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절대로 아니야. 내가 요즘 아무리 쉽게 피로를 느끼고 삶에 재미를 못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의 장신에 그렇게 눈에 띄는 얼굴을 하고 있는 SJ 강주안 상무를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 리는 없다고.”
친구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이 답답한 듯 미현이 움켜쥔 주먹으로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열변을 토했다. 물론 나은도 자신의 옛 애인의 형이자, 대기업 SJ물산의 상무인 강주안이 얼마나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인지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순순히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바쁜 사람이 그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는 오늘 같은 날 이 먼 곳까지 찾아왔었다는 친구의 주장에 썩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난 계속 이곳에 서 있었는데, 정말 아무 기척도 없었다고.”
미현이 자신을 놀려 주려고 한 농담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그만 털어놓기를 바라며 나은은 한동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이상하네.”
“그 사람이 날 봤다면 그렇게 조용히 내려갔을 것 같니? 난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에 내 차를 걸겠어.”
“정말 미치겠다.”
미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자 나은은 친구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장난친 거지?”
“아냐. 맞다니까.”
미현이 나은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대답했다.
“어쨌든 그만 내려가자.”
“그래야지.”
나은은 시안의 분골함이 있는 곳을 다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만하고 가자. 너 매번 이러고 있는 거 이젠 시안 씨도 별로 안 좋아할 거야.”
“인사만 하고 금방 나올게.”
미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은은 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시안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치 그가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볼 수도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지만 그녀는 이렇듯 시안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그의 집안에서 그녀가 아직도 그를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 그런 사실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일부러 그의 기일이나 생일이 아닌 자신의 생일에 이곳을 찾는다. 오늘도 자신의 생일에 맞추어 이곳에 들른 나은은 마치 살아 있는 시안의 곁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만 좀 가자.”
눈에 뭔가가 들어간 것처럼 뻑뻑한 느낌에 나은이 천천히 눈을 껌뻑거리고 있자 미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안의 분골함이 있는 곳까지 그녀를 데리러 들어왔다.
“오늘은 시안 씨가 생일 축하한다고 말이라도 해 주던? 아니면 자긴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도 몸조심하라고 안부라도 전해 주던?”
나은은 친구의 질문에 맥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생일날 그녀 혼자 이 먼 곳까지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함께 와 준 미현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은은 슬그머니 미현의 손을 잡았다.
“너 정말 연구 대상이야. 당장, 아니 평생 잊으라는 말은 안 할게. 하지만 이렇게 네 생일날에 찾아오는 건 청승맞아 보이기만 하지,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시안 씨 가족들이 아직도 네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 마음 아프겠지만 이제 좀 냉정하게 생각을 하자. 그가 죽은 게 너 때문도 아니고, 너희들이 결혼을 했던 것도 아니잖아. 지금 우리는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바쁜 처지인 데다, 어쨌든 너도 시집은 가야 할 거 아냐. 우리 이제 몇 달만 더 지나면 서른이거든? 너 계속 이렇게 살다 노처녀로 늙어 죽으면 가족도 없는데, 죽은 지 몇 달 만에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비참하지 않냐?”
신랄하게 나은의 가슴을 후벼 파던 미현이 큰 덩치를 부르르 떨며 은연중 자신의 말을 강조해 보였다. 나은도 그런 친구의 깊은 속뜻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언제까지나 시안의 죽음을 애통해하고만 있을 상황이 아닌,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도 벅찬 삶을 살아가는 처지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보내고 난 뒤 가족을 잃은 것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상태로 그를 보내 줬다면 이토록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그가 고통스럽지 않도록 진작 그의 형 말을 들을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다시 한 번 그녀의 멍든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만하자.”
나은은 꽉 잠긴 목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기 싫어. 하지만 내가 매번 말을 해 줘야 네가 현실을 직시하니까 이러는 거라고.”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어쩌면 그녀도 친구의 말이 모두 절절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늘 하루만이라도 잊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은은 바싹 말라 버린 입안을 축이듯 침을 삼킨 뒤 시안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네, 네. 알겠습니다요.”
미현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그녀를 따라 나왔다.
“가는 길에 현장에 좀 들러야겠어.”
미현과 나란히 납골당 건물을 빠져나오며 나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나은! 오늘 네 생일이야. 그런데 현장엘 간다고? 넌 분명 보통 여자가 아닐 거야. 난 보통 여자로서, 그리고 친구로서도 널 이해하기 힘들다.”
“조금 전에 네가 말한 것 같은데. 우린 먹고살기도 바쁘다고. 우리 처지에 생일이라고 팔자 좋게 노는 게 더 웃기지 않겠어?”
