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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운명의 장난 1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가자마자 구수한 미역국 냄새와 함께 영원과 지영의 수다가 유원의 귀에 들어왔다.
“아이, 엄마. 허락해 줘.”
“허락은 혜나한테 먼저 받아 와야지. 순서가 틀렸어, 송영원.”
“내년 봄에 무조건 결혼하고 말거야.”
“그러든지.”
“아, 엄마! 그렇게 건성으로 말하지 말고 진지하게 좀 들어줘. 나 정말 꽁이랑 내년 봄에 결혼할 거라니까?”
“그럼 상견례는 언제 하면 돼? 여자 집에 가서 먼저 허락받아 와야 하는 거 알지? 상견례 날짜 잡히면 그때 이야기해.”
아이처럼 떼를 쓰던 영원의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지영의 압승이었다. 남자지만 막내라 그런지 수다스러운 영원과 늘 옥신각신하긴 해도 끝내 입으로는 당해 낼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 김지영 여사였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쭉 내밀고 있을 영원의 모습은 안 봐도 뻔했다.
유원이 주방으로 들어섰다.
“저 왔습니다.”
“어머, 우리 유원이 왔어?”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던 지영이 환한 웃음으로 유원을 반겼다.
“네, 아버지랑 형은 아직입니까?”
“아까 출발한다는 연락 받았으니까 곧 도착하실 거야.”
“네.”
“송영원, 형한테 인사 안 해?”
미역국의 간을 보고 있었던 것인지, 국자를 들고 있던 지영이 아직도 입을 삐쭉 내밀고 있는 영원의 등을 찰싹 쳤다. 그러자 유원과 눈을 마주친 영원이 고개를 들어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미간을 더욱 찌푸리며 전투적으로 말했다.
“왔어?”
“그래. 손 씻고 올게요.”
“그래, 씻고 와. 얼른 식사 준비해 놓을게. 영원아, 식탁 닦고 얼른 수저 놔야겠다.”
“엄마 혼자 해. 나 저녁 안 먹을 거야.”
아이처럼 삐친 영원이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그래? 그럼 나도 상견례 안 나갈 거야. 네 마음대로 해.”
아쉬울 것 없다는 지영의 말에 영원이 눈을 크게 뜨며 지영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엄마의 뒤만 쫓는 어린아이처럼. 그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방을 빠져나온 유원의 발걸음이 욕실로 향했다.
“할게, 하면 되잖아. 아, 진짜!”
“됐거든.”
“내가 잘못했어, 엄마. 엄마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식탁 닦고, 수저 놓고 또 뭐 할까, 응?”
영원의 말에 지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능숙한 조련사처럼 영원을 조련하는 지영은 행주를 빨아 영원에게 건네고 있을 것이다. 유원은 설핏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아버지 선일의 생일에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자리. 역시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건 지영과 영원이었다.
“여보, 영원이 내년 봄에 결혼하겠대.”
“그래?”
말은 놀라는 척하고 있지만 표정은 무덤덤한 선일이 먼저 숟가락을 들자 지영을 비롯한 아들들이 숟가락을 들었다.
“네, 아버지. 똥차가 안 간다고 줄줄이 밀리다간 제가 노총각이 되고 말겠어요. 그러니까 내년 봄에 꽁이랑 결혼할래요. 허락해 주세요.”
“송영원, 아직 형 서른두 살밖에 안 됐거든. 누가 똥차라는 거야? 스물여섯 주제에 노총각 운운하는 게 형들 앞에서 할 말이냐?”
큰 형 하원의 말에 영원은 여자아이처럼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밥을 입에 넣는 선일의 대답을 기다렸다.
“혜나도 같은 생각이고?”
역시나 선일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국을 떠먹으며 아주 건성으로 묻는 것이다. 제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으면 진드기처럼 끝까지 달라붙는 영원의 성격을 알기에 외면해 버릴 수는 없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기엔 말이 안 되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은근슬쩍 관심을 표시하면서 넘기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은 선일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제 입에서 밥풀이 튀는 줄도 모르고 설레발을 쳤다.
“같은 생각이 아니라도 무조건 할 거예요.”
“넌 아무래도 정신병 같아. 어째 혜나, 혜나, 혜나밖에 모르냐.”
하원이 그런 영원이 안쓰럽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그러자 영원이 답답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 진짜 나도 답답해 죽겠단 말이야. 민지음이 자꾸 혜나한테 작업을 거는 모양인데, 그러다 우리 꽁이 바람이라도 나면 나는 못 살아. 그러니 그 전에 내가 데려올 거야.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고 취업도 했으니까 난 한 가정의 가장이 될 자질을 충분히 갖췄어.”
“놀고 있네. 전세, 아니 월세 얻을 돈은 있고?”
대번에 쏟아지는 하원의 현실적인 말에 뜨끔했는지 영원이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지영의 눈치를 보았다. 아마 거기까진 생각 못 했겠지. 그것을 파악한 지영이 젓가락으로 무쌈을 집다 말고 무심하게 말했다.
“나 돈 없어.”
“빌려 줘.”
“진짜 없어. 혜나랑 둘이서 잘 상의해 봐.”
돈을 맡겨 놓은 것도 아닌데 당당하게 빌려 달라 요구하는 영원에게 지영은 생각할 여유도 두지 않고 거절했다. 그러자 하원이 픽 웃으며 영원에게 궁여지책을 내놓았다.
