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남궁현 1권(4화)
1. 남궁현. 남궁 현? 남 궁현!
(4)
“그…… 안 되는 건가요?”
궁현이 말하자 화선은 어떻게든 자기 선에서 끝내 보려고 남궁건이 뭔가 말하기 전에 자신이 아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저…… 도련님. 송구하오나, 소녀가 알기로 무공을 배우려면 근골이 유연하고 피부가 연하여 각 혈들을 막지 않아야 하며, 또한 혈맥들이 굳지 않아 기를 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들은 자라면서 전부 굳게 됩니다. 그래서 무공을 배우려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십육 세부터는 시작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저…… 도련님은.”
철렁!
이럴 수가! 화선의 말을 통해 유추하면, 궁현은 이미 다 자랐기 때문에 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이 되지 않는가!
“저, 정말이야? 난 무공을 배울 수 없는 거야?”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충 무슨 내용의 이야기를 해 준 건지 예상한 남궁건은 최대한 궁현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기본적인 무공이라도 가르쳐 줄까 생각했다.
하나 어릴 때부터 배웠다면 그런 무공으로도 얼마든지 상승 무공으로 점차 진행할 수 있겠지만, 이미 근골이 굳어 버렸을 궁현은 기껏해야 삼류 무사 수준에 머물게 뻔했다.
‘아, 아니. 그래서는 오히려 이 아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뿐이겠지.’
괜한 걱정이었지만,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도 고려한 결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 칠대세가의 으뜸인 남궁세가 가주의 둘째 아들이 삼류 무사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얼마나 창피하겠는가! 차라리 ‘무공에 흥미가 없는 선비 같은 아이지요.’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물론 여태까지도 그래 왔고 말이다.
결국, 그런 식으로 궁현에게는 무공을 배울 기회가 영영 없어지는 듯 보였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2. 개미에게 지다(1)
짹, 째잭!
“으음…… 일어나았드아!!”
비단금침을 퍼엉! 하고 날려 버리며 시끄러운 소음을 발하는 이는 바로 남궁현이었다.
그날, 자신은 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안 이후 한동안 풀이 죽어 있던 궁현이었지만, 그것도 어느덧 2년째.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고부터는 풀죽을 틈도 없이 공부에 전념한 궁현이었다. 아니, 지금처럼 일부러 큰 소리로 활발한 척하며 집에 대한 그리움, 무공에 대한 미련 등, 여러 가지 잡생각을 날려 버렸다.
‘빨리, 더 빨리.’
그 이유는 남궁세가에서. 아니, 온 무림에서 이름을 날릴 다른 방도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솔직히 그렇다기보다는 현대에 가는 방법을 찾는 데에 유용할 만한 것을 찾았기 때문이랄까.
기관진식(機關陣式)과 진법(陣法).
남궁세가는 그 고견한 무공뿐만 아니라, 고절한 기관진식으로도 유명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서고를 찾아보니 굉장한 진법서들도 몇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주인 남궁건의 둘째 아들이라면 그 진수를 전수받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였다. 거기다 진법은 자연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 학문을 배우다 보면 어떤 원리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됐는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 수험생의 인간 승리일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국어 공부와 진법에 매달린 궁현은 이제 회화는 물론 웬만한 책도 다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각종 기관진식에 대한 해석도 가능하게 되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방 바깥에서 화선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궁현은 남은 잠기운을 날려 버리려는 듯 고개를 몇 번 흔들더니 양 볼을 짝짝 하고 두 손으로 치고는 대답했다.
“어, 그래. 일어났어.”
그러자 화선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옷은 여기 있습니다. 식사는 가져올까요, 아니면?”
“당연히 가서 먹어야지.”
가주인 남궁건은 엄격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예의를 많이 따지기는 해도 가법과 예법에 대한 것만 제외하면 꽤나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적어도 이 주일에 한 번씩은 그게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가솔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이다. 본인은 원래 매일 그렇게 하고 싶지만, 다들 할 일이 많고 자신도 그렇다 보니 절충한 것이 그 정도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매달 2, 3회 정도에서 많으면 5회까지 남궁세가의 숙수들은 죽어나가는 것이다. 아, 물론 식사를 무조건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사정이 있으면 시비나 종을 통해 그것을 말하고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웬만하면 참석하는 것이 남궁건이 가주에 오르고 나서부터의 관례였다.
