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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9화)
3. 반쯤 찬 식초가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3)
―호오, 역시. 그 와중에도 소진이 파훼될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니, 확실히 재능은 있나 보구나.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은 그제서야 입을 열고 궁현에게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하아. 크, 쿨럭. 하아. 크으― 이, 이것. 알고 계셨죠?”
―무슨 소리냐?
“알고, 하아, 큭. 말, 안 하신 거죠?”
어떻게든 비급이 있는 곳을 보며 그렇게 말하는 궁현을 보며 노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너를 골탕 먹였다? 허허허, 지금 너는 다른 무인들이 보면 굉장히 부러워할 일을 당한 것이니라. 거의 모든 혈맥들의 타통이니 말이다. 그걸 가지고 나를 탓해? 그래, 내 알고는 있었지. 네 말도 맞다. 그걸 알려 주지 않은 내 ‘덕’이지, 내 ‘덕’!
노인은 쓰러져 있는 궁현을 향해 조소(嘲笑)하며 궁현의 말을 은근히 비틀어 화를 돋웠다. 일견 유치해서, 과연 나[我]와 너[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탈아지경(脫我之境)에 오른 것이 사실인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후우…… 큭, 하아. 그럼 이제 전 진짜 졸리니까, 깨우지 마세요.”
노인의 말에 피식하고 힘겹게 웃은 궁현은 마치 생을 다한 시체처럼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
―허허, 재미있구만. 당장 내상을 무시하고 운기를 시작해도 모자랄 판에 잔다? 무인으로서는 정말 맘에 안 드는 놈이로다.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흥미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야.
쓰러진 궁현을 보며 노인은 의미심장한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궁현아.”
먼 곳에서 울리듯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궁현은 이불을 더 끌어당기며 더 깊은 잠을 요구했다.
“궁현아, 일어나야지?”
“아, 엄마. 10분만, 응?”
거의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한 궁현이었지만, 이내 그 목소리가 자기 어머니의 목소리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깜짝 놀라 이불을 제치며 깨어났다.
“어, 엄마? 엄마야? 정말이지? 정말 엄마지?”
“얘, 얘가. 누가 엄마 죽었다니? 왜 갑자기 이렇게 엄마를 찾아?”
몇 번이나 눈을 비빈 궁현이 고개를 들자, 갑자기 시야가 온통 검어지며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 뭐지?’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참다못한 궁현이 무언가를 외치려고 했으나, 역시 입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대, 대체 뭐야!! 난 지금 뭐…….’
그때, 궁현의 눈앞으로 눈에 익은 장면들이 지나갔다.
처음 보인 것은, 궁현이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젊은 엄마의 얼굴. 그리고 차례차례 아빠, 형, 할머니, 할아버지…… 그런 식으로 궁현이 알고 있는 여러 얼굴들이 지나갔고, 그런 다음 평소에는 떠올리려 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 옛 기억들이 지나갔다. 어린이집, 유치원 생활, 초등학교의 입학식, 처음으로 친구와 싸웠을 때, 처음으로 시험에서 100점 맞았을 때의 부모님의 표정, 궁환이 형과 함께 갔던 등산.
그 장면들은 차차 시간이 지나며 현재에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지나간 장면은, 설악산에서 자신을 잡으려 손을 뻗던, 그 궁환의 표정이었다.
‘이, 이건. 대체?’
그 이후, 다시 새로운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자신을 깨워 준 그 여행자부터 시작한 그 장면들은 세가의 무사인 허정휘와 이형종과의 만남, 여동생인 남궁소연과의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었던 첫 만남, 꽤나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가주 남궁건과의 만남, 남궁천천과 남궁섬의 화려한 무위, 직속 시비인 화선, 대숙수인 남궁무연.
