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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5화)
2. 개미에게 지다(2)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구나.”
남궁소연은 불안했다. 아까부터 자꾸 자신을 부를 것 같은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아직 그녀는 혼인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혼인을 하게 되면 이 남궁세가를 떠나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 세가의 다른 아이들과 있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특히, 오라버니와 떨어지게 되지 않는가. 그녀는 그 짧은 찰나에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그리고 하늘은 결국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현아?”
“네? 저, 저요?”
그 말을 들은 소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여태껏 어린 시절을 제하면 세가 내에 있던 시간보다 가출해 있던 시간이 더 많던 남궁현이었다. 그런 남궁현이 2년 전, 기억을 잃고 나서야 가출을 그만두었는데…… 이제껏 조금 어색한 사이 때문에 못 나눈 말도, 아직 못 만든 추억도 산만큼 쌓였는데, 그런 그를 빼앗아 가려 하다니. 아아, 소연에게 하늘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가져가는…… 지나치게 합리적인 존재인 것만 같았다.
궁현 또한 소연이 혼례를 치르지 않을까 하며 축하 말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궁건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크게 당황한 표정을 했다.
“그래, 네 옆에 있…….”
“안 돼요! 오, 오라버니가, 오라버니가. 그럴 수는 없어요. 이제, 이제야 겨우, 세가에 머무시는 시간이 늘어났는데…….”
남궁건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소연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한 기세로 말했다.
“……는 천천이가 장가를 가게……. 아니, 소연이 네가 그렇게 천천이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구나.”
그 말에 당황했던 소연의 안색이 점점 풀어졌다. 그 모습을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가만히 지켜보던 천천 또한 남궁건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연실색한 표정을 했다.
“무, 무슨 소리십니까, 아버님!! 전, 저는 ……세가의 소가주입니다! 다, 당가에 사위로 간다는 것은 당가…… 당가는 데릴사위제이잖습니까?!”
당황한 천천은 조금 횡설수설했으나, 말의 요지는 정확히 전달되었다.
“……어른들 간의 약속이다. 네가 어찌할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상견례 때 의논을 해서 데릴사위로 보낼 것인지 특별히 우리 가로 오게 하든지 할 것이다.”
남궁건의 말에 천천은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일어서며 말했다.
“하, 하하. 소자, 무례를 무릅쓰고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니, 이놈이.”
“되었다. 보내거라, 아범아.”
“하나…… 히익!!”
반박을 하려던 남궁건은 천천히 올라가는 남궁적의 왼손에 기겁을 해 가지곤 입을 다물었다.
‘하아, 난 또…… 현이 오라버니가 혼인하시는 줄 알고. 십년감수했다. 헤헤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궁현을 본 소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아버님, 소자도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잠시 탕초육과 문을 번갈아보며 고민하던 궁현은 이내 조금(많이) 아쉽다는 표정을 하며 눈 딱 감고 그렇게 말했다.
“후우, 그러거라.”
궁현은 남궁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젓가락으로 탕초육 하나를 들어 입에 넣고는 천천을 따라 문을 나섰다.
“형님!! 형님! ……형!!”
이미 사라져 버린 천천이 어느 곳으로 갈지는 대충 예상이 갔기에 궁현은 천주산의 동쪽으로 향했다.
“형님! 형니…… 역시, 여기에 계셨군요.”
궁현이 도착한 곳은 천주산 동쪽의 연단호(練丹湖)였다. 궁현이 이곳에 온 지는 몇 년 되지 않았지만, 남궁천천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 와서 돌을 던지며 놀았기 때문이다.
“하아, 혼인이라니. 별로 내키지가 않는구나.”
휙!
톡, 톡, 톡, 퐁당.
천천이 푸념을 늘어놓으며 던진 돌은 세 번쯤 튕기다가 가라앉았다.
“내키지 않아도…….”
휙!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집안 어른들이 결정하신 문제 아닙니까.”
돌을 네 번 튕기며 하는 궁현의 말에 천천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니 더 답답한 게지.”
휙!
이번에 던진 천천의 돌 또한 네 번을 튕겼다. 그리고 둘은 계속 대화를 이어 가며 입을 열 때마다 한 개씩 돌을 던졌다.
“……대체 아버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하아.”
“응?”
궁현이 한숨을 내쉬며 던진 돌의 튕긴 횟수를 보며 이상함을 느낀 천천은 가만히 그 전까지의 돌이 여태껏 튕긴 횟수를 되새겨 봤다.
“아니, 이 녀석이. 감히 형님보다 딱 한 번씩만 더 튕기게 해? 그래, 어디. 제대로 해 보자.”