“예, 도련님.”
그렇게 말하고 화선은 방을 나갔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잠시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궁현은 이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가벼운 경장 차림의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훨씬 말끔해져 있었다.
“가자.”
“예.”
한편, 그들이 전각을 나선 그 시각. 숙수들은 주방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거의 경공을 펼치다시피 하고 있었다.
“야야야!! 쓰바, 저 국물 넘치는 것 안 보여?! 야! 이놈들아! 어디서 탄 냄새가 난다!! 야, 야!! 좀 더 빨리 빨리 못 움직일까?!”
주방을 이리저리 나다니며 숙수들에게 심지어 육두문자까지 날리며 재촉하는 것은 남궁세가의 대숙수인 남궁무연(南宮楙宴)이었다. 여기서, 왜 남궁 씨를 가진 사람이 그것도 남궁세가 내에서 숙수나 하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어쩌랴, 그저 별종을 낳은 ‘남궁 현’의 숙부. 아니, 정확히는 숙모를 탓해야지.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나서야 아침상의 준비가 끝났다.
숙수들이 음식을 내가자마자 대숙수 남궁무연은 재빨리 자기에게 배정된 자리로 뛰어갔다. 그 옆에서는 세가의 총관이면서, 그의 아버지이자 남궁현의 숙부인 남궁단우(南宮丹雨)가 영 못마땅한 눈으로 남궁무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 요리나 하고 있던 게냐? 그건 그냥 숙수들에게 맡겨 두래도!”
거의 매일 듣는 아버지의 쓴 소리에 무연은 그저 미소만 지었다.
“에이, 백부. 아니, 가주님도 매일 제 음식이 아니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말씀하시잖아요.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아버님 표정이…… 풋.”
무연의 말에 화를 낼 만하건만 단우는 에잉 하고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도 사실은 까다로운 자기 형의 입맛을 맞춘 아들의 실력이 내심 대견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평생 요리나 만들며 살게 하진 않을 거지만 말이다.
“가주님, 드십니다.”
그 말에 왁자지껄하던 장내가 단번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궁현과 천천, 소연을 데리고 남궁건이 들어왔다. 다들 일어나 예를 취했다.
“아, 아. 됐소. 다들 앉으시오.”
“앉긴 뭘 앉아, 이놈아.”
남궁건은 안 그래도 같이 있던 궁현과 천천, 소연까지 예를 갖추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뒤에 전대 가주(태상가주)이자 남궁건의 아버지인 남궁적(南宮翟)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아, 오셨습니까, 아버님.”
“그럼 왔지, 갔겠느냐? 에라이, 이놈아.”
아니 그럼 어쩌란 말인가. 오셨는데 오셨냐고 묻지 달리 물을 방도가 있던가? 자기 아버지지만 참으로 괴팍한 성격이라고 새삼 생각하는 남궁건이었다.
“쿡!”
그런데 그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이가 있으니, 바로 남궁적의 손자이자, 남궁건의 둘째 아들……로 생각되고 있는 궁현이었다. 아직은 예법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궁현인지라, 순간적으로 나온 웃음을 막지 못한 것이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모아지자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궁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남궁건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아, 됐다. 들거라.”
남궁건의 말에 고개를 든 궁현은 어느새 미소가 번진 얼굴을 하며 자기 자리에 가서 섰다. 그에 따라 천천과 소연도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고, 남궁건도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상석(上席)에 앉았다. 남궁적을 두고 무슨 무례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의 가주는 남궁건이었고, 세가 내의 제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가주는 식탁에서도 가장 상석에 앉아야만 했다. 하여 아쉽기는 해도 남궁적은 그 바로 아래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이다.
“에, 그럼. 아침의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듯하여 아침 인사는 짧게 하겠소. 음식을 준비한 세가의 숙수들과 무연이에게 감사하오. 자, 그럼 다들 드십시다.”
