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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7화)
2. 개미에게 지다(4)
“에?”
목함 안에는 또 작은 크기의 파란 함 하나가 있었다.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은 궁현은 고개를 흔들고는 그 함을 열어 보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앗! 차거!”
단순히 손을 가까이 가져간 것뿐인데도 마치 얼음물에 손을 넣고 있는 듯 엄청난 냉기가 덮쳐 왔고, 깜짝 놀란 궁현은 함으로부터 급히 손을 뗐다.
“이, 이건 대체.”
다시 한 번 목함을 닫고 만져 보니 이번엔 냉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여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궁현은 목함 채로 품 안에 갈무리하고는 탁자에 앉았다.
“에…… 창궁무열신공(蒼穹無涅神功)이라, 막힘이 없다…….”
궁현이 책을 펴며 한참 생각에 빠져들려고 할 때,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잠시 움찔한 궁현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는 다시 책에 몰두하려 했다.
“도련님, 저녁 식사 시간이옵니다.”
“안 먹으…….”
궁현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화선이 문을 열고는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드르륵!
“……시면 안 됩니다. 점심도 거르셨는데, 저녁을 거르시면 어떡하십니까, 그런 서책은 그만 보시고 얼른 처소로 드시지요.”
꽤나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화선을 노려보던 궁현은 이내 기세에서 눌렸는지 꼬리를 말고는 서관을 나섰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졌다.”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난 궁현은 바로 자신의 전각으로 향했다. 그런 궁현을 지켜보던 화선은 이내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 아, 화선아, 뭔 일이냐?”
“아, 무연 도련님.”
주방으로 간 화선을 맞은 것은 아침부터 소란, 조찬(朝餐)이 있었기에 틈틈이 숙수들을 쉬게 해 주고 자신이 일을 대신하던 남궁무연이었다.
“우리 도련님 저녁 식사를 지어 가려 왔습니다.”
“음? 현이?”
유독 자신이 만들어 준 음식을 곧잘 맛있게 먹는 궁현을 좋아하던 무연은 궁현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현이 밥이라면 내가 책임을 져야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화선아.”
“아, 아니. 그, 저…… 다른 분께 부탁드려도 됩니다.”
화선의 말에 무연이 화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요리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보고는 화선은 질렸다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궁현에게 대하듯 무연을 대하는 자신에 눈치채고는 화들짝 놀라 표정을 지웠다. 궁현이 자신을 종답지 않게 조금 편히 대해 주어서인지, 요즘 화선은 자신이 종종 신분을 망각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
‘안 되지, 안 돼. 너는 시비야, 시비. 천것이라구.’
그런 생각을 하며 자세를 바로 하는 그녀였다.
그러고는 요리를 하고 있는 무연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편하게 해.”
“예?”
한창 요리를 하던 무연이 대뜸 그렇게 말하자 화선은 어리둥절해서 반문을 했다.
“편하게 하라구, 그렇게 얼어 있지 말고. 방금은 좋더만, 새초롬하니.”
무연의 말에 깜짝 놀란 화선은 아직 초과(炒鍋:프라이팬)를 잡고 요리를 하는 무연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제발 목숨만은…….”
“얼씨구? 편하게 하라니까.”
그 말에 화선이 땅바닥에 꿇어 앉아 빌 자세를 하자 그제야 초과에서 손을 뗀 무연이 그녀를 만류하며 말했다.
“반어법으로 말한 게 아니라, 정말로 편하게 하라구. 현이 대하듯이. 나는 말이지, 노비라는 게 너무 싫어. 아니, 아니, 네가 싫다는 게 아니라, 세상의 인간이란 것은 다 똑같은데 태어날 때 운만으로 어떤 놈은 노비고 어떤 놈은 주인 행세하는 게 싫다고. 뭐, 천것이라고 코 없고 눈 없나?”
“그, 그럼. 혼내지 않으실…… 건가요?”
화선의 말에 무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일으켜 주었고, 그러자 당황한 화선이 다급히 손을 빼며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도 서로 눈이 마주친 그들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
치이이이익―
“앗, 저, 요리가…… 타는데요.”
화선의 말에 엑? 하며 고개를 돌린 무연은 순간 당황해서는 우왕좌왕했다. 그 모습을 보던 화선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수건 하나를 집어 와서는 초과를 들어 올려 탄 음식을 버리고는 초과를 물에 식혔다.
