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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6화)
2. 개미에게 지다(3)
불교 선종 6대 조사 혜능의 가르침과 그 행적에 대한 해석.
이것뿐이라면 별로 이상할 것은 없지만, 왜인지 눈에 띄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며 그 책을 꺼내 들어 찬찬히 살펴보자 왜 눈에 띄었는지 깨달았다.
“벼, 별?”
표지와 색이 비슷한 색료를 썼는지, 잘 눈에 띄지 않긴 해도 가까이서 보니 표지의 별 모양이 확연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조금은 허탈함을 느낀 그는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고는 꽂혀 있던 책장에 표시를 했다. 그리고 온 서관을 헤매며 같은 표식이 있는 책들을 찾았다.
결국, 일곱 개의 표식이 있는 책이 있던 책장들을 전부 점으로 보고 머릿속에서 평면으로 이어 보니, 결국 북두칠성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하아, 도대체 이걸 만든 사람은 뭐랄까…… 의표를 찌르는군.’
그랬다. 괜히 어렵게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 심각한 걸까, 싶을 정도로 너무도 쉬운 문제였다. 단, 몸이 고생해야 하긴 하지만.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물을 채워 넣는다.’ 설마 진짜 물을 채워 넣으란 말은 아니겠으나…….
‘아니, 그럴 가능성도 있네.’
물론 지금까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도 다분했지만 궁현은 일단 그 경우를 배제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 물이라.’
그렇게 한 시진을 고민하다 결국 진짜로 물을 채워 넣어 보자는 생각에 화선을 부르려고 일어난 순간,
촤라라라락, 툭.
“응? ……아!”
궁현의 품에서 책이 떨어졌다. 물론 그 책이 천뢰경임에야 틀림이 없는 이야기겠으나, 펼쳐진 책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천수의 장.
이것은 아마도 뇌로의 장을 풀 단서를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시험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천뢰경을 완전히 배제하고 시험을 치르려 하다니. 그러고 보니 첫 번째 금제도 천수의 장 말미에 나오는 오신수타려진(五神獸墮旅陣)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잠시 그런 간단한 연상도 해내지 못한 자신의 머리를 콩, 쥐어박고는 천수의 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물을 가득 채운다. 국자 형상 안에만 가득 채워야 하겠지?’
책장들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서 대충 얻어 낸 값은 한 평 반이 조금 넘는 것 같았다.
‘그럼…….’
잠시 고민한 그는 이내 책들을 꺼내 일정하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언뜻 불규칙한 듯 보이나 실상은 너무나도 방대한 규칙성을 지녔을 뿐인 그 배치가 끝나자, 궁현은 성급히 거기서 발을 빼었고, 이내 허공(虛空)에서 시내가 흐르듯 책이 배치된 공간 안에만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출어공진(河出於空陣)!
말 그대로 공(空)의 기운을 응축해 물[河]의 기운으로 변화시켜 물을 뿜어내는 진으로, 천수의 장 중에서는 기본적인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물을 만들어 낼 뿐이므로 그 바깥쪽에 환상진(幻像陣)이나, 차단진(遮斷陣)을 중첩시켜 놓지 않으면 시원한 물세례나 한 번 시켜 주는 것에 그치는 진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는 이것보다 확실한 진법은 있을 수가 없었고, 궁현은 이미 본 책들만 사용하긴 했어도 과감하게 책을 버리면서까지 이 진법을 사용한 것이다.
천장까지 물이 전부 채워지자 더 이상 물이 솟아나지 않았고, 그제야 금제 하나가 또 풀렸는지 천뢰경의 마지막 장에 또 하나의 지시문이 생겨났다.
대충 봤다가 아연실색한 그는 책을 뚫기라도 할 기세로 다시 읽었다.
“그, 그 물을, 가장 안쪽의 책장에 꽉 차도록 옮겨, 모아라.”
