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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
남궁현 1권(1화)
序
뿌리는 자라서 줄기를 만들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는다. 또 열매는 씨를 뿌려 뿌리를 내린다.
결국 모든 것은 돌고 돌게 되어 있다.
이것은 진리.
뿌리는 씨앗을 파괴하고 나와서야 완전해진다. 그러고는 무수히 많은 잎들을 희생시켜 가며, 또 그에 버금가는 수의 꽃을 떨어뜨리며, 뿌리는 점점 더 깊게, 강인하게 자라난다.
뿌리는, 그러한 존재다.
1. 남궁현. 남궁 현? 남 궁현!
(1)
서울시 성북동.
“궁현아, 일어나라. 오늘 아버지랑 등산 가기로 했잖니?”
“아― 쫌만, 엄마. 쫌만 더 잘게…….”
평범한 어느 아파트의 방 안에는 제법 어깨가 벌어지고 늠름해졌지만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사내가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어머, 얘가. 그러게 공부도 좀 작작하지 그랬니. 안 그래도 부족한 주말을 이렇게 쓸데없이 보내고 싶니?”
그리고 그를 깨우는 여인은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푸근함을 지닌 여인이다.
짜악!
“악!”
몇 번을 흔들어도 궁현이 일어나지 않자, 그의 어머니 차혜숙은 그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아, 아프잖아! 아, 알았어요, 알았어. 일어난다니까요.”
순간 반항하려던 궁현은 혜숙의 도깨비 같은 얼굴에 깨갱, 하고 꼬리를 말아 버렸다.
“그럼, 10분 안에 씻고 옷 갈아입어. 밥은 먹고 가야지.”
네에, 하고 중얼거리듯 대답한 궁현은 아직 비몽사몽간의 상태인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후우.”
쪼르르르르르―
“시원하다. 하암. 졸려 죽겠는데 무슨 등산이야. 하아…….”
나지막이 불평하는 궁현이었지만, 사실은 그도 이 주말마다 하는 등산이 싫지는 않았다. 인간은 원래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잠이 조금 부족해진다는 것만 제외하면, 등산은 매우 훌륭한 취미였다.
대충 세수와 머리감기를 끝낸 궁현은 바로 거실로 걸어갔다.
“여, 지금 일어났냐?”
거실 탁자에는 그의 형 남궁환이 앉아 있었다.
“하아암― 어, 형. 이번엔 같이 갈 거지?”
고3인 남궁현보다 2살이 많은 남궁환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 매주마다 가던 등산을 많이 빼먹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대생인 남궁환은 의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수업이 없을 때에도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공부에 바빴기 때문이다.
저번도, 그 전의 등산에도 따라가지 않았던 남궁환에게 궁현은 서운한 눈길을 보냈다.
그걸 알아챈 궁환은 안 가려던 생각을 접고 미소를 지으며 긍정을 표했다.
“아, 그래. 안 그래도 산 공기 좀 마시고 싶었어.”
자신의 말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궁현을 보고 궁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남궁환과 남궁현 형제는 어릴 때부터 형제간의 우애가 깊기로 과장 좀 보태서 옆 동네까지 소문난 형제였다.
비록 이번 주말 동안에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학식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궁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어쩌면 궁환에게는 충분한 소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 오늘은 궁환이도 따라 갈 거니? 이런, 그러면…… 도시락을 하나 더 싸야겠네.”
어느새 부엌에서 나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혜숙은 발걸음을 되돌려 부엌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궁환이 그런 그녀를 붙잡는다.
“아, 아니에요. 엄마. 난 그냥 가는 길에 김밥이나 사 먹으면 되지. 정 안 되면 궁현이 것 나눠 먹으면 되니까 걱정 마요.”
“에휴, 그래도 어떻게 그러니. 얘, 궁현아. 아버지 더러 20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해라.”
궁환의 만류에도 한사코 고집을 부려 부엌으로 되돌아간 혜숙은 손을 바삐 놀리기 시작했다.
“네에―”
바로 아버지인 남석현의 방으로 들어간 궁현은 간단하게 상황을 전했다.
“어, 그래? 네 형이 따라간다고? 잘됐구나. 오늘은 좀 본격적으로 가려고 했는데.”