나은은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야, 허나은!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미안해.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에 나은은 일부러 눈을 찡그린 채 먼 산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됐어.”
“현장에 같이 갈래? 내려오면서 저녁 사 줄게.”
“현장이 어딘데?”
미현도 미안했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상신리 초등학교 근처…….”
“뭐? 어디라고?”
미현이 아무래도 자신이 말을 잘못 들은 것 같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정확히 폐교된 상신 초등학교 뒤로 있는 당간지주, 그 뒤로 좀 더 올라가서 있는 공터야.”
“뭐야. 하필이면 현장은 또 그 첩첩 산중의 고랑창이야? 내가 정말 미친다.”
미현이 기겁을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나은이 말한 현장이라는 곳은 언제 폐교가 됐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낡고 음산한 초등학교 건물과 당간지주가 유일한 인류의 흔적일 정도로 깊숙한 산골이었다. 미현이 이렇게 곧바로 그곳이 어딘지를 알아듣고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최근 설계 의뢰가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녀에게 찾아온 제법 큰 설계 용역이었다. 거기에다 시안이 잠들어 있는 납골당과도 가까운 거리니 그녀에게는 이래저래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얘가 뭘 모르는 소리를 하네. 거기 경치가 얼마나 좋은데. 요즘은 단풍잎이 떨어질 때라 경치가 더 끝내줄걸? 같이 가 보자. 사진 몇 장만 찍고 내려오면서 오랜만에 한잔 하면 좋잖아.”
나은은 미현의 반응을 관찰하며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한잔? 그 근처에 한잔 할 곳이 있어?”
“없던가?”
“난 그 근처에서 흉가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미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에 집을 짓는다는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라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너 설계비 50% 이상은 미리 받고 일 시작해라.”
“왜, 못 받을 것 같아서?”
“이런 고랑창에 숨어 살려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난 벌써 마음에 걸린다.”
“그만 됐고, 그럼 가는 길에 안주랑 간단하게 사 가지고 올라갈까? 그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면 아마 신선이 된 기분일 거야.”
“그럼 차는? 내가 예전에 그 근처에 가 봤던 적이 있었는데 거긴 일반 자가용은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길이 안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차가 4륜이라도 겁나고. 결론은 나은아, 난 아직 조금 더 살고 싶다.”
“그래서 같이 안 가 주겠다는 거야?”
미현이 나은을 위아래로 한 번 쓱 훑어보더니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오후에 환경 사무실 들러야 되거든. 지금도 늦었지만 오늘 중으로 들러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
“그럼 시내로 나가서 고기 사 줄게.”
“아니야, 정말 괜찮아.”
미현의 대답에 나은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곳까지 함께 와 준 친구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간단하게라도 저녁을 함께하려던 것뿐이었지 꼭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하면서 건설 쪽 대부분이 일감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규모 있는 설계사 사무실에 다니고 있는 미현이 친구보다 직장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건 나은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 나중에 밥 살게.”
“됐네.”
“사무실 들어가면 소장님한테 잘 말씀드려.”
“괜찮아. 여름에 바빠서 휴가 못 갔던 거 대신해서 오늘 반나절 쓰는 거라고 말해 놓고 나왔으니까.”
“하지만 벌써 오후잖아.”
“환경 사무실 들렀다 가면 잘 모르실 거야.”
그 순간 나은은 가족이 없어서 마음 붙일 데가 없다고 종종 불만을 가졌던 자신에게 이렇게 든든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미현은 친구의 인연으로 만났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친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 소중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미현아, 고마워.”
“얘가 갑자기 왜이래? 됐으니까 갔다 와서 전화나 해.”
“왜?”
“살아 돌아왔나 확인하게.”
“칫. 어디에서 내려 줄까?”
“큰 도로에서 내려 줘. 버스 타고 가도 되니까. 그나저나 너 지금 이 시간에 상신리에 들어가서 사진까지 찍고 나올 거면 후딱 다녀와라. 거기 해 떨어지면 귀신 돌아다닌다는 소문 있으니까. 그 폐교도 오싹하고.”
미현이 어깨를 바싹 움츠려 두툼한 목 쪽으로 좁히며 나은에게 겁을 주었다.
“뭐야.”
주차장에 도착하자 미현이 싱긋 웃어 보이며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 후 백미러로 자꾸 뒤를 힐끔거리는 나은에게 시간을 주려는 것인지 미현이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가에 도착하자 미현이 서둘러 내려 달라고 말했고 나은도 별말 없이 차를 세웠다.
