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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2화)
1. 남궁현. 남궁 현? 남 궁현!
(2)


“하아, 오라버니는 대체 왜 그리 말썽이신지, 결국 이번에는 해를 넘기시려는 건가…….”
남궁세가 안 뜰에는 한 여인이 애처로운 자태로 거닐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남궁소연(南宮嘯燕). 진짜 ‘남궁 현’의 여동생이자, 남궁세가 가주인 천뢰검군(天雷劍君) 남궁건(南宮健)의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金枝玉葉)이었다.
남궁소연이 심란한 얼굴로 한참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세가의 정문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하는 거예요오?! 아, 잠깐. 좀 놓고 말하면 안…….”
무슨 소란인가 하여 정문으로 달려간 그녀의 눈에는 그녀가 그토록 걱정하던 오라비가 들어왔다.
“오, 오라버니!”
와락!
궁현의 품에 안긴 그녀는 연신 ‘바보, 오라버니 바보.’ 하며 궁현의 몸을 두들겼다.
‘커, 커헉?!’
궁현은 처음 보는 여인에게 안겼다는 정신적인 충격에 더해 소연의 주먹질로 받는 충격 때문에 차마 입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고통을 삼켰다. 여인의 주먹이 무에 아프냐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남궁소연은 일반 여인가 아닌 무림의 여인이었다. 그러니 앙탈에 불과한 주먹질도 일반인인 궁현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될 수밖에.
“누, 누구……신지.”
궁현은 고통을 참으며 진지하게 물었으나, 소연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줄곧 잘 따랐던 오라버니가 돌아왔다는 반가움뿐이었다.
“이제 가출 좀 그만두세요. 세가 안이 그렇게 답답한가요, 오라버니?”
조금 지나서야 겨우 진정을 하고 입을 연 소연이었지만, 궁현이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답하세요!”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눈앞의 여인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궁현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예, 예.”
그러자 갑자기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잠깐 의문이 떠오르더니, 저마다 손바닥을 탁 치며 궁현을 어딘가로 데려갔다.
“여, 여긴……?”
궁현을 이름 모를 전각으로 데려간 그들은 남궁소연만을 남기고 저마다 바삐 사라졌다.
“아직은 그렇게 어둡지 않은데, 피곤하셨나 보네요. 그럼, 조금 있다가 먹을 것을 들이라 하겠으니 조금 눈을 붙이고 계시면 될 거예요.”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는 궁현은 대충 반응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직 어둡지 않다니, 무슨 말일까? 아마도 궁현의 ‘예’라는 말을 夜(Ye, 밤, 어둡다 등)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사실 조금 무리가 있는 추측이지만, 어쩌랴. 그것 말고 다른 상황은 떠오르지 않으니.
“아, 맞다. 이럴 것이 아니라, 아버…….”
“그럴 필요 없다. 벌써 와 있느니라.”
잠시 우왕좌왕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떠올린 소연이 방을 나서기도. 아니,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가주인 남궁건이 나타나 말을 잘랐다.
“아, 아버님.”
소연은 잠시 놀랐으나 바로 예를 갖췄다. 하지만 궁현은 영문도 모르고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
“…….”
“…….”
잠시간 정적이 흐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남궁건이었다.
“세가를 오래 떠나 있더니 예의마저 잊었나 보구나.”
그렇게 말한 남궁건은 다짜고짜 궁현의 따귀를 때렸다.
찰싹!
“아!”
궁현은 영문도 모르고 맞아야 했고, 그 때문에 눈에는 의문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이놈이 그래도 아비를 그런 눈으로 쳐다봐?!”
찰싹! 찰싹! 찰싹!
남궁건은 따귀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예의를 취하지 않는 궁현에게 마구잡이로 따귀를 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소연은 안절부절 못하며, 막고 싶어도 차마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궁현도 또한 영문을 몰라 참고는 있었지만,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매우 빡센 인내심 테스트였다.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다. 참자, 참자…….’