휙!
“어림도 없지요, 형님. 물수제비 던지는 것은…….”
휙!
“제가 한 수 위인 듯합니다. 하하하.”
계속 한 개 차이를 유지하고는 뻐기듯 말하는 궁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천천은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신나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으래애? 어디 한 번, 갈 때까지 가 보자!”
휙! 휙, 휘이익!
털썩!
한참을 던져도 궁현의 돌이 꼭 한 번 씩을 더 튕기자, 천천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나 참, 이 녀석, 한 번을 안 지는구나. 형님이 좀 이겨 보겠다는데.”
“후후후,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요.”
궁현의 말에 천천의 머리에서 어이가 긴급 탈출을 시도했다.
“이, 이게 공(公)이더냐? 사(私)지……. 하아, 어찌 됐건. 그래, 기분이 한결 나아졌구나. 세가로 돌아가자.”
먼저 일어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는 천천을 보며 궁현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강해 보여도 사실은 너무나 여린 사람이란 것을 아는 이는 대체 몇이나 될까.’
아마 채 열을 넘지 못할 것이다. 궁현은 천천에게 남달리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궁현이 이상한 취미를 가진 것은 아니고, 천천에게서 형인 남궁환과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 그렇게 혼자 가시면 어쩝니까?! 같이 가요, 형님!!”
“훗, 따라올 테면 따라와 보거라!! 하하하하하!!”
“에잇, 그런다고 못 따라갈 줄 아십니까?!”
궁현은 있는 힘껏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런 궁현을 보자 천천은 놀리듯이 거리를 더 벌리기 시작했다.
“이이, 치사하십니다! 경공을 쓰면 제가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치사하면 너도 경공을 익혀라! 아하하하하하!”
그것을 들은 궁현은 씩씩거리더니, 다짜고짜 주변의 돌들을 모아 달려가며 던져 일정하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축지법입니……다으다으다―”
“헉?!”
그러더니 달려가는 속도에 소리가 따라붙지 못해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현파명투천뢰경진도해의 현토의 장에 실린 일보행천리(一步行千里)의 묘용을 사용한 것이다.
이 일보행천리라는 이름을 보고 궁현이 떠올린 것은 바로 홍길동이 썼다는 축지법! 재미를 느낀 그는 이 일보행천리진(一步行千里陣)을 더욱 연구해서 움직이면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간소화시킨 것이다. 물론 그만큼 갈 수 있는 거리는 짧아졌지만, 그래도 웬만한 경신법보다 몇 배는 빨랐다.
덧붙이자면 사실, 선인(仙人)이나 신선(神仙)들의 도술(道術) 중에는 실제로 축지법이 존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현대인의 편견을 버리지 못한 궁현은 조선이나 중국의 도술을 잘 모르는 처지였다.
각설하고, 도중에 돌이 제대로 배치되지 않아 지체한 시간과 들고 있던 돌이 다 떨어져 줍는 시간까지 합하니, 둘은 결국 비슷비슷한 시간에 세가 정문으로 들어섰다.
“하, 하아, 하아. 어때요, 형님. 제, 제가 이겼지요?”
달리면서 돌을 던지다 보니 손이 온통 흙투성이가 된 궁현이 헉헉거리며 천천을 보고 말했다.
“무, 하아, 하아. 무슨 소리냐. 하아, 내가 한 발짝 먼저 도착했다.”
천천도 마구 뛰는 심장과 자꾸만 공기를 집어넣어 달라고만 하는 폐를 진정시키며 먼저 도착했다고 우겼다.
“제가 먼저 도착했다니까요. 그럼 내기할까요?”
“내가 먼저 도착했다. 그럼 저 문지기한테 물어봐서 늦게 도착한 사람이 무릎 꿇고 패배를 시인하는 게 어떠냐?”
“좋지요!”
한참을 그렇게 서로 우기던 그들은, 문지기의 말에 둘 다 넘어졌다.
“저기…… 제가 모르긴 몰라도 저기 있는 저 개미가 두 도련님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확실합니다.”
쿵! 털썩!
“개, 개미.”
“개미……?”
궁현과 천천의 말에 문지기인 이현혁(李賢奕)이 정문 안의 개미를 가리키며 말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 개미는 궁현의 일보행천리진. 아니, ‘축지법’에 휘말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남궁세가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개미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해 오는데, 저랑 이 친구랑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예, 그렇지요.”
두 문지기의 말에 궁현과 천천은 잠시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그 개미를 집어 들었다.
