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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8화)
3. 반쯤 찬 식초가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2)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해 볼까?”
궁현은 품에 있던 창궁무열신공이 적힌 비급을 다시금 꺼내었다.
“기(氣)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는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이루는 힘[力]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기는 공중(空中)에도, 땅[地]에도, 하늘[天]에도, 강(江)에도…… 심지어는 인간도. 기를 가지지 않고는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 그런데 필자는, 인간은 왜 이 넘치는 기를 놔두고 극히 적은 자신의 기운을 사용하려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물론 인간도 넘치는 기운의 일부를 자신에게 흡수하여 힘[功力]으로 삼지만, 그것은 전체 기의 양을 생각하면 바다에서 물 한 방울 퍼낸 것보다도 적다.”
궁현은 비급을 펼쳐 다음 내용을 보면서, 점점 그 내용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하여, 필자는 일생을 자연의 기[自然之氣]를 사용하는 법에 대해 연구를 했고, 미흡하게나마 그 방도를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하나, 이 자연지기를 사용할 수 있는 건, 같은 자연지기만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내고야 말았다. 그렇다. 필자는 이 신공(神功)을 사용해 자연지기를 사용하려 했으나, 몸 안의 내공과의 반발로 인해 단 한 번에 모든 공력을 잃은 것이다. 하나, 그 이후, 몸이 회복되었을 때, 모든 내공을 잃고 본연의 기[先天之氣] 즉,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지니는 기만을 가지고 이 신공을 사용하자, 필자는 정말 최강이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하나, 자연지기라는 말만을 듣고 말코 도사(道士)들이 쓴다는 웃기지도 않는 무한내공(無限內功)을 기대한다면 당장 이 비급을 덮어라. 이번에는 정말 장난이 아니다. 확실히 도인(道人)들이 꿈꾸는 자연지기를 모공으로 빨아들여 곧바로 자신의 내공처럼 사용한다는 이론[內功巡環法:내공순환법]은, 겉으론 그럴 듯해 보이나 사실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자연의 기운을 인간에 몸에 끌어들이는 것은 가능하나, 그것을 완벽히 자기 맘대로 조종하는 것은 신에게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기까지 읽은 궁현은 조금 짜증이 났다. 대체 비급이라는 책이 순 자기자랑에 기에 대한 언급만을 하고 있지 않은가! 좀 더 기를 쌓는 방법이라던가 하는 그런 것이 적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확, 넘어가 버려?”
하지만 그러자니 중요한 내용이 있을까, 불안하다. 잠시 고민하던 궁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금 비급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한 번 시작한 공부는 절대 도중에 그만두지 않는 궁현다웠다.
“……왜냐하면 자연지기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몸으로 그 일부를 천천히 쌓아 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한 번에 들락날락거렸다간, 전신에 내상을 입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권하는 방도는 절대 그런 방도가 아니다. 바로 자연지기를 자연지기 본연의 상태로 사용하는 것이다.”
아니, 이 무슨 궤변인가. 자연지기를 맘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자신이면서, 정작 자기가 자연지기 본연의 상태로 사용하라고 말하다니? 궁현은 순간적으로 책을 덮고 누워 버리려는 자신을 가까스로 막아 내고는 그 다음의 글을 읽어 나갔다.
“궤변을 일삼는다 생각할지도 모르나, 다 방도가 있다. 바로 오행(五行)의 이치를 이용하는 것. 이것을 위해 필자는 남궁가에 현파명투천뢰경진도해(玄波命透天雷境陣圖解)를 주고 후대의 은인에게 이 비급을 찾도록…….”
결국 그날 밤, 궁현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을 오기로 버티며 읽느라…… 밤을 새고야 말았다.
“으, 으으……. 화선아.”
쿵!
“왜,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히익?!”
방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에 큰 소리로 방문을 열며 궁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궁현의 눈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검어지고 쳐져 있자, 숨을 들이키며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도, 도련님?”
겨우 화선을 알아본 궁현이 바닥에 쓰러진 채로 화선의 옷자락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책이 싫다. 쿠울.”
“예, 예에? 대체 무슨? 도련님, 도련님? 주, 주무십니까?”
그렇게 말하고 잠들어 버린 궁현을 보며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던 화선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궁현을 침상에 뉘였다.
“흐유, 대체 무슨 책을 보셨기에 이리…….”
