향해 말했다.
‘미안해서 어쩌냐? 회사에서 날 원하니 어쩔 수 없지.’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희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던 그 얌체 같은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자니 기분이 나빠졌다. 사실 속된 말로 술 파티나 다름없는 개강 파티 따위는 참석할 생각이 없었건만 영주의 꼬임에 넘어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너 오늘 왜 이렇게 많이 마셔? 그만 좀 마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평상시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는 희수를 보다 못한 영주가 그녀의 술잔을 빼앗으며 외쳤지만, 희수는 얼른 다시 그녀에게서 술잔을 낚아채곤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윤희수가 술에 취하는 거 봤어? 나 말짱해. 말짱하다구!’
그녀는 영주의 어깨를 툭툭 치며 외쳤다. 속이 한없이 쓰린 오늘 같은 날, 꿀꿀한 기분을 마음껏 풀어 주기 위해서는 단 한 잔으로는 그칠 수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희수는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술잔들의 유혹을 저버리지 못하고 모두 다 받아들였다.
하아, 그래.
그랬었다.
적어도, 그녀가 적어도 모든 것을 제대로 기억을 할 때까지는.
왜 그에게 ‘얼음 왕자’란 별명을 붙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규영의 몸에선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희수는 천천히 그를 향해 물었다.
“저…… 규영 선배.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하셨어요?’도 아닌 ‘하셨나요?’라니. 아마 꽤 충격을 받았던 터라 말이 꼬인 것이 분명했다. 규영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톡 건드리고픈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나 책임지라고.”
“채, 책임이요?”
희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규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용서받고 싶다며. 그럼 책임져야지. 네가 한 일이 있는데.”
규영은 희수가 머뭇거리자 겨우 잠근 단추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악! 서, 선배!”
그리곤 다시 셔츠 안에 숨겨진 몸 군데군데에 새겨진 키스마크를 보여 주려 하는 그를 발견한 희수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가 생긴 것 답지 않게 괴팍하다는 소문은 듣긴 들었지만 이렇게 이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희수는 행동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규영의 예쁜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어떤 식으로 책임지면 되는데요?”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생물학과의 얼음 왕자 차규영.
그의 주위를 맴도는 수많은 미녀 하이에나들에게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학과 선배들과 겨우 인사를 할 정도로 안면을 트고 지냈던 윤희수조차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얘기다. 차규영이 한 번 수업에 떴다고 하면 강의실이 들썩였고, 그가 학내 식당에 떴다고 하면 여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 정도로 윤희수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에서 범아이돌적으로 추앙받는 이야기 또한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다니는 내내 여자친구 한 번 사귀는 꼴을 보지 못했기에 그를 시기하는 몇몇 남자 선배들이 차규영은 게이가 분명하다는 험담을 늘어놓고 다녔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학교 내의 거의 대부분의 여학생들에게서 일명 ‘남신’이라 추앙받는 존재, 차규영은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희수를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면 돼.”
그녀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그가 말하는 ‘책임’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설마 그런 것일 줄은 전혀 몰랐다. 희수는 쉽게 입술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