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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3화)
1. 남궁현. 남궁 현? 남 궁현!
(3)
“하아―암, 잘 잤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상쾌한 아침의 바람이 스며들어 와 궁현의 폐부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기지개를 켜고 잠시 자리에 앉아 있던 궁현은 조용히 지난밤의 일을 떠올렸다.
“그, 그러니까 지금이 며, 명나라 선덕제 시대라고?”
궁현은 정황상 조선어를 할 수 있는 것이 한 명밖에 없었기에 자신 직속 시비로 배정된, 진지하게 말하는 시비를 앞에 두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화선(華善)이라 소개했다.
“풋, 푸…… 푸하하하하하핫! 그, 그게 말이 돼? 너, 너무 진지하게 그런 소리 하는 것 아니다. 푸하하하, 하, 하…… 서, 설마. 진심으로 한 소리야?”
하지만 선의 얼굴이 너무 진지하고, 또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설령 손톱만큼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기에 궁현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다.
“네, 도련님. 선덕제가 무슨 황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황(現皇)께서 덕을 많이 베푸신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도 맞고, 여기가 명나라 땅인 것도 확실하지요.”
화선의 말에 궁현은 지금 상황을 오목조목 따져 보았다.
‘그, 그러니까. 나는 설악산에서 낙사했고, 윤회의 과정을 거쳐 환생한 건가? 아니, 무슨 소설도 아니고. 게다가 환생이라면 어릴 때부터 자랐어야 하니까 환생은 아니야. 그럼, 영혼 이동? 하지만, 아……!’
이것저것 생각하던 궁현은 화선을 불렀다.
“저기, 화……선아?”
“예, 도련님.”
“저기, 그 거울. 그러니까 그, 뭐시냐. 아! 동경(銅鏡:동으로 만든 거울) 좀 가져다 줄래?”
예, 하고 짧게 대답한 화선은 잠시 나갔다 오더니 둥그런 모양의 동경을 가져왔다.
“어디 보자.”
표면이 매끄럽지 못해 완벽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단편적으로 보아 동경에 비친 얼굴은 궁현 자신의 얼굴임에 틀림이 없었다. 확실하다고 해도 좋았다.
‘내 얼굴은 맞으니까 영혼 이동은 아니야. 그, 그러면 말도 안 되지만 정말로 시간 여행을 한 건가? 정말 말도 안 돼. 아니, 하긴 뭐 영혼 이동이나 환생도 내가 생각하기엔 말도 안 되지만……. 게다가 내가 남궁세가의 차남인 남궁 현이라니? ……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꿈인가? 설마 실제의 난 낙산해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고…… 꿈을 꾸는 건가?’
속으로는 끙끙대며 고민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궁현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충격의 도를 넘어서서 얼굴이 오히려 굳어 버린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던 궁현은 결국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으며, 일단 지금은 현재의 상황을 최대한 수긍하고, 집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기로 했다.
“하아, 내가 ‘남궁 현’이라는 거지?”
“예, 도련님.”
그렇다면 설령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연기해 보일 필요가 있다. 그때, 갑자기 궁현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남궁세가. ……남궁세가? 그, 그럼 무공이라던가 하는 게 있는 건가? 그래, 시간 여행도 했는데 무공이라고 없으란 법 있나?’
궁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심 없을 거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결국 눈 딱 감고 화선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 그러니까. 무공이란 게 있나?”
“네? 무공이요? 그러니까, 무공이라면…… 아! 우궁(武功)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것을 각오하고 한 말이건만, 의외로 화선에게 반응이 있자, 궁현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오, 그렇다면!’
“그럼, 나는 우리 세가의 무공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지?”
궁현의 말에 화선은 대답이 없었다.
“왜 말을 안 해?”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화선이 입을 열었을 때, 나온 말은 의외라면 의외였다.
“도련님은 무공에 흥미가 없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 흔한 심법 하나 배우기를 마다하셨지요. 배우신 것도 그런 것보다 시서화악(詩書畵樂)을 더 즐기셨구요.”
이럴 수가, 일반인의 몇 배나 빨리 달릴 수 있고 힘도 세지는데 그걸 배우기를 마다하다니, 궁현으로서는 남궁 현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래…….”