“여기서 어른들 모시고 살든가.”
하원의 말에 영원은 눈을 번쩍 뜨다 말고 유원을 힐끔 바라보며 전투적으로 말했다.
“그건 절대 안 돼.”
“어머머, 우리도 됐거든. 내가 너희들 모시고 살 일 있니?”
유원을 향한 가시 돋친 영원의 말에 밥을 먹다 말고 콧방귀를 뀐 사람은 지영이었다.
“왜 안 되는데? 유원이 때문에?”
“몰라.”
하원의 물음에 불퉁하게 대답하는 영원의 입이 댓 발 나왔다.
“아직도 유원이가 라이벌이냐? 언제는 민지음이라더니.”
“둘 다야.”
영원의 말에도 영 관심이 없는 듯 밥만 먹고 있는 유원을 대신해 하원이 혀를 차며 일갈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넌 평생 나무꾼처럼 올라가지도 못하는 나무만 찍고 있을 거다.”
“아, 형!”
“어째 두 사람은 발전이 없냐? 그러면서 결혼을 하겠다고?”
“발전 중이거든? 꽁이 너무 바빠서 그런 것뿐이야.”
부모인 선일과 지영보다 하원을 더 무서워하는 영원이 야속한 마음에 불퉁거리며 대답은 했지만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민지음이는 누구냐?”
선일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요즘 예능에서 잘 나가는 가수 있잖아요. 혜나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제일 인기 있는 애.”
지영의 친절한 설명에도 방송에는 영 관심이 없는 선일은 고개만 끄덕일 뿐, 다시 숟가락을 놀렸다.
“그 민지음이 혜나를 찍었구나.”
“그러니까 다들 협조해.”
“그렇게 혜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오늘 같은 자리에 데리고 왔어야지.”
“하원이 말이 맞네.”
선일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하원의 말에 응수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단체 회식이라 데려올 수가 없었어. 그리고 송유원 때문에라도 안 데려와.”
다시 전투적으로 유원을 노려보며 내뱉은 말에 지영의 주먹이 영원의 이마에 콕 박혔다.
“아, 엄마.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렸지, 아프지 말라고 때렸겠니? 형한테 송유원이 뭐야? 그러니 혜나가 널 친구로만 생각하는 거야. 어째 이리 애 같은지, 나 같아도 애처럼 졸졸 쫓아다녀야 하는 남편은 싫겠다.”
“내가 어때서. 내가 혜나를 얼마나 극진하게 보살피는데. 오늘도 회식 끝나면 대리 대신 부르라고 했어. 이런 남자 친구가 어디 있다고.”
“오냐, 오냐. 그러니까 상견례 날짜만 정해 봐.”
“알았어, 내가 오늘은 꼭 다짐을 받고 말 거야.”
영원의 말에 밥을 먹고 있던 남은 가족들의 입술이 피식, 하고 올라갔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영원은 다시 한 번 유원을 전투적으로 노려보더니 밥을 떴다.
선일의 생일임에도 영원의 문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던 저녁상을 물리고 지영이 깎아 준 과일에 맥주를 마시고 나자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저녁을 먹자마자 오피스텔로 갈 생각이었던 유원은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 김에 술을 한잔해야 하지 않겠냐는 선일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몇 달 전, 회사와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한 후로 가족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혜나의 대리 운전을 해야 한다는 영원은 오렌지 주스로 술을 대신하며 연신 전화를 붙잡은 채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런 영원에게 지영이 팔푼이 같은 자식을 낳았다며 구시렁거렸지만 영원은 히죽 웃기만 했다.
이른 술자리가 파하자마자 씻지도 않은 채 잠에 빠진 유원이 일어났을 때는 자정이 조금 넘어 있었다. 연일 야근을 한 덕에 맥주 두 잔이 톡톡히 수면제 역할을 했다. 두 시간을 잤지만 스무 시간은 잔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오자 모두 잠든 것인지 집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영원의 방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불빛. 유원은 주방으로 들어가 물을 한잔 마시고 손가락을 빗 삼아 머리를 빗으며 영원의 방문을 열었다.
불만 켜 놓은 채 보물단지 마냥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쥐고 반듯하게 누워 잠든 영원. 혜나는 아직인 모양이다. 유원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영원은 아직도 애 같기만 했다. 잠시 잠든 영원을 바라보던 유원이 환하게 켜진 영원의 방문을 닫으려다 말고 불을 껐다. 순식간에 방이 어둠에 빠졌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어디선가 벨소리가 울렸다. 어둠 속에서 홀로 밝은 빛을 내는 영원의 휴대전화였다. 톡톡 튀는 성격과는 달리 은은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휴대전화가 어둠 속에서 제 몸을 밝히며 재촉한다. 어서 받아 달라고.
어지간히 잠이 온 것인지 일어나지 않는 영원, 그리고 계속 빛을 밝히며 재촉하는 휴대전화. 유원은 문을 닫으려다 말고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영원의 손에 든 휴대전화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빛이 멈추었다. 전화를 건 상대방이 기다리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 버린 것이다.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데, 아직 미련이 남은 휴대전화가 다시 은은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몸을 밝혔다. 유원은 나가려다 말고 영원의 손 안에 든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다시 받을까 말까 망설이던 유원이 이내 손을 뻗었다. 영원의 두 손에서 아무 저항 없이 빠진 휴대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