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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편>





1화


프롤로그





화창한 날씨였다.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빛나고 싱그러운 바람이 마음마저 상쾌하게 만드는. 그래서 사람들도 덩달아 환한 웃음을 가득 달고 흥겨운 모습을 하고 있나 보다.
벚꽃이 화려함을 뽐내고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는 벌이 오늘따라 더 소란스러워 보였다. 만물이 소생하는 4월의 봄 날씨는 어제 잠깐 내린 꽃비로 인해 절정을 보이고 있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게 하는 유혹적인 날씨. 참 오랜만이란 생각을 하던 지우가 묵묵히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고마웠어요.한 점 흔들림이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처음 만난 타인이 길을 가르쳐 주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사람처럼 건조한 음성이었다.
“언제 떠나나?
항상 듣는 감정 없는 목소리에 지우의 등 뒤로 한기가 흘렀다. 저 음성을 4년 내내 듣고 살았다.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는 사람.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관심 없는 사람. 그래서 목마르는 외로움으로 말라가게 했던 사람. 그러나 이제 이 사람도 과거로 남겨질 것이다.
깨끗한 이목구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외모로 시선을 끄는 사내. 잘 다듬어진 머릿결이 한창 물 오른 봄볕에 윤기를 내며 눈이 부시게 한다. 그래서 눈을 뗄 수 없는, 그러나 보아서는 안 되는, 언제나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던 사내는 여전히 근사한 모습으로 지우의 옆에 서 있었다. 그것도 이제는 오늘로 마지막일 터였다.
“다음 주에요.
잠시 그를 눈 속에 담으려는 듯 응시하던 지우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담으면 뭐할까. 어차피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가기 전에 연락 줘.
“네.
물론 빈말이었다.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그와 만날 일은 없으리라.
“그럼 난 먼저 가지. 한 시간 뒤에 회의가 있어.
“그래요, 바쁘실 텐데……. 행복하세요.
여전히 뒷모습만 보이는 그였다. 마지막 순간에도 차 마실 여유조차 주지 않는 사람. 드라마를 보면 이런 얘기는 차 한잔 같이 들면서 하던데…….
그러나 마지막이어서일까? 지우의 말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듯했다. 아마도 착각이리라.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그를 지켜보던 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이 화창한 봄날, 지우는 4년 2개월의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시작된 결혼 생활은 졸업과 동시에 끝을 보았다.
그녀를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4년 2개월은 악몽도, 그렇다고 지옥도 아니었다. 그저 목마른 갈증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짙은 허무만 남기고 그렇게 끝이 났다.
졸지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던 지우가 그를 만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약혼자라고 했다. 할아버지들끼리 정해 놓은 약혼자라며 어느 날 그는 지우의 인생에 나타났다.
그때의 지우는 부모님을 잃고 공포와 절망에 물들어 할아버지 옆에서 잠시도 떨어질 줄 모르던 울보 꼬맹이였다. 한시라도 할아버지가 안 보이면 발작을 일으키던 예민한 아이. 그런 지우를 할아버지만큼이나 예뻐해 주셨던 할아버지 친구분의 손자가 바로 그였다.
그 당시의 그녀는 두려움에 질려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불퉁한 얼굴로 바라보던 열여덟 살의 소년이 약혼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단지 그의 얼굴에 보이는 경멸이 무섭고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스물이 되던 해, 그와 결혼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말 세상에 혈혈단신 혼자가 되었던 그날, 문상을 와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보이던 할아버지의 친구분 손에 이끌려 그분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건 약속이라고 했다. 그러니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스물의 나이 어린 신부가 되었다. 추운 2월의 신부가.
그리고 4년이 지난 4월엔 스물넷의 나이로 이혼녀가 되어 있었다.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예뻐해 주시던 할아버지의 친구분이 돌아가시고 한 달 뒤, 결혼하던 그때 그대로의 순결한 이혼녀가 되었다.




1.