“요리 실력은 대숙수신데, 어째 정리에는 소질이 없는 듯하시네요.”
“하, 하하. 그렇, 지?”
3. 반쯤 찬 식초가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1)
무연과 화선이 이상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그 시각, 궁현은 방에 들어앉아 비급을 펼치고 있었다.
“우선은 심법부터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궁무열신공이라 적혀 있는 비급을 펼친 그는 이미 본 머리말을 무시하고는 다음 장을 펼쳤다.
“기(氣)는 우주를 이루는 기본이자, 우주는 곧 하늘[天]이니, 하늘과 사람이 통하는 것은 머리[頭]이다. 즉, 하늘의 기를 받을 때에는 머리로부터 받아 전신(全身)과 단전에 돌린 후 발[足]의 용천혈(湧泉穴)로 빠져나가도록 하고, 땅의 기운을 받을 때에는 반대로 용천혈에서부터 머리의 전정혈(前頂穴)로 빠져나가도록 하는 것이…….”
궁현은 그 구결(口訣)을 읽으며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갔다. 아니, 빠져들려는 순간, 그 다음의 몇 글자를 읽고 말았다.
……것이 일반적으로 올바르다. 하나!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축기(畜氣)가 아니라, 원래의 설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그러니 이전에 쓰여진 구결대로 축기를 시작한 얼간이들은 지금 당장 이 비급을 덮고 원래 자리에 돌려 놓은 후, 진법(陣法)을 되돌려 놓기를 바란…… 아니, 가란다고 진짜 가면 안 되지.
‘뭐, 뭐냐. 이건.’
그럴 거면 차라리 그 앞의 설명들을 적어 놓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거기다 보는 사람의 성정이 바른생활 청년일 경우를 대비해 가지 말라는 말까지. 점점 이 글을 쓴 자의 정신 상태가 궁금해지는 궁현이었다.
결국 고개를 홰홰 젓고는 다음 장을 펼치려던 궁현이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화선의 목소리에 이만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저녁 식사이옵니다.”
“들어와, 화선.”
끼익!
“음?”
문이 열리고 화선이 들어오자, 궁현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웬 자장면? 원래 저녁 땐 잘 안 만들어 주던데.”
자장면은 저녁에 먹어야 제 맛인데 말이지. 하고 덧붙인 궁현은 화선이 내미는 그릇을 받아 들고는 비비기 시작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실제로 자장면이 저녁에 맛있는지는 필자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어이, 화선. 당장 불어.”
“예, 예? 대, 대체 뭘…….”
잠시 당황하는 화선을 보며 무언가 일이 있음을 확신하며 궁현은 화선을 더욱 밀어붙였다.
“……무연이 형이 해 준 거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화선은 궁현이 예상했던 질문이 아니라 다른 것을 묻자,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무연 도련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도련님의 만찬을 만든다니까 바로 나서셔서…….”
“음, 음! 좋지, 자장면. 아니, 설마 작장면(炸醬面:중국식 자장면, 발음은 비슷하다.)은 아니겠지?”
궁현의 말에 화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자장면? 작장면? 하고 의문을 표했다.
그런 화선의 모습에 궁현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무연이 형이랑 친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야기지…….”
“어? 이거, 이 음식은 뭐라고 하죠?”
고소한 냄새, 매운 냄새, 달콤한 냄새가 난무하고 연신 지글거리는 소리나 보글거리며 끓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주방에 놀러온 궁현은 자장면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물었다.
“응? 그걸 몰라? 작장면(자장미엔, zhajiangmian)이잖아?”
이름까지 자장면이라고 확인한 궁현은 ‘그러고 보니 자장면도 중국 음식이었지!’ 하는 얕은 생각에 한껏 기대를 안고 작장면을 비벼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
“왜? 그렇게 맛있어?”
중국식의 자장면인 작장면은 그렇게 맛없지는 않으나, 한국에서 언제나 시켜 먹던 그 맛을 기대한 궁현에게는 실망에 또 실망을 안겨 줄 만했다.
‘맞다. 자장면은, 인천에서 시작됐다고 했지.’
그제야 한국식 자장면의 기원을 기억해 낸 궁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젓가락을 들어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러고는 인터넷에서 봤던 자장면 소스 만드는 법을 읊기 시작했다.