무슨 소리인지 행여나 잘못 보았을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읽은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책장에 물을 모으라니, 이 책의 저자는 책을 원망하는 자인 걸까? 책장에 물을 모은다면 십중팔구(十中八九) 그곳의 책들이 못쓰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일 터. 그런데도 책장에 모으라니…… 이 서관의 책들에게 나름의 애착을 가지고 있는 궁현에게는 조금 무리한 주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시험을 포기할 궁현은 더더욱 아니었다. 결국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은…….
“하아. 다했다!”
그 글이 나타나고 몇 다경쯤 시간이 지났을까, 서관 가장 안쪽에 있던 책장은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장에 책이 단 한 권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두칠성의 국자 부분에서 가장 안쪽의 책장까지의 일직선상에는 책이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고, 나머지 책장들 또한 전부 비어 있었다. 진법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책 이외에는 물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한 구석에 전부 모아 놓은 것이다.
“좋아, 그럼.”
쑤욱!
슈우우우우…… 콸콸콸콸!!
그가 하출어공진을 유지하던 책들 중 하나를 빼 버리자 물은 그 틈을 통해 흘러넘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머지 책들도 다 삼켜 버리며 철썩 하는 소리를 내며 넘쳤다. 하지만, 어느 정도 넘치던 물들은, 일정하게 놓인 책을 경계로 하여 넘치지 않고 그 길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수수류변진(輸水流變陣)!
단순히 물의 흐름을 차단하고 바꾸기 위해서 만들어진 진법이었다. 혹자들이 수 양제가 대운하를 만들 때, 이 진법을 사용했다면 수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몇 십 년은 더 버텼을 것이라고 할 만큼 손쉽게 물의 흐름을 정확히 바꿔 주는 진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물을 다스려야 하는 토목, 공사에는 이 진을 사용하는 일이 꽤 있었다. 물론, 제갈세가가 담당했을 때의 일이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결국 물이 전부 가장 안쪽의 책장에 쌓이자마자, 다시 방위를 바꾸어 물을 차단한 궁현은 물에 젖은 책들을 하나씩 주워 모았다. 그러고는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에 널어놓았다.
“휴우, 다행이다. 실패하지 않아서.”
만약 한 번에 성공하지 않았다면 그만큼 더 많은 책을 희생시켰을 거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마저 돋는 궁현이었다.
“아!”
차단을 성공하고 책장 가득 물을 채우고 다경쯤 지났을 때, 갑자기 책장이 물을 빨아들이고 나서는 서관 자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아악!!”
궁현은 무엇이라도 잡고 버티려 했으나, 공간 자체를 빨아들이고 있는데 어쩌리오. 만약 이런 때 버틸 물건이 있다면 그건 무(無)뿐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없다는 얘기다.
결국 몇 초 만에 모든 것을 빨아들인 책장은 고요(孤寥)만을 다시 내뿜으며 텅 빈 공간에 안주했다.
―……아이야, 정신을 차리거라. 아이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작은 노성만이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으, 음? 아, 내가 왜 자고 있었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궁현은 눈앞에 웬 노인이 보이자 기겁을 했다.
“누, 누구세요?”
―나? 나는 나지.
노인의 장난과도 같은 대답에 약간 어이가 없어진 궁현의 언성이 조금 올라갔다.
“아니, 장난치지 마시고 얼른 대답해 주세요. 노선배는 누구신지요.”
궁현의 말에 노인은 허허 하고 웃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다. 세속에 묶여 누군가에게 이름으로 불리는 경지는 이미 초월한 게지. 그저 말년의 깨달음에 내 정신을 이 책에 묶어 둘 수 있었으니. 그래, 나는 어찌 보면 창궁무열신공서(蒼穹無涅神功書)라고 할 수 있겠구먼.
노인의 말에 궁현의 표정에 의문이 나타났다.
“예? 책이라뇨?”
궁현의 물음에 노인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허허허허, 곧 알게 될 것이니라.