“이런 개미가…….”
개미를 내려놓은 궁현은 한숨을 쉬며 무릎을 꿇었다.
“내, 내기는 내기니까. 져, 졌습니다!”
“그, 그렇지. 졌습니다.”
당연히 그들을 보던 세가의 무인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대고 무릎을 꿇으며 패배를 시인하는 그들을 이상하게 쳐다보았고, 마침 궁현과 천천을 맞이하고자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딸 때문에 밖으로 나왔던 남궁건도 이상하게 보고 있었다.
“무, 무슨 시답잖은 짓을 하는 게냐, 너희들은.”
“아, 아버님.”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선 남궁현과 남궁천천은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뭐, 뭐라?! 하하하하, 그럼 개미가 너희들을 이긴 게로구나. 하하하하하!!”
“푸, 풉. 오, 오라버니들. 푸, 푸…… 풋.”
그 둘의 말에 남궁건은 호탕하게 웃어 젖히고, 혹 비웃는 것으로 오해를 하지나 않을지 염려한 소연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는 있었지만, 그 새어나오는 소리가 거의 웃음에 가까웠다.
“에잉! 대결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괜히 성실하게 일하던 개미는 왜 끌어들여 가지고는. 쯧쯧쯔.”
유일하게 남궁적만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실은…….
‘푸, 푸하하하하하하하!! 그것 참 걸작이로고. 크흐흣, 하하하!!’
하고 웃고 싶었다. 하지만 전대 가주의 체면상 그런 꼴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간신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일어난 천천의 표정은 웃고는 있었지만, 아직 어딘가 그늘이 져 있었다.
‘후, 아우가 이렇게 내 기분을 풀려고 노력을 하는데, 계속 삐져 있어서야 안 되지. 암.’
“우덕(優悳) 장로, 오랜만에 비무를 좀 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음, 못할 것 없지요. 가십시다, 소가주.”
이내 기운을 차린 천천의 눈 안에서는 다시금 무(武)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이 연무장으로 사라지고 조금 뒤, 궁현은 화선과 함께 서관으로 향했다.
“화선아, 누가 오면 바로 알리도록 해라.”
“예, 도련님.”
서관에 들어서자마자, 궁현은 사다리를 가지고 가장 안쪽의 책장까지 다가갔다.
“오늘에야말로 내가 열고 만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책장에 다가선 궁현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어 맨 끝장을 펼쳤다.
현파명투천뢰경진도해, 다른 이름으로 천뢰경.
넉 달쯤 전, 이것을 천수의 장까지 풀었을 때 갑자기 책이 넘어가면서 마지막 장이 펼쳐졌고,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황룡을 밟고, 두 번 완전한 청룡을 따라 백호와 싸우고, 두 번 완전한 백호를 도와 주작을 달래고 현무의 단단한 등에 올라서라.
‘중앙[황룡]. 동[청룡]으로 33[두 번 완전한(33)]보, 그리고 서[백호]로 2[싸우고(둘이 맞부딪힘)]보, 또 서[백호]로 34[두 번 완전한(33), 도와(1)]보, 남[주작]으로 1[달래고]보 북[현무]으로 10[단단한(10) 등]보.’
처음에는 이러저러하게 난해한 해석을 해서 연신 틀려 댔던 궁현은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적혀 있는 것이 사신수와 중앙의 황룡이라는 것을 생각해 여러 숫자를 대입해 이동해 보았다. 그래서 결국 나온 정답이 이것.
중앙을 점하고 동, 서, 서, 남, 북의 방향으로 움직인 그는 어째서인지 다시 책장 앞에 서 있었다. 그랬다. 이 서관은 서관 자체로 하나의 절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은 첫 번째 금제(禁制)는 풀었고.’
궁현은 다시 그 책을 들여다보았다.
일곱 별로 이루어진 국자에 물을 채워라.
이 문제를 가지고만 석 달을 씨름한 궁현이었다.
일곱 별로 이루어진 국자가 북두칠성을 뜻하는 것은 알겠는데, 대체 천장이 뚫려 있어 밤하늘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 책장 앞에서는 창문을 들여다보는 것도 여의치 않은데, 어찌 그것을 찾는단 말인가.
‘흐음, 일곱 별이 다른 것을 이르는 건 아닐까.’
그는 천천히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법 때문에 금제가 가해질까 두려워 그 자리에만 있었지만, 얼마 전 첫 번째 금제를 풀고 나면 그건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국자…… 물을, 채워라…….’
그렇게 서관 안을 이리저리 헤매던 궁현의 눈에 책 한 권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