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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까지 녹지 않아 소복하니 쌓인 언덕 위로 까만 단화가 올라섰다.
뽀드득거리는 청량한 소음이 일렬로 모양을 만들어 내는 발자국을 따라 움직이는가 싶더니 양지바른 둔덕 아래 작은 무덤 앞에서 멈췄다. 하얀 눈이 뒤덮인 무덤 하나.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그곳엔 켜켜이 쌓인 눈만이 그득했다. 며칠 밤낮이 지나는 동안 부드러웠던 눈은 딱딱해졌고 평평하게 다져진 설면 위로 내리쬔 햇살이 찬란한 보석을 흩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
하얀 설원의 중심에 이질적으로 툭 튀어나온 묘비를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짙어졌다. 눈동자에 여태 머물고 있던 공허함이 사라지고 차츰 슬픔이 차올랐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발갛게 변한 입술이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래서인지 여자의 얼굴은 더욱 추워 보였다.
“엄마, 잘 있었어?”
들고 온 꽃다발을 내려놓는 여자의 가느다란 목덜미 위로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차르륵 흘러내렸다. 겨울 한낮의 뭉근한 햇살이 머리카락에 반사되어 공중으로 튕겨졌다.
“…….”
해주는 하얀 눈이 뒤덮인 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묘비에 쌓인 눈을 털어 냈다.

성효선

눈에 가려져 있던 이름이 드러나자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했다.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어 묘비에 새겨진 글씨를 쓰다듬자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이 차가운 묘비 아래 잠들어 있을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자 울컥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뭔가가 치밀었다.
벌게진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눈가를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한번 터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다.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
울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을 해 놓고도 이곳에만 서면 끝내 울음이 터졌다. 또 한 해를 단단하게 견뎌 내고도 이곳에 서면 도무지 태연한 척 굴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아물어지지 않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흐느낌이 짙어질수록 여자의 어깨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나 버린 이별. 매년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엄마의 기일. 언제쯤이면 아무렇지 않게 여기에 설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견뎌 내야 웃는 낯으로 엄마 앞에 설 수 있을까.
서럽게 울음을 토해 내는 그녀 위로 겨울 햇살이 위로하듯 따사롭게 쏟아져 내렸다. 길고 긴 겨울의 시작이다.

한적한 카페 안으로 장신의 남자가 들어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힐끔 지나가는 관심을 보이던 사람들의 눈빛에 감탄이 서릴 정도로 들어선 남자는 핸섬했고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엔 별 관심도 두지 않은 채 그는 카페 구석 자리로 성큼성큼 향했다. 만날 사람을 확인하는 그의 머리카락에선 녹아내린 눈이 툭툭 떨어졌다.
“오랜만이야.”
거의 1년 만에 다시 보는 여자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적당히 천박해 보이는 화장 하며 사람을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무례한 시선. 나이가 들면 생길 법한 원숙미 대신 여자는 넉살만 늘은 모양이다. 더불어 탐욕과 끈적함까지.
미리 기다리고 있던 변호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석원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는 듯 안부를 물을 기회도 주지 않고 들고 온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자신이 해결할 일에만 관심을 둔 채 그는 챙겨 온 서류를 다시 한 번 꼼꼼하게 검토했다.
“여기 사인하고 금액 확인하십시오.”
딱딱한 말투로 서류와 꽤 두툼한 수표 뭉치를 내미는 석원을 흥미로운 눈길로 주시하던 혜미는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은 석원의 외모에 속으로 감탄했다. 제 아버지는 작달막한 키에 단단한 몸집이었는데 그의 아들은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 거기에 저 잘생긴 외모라니.
“어련히 알아서 잘 준비했겠어. 보나마나 맞겠지.”
“확인, 하십시오.”
석원의 날카로운 지적에 혜미는 입술을 씰룩이며 그가 내민 서류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값을 더 쳐 줬을 리도 없지만 십 원짜리 하나 덜 줬을 리도 없는 석원이다.
“뭐, 맞는 것 같네. 괜히 머리 아프게 하지 말고 강 변이 확인해 봐.”
데리고 나온 변호사에게 일을 떠넘긴 혜미는 아직 석원의 손에 잡혀 있는 수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장난스럽게 물었다.
“신수가 훤해진 것 같아. 올해 나이가 몇이지?”
