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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며칠 전 집에서 나간 뒤 줄곧 연락 두절이었던 시안이었다. 주안은 그런 시안이 호텔 레스토랑에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모든 스케줄을 미뤄 둔 채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안에게 동행이 있었다. 이미 혼담이 오가고 있는 NH 소유의 호텔 레스토랑에 여자와 함께 나타났다.
“상무님, 이쪽입니다.”
주안은 레스토랑의 매니저가 안내하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저쪽 창가에 앉아 계신 분이 동행이십니다.”
매니저가 가리키는 테이블에는 젊은 여자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안이는요?”
그의 질문에 매니저가 재빨리 레스토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말 강시안이 확실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함께 봤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주안은 매니저에게 그만 가 봐도 좋다는 손동작을 취해 보인 후 시안의 동행이라는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여자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햇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창가의 다른 테이블은 대부분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 상태였기에 주안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셔 저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강시안과 동행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주안이 말을 건넨 순간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누군가를 정면으로 주시할 때면 자주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행동은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도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상쾌한 밤바람을 연상시키는 그 크고 동그란 눈동자에 주안은 잠시 흥미를 느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제야 햇살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여자의 옷차림이 주안의 눈에 들어왔다. 연두색과 하늘색으로 이루어진 헐렁한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이 여자가 정말 시안의 동행인지 주안은 점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늘 함께 이곳에 온 게 맞습니까?”
“네.”
주안은 뽀얀 피부의 계란형 얼굴과 작지만 도톰한 분홍색 입술, 그리고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크고 맑은 예쁜 눈을 가진 여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시안 씨를 어떻게 아세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입니다.”
그의 말에 여자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아,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지만 주안은 여자의 표정에서 의아함을 읽을 수 있었다.
“시안이는 어디 간 거죠?”
“잠깐 화장실에…….”
그가 맞은 편 자리의 의자 하나를 빼내 자리에 앉자 그녀의 표정이 이번에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쯤에서 이미 딴청을 피우듯 돌아섰을 시선이 여전히 그에게서 꼼짝도 하지 않고 붙어 있었다.
“시안 씨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목소리가 참 맑고 청아하다. 이 여자, 시안과 어떤 관계일까? 오랜만에 호기심이 생겼다.
“저희는 벌써 식사 주문을 마쳤는데, 아직 식사 전이시면…….”
“됐습니다.”
“네.”
“형!”
그때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어디 있었니?”
주안은 며칠 새 얼굴이 까맣게 탄 시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르바이트 좀 하느라고.”
시안은 지난 며칠간 이어졌던 자신의 부재 같은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듯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에서?”
“여기저기.”
형이 무슨 의도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이미 짐작했을 텐데 시안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당장 들어와.”
“형.”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마. 먼저 일어난다.”
주안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형!”
그 순간 시안이 그의 팔을 잡았다. 성인이 되고 난 뒤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의 몸에 손을 대는 일도 자제를 하던 그들이었다. 주안은 시안을 바라보았다.
“오늘 나은 씨 생일이야.”
주안은 나은이라는 여자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이 어리둥절한 것 같기도 하고 자신 때문에 형제 사이가 서먹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형이 우리랑 같이 식사하면, 함께 들어갈게.”
주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여유롭진 않았지만 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시안이 자신을 상대로 이런 배팅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안은 나은과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시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안에게 이런 의지와 배짱을 심어 준 것이 저 여자인가?
“난 커피면 됐어.”
“정식으로 소개할게. 형, 이쪽은 내 여자 친구 허나은. 그리고 나은 씨, 이쪽은 우리 형.”
나은은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세팅되고 시안과 나은은 천천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정하게 웃으며 서로를 챙겨 주는 모습을 지켜보는 주안은 마치 자신이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은 씨는 곧 건축사가 될 거야, 형.”
시안이 자랑하듯 불쑥 말했다.
“난 말이야, 나중에 작은 무인도를 하나 사서 그곳에 그림처럼 예쁜 집을 짓고 싶어. 나은 씨 생각은 어때? 근사할 것 같지 않아?”
“글쎄, 무인도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나은은 시안이 무안하지 않도록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안은 오늘 그에게 무얼 보여 주고 싶은 것일까?
나은은 식사를 하는 내내 주안이 신경 쓰였다. 시안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은 언젠가 들어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해 그리 오래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형과 많이 닮지는 않았더라도 아래쪽으로 살짝 휘어진 눈꼬리나 환하게 웃을 때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입 모양 정도는 닮았을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이렇게 그림처럼 완벽한 외모에 차갑고 말이 없는 사람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게다가 줄곧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의 기준에 자신을 대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아 나은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식사 다 했으면 그만 일어나자.”