남석현은 평소에도 등산을 즐기는 산악 마니아였다.
“네, 진짜요? 아,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갈 건데요?”
궁현의 질문에 석현은 지도를 가리켰다.
“네?”
탁!
석현이 가리킨 곳은 설악산이었다.
“아, 네.”
왜 쓸데없이 폼을 잡으시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궁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잘 다녀오세요, 여보. 그리고 너희들도 잘 다녀와라, 조심하고.”
혜숙의 말에 궁현 일행은 등산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새삼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 다녀오리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설악산으로 향했다.
“하아, 이야, 역시 산 공기 좋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궁현을 보며 궁환과 석현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우선은 정상까지 올라가 볼까?”
그들은 설악산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곳은 원래의 입구가 아닌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샛길이었다. 이 길은 남석현이 몇 년 정도 전에 발견했던 길이다. 대청봉으로 바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설악산을 빙 둘러 가는 상당히 험악한 등산로였다.
“후우, 후우…….”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그들은 중간 정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가 가장 험난한 길로 남석현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천천히 그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수십 분, 일행의 가장 뒤에서 가던 궁현은 갑자기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어, 어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궁환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이미 궁현의 신형이 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 안 돼!! 궁현아!!”
“응? 구, 궁현아―!!”
황급히 내밀어진 궁환의 손은 궁현의 손으로부터 한 치가 부족해 닿지 못하고 끝내 궁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궁환과 석현을 눈에 담아 두던 궁현은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결국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
“……요, 이봐요!!”
멀리서 울리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궁현은 가까스로 정신을 깨웠다.
“이봐요! 어서 일어나시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궁현은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본능적으로 서서히 눈을 떴다.
눈앞이 뿌옇지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인 후에야 겨우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네. 이, 일어나요. 일어났다구요, 엄마……?!”
거의 자동적으로 엄마라고 말한 궁현은 그제야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는, 엄마는커녕 여자조차 아닌 상대방에게 사과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엄마인 줄…….”
“뭐라는 겁니까? 아니, 그건 됐고. 지금 미쳤수? 이런 곳에서 누워 자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오. 그래도 도중에 내가 지나갔기에 살아난 게지.”
궁현은 자신의 사과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입을 연 사내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주, 중국어? 어, 어떡하지? 나, 나는 중국어 못하는데.’
한참을 머리를 굴리던 궁현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것도 제대로 할 수는 없지만…….’
“Ca, Can you speak English?”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중국인은 ‘영어 할 줄 아느냐’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것이오? 에잉,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에이, 잠이나 잘 주무쇼.”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화를 낸다는 정도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괜히 화나게 했다는 생각에 궁현은 그자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집에 가지 않으면…….’
그제야 자신이 설악산에서 떨어진 이후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알아챈 궁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에…… 그러니까, 상처가 없네.”
확실히 궁현의 몸은 바닥에서 뒹굴었기 때문에 더럽긴 했지만 상처는 거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한동안 머리를 굴리는 궁현의 귀에,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이 들려왔다.
“아, 이봐. 저기 저 사람.”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마치 사극에나 나올 법한 차림을 하고 허리에 검을 찬 사람 둘이 궁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사라졌던 그 사람도 차림이 조금은 이상했던 것 같았다.
“아, 맞아! 도련님이시다!!”
그렇게 수십 초 동안을 가만히 있던 그들은 그렇게 소리치더니, 궁현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당연하게도 뭐라고 말하는지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궁현이지만, 갑자기 정색을 하고 달려오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탓.
하지만 달리기에 꽤나 자신이 있던 궁현인데도, 그들은 순식간에 따라잡아 앞뒤를 가로막고 입을 열었다.
“하하하, 도련님. 어딜 또 도망 가시려구요. 가출은 안 되죠, 가출은.”
“으, 응?”
적어도 상대가 뭐라고 말하는지만 알면 좋으련만, 궁현은 계속 엉거주춤 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남궁 현 도련님! 세가로 돌아가시죠!”
“세가로 돌아가시죠, 도련님! 제발!”
무인들은 답답했다. 벌써 한 다경 째 설득을 하는데도 요지부동이니…….