“…….”
“아직 애인은 없어?”
묻는 말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은 듣지 못했다. 괜히 무안해졌다. 그때 강 변호사가 혜미에게 말했다.
“서류는 맞습니다.”
“그럼 사인하시죠.”
딱딱한 석원의 말에 보톡스를 맞아 주름이라고는 하나 없는 입술을 실룩이던 혜미는 빨간 매니큐어가 발린 손을 뻗어 석원에게서 수표 뭉치를 끌어갔다.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쟤는 인간미가 없어. 그래도 한때는 내가 자기 아버지와 살을 섞고 살던 어머닌데 말이야.
“누가 도망치기라도 한데? 돈부터 확인 좀 해 보고.”
자신의 손에 들어온 돈을 보고 있으니 못마땅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짙은 화장으로 눈꺼풀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수표를 들여다보며 환하게 펴졌다. 진즉에 팔아 버리려던 것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오르면 비싼 값을 쳐 주겠다고 하던 석원의 약속을 꼭 믿고 기다렸던 것만은 아니지만 이렇듯 목돈을 거머쥐고 보니 안 팔길 잘했구나 싶었다.
“요즘 회사가 운영이 잘 되나 봐?”
주식양도증서에 서명을 마치고 난 후 혜미가 은근하게 물었다. 지난 10년 동안 다 쓰러져 가던 회사를 떠맡아 죽기 살기로 살아왔던 이야기를 모르고 묻는 것은 아니었다. 석원이 하기에 따라 자신이 받은 유산이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처지였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가끔 들리는 소문으로 확인도 했었다.
“완벽하게 회사를 차지했는데 이런 날 축하주라도 한 턱 내야 하는 거 아냐?”
자신이 사인한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석원에게 혜미는 눈치 없이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회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석원이 이 순간 어떤 감정일지 그녀가 알 턱이나 있을까.
주식양도증서를 손에 쥐고 석원은 울컥한 기분이었다. 이제야 겨우 아버지가 혜미에게 물려주었던 지분을 찾았다. 마음 놓고 밤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해 가며 회사에 매달렸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자 석원은 힘껏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손에 들린 종이 조가리가 부르르 경련했다. 이 여자와 끝이 났다. 지긋지긋하게 발목을 잡고 늘어지던 여자와 더 이상은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되고, 많은 지분을 보유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총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를 이해시키느라 더 이상 힘을 빼지 않아도 된다. 이 여자와는 완전히 끝이 났다.
“표정이 왜 그래? 감격이라도 했어?”
“…….”
“아무튼 고래 심줄 같은 그 고집은 알아줘야 해. 누가 이렇게 번듯하게 일으켜 세울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그런 얘기, 재미없는데 그만 하시죠.”
“그, 그럴까.”
말을 자르고 끼어든 석원이 못마땅했지만 모처럼의 행복감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간만에 손에 쥐여진 큰돈으로 뭘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진 그녀는 전남편 아들의 버릇없는 태도를 기꺼이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적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청산된 관계이니 두말 안 하겠습니다. 이젠 법적으로도 표혜미 씨가 행사할 권리는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서릿발처럼 싸늘한 확인 사살에 커피를 들이키던 혜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제 이름이 저 집안에 올라 있던 것도 아니고 남편이 죽으면서 남긴 유산을 찾기 위해 여태 기다렸지만 이제 그마저도 끝났으니 자신 또한 저렇게 찬밥 신세를 만드는 석원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정색 안 해도 나도 다 알아. 누가 들으면 내가 어지간히 찝쩍거렸는지 알겠네.”
“그만 일어나시죠.”
종업원이 앞에 가져다준 찻잔에 입도 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석원을 혜미가 붙들었다.
“지원인 잘 있지?”
남의 안부를 묻듯 가벼운 어투에 석원의 턱 끝이 부르르 떨렸다.
“궁금하기는 하십니까?”
진짜 묻고 싶었다. 자신이 버리고 간 어린 딸의 안부를 아무렇지 않게 묻는 저 여자가 도대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많이 컸지?”
“울며불며 매달리던 그 꼬맹이는 아니겠죠.”
“내가 지원이 한번, 만나 볼까?”