그는 마치 지금 이 자리에 나은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나은은 그런 행동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지만 시안을 생각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 뭐가 그렇게 급해?”
“난 너처럼 한가하지 않아.”
주안의 말투는 마치 연애란 것은 한가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냉랭하기만 했다.
“일어나자.”
주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나은의 표정을 살피던 시안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은 씨 미안해.”
“아니, 난 괜찮아.”
나은은 불편한 표정의 시안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혼자 들어갈 수 있으니까 형님이랑 들어가.”
“미안해.”
시안이 다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나은은 마음에 걸렸다.
“만나 봬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나은은 자리에서 일어서 주안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시안에게 정말 괜찮다는 듯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안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니, 다시는 만나는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허나은 씨.”
“네?”
“강시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죠?”
“네?”
“SJ물산의 차남 강시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냐고요.”
나은은 눈을 찌푸렸다. SJ물산이라니? 아무리 SJ라는 상표를 붙인 물건과 상점이 세상에 흔하다고는 하지만 그것들 중 무언가가 시안과 관계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은은 시안을 바라보았다. 시안은 형의 표정을 살피느라 나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안 씨가 전에 SJ물산 인사과에 근무했던 건 알고 있습니다.”
나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 이 강시안이, 바로 SJ물산 강동수 회장의 차남입니다.”
“네?”
“그리고 이미 정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집안이 있습니다.”
“…….”
“지금 내가 한 말 이해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자신이 할 말을 모두 마친 주안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시안은 그런 형과 나은을 번갈아 바라보다 나은에게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형을 따라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나은은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주안이 남기고 간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1장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나은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은 고사하고 먼발치에 놓여 있는 테이블이 전부인 황량한 장소였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테이블 위에 동그랗게 말려 있는 신문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나은은 그것이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생각에 잠겨 있는 틈에 누군가 들어와 두고 간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생각은 피하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그것을 무시하듯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후…….”
참아 보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안이 자신의 곁을 떠난 지 이미 두 해가 지났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가 없는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물론 지난 2년 동안 그녀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남편감이 되어 줄 만한 남자 몇 명이 대시를 해 오긴 했었다.
그들은 모두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선뜻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남자들이란 원래 자신의 관심에 무관심하게 대하는 여자에게 더 흥미를 느끼는 동물일 뿐이라는 그녀의 선입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무관심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주변을 맴도는 그들의 행동에 오히려 불쾌감만 쌓여 갔고 결국은 번번이 매몰차게 거절을 해 버렸다.
사실 나은이 그런 불신을 갖고 있는 데는 과거의 기억이 한몫을 했다. 그녀가 막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기사로 지금의 일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남자들은 그녀가 남자들의 텃세가 심한 이곳에서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호기심에 접근을 해 왔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관심하게 대할수록 더욱 몸달아하며 그녀에게 집착을 하는 것 같았다.
2년 전 시안이 그녀의 곁을 떠난 뒤로 다시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도 분명 그녀 자체보다는 미혼의 젊은 나이에 작지만 건축사 사무실의 어엿한 소장이라는 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직업을 떠나서는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을 만큼 매력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모를 떠나서 그녀가 천애고아나 마찬가지인 데다 간판과 보증금뿐인 사무실 이외에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곧 흥미를 거둬들일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겉으로는 관심 없는 듯 덤덤한 척 대응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의 관심에 응해 줬다가 또다시 혼자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될까 봐 두려워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미 보통 자신의 또래가 겪었을 것의 몇 배나 되는 이별과 그 이별 뒤에 찾아오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몇 번이나 경험한 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이 뻔히 보이는 만남에 무모하게 뛰어들 수 없는 것뿐이었고, 자신의 태도에 딱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 또한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가끔씩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면 나은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분명 시안 같은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이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은아!”
그때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나 방금 올라오다가 시안 씨…… 헉헉.”
다급하게 뛰어 올라와 숨이 찬지 듬직한 덩치의 미현이 하려던 말을 멈추고 한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시안 씨가 뭐?”
미현의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시안이라는 이름에 나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의 심장도 친구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온 이유를 추측해 보고 있는 듯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불안을 이기지 못해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현과 함께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시안 씨 형, 그 사람이 조금 전에 여기에서 내려오는 거 봤어. 혹시 못 만났어?”
“시안 씨 형?”
미현이 대답 대신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니. 여긴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었는데.”
“분명 시안 씨 형이었는데…….”
미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그래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닌데 그 사람이 이곳을 찾아왔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방금 전에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야.”
미현이 얇게 진 쌍꺼풀이 완전히 사라질 정도로 동그랗게 뜬 자신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비슷한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