하지만 궁현은 또 궁현대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진지하게 꺼내더니, 나중에는 거의 빌다시피 하지 않는가. 그 이후로도 계속 알 수 없는 말로 무언가를 토로하는 무인들. 궁현으로서는 그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응? 혹시 날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난공 어쩌고 하는 것이 왠지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봐야 뭔가 의사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아, 근데 어쩐다냐. 내가 아는 중국어라고는 ‘니 하오’밖에 없는데. 그래! 미, 밑져야 본전이다!’
“도련님!! 이번에 못 데리고 돌아가면 저희는 죽습니다!!”
계속 재촉하는 그들에게 지친 궁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중국어 단어를 말했다.
“너희들……좋다!”
니 하오. 한자로 쵴好. 안녕, 안녕하십니까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건만, 자신이 없는 궁현이 쵴(너, 당신, 너희들)와 好(좋아, 그래, 아름답다)를 떼어 발음하는 바람에, 조금 갸우뚱하던 그들은 완전히 다른 뜻으로 이해했고, 드디어 궁현이 굴복했다고 생각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자네!”
“……그, 그래!!”
그들은 행여나 궁현의 마음이 바뀔까 서둘러 궁현을 들쳐 메고 경공을 펼쳤다. 뭐, 일단 궁현은 그럴 마음도 아니었지만.
“어? 어어? 뭐, 뭐하는 거야……요, 당신들!!”
궁현은 잘 몰랐지만, 이곳은 남궁세가의 본가가 위치한 천주산 어귀였다. 이들은 가출을 상습적으로 일으키는 남궁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사들이었다. 일단 들쳐 멨으니, 세가로 돌아갈 때까지는 절대로 내려놓을 리 만무했다.
두 무사 즉, 남궁세가 소속의 무사인 이형종과 허정휘는 최대한 3달 안에 남궁현을 찾아오라는 가주의 명을 받고 중원 각지를 떠돌았다. 하지만 여기저기를 뒤지고 또 뒤져 1년이 넘어서야 겨우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궁현을 찾게 될 줄이야?
하늘이 내려 주신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 은혜를 저버리기 싫은 그들은 죽기 살기로 발을 놀리며 남궁세가로 향했다.
남궁현 1권(1화)
序
뿌리는 자라서 줄기를 만들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는다. 또 열매는 씨를 뿌려 뿌리를 내린다.
결국 모든 것은 돌고 돌게 되어 있다.
이것은 진리.
뿌리는 씨앗을 파괴하고 나와서야 완전해진다. 그러고는 무수히 많은 잎들을 희생시켜 가며, 또 그에 버금가는 수의 꽃을 떨어뜨리며, 뿌리는 점점 더 깊게, 강인하게 자라난다.
뿌리는, 그러한 존재다.
1. 남궁현. 남궁 현? 남 궁현!
(1)
서울시 성북동.
“궁현아, 일어나라. 오늘 아버지랑 등산 가기로 했잖니?”
“아― 쫌만, 엄마. 쫌만 더 잘게…….”
평범한 어느 아파트의 방 안에는 제법 어깨가 벌어지고 늠름해졌지만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사내가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어머, 얘가. 그러게 공부도 좀 작작하지 그랬니. 안 그래도 부족한 주말을 이렇게 쓸데없이 보내고 싶니?”
그리고 그를 깨우는 여인은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푸근함을 지닌 여인이다.
짜악!
“악!”
몇 번을 흔들어도 궁현이 일어나지 않자, 그의 어머니 차혜숙은 그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아, 아프잖아! 아, 알았어요, 알았어. 일어난다니까요.”
순간 반항하려던 궁현은 혜숙의 도깨비 같은 얼굴에 깨갱, 하고 꼬리를 말아 버렸다.
“그럼, 10분 안에 씻고 옷 갈아입어. 밥은 먹고 가야지.”
네에, 하고 중얼거리듯 대답한 궁현은 아직 비몽사몽간의 상태인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후우.”
쪼르르르르르―
“시원하다. 하암. 졸려 죽겠는데 무슨 등산이야. 하아…….”
나지막이 불평하는 궁현이었지만, 사실은 그도 이 주말마다 하는 등산이 싫지는 않았다. 인간은 원래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하지 않는가. 잠이 조금 부족해진다는 것만 제외하면, 등산은 매우 훌륭한 취미였다.