“산속은 시내보다 더 빨리 어두워질 테니까 조심해서 다녀와.”
“알았어. 너도 조심해서 올라가.”
차에서 내려 힘껏 손을 흔들어 주는 미현을 뒤로하고 다시 차를 출발시킨 나은은 갑자기 가슴이 젖은 낙엽들로 가득 메워진 듯 서늘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미현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는 벗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기분을 바꾸기 위해 CD를 바꿔 넣고 볼륨을 크게 올렸다. 그리고 한적한 시골길과 맞닿아 있는, 주황과 빨간색 물감을 마구 흔들어 놓은 듯 뜨겁게 타들어 가고 있는 노을을 향해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뛰어들 수 없는 저녁노을을 향해 얼마나 달렸을까. 나은은 두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음악 소리 때문인지 서서히 조여져 오는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왼쪽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되는 비포장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몸이 지친 것도 잊었을 뿐 아니라 차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사실도 떠올리지 못했다.
미현을 내려 준 뒤부터 머릿속에 미현이 납골당에서 본 것 같다고 얘기한 시안의 형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맴돌았다. 하지만 시안의 기일도 아닌 날에 그가 그곳을 찾았을 리는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는 어떤 면에서도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무엇보다 나은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만약 미현의 말대로 그가 정말 납골당에 들러 그녀를 봤다면 그렇게 조용히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기로 시안과 그녀의 교제를 가장 완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바로 주안이었다. 시안이 형의 간섭과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떠올리자 자신으로 인해서 그의 고통이 더 컸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너무 잘난 형과 형이 인정해 주지 않는 여자를 끝까지 저버릴 수 없었던 시안. 그의 사고와 관련된 모든 원인을 자신이나 그의 형에게로 돌리기엔 약간의 억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처음부터 아예 자신을 만나지 않았거나 주안이 그녀를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시안은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지금까지도 그녀를 괴롭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나은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 수심이 가득했던 시안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자 괜히 목덜미가 달아오르면서 눈앞이 뿌예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의 속도를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늦가을의 해는 순식간에 저물어 버릴 것이다. 현장을 찾아가는 게 두 번째인 그녀는 이대로 숲 속에 어둠이 내려앉는다면 길을 제대로 찾아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친구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이 답답한 듯 미현이 움켜쥔 주먹으로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열변을 토했다. 물론 나은도 자신의 옛 애인의 형이자, 대기업 SJ물산의 상무인 강주안이 얼마나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인지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순순히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바쁜 사람이 그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는 오늘 같은 날 이 먼 곳까지 찾아왔었다는 친구의 주장에 썩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난 계속 이곳에 서 있었는데, 정말 아무 기척도 없었다고.”
미현이 자신을 놀려 주려고 한 농담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그만 털어놓기를 바라며 나은은 한동안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이상하네.”
“그 사람이 날 봤다면 그렇게 조용히 내려갔을 것 같니? 난 절대로 그렇지 않다, 에 내 차를 걸겠어.”
“정말 미치겠다.”
미현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자 나은은 친구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장난친 거지?”
“아냐. 맞다니까.”
미현이 나은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대답했다.
“어쨌든 그만 내려가자.”
“그래야지.”
나은은 시안의 분골함이 있는 곳을 다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만하고 가자. 너 매번 이러고 있는 거 이젠 시안 씨도 별로 안 좋아할 거야.”
“인사만 하고 금방 나올게.”
미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은은 친구의 손을 뿌리치고 시안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치 그가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볼 수도 없고 대화를 나눌 수도 없지만 그녀는 이렇듯 시안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그의 집안에서 그녀가 아직도 그를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른다. 그런 사실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일부러 그의 기일이나 생일이 아닌 자신의 생일에 이곳을 찾는다. 오늘도 자신의 생일에 맞추어 이곳에 들른 나은은 마치 살아 있는 시안의 곁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만 좀 가자.”
눈에 뭔가가 들어간 것처럼 뻑뻑한 느낌에 나은이 천천히 눈을 껌뻑거리고 있자 미현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안의 분골함이 있는 곳까지 그녀를 데리러 들어왔다.
“오늘은 시안 씨가 생일 축하한다고 말이라도 해 주던? 아니면 자긴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도 몸조심하라고 안부라도 전해 주던?”
나은은 친구의 질문에 맥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생일날 그녀 혼자 이 먼 곳까지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함께 와 준 미현에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은은 슬그머니 미현의 손을 잡았다.