잠시 궁현의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화선은 탁상 위에 올려진 서책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보다가 이해할 수 없는 한자들이 나열되어 있자 피식, 하고 웃고는 책을 잘 덮어 놓고 방을 나갔다.
한편 그 시각, 천천은 아침 수련의 첫 단계인 일주천(一周天)을 끝내고 목검을 집어 들고 있었다.
“하나.”
후웅!
“둘.”
훙!
“셋.”
후웅!
처음엔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그러다가 갑자기 검무(劍舞)를 춘다. 한참을 그러던 천천의 검로가 약간 흐트러졌다. 그리고 한 번 흐트러진 검로는 마치 둑을 터뜨리며 터져 나오는 물처럼 굉장한 속도로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렸다.
‘아니야, 이건. 집중해야지. 마음을 정갈히 하고.’
하지만, 한 번 실패한 검무가 두 번 한다고 성공할 리 없었다. 원래 마음이란 잡으려 하면 잡으려 할수록 더욱 심란해지는 법. 한 번 든 생각은 생각을 낳고, 또 그 생각은 생각을 낳고…… 그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물론 평소의 천천이라면 이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겠지만, 어제의 정혼 발언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라 도저히 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 남궁우덕(南宮優德) 장로와의 비무도 너무 형편없이 당하기만 했었다.
“하아, 대체. 내가 생각한다고 될 일이 아니건만.”
검 수련은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천천은 칼집에 검을 집어넣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혼인이라.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잘 있을까.’
눈을 감고 추억을 떠올린다. 그것은 천천의 첫 강호출도 때의 기억. 그리고 그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
“하아.”
아직까지도 천천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그녀이건만, 여행길에 스치듯 만난 인연이니 천천은 그녀의 이름은커녕 사는 곳조차 모른다. 게다가 어쩌면 그녀가 천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체 왜 그리 한숨을 쉬누?”
그때, 천천의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남궁세가의 태상장로(太上長老)인 남궁호열(南宮號烈)이었다.
“아, 태상장로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그래. 평안했지. 그건 그렇고, 우리 소가주님께서는 어찌 그리 한숨을 쉬셨누?”
남궁호열의 말에 천천은 다시금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혼 문제…… 알고 계십니까?”
천천의 말에 남궁호열의 얼굴에 잠깐 동안 의문이 스쳐 갔지만 이내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럼, 알고 있지. 태상장로님이 사천당가의 그 맘 없는 녀석과 맺은 약속을 말하는 게냐?”
“대체 어떻게 해서 당가와 혼약을 맺은 건지는 모르겠사오나, 저는 아직 누군지도 모르는 낭자와 혼인을 할 생각은…….”
“없을 테지.”
“예?”
천천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호열은 말을 잘라먹으며 입을 열었다.
“혼인하고 싶지 않은 게야. 하나, 자기 맘대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 이리 혼자 한숨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니겠누?”
“후, 잘 알고 계시군요. 하기야, 그렇겠지요. 이런 건 역시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겠지요?”
천천의 말에 호열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혼인을 할지 안 할지는, 우선 그 당가의 여식을 보고 정하는 것이 어떻겠누? 맘에 안 들면 그 당가에서 거절을 하도록 행동하면 될 일이지 않아?”
“아!”
그 말에 무언가 깨달은 천천은 안색을 펴며 목검을 고쳐 잡았다.
“예, 그렇지요. 나중 일은 나중에 걱정하면 될 일이지요. 하하하.”
그런 천천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 호열은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후우, 언제 봐도 정말 귀신같은 경공이시군. 하하하.”
천천의 웃음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
―아이야. 아이야, 정신을 차리거라.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가 궁현의 귀를 계속 간지럽히자, 결국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방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방에서 이 노인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대, 대체 어디 숨어 계신 거죠?”
―어디긴, 전에 말했지 않느냐?
노인의 대답에 궁현은 자신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었다. 분명히 노인이 전에 자신이 머물고 있다고 말한 곳은…….
“……비급?”
―그렇지!
“에이, 말도 안 돼. 사람이 어떻게 책 안에 존재해요? 순 뻥은.”
당연히 믿지 않는 궁현이었다. 중원 무림. 아니, 정확히는 남궁세가에 오면서 비현실적인 것들을 많이 접하기는 했지만,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죽은 자의 영혼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사도(邪道)에서도 웬만하면 꺼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남궁세가의 둘째 아들에게 굳이 그런 수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뻥이라니! 이이, 소가주도 못 된 주제에 내가 네놈의 몇 대 조상인지나 알고는 말하는 게냐?!