대충 세수와 머리감기를 끝낸 궁현은 바로 거실로 걸어갔다.
“여, 지금 일어났냐?”
거실 탁자에는 그의 형 남궁환이 앉아 있었다.
“하아암― 어, 형. 이번엔 같이 갈 거지?”
고3인 남궁현보다 2살이 많은 남궁환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 매주마다 가던 등산을 많이 빼먹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대생인 남궁환은 의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수업이 없을 때에도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공부에 바빴기 때문이다.
저번도, 그 전의 등산에도 따라가지 않았던 남궁환에게 궁현은 서운한 눈길을 보냈다.
그걸 알아챈 궁환은 안 가려던 생각을 접고 미소를 지으며 긍정을 표했다.
“아, 그래. 안 그래도 산 공기 좀 마시고 싶었어.”
자신의 말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궁현을 보고 궁환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남궁환과 남궁현 형제는 어릴 때부터 형제간의 우애가 깊기로 과장 좀 보태서 옆 동네까지 소문난 형제였다.
비록 이번 주말 동안에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학식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궁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어쩌면 궁환에게는 충분한 소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 오늘은 궁환이도 따라 갈 거니? 이런, 그러면…… 도시락을 하나 더 싸야겠네.”
어느새 부엌에서 나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혜숙은 발걸음을 되돌려 부엌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궁환이 그런 그녀를 붙잡는다.
“아, 아니에요. 엄마. 난 그냥 가는 길에 김밥이나 사 먹으면 되지. 정 안 되면 궁현이 것 나눠 먹으면 되니까 걱정 마요.”
“에휴, 그래도 어떻게 그러니. 얘, 궁현아. 아버지 더러 20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해라.”
궁환의 만류에도 한사코 고집을 부려 부엌으로 되돌아간 혜숙은 손을 바삐 놀리기 시작했다.
“네에―”
바로 아버지인 남석현의 방으로 들어간 궁현은 간단하게 상황을 전했다.
“어, 그래? 네 형이 따라간다고? 잘됐구나. 오늘은 좀 본격적으로 가려고 했는데.”
남석현은 평소에도 등산을 즐기는 산악 마니아였다.
“네, 진짜요? 아,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갈 건데요?”
궁현의 질문에 석현은 지도를 가리켰다.
“네?”
탁!
석현이 가리킨 곳은 설악산이었다.
“아, 네.”
왜 쓸데없이 폼을 잡으시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궁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잘 다녀오세요, 여보. 그리고 너희들도 잘 다녀와라, 조심하고.”
혜숙의 말에 궁현 일행은 등산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새삼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 다녀오리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설악산으로 향했다.
“하아, 이야, 역시 산 공기 좋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궁현을 보며 궁환과 석현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우선은 정상까지 올라가 볼까?”
그들은 설악산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곳은 원래의 입구가 아닌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샛길이었다. 이 길은 남석현이 몇 년 정도 전에 발견했던 길이다. 대청봉으로 바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설악산을 빙 둘러 가는 상당히 험악한 등산로였다.
“후우, 후우…….”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그들은 중간 정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가 가장 험난한 길로 남석현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천천히 그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수십 분, 일행의 가장 뒤에서 가던 궁현은 갑자기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어, 어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궁환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이미 궁현의 신형이 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 안 돼!! 궁현아!!”
“응? 구, 궁현아―!!”
황급히 내밀어진 궁환의 손은 궁현의 손으로부터 한 치가 부족해 닿지 못하고 끝내 궁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궁환과 석현을 눈에 담아 두던 궁현은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결국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
“……요, 이봐요!!”
멀리서 울리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궁현은 가까스로 정신을 깨웠다.
“이봐요! 어서 일어나시오!”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궁현은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본능적으로 서서히 눈을 떴다.
눈앞이 뿌옇지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인 후에야 겨우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네. 이, 일어나요. 일어났다구요, 엄마……?!”
거의 자동적으로 엄마라고 말한 궁현은 그제야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는, 엄마는커녕 여자조차 아닌 상대방에게 사과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엄마인 줄…….”
“뭐라는 겁니까? 아니, 그건 됐고. 지금 미쳤수? 이런 곳에서 누워 자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오. 그래도 도중에 내가 지나갔기에 살아난 게지.”