피곤한 하루였다. 제천에 준공 중인 제3공장에 불이 나 이른 새벽부터 그곳으로 날아가야 했다. 이번에 준공하는 공장은 동혁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소방 시설을 완비하고 만약을 대비해 경비도 강화시켰다.
이제 막 건물을 세우고 중요 기계들이 들어갈 준비를 하던 곳에 불이 날 이유가 없었다.
다행히 날씨가 도와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자본이 꽤 들어간 지금 조금이라도 늦게 불길을 잡았더라면 그로서도 꽤 난감한 처치에 빠졌을 것이다.
경찰들과 소방관들의 발 빠른 대처에도 불구하고 갇혀 있던 인부 세 명이 연기로 인해 질식사를 했다는 소식에 동혁은 수습을 하느라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아직도 옷에서 화재의 잔재인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부지런히 옷을 갈아입고 경제인 모임이 있는 호텔로 향했다. 부부 동반 자리였지만 현정은 영화 오디션이 있다며 거부했기에 오늘도 그는 혼자 이 모임에 나섰다.
호텔에 도착한 그는 아버지도 얼굴을 보인 자리니 굳이 그가 없어도 상관없으리라 여겨 간단히 인사만 하고 나올 요량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에게 잡히는 바람에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 똑같은 인사를 하는 자리가 지겨워진 그는 슬그머니 비켜나 호텔의 맨 위층을 찾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군데군데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서울의 야경을 즐기며 대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익숙한 야경이었다. 사실 이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보다 그의 사무실에서 보는 야경이 더욱 아름다웠다. 미련 없이 바에 앉은 그가 위스키 잔을 기울이던 그때,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창가에 홀로 앉아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왠지 낯이 익다. 멋없이 틀어 올린 머리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은 핀이 불빛을 받아 반짝이며 염색기 없는 검은 머리를 돋보이게 했다.
그녀도 그만큼이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느슨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좁은 어깨에 힘없이 흩어져 있었다. 깔끔한 투피스 정장의 치마선이 보기 좋은 종아리 선으로 이어져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짙은 외로움의 향기가 눈을 뗄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처음 보는 여자인데도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날 듯 기억나지 않는 갈증을 느끼게 한다.
그녀는 팔꿈치를 탁자에 올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뺨에 대고는 창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그의 시선을 잡았다. 어쩌면 검은 머릿결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하얀 살결로 인해 그녀의 손가락이 두드러져 보이는지도 몰랐다.
점점 얼굴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잡히지 않는 기억을 헤집어도 잡히지 않는, 그러나 익숙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지자 순간 그녀에게 말이나 걸어 볼까 하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동혁의 바람이 통했는지 마치 인형같이 움직임 없던 그녀가 천천히 팔을 움직여 시계를 확인했다. 더불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까? 애인? 남편?
갑자기 그녀가 혼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느껴진다. 자신이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모르는 여자가 아니던가. 처음 보는 여자가 혼자이든 유부녀이든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가만히 앉아 있던 여자가 일어나 그를 향해 섰을 때, 동혁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익숙한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얼굴.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4년을 그의 아내로 살았던 여자인데.
헤어지고 4년 만에 동혁은 이혼한 전처를 만났다.
가방을 챙겨 나가려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동혁은 생전 처음으로 당황이라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알은체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체해야 하는 걸까?
4년을 같이 살았다지만 남남이라고 해도 무방한 사람이었다. 잠시 그의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사라진.
그녀와의 조우에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녀도 그를 알아보고 놀란 듯 커다래진 눈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아, 이 여자의 눈이 이렇게 올곧았구나.
4년을 아내로 살았던 그녀의 눈을 그는 오늘 처음으로 바로 보았다.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 때문에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돋보이며 단아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 여자가 이토록 예뻤던가?
그의 기억 속의 전처는 항상 움츠리고 겁먹은 생쥐 같았는데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어디에도 그런 모습이 없었다. 약간은 창백한 안색이지만 그건 생각지 않은 만남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리라.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선의 몸매가 회색 투피스로 인해 딱딱해 보일 수도 있는 맵시를 살려 주었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달걀 모양의 얼굴을 따라 아름다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여자지만 처음 보는 듯 낯선 여자 같기도 했다.
