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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후, 참 끈질기시네요……. 죄송하지만 그쪽이 어떤 사람인지 별로 안 궁금해요.”
남자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거절당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태희 씨, 갈게.”
끼익, 의자를 밀고 일어서는 해주의 말투가 가시를 세운 것처럼 날카로웠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남자는 당황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들고 외투를 걸치자 저만치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태희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아무 잘못도 없는 태희에게 짜증 섞인 말투를 내뱉은 것이 마음에 걸려 해주는 애써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 나중에 봐요.”
빈속에 마신 탓인지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 약간의 취기가 돌았다. 살짝 어지러웠지만 해주는 반듯한 걸음으로 홀을 빠져나갔다. 유리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발소리가 쫓아온다. 육중한 발소리는 이내 가까워졌다.
“이봐.”
그 남자였다. 잔뜩 불만이 서린 목소리로 남자가 불렀지만 해주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모질게 끊어 내지 않으면 남자의 치근거림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 뻔했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왜 무시해?”
“…….”
“거참 되게 비싸게 구네.”
휙 어깨를 낚아챈 남자의 손아귀에 해주의 몸이 비틀거렸다. 겨우 중심을 잡고 돌아선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남자는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서 있었다.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남자의 몸에선 술 냄새와 더불어 역한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우악스런 손놀림에 남자에게 잡힌 어깨가 아팠다.
“……놔.”
“뭐?”
“이 손 놓으라고.”
악물린 입술 사이로 뱉어 낸 말에 남자가 픽 웃는다. 벌써 몇 번을 찍어 댔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해주를 바에서 발견한 순간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그동안은 번번이 놓쳤다지만 오늘은 놔줄 마음이 없었다. 연인과 서로들 못 붙어 있어 안달인 오늘 같은 날 혼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뻔하다. 채였던가, 찼던가, 아니면 애초부터 혼자던가. 이런 날 여자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일이야말로 남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는 스스로의 행동에 제멋대로 타당한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여자의 몸집은 여리고 작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힘으로라도 차지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하며 해주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품 안에 가둔 그가 속삭였다.
“충분히 튕겼으면 됐어.”
남자는 마치 사랑싸움을 하고 난 연인처럼 굴었다. 토라진 자신의 여자를 달래듯 손을 들어 해주의 턱을 쓰다듬으며 한껏 달아오른 눈동자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이글거리는 욕정을 가득 담은 눈빛, 너무도 가까이서 느껴지는 숨소리에 토악질이 날 것만 같다.
“나 꽤 능력 있어. 뜨거운 밤을 선사하겠다고 약속해.”
남자의 손가락이 해주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키스라도 할 듯 가까이 다가왔다. 가게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문이 열리며 더욱 크게 들려왔다.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져 내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 역시 그들을 힐끗거리며 무심히 지나쳐 갔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처럼 귀찮은 일도 없으니 그런 반응들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시끄럽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면 꺼져 버려.”
나직한 해주의 경고에 남자의 입술이 피식 바람을 뿜는다.
“당신 같은 사람, 정말 싫어.”
낮지만 단호한 말투에 남자의 인상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진즉에 알아봤지만 쌀쌀맞기가 하늘을 찌른다니까. 그렇게 튕길수록 난 더 꺾어 싶어져 환장을 하지. 남자의 눈빛이 음흉스럽게 빛이 났다.
“가시 많은 장미가 향은 짙은 법이지. 그런 장미는 꺾어야 맛이고. 앙탈 부리고 싶으면 부려 봐. 나도 쉽게 넘어오는 여자 재미없으니까.”
조롱하는 남자의 손길이 턱에서 내려와 어깨를 쓸었을 때 짝, 소리를 내며 남자의 얼굴이 휙 옆으로 돌아갔다.
“……!”
꽤 강한 손놀림에 금세 남자의 볼이 발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남자의 뺨을 후려갈긴 해주의 손바닥이 다 얼얼했다.
“이런 썅!”
화끈거리는 뺨을 문지르며 험한 욕설을 중얼거린 남자의 손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해주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곧이어 닥칠 충격을 예상한 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악!”
제 것이 아닌 남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있을 뿐 충격은 없었다. 그녀를 막고 있던 몸이 사라지고 남자의 비명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순식간에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였다.
180이 훨씬 넘을 것 같은 장신의 사내. 회색 재킷으로 감싸인 널따란 등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다. 남자의 등을 보고 있는데 순간 잿빛의 황량한 벌판이 떠올랐다.
“괜찮습니까?”
성량이 풍부한 그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해주가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를 어디서 보았더라. 아마 블루에서 스치듯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다.
“큭, 넌 뭐야…….”
“아는 사람입니까?”
“아뇨.”
“필요하다면 경찰에 넘겨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 치근거리던 남자를 쳐다봤다. 사내의 손아귀에 멱살이 붙들린 채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매달려 있는 꼴이 어쩐지 우스웠다. 덩치에서도 힘에서도 완벽하게 밀린 남자는 숨이 막히는지 캑캑거리며 버둥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모르고 오만해 보이던 사람의 불쌍한 종말이다.
“그냥 놔주세요.”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이에요, 뒷말은 삼켜 버렸다. 멱살을 잡은 손을 풀자 헉헉 숨을 몰아쉬며 남자는 낮은 욕설을 뱉었다.
“성추행범으로 혼쭐나기 싫으면 당장 꺼져.”