그것은 바로 명나라로 넘어온 이후의 ‘남 궁현’이 아니라 ‘남궁 현’으로서의 삶들이었다. 그것을 보고 난 궁현은, 솔직히 말해서 이후의 삶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뭔가가 결여된 삶이었다. 세가의 가족들은 궁현에게 진실한 ‘가족으로서의 사랑’을 주고 있겠지만, 자신은 거짓으로밖에 줄 수 없었다. 그것을 떠올린 궁현은 부모님과 형의 얼굴이 보고 싶어지는 반면, 자신이 진짜 남궁 현으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대체. ‘나’라는 것은 누굴까. 남 궁현? 남궁 현? 과연 어느 쪽의 내가 진짜일까? 설마 나는 정말로 꿈을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지금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사실 내가 미래로 돌아갈 확률은 이곳으로 온 확률만큼이나 적을 텐데. 과연 그런데도 내가 계속 남 궁현으로서 자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느 날 진짜 남궁 현이 나타나면 나는 이 자리를 비워 줄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궁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이렇게 외쳤다.
‘어느 쪽이면 어때!! 나는 그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건아, 남궁현일 뿐이다!!’
남궁세가의 어느 전각 안, 그중 한 방에 여러 인영(人影)들이 모여 있었다.
“아, 아버님, 어머님. 흑, 이대로 오라버니가 안 깨어나시면 어떡하죠?”
거의 울 듯한, 아니 이미 몇 번이나 울었는지 눈가가 부어 있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바로 남궁소연이었다.
“그렇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현아, 현아.”
대답하는 남궁건과 그의 아내인 서모련(徐慕蓮)도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때, 침상에 뉘여 고른 숨만을 내뱉고 있는 인영, 궁현이 입을 달싹였다.
“……으.”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시선이 궁현에게로 쏟아졌고, 그 시선을 받으며 일어난 궁현은 이렇게 외쳤다.
“나는 대한 건아 남궁현이다!!”
방 안에서 궁현에게로 쏟아지던 시선들이 전부 황당함을 담아 갔다.
다음 날, 궁현은 걱정하는 가족들을 돌려보내고, 그래도 남아서 옆에서 간호하겠다는 화선과 소연을 한사코 방에서 물리고는 다시금 비급을 집어 들었다.
“하아, 이젠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혼자서 한다지 않았느냐?
다시금 역시 경지에 이른 어른답지 않게 유치하다고 생각한 궁현은 이판사판으로 일단 자신이 행했던 구결의 다음을 펼쳤다.
“이제는 여태까지 막혀 있던 혈들이 완전히 뚫렸을 것이다.”
그것을 읽던 궁현의 표정이 허탈해졌다. 다음 장을 펼쳐 보았더라면 자신이 어떤 꼴에 처할지 알 수 있었건만. 이제는 자신을 책을 쓴 필자와 노인 둘이서 아주 쌍으로 가지고 논다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약한 자는 당해야지. 그것이 고래(古來)로부터 인간. 아니, 세상에게 주어진 법칙 아니겠는가.
각설하고, 구결을 읽다가 멈칫한 궁현은 다시금 소진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몸에 오행을 새기지 못 했었다.”
그런 궁현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은 이내 입(?)을 열었다.
―뭘 하고 있는 게냐?
“뭐하긴요, 쓰여진 대로 몸에 오행을 새기…….”
―이이, 바보 같은 놈! 저번에 나흘 동안은 괜히 쓰러진 줄 아느냐? 그것이 다 몸의 체질이 무위자연지체(無僞自然之體)의 첫 단계인 오행지체(五行之體)로 바뀌는 과정이었다, 이놈아! 그것도 모르고 몸에 오행진을 새기려 해? 정말 나 같은 짓만 골라…… 가 아니라 바보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노인의 말에 궁현은 표정에 의문을 표하며 비급을 쳐다보았다.
“예? 그럼 오행을 새기라는 말은 왜 나온 거죠?”
―그게 바로 필자의 오해라는 것이다! 그분은 무공을 잃긴 하셨어도 본디 무인. 그러다 보니 이미 확립된 몸의 성격[體質]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니라. 그러다 보니 단순한 자연과의 소통으로는 체질이 바뀌지 않아 몸에 직접 오행진을 새기신 것이다. 하나 너는 조금 탁기가 많다 싶기는 했으나, 원래의 자연의 기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질이 바뀌어 간 게지. 그것에 적응하느라 또 나흘간이나 누워 있었던 게고.