궁현의 머릿속에는 허허허허 하는 노인의 웃음소리가 각인되어 갔다.
그 말을 듣자마자 궁현은 몸이 튕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자, 서관의 탁상에 앉아 엎드려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건, 무슨?”
궁현은 순간 자신이 미쳤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탁상에 앉아 있는 것도 이상할 뿐더러, 어리둥절해서 서관을 둘러보자 엉망진창이 되었던 서관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깨끗했기 때문이다.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는데, 서관 자체가 환상진이었던 것인가. 잠시 허탈하게 웃은 궁현은 아직 자신도 멀었다고 생각하고는 문득 가장 안쪽의 책장을 바라보았다.
“아.”
그곳에는 책장이 아니라 탁상 하나가 있었고, 그 위에는 목함(木函)이 네 개 올려져 있었다.
얼른 달려가 가운데에 있는 목함을 열어 본 그는 어딘가 눈에 익은 듯한 제목의 비급(秘쳥)이 있었다.
창궁무열신공(蒼穹無涅神功).
잠시 고민하던 궁현은 비급을 집어 들고는 천천히 펼쳐보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 번 보고는 뜻을 알 수 없는 무공 구결들이 튀어나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궁현의 그런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필자는 남궁가에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렀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요.
그 은사(恩事)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을까 하여 남궁가의 모든 심법과 필자의 깨달음을 조금 가미하여 이 책을 엮었소.
부디 후대의 은인에게 꼭 도움이 되기를 빌며 이만 줄이오.
―배풍인(徘風人) 해경수(海敬水).
추신, 이 신공을 배우려면 그 이전에 다른 어떤 심법도 익히지 않는 것이 좋으오. 또한 근골이 굳은 성인이라도 얼마든지 깨우칠 수 있으니 미리 포기하지는 않길 바라오. 필자는 이 책이 가질 만한 자격을 지닌 자에게 가기를 바란다오.
머리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궁현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객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추신에 적힌 말뿐이었다. 근골이 굳어도 좋다니? 그럼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신공 같지 않은가? 물론, 근골이 굳어 삼류 무사로 남은 사람들이야 중원 천하 넘치도록 있을 테니 굳이 그렇게 볼 수도 없지만 말이다.
궁현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있었다. 비급을 잡은 두 손이 조금씩 떨리고, 점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하다가 다른 세 목함을 보고는 그 내용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른 목함을 연 궁현은 또 새로운 비급을 볼 수 있었다.
“아!”
제왕뇌익검법(帝王雷翼劍法).
제목을 보자마자 궁현은 속으로 새삼 쾌재(快哉)를 불렀다.
검이라! 자고로 백일창(百日槍) 천일도(千日刀) 만일검(萬日劍)이며, 검은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하였다.
뒤의 말은 말 그대로 검이 모든 병기 중에 가장 앞선다는 뜻이고, 앞의 말은 검을 수련함에 있어서는 만일(萬日) 이상을 수련해야 할 정도로 어렵다는 뜻이지만, 그만큼 제대로 수련하면 모든 병기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도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다 편협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궁현도 이왕 배울 거라면 검이 끌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 딱 맞춰서 나타나니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비급을 품에 잘 갈무리한 궁현은 다른 목함을 열었다.
어찌 보면 예상대로일까, 이번에도 목함에는 비급이 들어 있었다. 하나, 이번 것은 전번의 두 권과는 확연히 다른 굵기를 보이고 있었다. 조심스레 비급을 집어든 궁현은 그 제목을 훑었다.
천뢰무한기궁법집편(天雷無限氣躬法輯編).
제목만 보고는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 책이었다. 검법(劍法), 창법(槍法), 권각법(拳脚法), 보법(步法), 신법(身法)은 봤어도 궁법(躬法)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궁술(弓術)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데, 도저히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설마 또 이런 요상한 비급이 나오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하며 궁현이 마지막 하나 남은, 다른 것들보다 조금 작은 목함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