하지만 남궁건은 남궁건대로 아무리 때려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의 아들에게 차마 주먹질은 못하고 참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고, 가장 먼저 폭발하고야 만 것은 궁현이었다.
“아아, 진짜. 나는 중국말 못하니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해서 지금까지 참고는 있었는데요, 대체 처음 보는 사람을 왜 때리는 겁니까, 아저씨는!! 그리고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는 뭐예요?!”
그 말에 방 안의 소리가 잠시 멎었다.
“이, 이놈이, 뭐라고 하는 게야?!”
남궁건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주먹을 쥐었고 궁현을 향해 내뻗었다.
“우욱!! 컥, 대, 대체 왜…….”
결국 내공을 담지 않았다고는 하나 무인의 단련된 주먹을 견디지 못한 궁현은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다. 바로 그때, 방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비(侍婢) 하나가 달려들었다.
“가, 가주님. 저것은 고, 고려 말입니다!! 아니, 지금은 조선이지만요.”
시비의 말에 남궁건은 쥐었던 주먹을 풀고 시비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 뭐라고 말했는지 아느냐?”
남궁건의 말에 시비는 한참을 망설였다. 자신이 잘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는데, 만약 그렇다면…….
“어허, 어서 말을 하래도!!”
재촉하는 남궁건을 보자 시비는 눈을 딱 감고 입을 열었다.
“아아, 진짜. 나는 중국말 못하니까 뭔가 잘못한 게 있나, 해서 지금까지 참고는 있었는데요, 대체 처음 보는 사람을 왜 때리는 겁니까, 아저씨는!! 그리고 여긴 어디고, 끌고 온 이유는 뭐예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마 중국이라는 것은 명나라를 이르는 것이니, 한어(漢語)를 할 줄 모르신다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시비의 말에 남궁건과 남궁소연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그래도 혹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가 하여 시비의 말을 다시 한 번 꼼꼼히 되짚어 보던 그들은,
“그, 그럴 리가 없다! 오, 오라버니가 우리말을 못할 뿐더러 여기가 어딘지조차 모른다니!!”
“이, 이놈이 어디서 별 시답잖은 언어를 배워 와서는 아비를 능멸해?!”
시비는 혹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조용히 물러났다. 아니, 물러서려 했다.
“물을 가져 오너라. 어디, 언제까지 아비를 능멸하는지 보자.”
깜짝 놀란 시비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 물 한 바가지를 떠 왔다.
촤락!
“으, 으으.”
갑자기 차가운 물을 맞고는 강제로 깨어난 궁현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 이내 자신을 기절시킨 장본인을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하, 하. 지금이 어느 시댄데 다짜고짜 주먹질입니까, 주먹질은. 아, 아저씨가 입고 있는 옷을 평상복으로 입던 시대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라고 하셨습니다.”
시비는 둘째 도련님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도, 자칫 잘못하다 자신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말 그대로 해석했다.
“뭐, 뭐라! 내 이놈을 당장!!”
“자, 잠시만요. 아버님! 오라버니의 눈을 보세요, 거짓말하는 사람의 눈빛이 이럴 수는 없어요.”
자신을 말리는 소연의 말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궁현의 눈을 바라본 그는 소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구나. 하나, 그럼 이자는 내 아들 현이가 아니란 말이냐?! 말도 안 된다. 어찌 이리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래, 직접 물어보면 되겠구나.”
시비는 남궁건의 말에 바로 궁현에게 조선어로 이름을 물었다.
“저, 저어.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조금 서툴지만 하나하나의 발음만은 정확해서, 제대로 알아들은 궁현은 반가워서 입을 열었다.
“아, 아니.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아, 정말 다행이다. 말도 안 통하는데 다짜고짜 때려 대서 완전 답답했지 뭐예요. 맞다, 이름이요? 제 이름은 남궁현이에요. 남. 궁. 현.”
궁현의 말에 약간 기대하고 있었던 시비의 표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변했다. 하지만 동명이인(同名異人)일 수도 있으니 종이를 가져다 글자를 써 보라고 했다.