“너 정말 연구 대상이야. 당장, 아니 평생 잊으라는 말은 안 할게. 하지만 이렇게 네 생일날에 찾아오는 건 청승맞아 보이기만 하지,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시안 씨 가족들이 아직도 네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 마음 아프겠지만 이제 좀 냉정하게 생각을 하자. 그가 죽은 게 너 때문도 아니고, 너희들이 결혼을 했던 것도 아니잖아. 지금 우리는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바쁜 처지인 데다, 어쨌든 너도 시집은 가야 할 거 아냐. 우리 이제 몇 달만 더 지나면 서른이거든? 너 계속 이렇게 살다 노처녀로 늙어 죽으면 가족도 없는데, 죽은 지 몇 달 만에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비참하지 않냐?”
신랄하게 나은의 가슴을 후벼 파던 미현이 큰 덩치를 부르르 떨며 은연중 자신의 말을 강조해 보였다. 나은도 그런 친구의 깊은 속뜻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언제까지나 시안의 죽음을 애통해하고만 있을 상황이 아닌,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도 벅찬 삶을 살아가는 처지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보내고 난 뒤 가족을 잃은 것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상태로 그를 보내 줬다면 이토록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그가 고통스럽지 않도록 진작 그의 형 말을 들을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다시 한 번 그녀의 멍든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만하자.”
나은은 꽉 잠긴 목소리로 힘없이 대꾸했다.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기 싫어. 하지만 내가 매번 말을 해 줘야 네가 현실을 직시하니까 이러는 거라고.”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어쩌면 그녀도 친구의 말이 모두 절절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늘 하루만이라도 잊고 싶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은은 바싹 말라 버린 입안을 축이듯 침을 삼킨 뒤 시안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네, 네. 알겠습니다요.”
미현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그녀를 따라 나왔다.
“가는 길에 현장에 좀 들러야겠어.”
미현과 나란히 납골당 건물을 빠져나오며 나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나은! 오늘 네 생일이야. 그런데 현장엘 간다고? 넌 분명 보통 여자가 아닐 거야. 난 보통 여자로서, 그리고 친구로서도 널 이해하기 힘들다.”
“조금 전에 네가 말한 것 같은데. 우린 먹고살기도 바쁘다고. 우리 처지에 생일이라고 팔자 좋게 노는 게 더 웃기지 않겠어?”
나은은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야, 허나은!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미안해.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에 나은은 일부러 눈을 찡그린 채 먼 산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됐어.”
“현장에 같이 갈래? 내려오면서 저녁 사 줄게.”
“현장이 어딘데?”
미현도 미안했는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상신리 초등학교 근처…….”
“뭐? 어디라고?”
미현이 아무래도 자신이 말을 잘못 들은 것 같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정확히 폐교된 상신 초등학교 뒤로 있는 당간지주, 그 뒤로 좀 더 올라가서 있는 공터야.”
“뭐야. 하필이면 현장은 또 그 첩첩 산중의 고랑창이야? 내가 정말 미친다.”
미현이 기겁을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나은이 말한 현장이라는 곳은 언제 폐교가 됐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낡고 음산한 초등학교 건물과 당간지주가 유일한 인류의 흔적일 정도로 깊숙한 산골이었다. 미현이 이렇게 곧바로 그곳이 어딘지를 알아듣고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최근 설계 의뢰가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그녀에게 찾아온 제법 큰 설계 용역이었다. 거기에다 시안이 잠들어 있는 납골당과도 가까운 거리니 그녀에게는 이래저래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얘가 뭘 모르는 소리를 하네. 거기 경치가 얼마나 좋은데. 요즘은 단풍잎이 떨어질 때라 경치가 더 끝내줄걸? 같이 가 보자. 사진 몇 장만 찍고 내려오면서 오랜만에 한잔 하면 좋잖아.”
나은은 미현의 반응을 관찰하며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한잔? 그 근처에 한잔 할 곳이 있어?”
“없던가?”
“난 그 근처에서 흉가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미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에 집을 짓는다는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라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너 설계비 50% 이상은 미리 받고 일 시작해라.”
“왜, 못 받을 것 같아서?”
“이런 고랑창에 숨어 살려는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난 벌써 마음에 걸린다.”
“그만 됐고, 그럼 가는 길에 안주랑 간단하게 사 가지고 올라갈까? 그렇게 경치 좋은 곳에서 술을 마시면 아마 신선이 된 기분일 거야.”
“그럼 차는? 내가 예전에 그 근처에 가 봤던 적이 있었는데 거긴 일반 자가용은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길이 안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차가 4륜이라도 겁나고. 결론은 나은아, 난 아직 조금 더 살고 싶다.”