궁현은 시무룩해져서는 침소에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시무룩해졌는지 자신이 더 궁금할 정도였다. 원래 남궁현이 어찌했던 간에 자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게다가 기억을 잃었으니 흥미가 가는 곳이 다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좋아, 당장 무공을 배우러 가 보실까?”
어느 무협지와 같은 소설책의 주인공들처럼 절세무공을 가진 절대자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궁현의 최종 목표는 미래로 돌아가는 일뿐이었으니까, 몸에 조금 도움만 된다면 그걸로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전각에서 나와 발을 놀리던 궁현은, 이윽고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여, 여기는 왔던 곳 같은데. 아니, 아닌가? ……이상하네.’
바로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남궁세가는 중원 무림 정파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칠대세가 중에서도 규모와 그 위치에서 모용세가와 함께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세가였다.
그런 세가의 본가에서 누군가의 안내도 없이 어딘가를 찾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 아니, 그냥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헤매고 또 헤매던 궁현의 귀에 어렴풋이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챙! 챙! 챙!
자고로 금속음이란 금속과 금속, 주로 철과 철이 부딪쳐서 나는 챙! 이나 츠캉! 하는 날카로운 소리로, 만약 별일이 없다면 무술을 연마를 하거나, 금속을 제련할 때 이외에는 날 리가 없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규칙적으로 금속음이 들릴 만한 곳은 두 군데로 한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장간과 연무장.
남궁세가 안에 대장간까지 갖추고 있을 리는 없으니, 결국 금속음이 들리는 곳은 연무장이라는 소리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했던가. 애초에 목적이 무공을 배우는 것이었으니,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가면 무공을 배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궁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편, 웬일인지 늦잠을 자 버린 화선은 일어나자마자 대충 씻고는 서둘러 궁현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궁현은 이미 전각을 빠져나와 세가를 온통 헤매는 도중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주무십니까? 도련님?”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자, 화선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궁현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잘 개여 있는 침구(寢具)가 침상 위에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도, 도련님!!”
화들짝 놀란 화선은 문을 닫지도 못하고 그대로 궁현의 거처를 뛰쳐나왔다.
“도련님!”
화선은 세가를 헤집고 다니며 궁현을 찾았다. 한참을 찾던 중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건이었다.
“가, 가주님. 하아, 하아, 하. 가주님.”
“그래, 뭔 일이냐? 어서 말을 하거라.”
남궁건은 아침 산보를 하던 중 자신의 둘째 아들 남궁현에게 시비로 붙여 준 아이가 자신을 부르자 웬일인가 하여 귀를 기울였다.
“도, 도련님이, 도련님이…….”
“현이가 뭘 어쨌느냐?”
남궁건은 서둘러 입을 열지 않는 시비가 답답해 계속 재촉했다.
“도련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이럴 수가, 남궁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는 기억을 잃고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단 말인가, 돌아온 지 아직 채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뭐, 뭐라고?! 하아, 아직 멀리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여봐라!”
그는 근처에 있던 세가의 무사들을 불러 모았다.
“현이를 어서 찾아오너라!”
“예!”
무사들은 저마다 짧게 대답을 하고는 세가를 나섰다.
그 때, 세가 밖으로 나간 무사들에게는 매우 미안한 일이지만 궁현은 한참 넋이 나가 있는 도중이었다.
‘아름답다!’
그가 비록 마니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협 영화나 드라마, 홍콩 영화를 남들 보는 정도는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무술에 대한 매체도 이처럼 구름이 흘러가듯 이어지다가, 어쩔 때에는 번개 같은 기세로 퍼붓는 듯한 실감을 주지는 못했다.
“하앗! 하!”
챙!
연무장에서 비무를 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남궁현의 형인 남궁천천(南宮穿天)과 세가의 장로를 맡고 있는 단뢰검자(斷雷劍者) 남궁섬(南宮剡)이었다.
그중 특히 단뢰검자 남궁섬은 별호대로 벼락을 끊을 듯 강맹한 기세로 남궁천천을 몰아세웠다.
하나 그 검을 받아 내는 남궁천천 또한 비범했다. 반격을 하지는 못했지만,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우레 같은 검격을 살짝살짝 흘려내는 그 실력도 남궁섬과 남궁천천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몇 십 합을 겨루던 그들은 어느 순간 누가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기운을 갈무리하고 자세를 누그러뜨렸다.