“에?”
대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인의 말에 궁현은 어리둥절해했다. 조상이라니?
“어디 숨어 계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고 나오십시오. 제가 무공을 모르기는 하지만, 은신잠행술(隱身潛行術)이라 하여 기척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왜, 왜 내 말을 못 믿는 것이냐?! 그래, 창궁무열신공의 요결(要訣)이라도 외워 주랴?
그 말에 궁현의 눈이 번뜩 뜨였다. 창궁무열신공이라니? 그 이름은 신공을 만든 사람과 자신밖에 모를 터였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를 떠올리는지 대충 감이 잡힌다만, 적어도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 분은 아니다. 그저, 너처럼 이 신공을 찾아낸 네 조상일 뿐이지.
“그럼, 정말 노선배는. 아니, 할아버님은 정말로 그 책에?”
―그렇지.
아무래도 노인은 정말로 책 속에 정신을 봉인한 사람인 듯했다. 참 별의별 수법도 다 있다고 생각하는 궁현이었다.
“그런데 저를 깨우신 이유는 뭐죠?”
궁현의 질문에 그것도 모르냐는 목소리로 노인이 말했다.
―그, 그것을 몰라서 묻느냐?! 네놈이 하는 짓이 하도 답답해서 깨웠다. 어찌된 것이 구결을 읽고도 아무 일도 안 하느냐?
“그거야 너무 졸리다 보니…… 헤헤헤.”
그랬다. 결국 궁현은 비급의 구결 부분까지 읽었지만, 그때에는 이미 비몽사몽간에 있었던지라, 무슨 내용이었던지 생각도 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실행할 정신은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후우, 어찌 이런 놈이 그 진법을 풀어 낸 건지.
“훗, 제가 좀 똑똑하긴 하…….”
―멍청하다는 뜻이니라, 이 바보 같은 9대 손(孫)아.
노인의 말에 뻐기려던 궁현의 표정은 더없이 일그러졌다.
“쳇, 하여튼. 이제부터 읽을 거라구요. 방해하지 마세요.”
―방해? 도움을 주려고 했건만, 방해라? 좋다. 어디 맘대로 해 봐라.
“그런다고 못할 줄 아십니까?”
도움이란 말에 조금 움찔한 궁현이었지만, 이내 오기가 생겨 그렇게 말하고는 비급의 구결 부분을 펼쳤다.
“후우, 먼저 토, 화, 목, 금, 수의 소진(小陣)을 상극과 상생에 맞추어 배치하고, 그 중심에 앉아 가부좌를 튼다. 그 후, 다음에 적힌 호흡법으로 호흡하며 자신의 몸에 오행을 새긴다.”
한참 그렇게 하던 궁현은 갑자기 엄청난 기운이 자신에게 몰려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크게 떴다.
“으윽?”
오행의 소진들이 그 기운들을 머물지 않고 강제로 소통시키도록 했기 때문에 간신히 버티기는 했으나, 그것도 얼마 못 갈 것으로 보였다.
“크으.”
그러기를 두어 시진, 결국 너무 많은 기를 받아 소진이 파해(破解)되고 말았다.
“허억…… 큭!”
간신히 그것과 맞추어 호흡법을 중지함으로써 자연지기와 함께 몸이 산산조각으로 파열(破裂)되는 것은 막았으나, 궁현의 입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내렸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기운을 받아들여 여태껏 단단히 막혀 있던 십사경락(十四經絡:십이경락에 임독양맥을 더한 것)과 기경팔맥(奇經八脈), 그리고 전신의 세맥(細脈)들이 강제로 타통된 것이다. 아니, 타통되었다기보다는 갈가리 찢겼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심하게 강제적이었다.
생각해 보라. 굵기가 얇은 수도관에 바닷물을 강제로 쑤셔 넣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수도관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릴 것은 해 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막힌 곳이 뚫린 것은 맞지만 그만큼 고통도 원래의 벌모세수 같은 것보다 수백, 수만 배 더한 것이다. 그러니 무인으로서는 확실히 엄청난 기연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무공을 처음 접한. 아니, 이제 접하려고 하고 있는 궁현에게는 다소. 아니, 매우 많은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