노인의 말을 끝까지 들은 궁현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얼른 진을 치웠다.
―그건 그렇고 말이다. 그 대한 건아라는 건 뭐냐?
“예?”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당황한 궁현은 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대한 건아 말이다. 네놈이 깨어나면서 외쳤던…….
“아아, 그건. 그러니까. 일단 조선말이기는 한데요…….”
그렇기는 해도 궁현은 노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이후에도 더욱 당황했다. 대한 건아(大韓健兒)라니. 대한민국의 씩씩한 사내! 라는 뜻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 그걸 말할 수 있으랴! 지금은 명나라의 선덕제 시대. 대한민국은커녕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세상이 아닌가!
“벼, 별호?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호오, 별호라. 한어로는 어찌 읽느냐?
“예, 예? 아니, 그…… 저, 저도 제대로 정하질 못해서요. 할아버님이 정해 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할아버님은 동이의 말도 할 줄 아시겠죠?”
잠깐 머뭇거리던 궁현은 결국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불리우는 ‘반문하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궁현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노인은 조선어. 즉, 그가 살던 시절에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라 불린 곳의 말을 떠올리며 궁현의 말에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흐음, 그래. 큰 대(大)자에 날개 한(翰) 자, 세울 건(建) 자, 나 아(我) 자로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큰 날개로 나를 세운다[大翰建我]!!
임기응변으로 넘어가기 위해 되받아친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과한 보답이었다. 너무나 훌륭한 별호가 아닌가.
“대한건아, 대한건아라.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아직 무공도 제대로 모르는 제가 달기에는 조금 거창한 별호가 아닌지…….”
궁현의 말에 노인은 조금 웃음기를 머금으며 장난식으로 내뱉었다.
―원래 식초가 반쯤 찬 병에서 소리가 나기 마련이니라.(가득 찬 식초는 흔들어도 소리가 없으나, 반쯤 찬 식초는 소리를 낸다.[일병초불향, 반병초황탕(一甁醋不響,半甁醋晃蕩)],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뜻.)
노인의 말에 궁현은 울컥했지만, 피식하고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4. 오행기류(五行氣流)(1)
“아버님, 저 혜아(惠兒)입니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이러할까. 아니,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미성(美聲)이 방 안에 울려 퍼지자, 그 안에 있던 인영이 입을 연다.
“들어오너라.”
“예.”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방 안에 들어선다. 도저히 이런 음침한 기운이 서려 있는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작야,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무슨 일이냐.”
방 안에 있던 인영, 당가의 가주(家主) 당천명(唐遷暝)이 입을 열자 그곳에서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옅은 독무(毒霧)까지 새어나오고 있는 듯했다.
“이 년 뒤에 열릴 칠천회 때, 제 지아비가 되실 분을 만난다 들었습니다.”
그 독무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다소곳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말을 하는 당설혜(唐設惠)는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이 이렇다 말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가만히 바라만 보던 당천명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 남궁세가의 남궁천천이라 하던가? 그 소가주(小家主)였지. 약관(弱冠)을 넘긴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무공이 이미 세가의 장로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라고 하더구나. 분명히 어느 정도 과장은 있을 테지만 내 사위가 되기에는 손색이 없으리라고 본다.”
“하, 하나. 과연 남궁세가에서 소가주를 그리 쉽게 보낼까요? 아무리 할아버님끼리의 약속이라고는 해도…….”
그 말에 당천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혜아를 남궁세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당가의 전통인 데릴사위제를 어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설혜의 무공은 그 오라비인 당호영(唐扈影)보다 강하면 강했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를 남궁세가에 보내는 것은 당가로서 엄청난 손실일 뿐더러, 안 그래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는 남궁세가에만 좋은 일을 시켜 주는 격이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후우, 그것은 차차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럼 볼일은 그것뿐이더냐?”
당천명이 묻자 당설혜는 작게 예 하고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