동혁을 알아보고 망설이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작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입술을 사리문 것이 보였다.
이제 그녀를 알아보았으니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4년 동안 아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던 여자를 만나면 무슨 말로 첫 마디를 건네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의 고민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그녀 덕분에 끝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우연히도 만나네요.”이 여자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고 그윽했구나.
침착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동혁이 생각한 것이라고는 고작 그것뿐이었다.
“귀국한 건가?”
간신히 제 목소리가 나오는 것에 감사하며 동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전히는 아니지만.”
“좀 앉지.”
“아니요, 다음에요. 좀 피곤해서요.”
그의 청을 부드럽게 거절하는 목소리는 평이했다. 오랜만에 보는 놀라움도, 반가움도 없는. 하긴 그녀가 그를 반가워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녀의 거부에 오기 비슷하게 잡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음이 있을까? 앉아.”
분명 부탁하려 했는데 버릇처럼 엄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잠시 지우의 눈가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어렸지만 얕은 한숨을 내쉰 그녀는 순순히 옆자리에 앉았다.
지우가 앉자 눈치 빠른 바텐더가 그녀의 앞에 새로운 잔을 놓아 주었고, 동혁은 묻지도 않고 마시고 있던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말없이 그의 행동을 주시하던 그녀가 다시 낮은 한숨을 내쉰다. 꽤나 귀찮다는 듯.
왜 그런 그녀의 행동에 화가 치미는 것일까?
예전에는 지우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던 그였다. 오히려 반응을 보일라치면 차갑게 무시했었다.
“마셔.”
“전 술은 안 해요.”
그랬던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좋아 보이는군.”
“당신도요.”
“언제 온 거야?”
“삼 일 전에요.”
“연락하지 그랬어.”
“왜요?”
그녀의 물음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 끊어진 인연인데 굳이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 막상 지우를 붙잡아 앉혔지만 할 말 또한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이대로 보내기도 싫었다.
“당신 부모님은 잘 계시죠?”
“응, 아버지가 작년에 심장 수술 받으셨어.”
“그래요? 지금은 괜찮으세요?”
“좋아지셨어. 그래도 예전처럼 활동적이진 못하시지만.”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서 지내는지, 결혼은 했는지…….
왜 갑자기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많은지 그도 알 수 없지만, 알고 싶어졌다.
“혼자야?”
“네, 아직은요. 당신 결혼 소식은 들었어요. 워낙에 유명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더군요. 부인이 나오는 영화도 봤어요. 그때보다 더 아름답더군요.”
무심한 대답에 어깨가 굳어졌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은 그녀에 대해 모르는 동안에도 지우는 그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괜히 껄끄럽고 민망해졌다.
“어디…… 잠깐.”
그녀가 어디에 묵고 있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그의 휴대폰이 몸부림을 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 당신, 어디 있어요? 오라고 해서 왔더니 당신 없잖아요.
오디션 때문에 못 온다던 현정이 늦게라도 온 모양이었다.
“알았어. 지금 갈 테니 시끄럽게 하지 마.”
- 대체…… 얼른 와요.
“부인이신가 봐요. 얼른 가 보세요. 그럼, 만나서 반가웠어요.”
작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현정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마침 핑계가 없었는데 잘되었다는 양, 그녀가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저…… 연락해.”
“그러죠.”
입에 발린 말이란 걸 그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로 볼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두 사람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우가 사라진 후에도 동혁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야 함을 알고 있었다. 현재 그의 아내의 옆으로. 그러나 오늘따라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난다.
그 남자 신동혁. 이혼한 지 4년, 그리고 다시 결혼한 지 4년 만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작은 의문부호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룸까지 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으로 인해 현기증이 나고 무섭게 팔딱이는 맥박이 그녀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남아 그녀를 지탱하는 오기와 자존심이었겠지. 그나마 그런 자존심이라도 아직은 지니고 있었다니 다행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처음 그를 발견한 지우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눈 뜨고도 잠이 들 수 있구나! 할 정도였다.
그쪽이 그녀를 몰라보았다면 그가 알아보기 전에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초리에서 이미 늦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두려워하거나 피할 이유가 없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먼저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