해주에게 치근거리던 남자는 금세 정리가 되었다. 정글의 법칙처럼 금세 꼬리를 내리고 사라져 버리는 남자의 못난 뒷모습에 해주의 입술이 비틀렸다. 저 남자 때문에 하루의 마지막을 완전히 망쳐 버렸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기분 좋은 울림이 가득한 목소리가 별빛처럼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렸다. 긴장하고 있던 온 감각이 그 목소리를 향해 쏠렸다. 적당히 묵직하고 달콤한. 호기심을 끄는 목소리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낯선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없었던 해주지만 그날은 달랐다. 놀랐던 탓일 수도, 종일 느껴지던 우울함 탓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평상시완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해주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듯 남자가 말을 이었다.
“재수 없는 날이라고 여깁시다.”
재수 없는 날……. 어쩐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 주는 것 같은 말에 그를 올려다봤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불빛을 등져 잘 보이지 않았다. 짧은 머리카락과 풍기는 옅은 스킨 항기. 그를 살피던 시선에 자신의 작은 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손이 잡히자 해주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쪽도 그런가요? 재수 없는 날.”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낮게 웃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쓸쓸해 보였다. 그 쓸쓸함이…… 우습게도 이해가 되고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래 보입니까?”
“…….”
“그쪽이 어땠는지 몰라도 나도 최악이었죠.”
남자의 대답에 단단하던 마음이 순간 말랑해졌다. 이 남자는 오늘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최악의 사람들. 어울리지도, 어울려서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최악은 하나만으로도 족하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해주의 입가엔 쓸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누군가에겐 최고의 밤이 될 크리스마스 이브. 오늘이 지나면 우리도 다들 좋아질까. 남들처럼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일까. 자고 나면 머리맡에 놓여 있는 선물처럼 전혀 다른 세상들이 펼쳐질까. 우리 같은 최악의 사람들에게도…….
어디선가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왔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드나드느라 열린 출입문 사이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체 언제였을까. 저 말을 해 본 지가…….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가까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해주였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연말의 분위기 탓이라고 해도 좋고 취기 탓이라 해도 좋다. 빈 방에 들어가 뒹구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해주는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같이, 있을래요?”
교태 어린 목소리였더라면 거절하기가 쉬웠을까.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듯한 담담한 말투에 석원의 신경이 여자에게로 온전히 쏠렸다. 바둑알처럼 까만 눈동자와 연두부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뺨, 립스틱 하나 바르지 않은 추워 보이는 입술을 가진 여자. 낯선 남자를 유혹할 만큼 대범해 보이지 않는 여자의 요구에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 줄은 제대로 알고 있는 겁니까?”
“…….”
“갑시다.”
앞장서 걷는 석원을 따라 해주가 천천히 발을 뗐다. 그녀가 따라오길 기다리며 남자의 걸음은 속도를 늦췄다.
축제의 밤이 어느덧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달깍. 문이 닫히고 현관에 선 두 남녀의 위로 노란 불빛이 쏟아졌다. 호텔에 들어와 함께 이곳까지 오는 내내 이어졌던 어색한 침묵. 누군가 돌아서 가 버린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분위기였지만 어느 누구도 돌아선 사람은 없었다.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잘 정돈된 침대를 보고 있는 해주를 향해 석원이 입을 열었다.
“지금, 시작하면 못 멈출 겁니다. 원하지 않으면 지금 말해요.”
“……괜찮아요.”
“이름을 물어도 됩니까?”
석원의 질문에 태연하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돌아서서 그를 마주 봤다. 남자의 눈은 검은 밤하늘처럼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저 차분한 눈동자에 이제 욕망이 차오를 것이다. 절정에 오르면 저 남자는 어떤 목소리를 낼까. 눈에 새기듯 남자의 생김새를 자세히 바라보는 그녀의 이마로 남자의 숨결이 흩어졌다.
“우린 지금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거예요. 이름 따위는 없어요.”
“…….”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안아 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따뜻하게.”
가만히 해주를 내려다보던 석원이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손이 코트 자락 안을 파고들었다. 블라우스를 끌어 올리고 그 안으로 손을 넣어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을 거머쥐었다. 여린 체형에 비해 제법 큰 가슴이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용기 있는 말과는 다르게 여자의 몸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트린 채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보였다.
“긴장 좀 풀지 그래요? 당신이 그러고 있으면, 내가 치한이라도 된 기분이 드는데.”
낮은 속삭임에 해주는 애써 어깨의 힘을 풀었다. 그 순간 석원이 남은 한 손으로 허리를 휘감으며 다가오자 여자의 몸이 움찔 떨며 한 걸음을 물러섰지만, 벽과 남자 사이에 갇혀 꼼짝을 할 수가 없다.
석원은 여자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고개를 내려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은은한 샴푸 향이 풍기는 머리카락의 결을 따라 내려간 입술이 귓바퀴 안으로 뜨거운 숨을 불어넣자 움찔거림은 더욱 커졌다. 이 여자 정말 민감하네. 슬쩍 여자를 보니 어느새 감겨 버린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걸 원했던 거면 즐겨.”
더운 숨과 함께 나직한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귀를 혀끝으로 적시며 허리를 잡은 손을 조금씩 아래로 내려 엉덩이를 거머쥐었다. 바싹 자신에게로 여자를 밀착시키며 그가 작은 귀걸이가 달린 귓불을 입술로 잘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