“형, 작장면을……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뭐? 된장을 어쩌라고?”
결국, 일일이 지시해 준 뒤에야 자신이 원하던 대로 만들어진 자장면을 보며 궁현은 눈물을 흘렸다.
1년이었다. 거의 1년간을 엄마 뒷모습도 못 보고 살아온 궁현에게는 그나마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먹던 자장면이라는 사소한 것도 커다란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기회가 나면 조선에나 가 봐야지, 흑.’
“왜, 왜 우는 거냐, 현아?”
“아,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말한 대로 작장면 하나 만드는 데도 여기저기 끼어들며 틀렸다는 궁현에게 조금 화가 나 있던 무연은 만들어진 작장면을 보며 몇 년 만에 만난 친구 보듯 우는 궁현이 의아했다.
“그러냐? 뭐, 그럼 어디. 이렇게 닦달해서 만든 작장면 맛 좀 볼까? ……!!”
그런 궁현을 놔두고 자장면을 먹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궁현을 힐끔 쳐다보더니, 금방 그릇을 비웠다.
“호, 네가 닦달할 만큼 맛은 있구나, 달콤 짭짜름한 것이…….”
“자장면(煮醬面)이라 이름 짓겠습니다.”
궁현의 말에 무연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작장면과 비슷한데, 한 글자 차이로 이리도 맛이 바뀌다니. 하하하.”
“그,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런 자장면의 요리법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되신 겁니까?”
갑자기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화선의 말에 궁현은 움찔하며 당황했다.
“그, 그게 말이지. 아― 맛있겠다.”
“에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빨리 말해 주세요!!”
궁현은 그런 화선을 애써 무시하며 젓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자, 잘 먹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먹는 내내 노려보는 화선의 눈빛에 압도당한 궁현은 마치 미각이 마비된 듯 기계적으로 젓가락을 놀릴 뿐, 이게 자장면인지, 작장면인지조차 구분을 하지 못했다.
“잘 드셨어요, 도련님? 자, 그러면 입을 여셔야지 않겠습니까?”
궁현의 그 말에 꽃이 활짝 개화하듯 미소를 지은 화선은 ‘그만 불어!’라는 식으로 궁현을 몰아세웠다.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궁현은 결국 입을 열었다.
“저녁. 화선아, 너도 저녁 먹어야…….”
“무연 도련님이 벌써 다 챙겨 주셨습니다.”
이미 마지막 퇴로까지 다 차단해 둔 화선이었다.
“……그냥,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
아무리 화선이라지만, 궁현과 지낸 시간이 벌써 두 해째였다. 궁현이 그냥 갑자기 생각난 정도로 누군가를 그렇게 몰아세우지 않는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흐응, 그러십니까아?”
은근한 눈길로 쳐다보는 화선을 보며 궁현은 결국 두 손바닥을 모았다.
“제발, 그냥 넘어가 주라.”
“후우, 이번만입니다.”
“알았어.”
“그럼,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주무실 준비를 하시지요.”
문을 열고 나가는 화선을 보며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쉰 궁현이었다.
“도련님, 발 씻겨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수분(水盆:대야)에 물을 떠 온 화선은 궁현의 발 앞에 내려놓고는 궁현의 발을 씻기려 했다.
“자, 잠깐, 내가 한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아니 됩니다. 이것마저 안 하면 제가 청소 말고는 시비로서 제대로 하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청소로도 충분한데 말이지.’
그런 말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너무도 단호한 화선의 말에 궁현은 하는 수 없이 발에 힘을 뺐다.
찰팍.
화선의 부드러운 손길이 수분의 물을 퍼 올려 궁현의 발을 쓸어 갔다. 왠지 이럴 때면 시선을 둘 곳을 찾을 수 없는 것이 궁현에게는 너무나 고역이었다. 빤히 바라보자니 눈이라도 마주치면 뭔가 기분이 이상할 것만 같고, 그렇다고 외면하자니 수줍어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그런 이유로 거절하는 것이기도 했고.
그렇게 발을 씻긴 화선은 궁현에게 밤 인사를 하고는 궁현의 처소를 나섰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도련님.”
“아, 그래. 너도 잘 자라, 화선아.”
궁현의 말에 화선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문을 닫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