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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책의 절반 이상이 응응 씬이요 표지는 빨간색이고 오른쪽 꼭대기에 앙증맞은 19금 마크도 붙어 있다고 차마 고백할 수 없었다. 그것도 책으로 나온 것만 그렇다는 것이지 전자북은 더 하다는 사실은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그의 약혼녀는 이래 봬도 잘나가는 인터넷 야설 작가인 것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무, 물어보겠습니다.”
“응? 뭐야, 제 약혼녀가 썼다는 책 제목도 모르고 있었냐? 하긴, 내 그럴 줄 알았다. 제 공부 하느라 바빠서 물어볼 생각도 못 했겠지. 무심한 놈 같으니.”
“하하.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하경이는 아직 안 왔습니까?”
공연히 속이 뜬끔해진 지형이 잽싸게 말길을 돌렸다.
여기서 더 까발리면 면구스러운 건 둘째 치고 대량 유혈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얼굴로 몰린 피가 코를 통해 분수처럼 뿜어져 나가면 그걸 어찌 다 수습한단 말인가.
“안 오긴? 아까 전에 와서 옷 갈아입고 부엌으로 갔지. 슬쩍 보니까 제 올케들이랑 어울려 놀고 있던데.”
“아, 그럼 우리 조카도 같이 왔겠네요?”
“아니. 일하는 데 방해된다고 그놈은 떼어 놓고 왔다. 이따가 석준이가 오면서 같이 데리고 온다고 하더라.”
요즘 발발 기어다니기 시작한 덩어리를 떠올리며 하준이 무심히 대꾸했다. 그러더니 또 집요하게 물었다.
“사인회는 호텔보다 백화점 도서코너에서 하는 게 낫겠지?”
“그, 그렇긴 하지만…….”
“작은형, 도서코너에 자리 좀 마련해 주지?”
“비용은 네가 대는 거냐?”
“거 자꾸 쩨쩨하게 굴 거유? 알았어. 까짓 몇 푼이나 한다고 아껴. 결혼선물 하는 셈 치지 뭐. 날이나 잡아 주슈.”
큰일 났다.
이러다 정말로 사인회가 열리면 어쩌나. 만일 열리면 대한민국 최초의 야설작가 사인회가 될 텐데 그땐 또 어찌해야 하나. 막아야 했다. 목숨 걸고 무조건 막아야 산다. 결심하는 순간 문득 잠자코 듣기만 하던 윤 여사가 다리를 걸었다.
“이거이 웬 기특한 짓이네. 아새끼래, 철때기는 없어도 마음 쓸 줄은 아는 기야. 기래, 잘 생각했댔어. 서운치 않게 잘 좀 챙겨 주라.”
“음하하하. 맡겨만 두라니까. 엄마, 역시 나밖에 없지?”
“기렇대두. 여기, 떡 하나 더 먹으라우.”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소리가 이래서 나온 것인가.
굳이 안 챙겨 주셔도 되는데 왜 하필이면 그런 선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이렇게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나 싶어 지형은 눈물 젖은 눈으로 잠시 하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좌절어린 시선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하준이 또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감동받았냐? 새끼, 뭐 그까짓 것 가지고 눈물씩이나. 이게 다 너 잘 살라고 하는 거야, 인마. 보나마나 프러포즈도 시원찮게 했을 텐데 이렇게라도 안 챙기면 제수씨가 얼마나 서운해하겠냐?”
“크흠. 프러포즈는 제대로 했습니다만.”
“알지. 호텔방에다 촛불 켜 놓고 무릎 꿇고 반지 준 거 다 알지.”
“헉! 그,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혹시…….”
“어허, 사람을 뭘로 보고. 누가 촛불을 백 개나 주문했다기에 불 날까 봐 그냥 한번 살펴본 거다. 소화기는 잘 있는지 방화벨이며 스프링쿨러는 멀쩡히 돌아가는지, 뭐 그런 것도 검사할 겸.”
하준은 시치미를 뚝 떼고 대강 얼버무렸다.
뭘 하는지 궁금해서 꽃바구니에 몰카를 설치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직전까지 여자가 있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뜬금없이 호텔을 찾은 놈이 갑자기 촛불이며 꽃에 샴페인 따위를 시키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올라가는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건 은하준이가 아니다. 그는 배고픈 것도 못 참지만 궁금한 건 더 못 참는다. 덕분에 지형이 곧 장가를 갈 거라는 사실도 제일 먼저 알지 않았나.