“음…… 잘 모르겠네. 남녘 남 자는 南는 이렇게 쓰고, 집 궁 자 宮에, 빛날 현 炫. 네, 이렇게 쓰는데요.”
南宮炫.
간혹 획순이 틀릴 때마다 조금씩 기대를 갖던 시비는 궁현이 이름을 다 써내고 나자, 한숨을 내쉬며 그 종이를 남궁건에게 넘겼다.
“……이름이 남궁현이라 하옵고, 한자도 맞습니다. 하나…… 획순도 많이 틀리시고 문체가 영 서투신 것이…….”
시비의 말에 남궁건은 종이를 빼앗듯 가져가 그 문체를 확인했다.
“이것은 현아(炫兒)의 서체가 아니다. 하나, 이름이 이렇고 또 이런 외모를 보아하니…….”
잠시 생각에 잠긴 남궁건은 이내 궁현을 보다가, 그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을 확인했다.
“……허.”
천천히 다가가 그것을 들어 확인한 남궁건은 잠시 침음성을 흘렸다. 그것은 남궁세가 가주 직계의 손(孫)임을 증명하는 옥패(玉牌)였던 것이다. 또한, 거기에 남궁현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남궁현의 것임이 분명했다.
“현이가, 믿을 수 없지만…… 현이가 기억을 잃은 듯하구나.”
궁현은 자기 주머니에서 옥패를 가져가 확인한 이상한 아저씨(남궁건)가 뭔가 말하며 갑자기 울 듯한 표정을 하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 어쨌다는 거지. 삼촌이 선물해 준 건데.’
궁현의 삼촌은 여행을 즐겨 해서, 어딘가를 갈 때마다 새로운 선물을 사다 주었다. 그중 궁현에 마음에 가장 쏙 든 것은 아무래도 중국 여행의 선물이었던 이 옥패였다. 삼촌이 직접 모양에 문양 ―여섯 구름 사이로 한줄기 뇌전이 뻗는 문양이었다.― 까지 만들어 내서 궁현의 이름을 새겨 달라고 장인에게 부탁해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의 장난인지, 우연히도 그 모양과 문양이 남궁세가의 신분증명 패와 똑같았던 것이다.
각설하고, 남궁건의 말을 들은 남궁소연의 표정은 충격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따랐던 오라버니이건만. 그 기억들을 전부, 모두 잃었다는 말인가.
“하, 하지만…… 이름도 알고 있고.”
“그것은 기억을 잃었을 때 처음 발견한 사람이 저 옥패를 확인하고 알려 준 것일 게다. 이럴 수가, 현이가 기억을 잃다니.”
충격을 받은 듯한 남궁건은 그대로 비틀거리며 방에서 사라졌다. 또한 시비도 조용히 방에서 물러나려 했다.
“잠깐, 기다리거라.”
“예, 아가씨.”
“내 말을 통역해 주어라.”
“예…….”
소연이 불러 세우자, 시비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오라버니, 정녕이신가요? 정녕, 전부 잊으신 건가요?”
궁현은 처음 봤을 때 자신을 껴안은 여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뭐라고 말을 하자 어색한 표정을 하며 시비에게 시선을 주었다. 통역해 달라는 뜻이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응? 궁현은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라고? 자신이 왜 이 사람의 오라버니란 말인가. 그것보다 요즘 세상이 어떤 시대고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그런 단어를 평범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순간 자신이 정말로 과거로 와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면 설악산에 있다가 이런 곳에 온 것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전부 중국어만 하고 있는데다가, 눈앞의 여자도 한국어가 서툴 뿐더러, 가끔 통역 중간 중간 현대에 와서는 없어졌거나 잘 쓰이지 않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오, 오라버니라니? 내가 저 사람 오빠일 리가 없잖아요.”
그의 말에 시비는 잠시 궁현을 딱한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 말을 소연에게 전달했다.
그 말을 들은 소연은 차마 궁현의 앞에서는 울지 못하고 황급히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바로 자신의 거처에 도착하자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으흐흑, 흑. 오라버니.”
그렇게 눈물을 머금은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