궁현은 자신의 사과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입을 연 사내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주, 중국어? 어, 어떡하지? 나, 나는 중국어 못하는데.’
한참을 머리를 굴리던 궁현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것도 제대로 할 수는 없지만…….’
“Ca, Can you speak English?”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중국인은 ‘영어 할 줄 아느냐’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것이오? 에잉,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에이, 잠이나 잘 주무쇼.”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화를 낸다는 정도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괜히 화나게 했다는 생각에 궁현은 그자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 아차.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집에 가지 않으면…….’
그제야 자신이 설악산에서 떨어진 이후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알아챈 궁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에…… 그러니까, 상처가 없네.”
확실히 궁현의 몸은 바닥에서 뒹굴었기 때문에 더럽긴 했지만 상처는 거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렇게 한동안 머리를 굴리는 궁현의 귀에,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이 들려왔다.
“아, 이봐. 저기 저 사람.”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마치 사극에나 나올 법한 차림을 하고 허리에 검을 찬 사람 둘이 궁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사라졌던 그 사람도 차림이 조금은 이상했던 것 같았다.
“아, 맞아! 도련님이시다!!”
그렇게 수십 초 동안을 가만히 있던 그들은 그렇게 소리치더니, 궁현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당연하게도 뭐라고 말하는지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궁현이지만, 갑자기 정색을 하고 달려오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탓.
하지만 달리기에 꽤나 자신이 있던 궁현인데도, 그들은 순식간에 따라잡아 앞뒤를 가로막고 입을 열었다.
“하하하, 도련님. 어딜 또 도망 가시려구요. 가출은 안 되죠, 가출은.”
“으, 응?”
적어도 상대가 뭐라고 말하는지만 알면 좋으련만, 궁현은 계속 엉거주춤 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남궁 현 도련님! 세가로 돌아가시죠!”
“세가로 돌아가시죠, 도련님! 제발!”
무인들은 답답했다. 벌써 한 다경 째 설득을 하는데도 요지부동이니…….
하지만 궁현은 또 궁현대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진지하게 꺼내더니, 나중에는 거의 빌다시피 하지 않는가. 그 이후로도 계속 알 수 없는 말로 무언가를 토로하는 무인들. 궁현으로서는 그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응? 혹시 날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난공 어쩌고 하는 것이 왠지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봐야 뭔가 의사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아, 근데 어쩐다냐. 내가 아는 중국어라고는 ‘니 하오’밖에 없는데. 그래! 미, 밑져야 본전이다!’
“도련님!! 이번에 못 데리고 돌아가면 저희는 죽습니다!!”
계속 재촉하는 그들에게 지친 궁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중국어 단어를 말했다.
“너희들……좋다!”
니 하오. 한자로 쵴好. 안녕, 안녕하십니까의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건만, 자신이 없는 궁현이 쵴(너, 당신, 너희들)와 好(좋아, 그래, 아름답다)를 떼어 발음하는 바람에, 조금 갸우뚱하던 그들은 완전히 다른 뜻으로 이해했고, 드디어 궁현이 굴복했다고 생각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자네!”
“……그, 그래!!”
그들은 행여나 궁현의 마음이 바뀔까 서둘러 궁현을 들쳐 메고 경공을 펼쳤다. 뭐, 일단 궁현은 그럴 마음도 아니었지만.
“어? 어어? 뭐, 뭐하는 거야……요, 당신들!!”
궁현은 잘 몰랐지만, 이곳은 남궁세가의 본가가 위치한 천주산 어귀였다. 이들은 가출을 상습적으로 일으키는 남궁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사들이었다. 일단 들쳐 멨으니, 세가로 돌아갈 때까지는 절대로 내려놓을 리 만무했다.
두 무사 즉, 남궁세가 소속의 무사인 이형종과 허정휘는 최대한 3달 안에 남궁현을 찾아오라는 가주의 명을 받고 중원 각지를 떠돌았다. 하지만 여기저기를 뒤지고 또 뒤져 1년이 넘어서야 겨우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궁현을 찾게 될 줄이야?
하늘이 내려 주신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 은혜를 저버리기 싫은 그들은 죽기 살기로 발을 놀리며 남궁세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