남궁적 때문에 벌어진 사단 때문인지, 남궁건은 아침 인사의 대부분을 생략하고는 바로 식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남궁건이 궁현을 불렀다.
“현아.”
남궁건의 말에 탕초육(糖醋肉:탕수육) ―원래 중국인들이 많이 즐겨먹는 음식은 아니지만, 1년 전쯤 궁현이 이 음식을 보며 좋아하자 신이 난 무연이 식사 때마다 만들기 시작했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으려던 궁현은 젓가락을 놓고 남궁건을 쳐다보았다.
“예, 아버님.”
“그래, 기관진식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냐?”
아무래도 궁현의 성취(成就)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예, 가문 내의 서관(書館)에 있던 진법과 기관은 거의 전부 해석하였습니다. 하오나…….”
“하오나?”
잠시 말을 멈추었던 궁현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다른 것은 보면 알겠으나, 오직 현파명투천뢰경진도해(玄波命透天雷境陣圖解)의 뇌로(雷路)의 장(章)만큼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궁현의 말에 장내의 모든 이가 숨을 삼켰다. 현파명투천뢰경진도해라니! 그것은 먼 옛날 어느 고인이 남궁세가에 머물렀을 때, 답례라고 주고 갔던 서책(書冊)이었다. 다른 진법과는 원리나 구축 방법, 그리고 효과가 판이하게 달라 몇 십 년 전, 제갈세가의 가주도 첫째 장인 현토(玄土)의 장을 해석하고는 그 다음을 보자 혀를 내두르고는 경외를 담아 천뢰경(天雷經:하늘과 번개의 경전)이라 칭했다는 진법이 아니던가! 그것을 여섯 번째 장인 뇌로의 장에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는 것은 첫째인 현토의 장은 물론 그 다음의 파화(波火), 명목(命木), 투금(透金), 천수(天水)의 장을 전부 풀었다는 뜻이었다.
“저, 정말이냐? 그럼…… 그 전의 장들은 전부 이해했고?”
남궁건과 다른 이들이 너무나 경악한 표정을 짓자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나, 하는 생각에 조금 망설인 궁현은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아직 실현시켜 보지 못해 몇 가지 수정할 것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예,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
궁현이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자 잠시간 정적이 돌았던 장내의 인사들이 일제히 감탄을 내질렀다.
“오오!!”
“음!”
“대단하시구려, 도련님.”
“장하다, 현아.”
그렇게 갑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것으로 장내가 시끄러워지자, 궁현은 영문도 모르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아니…… 그, 저…… 그게 대단한 건가요?”
“아무렴요! 굉장하세요, 오라버니!”
“조용!”
그렇게 한참을 시끄럽던 장내는 남궁적의 목소리에 다시 정적을 찾았다.
“…….”
장내가 조용해지자 남궁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하구나. 흠, 그렇다면 다음 칠천회 때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오면 한 번 생각을 나눠 봄이 어떻겠느냐?”
칠천회(七天會).
칠천회는 천하 칠대세가들이 삼 년마다 모여 화합을 다지는 모임을 말한다. 하지만 현재까지 내려오면서 그 뜻이 변질되어 칠대세가의 후지기수들끼리 싸워, 자기 세가의 힘을 자랑하는 일종의 비무대회로 바뀌어 버린 회합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비무대회에 대한 불참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특성상 절대고수가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비무대회 이후에 일어나는 총회의 때만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궁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이것은 저 혼자 힘으로 풀어 보고 싶습니다. 이런 귀한 것을 제갈세가 사람들과 공유할 수는 없지요.”
그 말에 좌중들은 궁현의 깊은 생각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거라. 아, 그건 그렇고 건아, 당가(唐家)에서는 소식이 없느냐?”
갑자기 말을 돌리는 남궁적에 적잖게 당황한 남궁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는 그 말에 대답했다.
“……예? 아, 예. 정혼 말이시군요. 예, 전에 전서구로 이번 칠천회 때 상견례를 가지자고 하더군요.”
남궁건의 말에 좌중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당가라면 사천에 있는 당씨 세가를 말하는 것인데, 당가와의 정혼에 대한 이야기는 이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