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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현 1권(10화)
4. 오행기류(五行氣流)(2)
당천명은 당설혜가 떠나간 자리를 보며 독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한편 방을 나선 당설혜가 향한 곳은 자신의 숙부인 당천호(唐遷湖)의 방이었다.
“숙부님, 숙부님?”
문을 두드리며 기척을 내자, 안에서는 들어오라는 다소 듣기 안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숙부님, 전에 말한 ‘그것’은 어떻게 됐지요? 이제 칠천회까지는 이 년밖에…… 다른 건 몰라도 그걸 길들이기엔 조금 벅찬 시간이라구요!!”
당설혜는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노골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며 다짜고짜, 무언가에 대해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그리도 필요하더냐? 네 정도라면 미색(美色)만으로도 웬만한 사내는 얼마든지…….”
“웬만한 사내가 아닐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잖아요! 후우, 안 그래도 처음 보는 사내와 혼인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데, 만에…… 만에 하나라도 남궁세가에 며느리로 들어가게 되어 버리면…… 으으으!! 익숙지도 않은 곳에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내와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아버지인 당천명 앞에서 보여 준 모습들은 전부 내숭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숙부인 당천호는 그런 당설혜를 보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아내가 없는 그로서는 조카들을 거의 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것은 당천호의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너무 일방적으로 당천호만이 주는 사랑이다 보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기만 한다면 조카들이 그 무슨 일을 원해도 다해 주게 되어 버린 것이다.
“허허, 걱정 말거라. 칠천회 때까지는 어떻게든 맞출 수 있으니. 그 녀석들이 워낙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서 말이다.”
“예? 정말이죠, 숙부님? 아아, 제가 이래서 숙부님을 좋아한다니까요! 헤헤헤헤.”
금세 표독스런 얼굴을 지운 당설혜가 당천호에게 달라붙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남궁천천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
“…….”
어느새 궁현은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비급의 다음 단계인 축기를 행하고 있었다.
―먼저 몸 안의 오행의 기운을 느끼거라. 그리고 자연의 기운을 각각 오행으로 나누어 축기하는 것이다.
그 옆에서 자칭 궁현의 조상이라는 노인이 궁현에게 축기법을 이르고 있었다.
‘대단하다. 단순히 소(小) 오행진(五行陣)의 안에서 심법을 펼친 것뿐인데 몸의 체질이 변하다니.’
어느새 궁현의 몸 안에는 단전(丹田)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그 단전이 오행(五行)의 상극과 상생의 법칙에 따라 다섯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궁현의 몸 자체도 자연과 하나가 되지는 못했지만, 탁기도 거의 전부 빠져 확연히 자연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기운을 나누라니, 대체.’
노인은 궁현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자 다시금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인체에는 십이경맥(十二經脈)이라는 열두 개의 혈맥(穴脈)이 있다. 그 십이경맥은 사지(四肢)의 주관절(?關節)과 슬관절(膝關節) 이하에서 각각 오행혈(五行穴)과 오원혈(五原穴)로 나뉘니, 그중 오행혈은 음경(陰經)과 양경(陽經)으로 다시 나누어 각각 음경에서는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에 해당하는 정(井), 영(榮), 유(兪), 경(經), 합(合)혈로 나뉘고, 양경에서는 금, 수, 목, 화, 토에 해당하는 경, 합, 정, 영, 유혈로 나뉘는데, 이에 따라서 자연지기(自然之氣)를 운기하면 어느 순간 기(氣)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각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운으로 분리되느니라. 이 중 음(陰)과 양(陽)의 기운은 아직 가질 수 없으니 그대로 사지의 혈맥을 통해 내보내고, 나머지 오행의 기운을 각각 다섯 갈래로 나누어 단전에 축기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창궁무열신공(蒼穹無涅神功)의 요결이니라. 말코 도사나 땡중 놈들처럼 배배 꼬지 않고 현실적으로 알려 주었으니 행여 틀릴 생각은 말거라.
책 속에 봉인되면 말이 헷갈리지도 않는 것일까, 저 긴 대사를 말 한 번 꼬이지 않고 뱉어 낸 노인은 이제 됐냐는 듯 궁현을 쳐다보았다.
‘그,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궁현도 이 정도로 자세한 설명을 듣고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바보는 아닌지라, 말없이 운기에 들어갔다.
“…….”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각각 뜨겁고 차갑고 포근하고 날카롭고 부드러운 기운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 궁현이 밝은 표정을 하며 눈을 떴다.