“그래서 같이 안 가 주겠다는 거야?”
미현이 나은을 위아래로 한 번 쓱 훑어보더니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오후에 환경 사무실 들러야 되거든. 지금도 늦었지만 오늘 중으로 들러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
“그럼 시내로 나가서 고기 사 줄게.”
“아니야, 정말 괜찮아.”
미현의 대답에 나은은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곳까지 함께 와 준 친구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간단하게라도 저녁을 함께하려던 것뿐이었지 꼭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하면서 건설 쪽 대부분이 일감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규모 있는 설계사 사무실에 다니고 있는 미현이 친구보다 직장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건 나은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 나중에 밥 살게.”
“됐네.”
“사무실 들어가면 소장님한테 잘 말씀드려.”
“괜찮아. 여름에 바빠서 휴가 못 갔던 거 대신해서 오늘 반나절 쓰는 거라고 말해 놓고 나왔으니까.”
“하지만 벌써 오후잖아.”
“환경 사무실 들렀다 가면 잘 모르실 거야.”
그 순간 나은은 가족이 없어서 마음 붙일 데가 없다고 종종 불만을 가졌던 자신에게 이렇게 든든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미현은 친구의 인연으로 만났지만 그녀에게는 분명 친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 소중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미현아, 고마워.”
“얘가 갑자기 왜이래? 됐으니까 갔다 와서 전화나 해.”
“왜?”
“살아 돌아왔나 확인하게.”
“칫. 어디에서 내려 줄까?”
“큰 도로에서 내려 줘. 버스 타고 가도 되니까. 그나저나 너 지금 이 시간에 상신리에 들어가서 사진까지 찍고 나올 거면 후딱 다녀와라. 거기 해 떨어지면 귀신 돌아다닌다는 소문 있으니까. 그 폐교도 오싹하고.”
미현이 어깨를 바싹 움츠려 두툼한 목 쪽으로 좁히며 나은에게 겁을 주었다.
“뭐야.”
주차장에 도착하자 미현이 싱긋 웃어 보이며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 후 백미러로 자꾸 뒤를 힐끔거리는 나은에게 시간을 주려는 것인지 미현이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가에 도착하자 미현이 서둘러 내려 달라고 말했고 나은도 별말 없이 차를 세웠다.
“산속은 시내보다 더 빨리 어두워질 테니까 조심해서 다녀와.”
“알았어. 너도 조심해서 올라가.”
차에서 내려 힘껏 손을 흔들어 주는 미현을 뒤로하고 다시 차를 출발시킨 나은은 갑자기 가슴이 젖은 낙엽들로 가득 메워진 듯 서늘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미현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는 벗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기분을 바꾸기 위해 CD를 바꿔 넣고 볼륨을 크게 올렸다. 그리고 한적한 시골길과 맞닿아 있는, 주황과 빨간색 물감을 마구 흔들어 놓은 듯 뜨겁게 타들어 가고 있는 노을을 향해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뛰어들 수 없는 저녁노을을 향해 얼마나 달렸을까. 나은은 두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음악 소리 때문인지 서서히 조여져 오는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왼쪽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되는 비포장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몸이 지친 것도 잊었을 뿐 아니라 차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사실도 떠올리지 못했다.
미현을 내려 준 뒤부터 머릿속에 미현이 납골당에서 본 것 같다고 얘기한 시안의 형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맴돌았다. 하지만 시안의 기일도 아닌 날에 그가 그곳을 찾았을 리는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는 어떤 면에서도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무엇보다 나은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만약 미현의 말대로 그가 정말 납골당에 들러 그녀를 봤다면 그렇게 조용히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기로 시안과 그녀의 교제를 가장 완강하게 반대했던 사람이 바로 주안이었다. 시안이 형의 간섭과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떠올리자 자신으로 인해서 그의 고통이 더 컸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너무 잘난 형과 형이 인정해 주지 않는 여자를 끝까지 저버릴 수 없었던 시안. 그의 사고와 관련된 모든 원인을 자신이나 그의 형에게로 돌리기엔 약간의 억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처음부터 아예 자신을 만나지 않았거나 주안이 그녀를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시안은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지금까지도 그녀를 괴롭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나은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 수심이 가득했던 시안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자 괜히 목덜미가 달아오르면서 눈앞이 뿌예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의 속도를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늦가을의 해는 순식간에 저물어 버릴 것이다. 현장을 찾아가는 게 두 번째인 그녀는 이대로 숲 속에 어둠이 내려앉는다면 길을 제대로 찾아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