“허허허, 소가주의 실력은 볼 때마다 일취월장을 거듭하시는 구려. 허허허허.”
남궁섬은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이 남궁천천을 쳐다보며 칭찬을 거듭했다. 그런 남궁섬에 남궁천천도 내색은 안 했지만 내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저 양보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리고 그 장면을 바라보던 궁현은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을 서로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그제야 연무장 밖에 가만히 서 있는 궁현을 발견하고는 잠시 황당한 눈길로 바라보다 인사를 했다.
“아, 어제 돌아왔다더니. 반갑구나. 그건 그렇고 언제부터 보고 있었느냐, 현아?”
“안녕하십니까, 현 도련님.”
이들의 인사를 받고 나서야 궁현은 엄청난 문제점을 발견했다.
‘뭐, 뭐라는 거지?’
그랬다. 가주를 찾아가던 누구를 찾아가던, 자신은 그 중간에서 말을 통역해 주는 화선이가 없으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궁현은 그들의 말에 그저 고개를 숙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잠깐 이상함을 느낀 남궁천천이었지만, 이내 검세(劍勢)를 가다듬고는 남궁섬에게 말을 걸었다.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섬 장로.”
“얼마든지요.”
그들은 다시 검을 맞대기 시작했다.
챙!
우측 어깨로 내려오는 검을 살짝 뒤로 뛰어 피해 낸 남궁천천은 몸의 방향을 유연하게 왼쪽으로 전환하며 남궁섬의 허리를 베어 나갔다. 하지만 남궁섬 또한 내려치던 검로를 몇 번의 회전을 가하여 바꾸며 남궁천천의 검을 막아 냈다.
‘대, 대단해.’
비무(比武)라는 것은 원래 결사의 각오로 상대를 이기려는 것이 아닌, 그저 서로의 기량을 보여 주고 간접적으로나마 실전의 경험을 쌓으려는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몇 수 위의 선배와의 비무라면,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선배가 후배의 실력을 견식하고 기본을 되새기며 후배에게 다음 경지로의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하다 보니 명문 정파에서의 비무는 대회가 아닌 이상 별로 치열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반인들도 조금만 긴장하면 얼마든지 당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느린 속도의 비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의 비무는, 무공이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르는 궁현이 봐도 굉장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서로의 기세가 일렁이는 것이 단지 떨어져서 구경하는 것만 으로도 온몸의 잔털까지 일어설 정도로 짜릿한 기분이 드는데, 정작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침착하게 검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 검을 부딪치던 그들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궁현의 귀에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혀, 현아!”
자신의 입장도 생각지 않고 무작정 기쁜 얼굴로 달려오는 남궁건을 보며, 궁현은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또 네가 다시 가출을 한 줄 알았구나. 그래, 네 형의 비무를 보니 어떻더냐?”
“……라고 하셨…… 헉……습니 ……헉, 헉. ……다.”
어느새 숨 가쁘게 달려온 화선이가 남궁건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궁현은 형이라는 말에 잠깐 흠칫했으나, 이내 남궁건의 말에 대답했다.
“정말 놀랍습니다. 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제가 봐도 엄청나다고 생각될 정도로.”
“……라고 하셨습니다.”
궁현의 말(?)에 남궁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남궁건을 보던 궁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서 말입니다.”
“……라고.”
“응? 무엇이냐?”
이번 말은 통역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화선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숨을 골랐다.
“저도 무공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님?”
이미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철저하게 남궁 현의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궁현이었다.
“…….”
궁현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화선이었다. 시비 신세에 무공이나 다른 것에 대해 잘 모르긴 해도, 얼핏 지나가는 말로 이미 다 자라 피(皮), 근(筋), 골(骨)이 자리 잡고 혈맥(穴脈)이 굳은 경우 무공을 익히기 힘들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 궁현이 실망할 것 같기에 통역을 망설이는 것이었다.
“어허, 빨리 뭐라고 말했는지 알려 주지 않고!”
하지만 재촉하는 남궁건의 말에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도련님께서 그…… 무공을, 배우고 싶으시다고…….”
화선의 말에 순간 표정을 굳히는 남궁건이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궁현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