10년 전에 헤어진 딸을 그리워하는 조금의 눈치라도 있었더라면 석원도 어쩌면 생각을 바꿨을지도 모르겠다. 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조금이라도 내비쳐졌더라면 아무리 그녀가 싫고 원망스럽다 해도 모질게 잘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딸의 안부를 물을 때조차 자신을 알아보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뼛속까지 3류 여배우인 그녀의 태도에 석원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기만 해 보십시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는 혜미는 서둘러 손을 흔들며 그냥 해 본 말이라 둘러댔다. 괜히 석원의 말을 무시하고 지원을 만났다가는 사는 집조차 내놓아야 될지 모르는데 그녀로서는 그딴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정색 좀 하지 마. 석원이 그러고 쳐다볼 때마다 내가 무슨 중죄인이라도 된 것 같단 말야. 먼저 갈게. 그럼 나중에 또 봐.”
가방에 수표 뭉치들을 쓸어 담듯 집어넣고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혜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석원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강 변호사도 먼저 가 보겠다며 일어났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석원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빌어먹을.”
석원은 피곤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며칠 동안 연말 마무리를 하느라 날밤을 새운 탓에 까칠해진 피부가 만져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전화기가 부르르 떨려 댄다. 눈가를 덮고 있던 손을 내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전화기를 귀에 대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찾아 대는 미스 홍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사장님, 손님 기다리시는…….
“금방 갑니다. 10분이면 돼요.”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 대는 회사였지만 지켜 내었다. 늘 적자에 허덕이던 시간들이 다 지나갔다. 20대의 젊음과 맞바꾸었고, 비록 남은 것은 갚아야 할 대출금과 공장뿐이었지만 그래도 밑바닥은 면했으니 일어서기만 하면 되는 거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엔 쓴웃음이 지어졌다.
석원이 카페를 나왔을 때 여전히 거리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캐럴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들. 거리는 들떠 있었고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제야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몇 년 동안 잊고 살았던 연말의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자신만 낯선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거북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차를 모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몇 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떠들어 댄다. 유리창으로 투둑 떨어지는 눈송이를 와이퍼로 밀어내며 석원은 난생처음으로 공장을 잊어버리고 싶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으니까.

“그러지 말고 언제 저녁이나 같이 해요.”
몇 번이나 거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끈질겼다. 와인바 ‘블루’에서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그저 약간의 안면이 있는 정도의 사람이었다. 무의식중에 틈이라도 보였던 것일까.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고 그것은 분명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점점 불편해지자 얼마 전부터는 그를 의도적으로 피했었다. 불편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선경이 그가 와 있는 시간을 미리 일러 주거나 하는 식으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었다. 그래서 그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종일 들떠 있던 떠들썩한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 같은 날 혼자 집에 들어가 청승을 떨고 싶지 않아 가볍게 술이나 한잔 할 생각이었다. 선경과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울적한 기분을 달래 볼 셈이었는데 자리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선경은 없었고 대신 이 남자가 해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남자를 발견했을 때 곧장 뒤돌아 나가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그는 해주가 나타나기 무섭게 눈짓으로, 몸짓으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더니 기어이 그녀의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였어요?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
톡톡톡. 시선을 외면한 채 앉아 있는 해주의 관심을 끌 요량으로 남자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흰 소매 끝자락에 달린 금색의 커프스단추가 조명에 반짝거렸다.
“모처럼 만인데 얼굴 좀 보여 주죠?”
“…….”
말없이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는 해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며칠 전 산에 다녀온 이후로 기분은 계속 저조했다. 이 남자의 시답잖은 농담을 받아 주고 말 상대를 해 주고픈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런 기분을 알 턱이 없는 남자는 계속해서 수작을 걸어왔다.
“저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입니다.”
씩 웃으며 명함을 해주의 앞으로 쓱 밀어 놓은 남자는 꽤 유명한 로펌에서 근무하고 있는 자신의 직책이 잘 보이도록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유난히 길고 하얀 손가락이 눈에 거슬렸다. 물 한번 묻혀 보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반질반질한 손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손이었다. 그녀의 미간이 희미하게 찡그려졌다.
“쓸 만하다니까요.”
손가락을 바라보는 해주의 시선을 관심이라 인식했는지 남자는 입꼬리를 슬쩍 늘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너라고 별수 없다는. 다른 여자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냐는 남자만의 오만함이 은연중에 묻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