“후우우웁, 하아아아―”
본디 심법들은 하루 종일 같은 호흡법으로 호흡하면 더 좋은 효과가 있는 것들이 많으나, 창궁무열신공의 경우 무리해서 자연지기를 몸에 쌓았다가는 몸이 그것을 견딜 수 없으므로 무위자연지체를 완성시키기 전까지는 보통의 호흡을 해야 하는 탓에 잠시 심호흡을 하며 본래의 호흡 상태로 되돌린 궁현은 자신의 아랫배를 쳐다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남들이 보면 임신이라도 한 줄 알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어떠냐, 처음으로 축기를 끝내 본 소감이?
“하아, 무인들은 이런 걸 언제나 하는 거였군요. 대단해요! 오늘 처음으로 할아버님이 대단해 보입니다!!”
―예끼, 이놈이! 그럼 여태까진 뭐로 보였느냐?
노인의 말에 궁현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는 어린아이 웃듯 웃으며 대답했다.
“헤헤헤. 그, 그러니까. 그…….”
목구멍까지 ‘노망난 늙은이요.’라는 말이 차올라 왔으나, 만약 그 말을 했다간 이 유치한 할아범이 또 언제까지 삐져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궁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순간, 궁현에게 구원이 도착했다.
“도련님, 화선이옵니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곳으로 고개를 돌린 궁현은 키워지는 강아지가 밥 가지고 온 주인을 맞이하듯 달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화악!
“힉?!”
“왜, 왜 불렀냐, 화선아?”
아침의 창백한 낯빛과는 너무나도 달리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궁현을 보자, 잠깐은 놀란 화선이었지만 이내 안심하고는 입을 열었다.
“점심때이옵니다. 간단하게 점심(点心, dianxin, 딤섬:일반적으로 점심 때 먹는 광동에서 시작된 요리. 종류로는 교(餃, jiao), 포(包, bao), 매(賣, mai), 장분(腸粉, changfen), 봉조(鳳爪, fengzhua)가 있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마침 배고팠는데 잘 됐…… 아, 너는 먹었냐?”
“예, 저는 이미 무연 도련님이…….”
그 말을 듣던 궁현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그 짓궂은 표정을 본 화선의 표정이 일순 변했으나,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호오, 무연이 형이? 그러고 보니, 저번에 나가 있던 시간도 자장면 만드는 시간 치고는 좀 길었어. 너…… 설마?”
궁현의 말에 화선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저 같은 것이 어찌.”
“장난이야, 뭘 그렇게 떨고 그래?”
그 표정을 보고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궁현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화선의 등을 탁탁 쳤다.
“자, 빨리 줘. 나도 배고프니까.”
“예? 예, 예.”
화선이 넘긴 접시의 뚜껑을 빼자 김이 새어나오며 그 안의 점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포(包)였다. 만두와 비슷한 아니, 굳이 비유하자면 야채찐빵과 같은 음식이었다.
금방 음식를 비운 궁현은 접시를 화선에게 넘기고는 차림새를 고치고 밖으로 나섰다.
“자, 그럼 어디. 검법을 수련해 볼, 흐음.”
궁현이 갑자기 연무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 지금 세가의 가솔들은 전부 내가 무공을 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이렇게 쉽게 알리면 인간적으로 너무 김빠지는 것 아니겠어?!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 드려야, 그것이 예의라는 것이지. 후후후, 얼마나 놀랄지 궁금한 걸?’
그러고는 연무장에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무고(武庫)로 향했다.
남궁세가의 무고!
그곳은 십팔반 병기를 포함한 수십, 수백 가지의 무기가 있음은 물론 기관진식을 펼치기 위한 갖가지 도구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있는 청소 때 이외에는 웬만하면 문이 열리는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세가의 가솔들이 사용하는 무기의 대부분은 대장간에 주문해서 만든 주문 제작식이었기 때문에, 딱히 이 무기고를 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그 무기고 안으로 들어선 궁현은 등(燈)을 켜고 주위를 둘러봤다. 검이나 창 같은 기본적인 무기는 물론, 보기만 해도 등에 소름이 쫙 끼치는 흉측한 무기까지 여기저기에 걸려 있었고 도저히 이 중 하나를 골라 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때, 비급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곳은!! 아이…… 아니, 잠깐. 그러니까…….
“남궁현입니다.”
―아, 그래. 현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말해 주지 않았구나. 내가 살아 있을 적 이름은 남궁상현(南宮霜炫)이라 한다.