“그리고 이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촌스럽게 그게 뭐냐? 요즘 누가 그런 심심한 프러포즈를 해. 석준이를 봐라. 뉴스 시간에 생방송으로 터뜨렸잖아. 사내자식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심지어 저 재미없는 우리 큰형도 그렇게는 안 했다.”
“어? 갑자기 나는 왜 끌고 들어가?”
구부정하게 앉아 밤을 꼼꼼히 들여다보던 하중이 벼락을 맞은 양 고개를 발딱 들고 하준을 노려보았다.
“아니, 큰형이 원래 멋대가리 없는 사람이긴 해도 프러포즈는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럭저럭 괜찮은 게 아니라 꽤 괜찮았지. 짠돌이 형님이 그런 돈지랄을 할 줄은 나도 몰랐잖아.”
옳다구나 싶었는지 이젠 하서까지 거들고 나섰다. 거기에 사인회 선물을 그대로 묻어 버리고 싶은 지형이 덥석 꼬리를 잡았다.
“굉장한 연애라도 하셨나 봅니다?”
“크흠. 굉장한 연애는 무슨. 저놈이 괜히 헛소리를 하는 게지.”
“어허, 헛소리라니.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해? 큰형이 대학 때부터 공부 안 하고 연애질을 한 덕분에 내가 일찌감치 형수를 본 것 아냐?”
“에라, 이 자식아! 공부를 안 하긴 누가!”
들고 까던 밤을 던질 듯 움켜쥐자 하준이 여전히 누운 채 냉큼 덧붙였다.
“그거 던지면 형이 대학 때 잠시 형수랑 헤어지고 엉엉 울던 거 다 까발리는 수가 있어!”
“헛! 너 이 자식, 그건 어떻게 알았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뭐. 한동안 붕어눈퉁이가 되어 가지고 다녔으면서.”
연이은 폭로에 하중이 충격받은 얼굴로 밤을 꾹 움켜쥐었다. 말릴 새도 없이 홱 던지면서 소리쳤다.
“아예 다 까발려라, 이놈아!”
딱!
날아온 밤이 하준의 머리통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태평하게 늘어져 있던 얼굴에 불뚝 심술이 솟구쳤다.
“던졌다 이거지? 좋아. 다 털어놓겠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맞고 나니 반드시 다 까발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까지 샘솟았다. 그에 작심한 하준이 지형을 붙잡고 제 큰형의 그 웃기지도 않는 연애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어떻게 된 이야기냐 하면 말이야…….”
찌질한 시절이었다.
난봉꾼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본래부터 번듯하게 타고난 외모에 아주 뛰어나진 않지만 그리 빠지지도 않는 머리, 그리고 어머니와 어린 누이 덕분에 그럭저럭 먹고살 만해진 살림까지. 크게 만족스럽진 않지만 딱히 불편할 것도 없는 생활을 습관처럼 하루하루 이어 가던 그때, 그는 찌질한 대학생이었다. 얼마나 찌질했느냐 하면…….
“네가 은하중이지?”
누군가가 책에 코를 박고 있던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무심히 올려다보니 바로 윗대의 선배 하나가 팔짱을 척 끼고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같은 과 동기들이 병풍처럼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것도 보였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살벌했다.
“맞습니다만.”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며 하중이 멀뚱히 대꾸했다. 그러자 더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문제의 선배가 소리쳤다.
“너 왜 여기에 있냐?”
“몰라서 물으십니까? 곧 시험입니다. 준비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연? 다른 학우들은 지금 최루탄이 터지는 시위현장에 가 있다. 그들이 시험날짜를 몰라서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알 게 뭔가.
시위하고 싶은 놈은 시위를 하는 것이고 공부하고 싶은 놈은 공부를 하는 것이지. 남들이 한다고 우르르 따라나설 이유 따위 그에겐 없었다. 무엇보다 폭력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뭐,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저까지 끌고 가셔야겠다는 겁니까?”
“뭐?”
“시위를 하는 놈이 있으면 공부를 하는 놈도 있는 겁니다. 도대체 시험기간에 공부를 하는 게 언제부터 죄가 된 겁니까?”
“죄가 된다는 게 아니라…….”
“반독재도 좋고 민주화운동도 좋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가 할 일은 한 다음에 거리로 나서는 게 옳은 일 아닐까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툭툭 내뱉는 말에 선배는 물론이고 동기들까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하중은 느긋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는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 주는 게 예의입니다.”
그래 봤자 도서관은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