“아, 그러셨군요.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9대조 할아버님이라고 한다면 그 이름 외에는 없을 테니까요.”
늦었지만 서로의 통성명을 끝내자, 노인은 다시금 못한 말을 이어 갔다.
―그래, 이곳이 무기고라고. 훗,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고. 상환이가 위장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인가. 그래, 이것도 인연이지. 현아, 이곳의 땅을 파 보거라.
“예, 예에?”
그 말에 궁현은 기가 막혔다. 노망난 늙은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땅을 파라니? 노망도 아주 제대로 든 것 같았다.
―예끼! 빨리 못할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본 그는 삽과 비슷한 무기를 찾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거기가 아니라. 왼쪽으로 4보. 그렇지, 그리고 앞으로 3보. 아니 아니지, 뒤로 1보.
노인이 말하는 대로 한참을 움직이던 궁현은 처음 있던 지점에서 왼쪽으로 일장, 앞쪽으로 반장 정도 되는 곳에서 멈췄다.
―그래! 거기다!
“하아,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궁현은 혹시나 무언가 있을까 기대하며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다경(二茶頃:한 식경, 약 30분) 정도 지났을까, 건성으로 파던 궁현의 팔이 갑자기 빨라졌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노인이 원하던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검?”
그것은 평범한 검이었다. 아무리 잘 봐줘도 ‘평범한’ 검.
“마, 말도 안 돼.”
궁현은 어이가 없었다. 여태까지 고생해서 땅을 팠더니 나온 것이 고작 평범한 검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노인이 이 존재를 알고 있다면 최소한 자신으로부터 9대 전, 즉 못해도 450년 정도 이전 것일 텐데, 그 검은 너무도 평범했다. 즉, 아직도 녹 하나 전혀 슬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보면 수시로 꺼내서 손질한 다음 다시 묻어 놓는 것을 반복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고렇지! 이 녀석, 오랜만이로구나.
검을 본 노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마치 오래된 친우라도 본 듯했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한 검인데. 응? 이 문양은 대체 뭐죠?”
이상한 점을 찾기 위해 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궁현의 눈에, 검병(劍柄)에 새겨진 문양이 들어왔다. 마치 지금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생한 새의 문양이었다.
―이 검이 바로 뇌붕일섬낙일명(雷鵬一閃落一命)이니라.
뇌붕일섬낙일명. ‘번개[雷]의 대붕[鵬]이 한 번[一] 벨 때마다[閃] 한[一] 목[命]이 떨어지는구나[落]’라니. 검에게 주어진 이름으로서는 조금 섬뜩한 이름이었다. 벨 때마다 한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하면, 감히 이 검이 베어 넘긴 사람의 수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검병에 그려진 새의 정체는 대붕(大鵬)이란 말인가. 그런데 검의 그 이름이 궁현에게는 낯설지가 않았다. 찬찬히 기억을 되짚어 보던 그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남궁세가의 옛 가주, 남궁상현의 애검!’
“뇌붕일섬낙일명이라. 할아버님이 쓰시던 검 아닙니까?”
―호오? 알고 있었느냐?
그제야 검의 정체를 알아챈 궁현이 특별한 점이라도 있는지 더욱 세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을 볼 줄 모르는 궁현이 아무리 살펴봐야 다른 검과 다를 바 없이 똑같게 보일 뿐이었다.
아니, 궁현이 아무리 검을 잘 볼 수 있었더라도 이 검의 진면목을 알아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왜냐하면, 이 검은 천하의 명장이 와서 살펴보지 않는 한 일반적인 검과 별다르지 않게 보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로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잘 쳐 줘도 보검 축에 들까 말까.”
―본디 최강의 반열에 오른 고수는 오히려 평범해 보이듯, 좋은 검은 평범해 보이기 마련이니라.
“예? 그건 대체 무슨 논리…….”
궁현의 말에 노인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무슨 논리냐니. 억지논리(抑支論理)지. 그것보다, 검법을 수련하려는 것 아니었느냐?
“예에? 뭐.”
뭔가 반론하려던 궁현이었지만, 어차피 노망난 노인과 말다툼 해 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생각에 검에 맞는 검집을 찾아 들고는 검을 집어넣고 무기고를 나섰다. 우연히 그 검집에는 날아오르는 한 쌍의 봉(鳳)과 황(凰)이 그려져 있어, 검과 은은한 조화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