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남궁현 1권(11화)
4. 오행기류(五行氣流)(3)
무기고를 나선 궁현은 축지법을 사용해 단숨에 도원호(桃源湖:천주대협곡에 위치한 천주산의 또 다른 호수, 연단호는 인공 호수이지만, 도원호는 자연호였다. 현재는 댐에 가로막혀 있다.) 앞으로 달려갔다. 연단호에서도 수련을 할 수 있지만, 그곳은 남궁천천이 올 확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궁현은 익숙하지 않은 이곳에서 수련을 하기로 한 것이다.
“자, 그럼.”
도원호 앞에 도착하자 잠시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던 궁현은 품에서 제왕뇌익검법을 꺼내 펼쳤다. 아니, 펼치려 했다.
―에이잉! 바보 같은 놈아!!
마치 머릿속에서 계속 메아리치듯 울리는 노인의 목소리에 궁현은 기겁을 해서는 귀를 막았다.
“아, 시끄럽잖습니까? 대체 이번에는 또 왜 그러세요?”
그렇게 말한 궁현은 살살 눈치를 보며 막았던 귀에서 손을 떼었다. 그때, 다시금 노인의 일갈성(一喝聲)이 머릿속 끝까지 울려 퍼졌다.
―이, 이놈아! 검을 수련하려거든 먼저 몸을 만들어야 될 것 아니냐!! 천뢰무한기궁법집편은 무슨 포엄(袍儼:도포(袍)를 입고 의젓하게 있다(儼)는 뜻으로 현대 한국의 콩글리시로 번역하자면 폼(form)이라고 할 수 있겠다.)으로 준 줄 아느냐?!
다시금 울리는 노인의 대성(大聲)에, 궁현은 두 귀를 살살 문지르고는 대답했다.
“대, 대체 포엄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할아버님이 하고 싶으신 말의 요지는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만, 머리가 울리면서 아파지니까 방금 전처럼 큰 소리는 내지 말아 주셨으면…….”
―알았느니라.
그제야 노인은 어른다운 말투를 써 보지만, 궁현에게는 그것마저 유치해 보일 뿐이었다.
각설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검법을 품에 넣은 궁현은 천뢰무한기궁법집편을 꺼내 들었다.
“체, 이게 대체 뭐라고.”
입을 쭉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던 궁현이었지만, 그래도 비급을 펼쳐 내용을 읽기 시작하자 어느새 눈에 이채가 서리며 그 글에 집중하는 것이, 마치 새로운 학문을 발견한 유생(儒生) 같았다.
“……하기에 창궁무열신공에 맞는 강기공(|氣功)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오행지기(五行之氣)의 다섯 기운을 각각 따로 꺼내어 사용하는 기류공(氣流功)을 창안하고, 남궁세가의 여러 몸놀림[躬法]을 모아 기궁법(氣躬法)으로 집편하니, 후대에 이를 참고하고 더욱 발전시키기를 바란다. 천뢰검신(天雷劍神) 남궁상현…… 엑?”
머리말을 읽던 궁현은 그 밑에 적힌 필자(筆者)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남궁상현이라니? 그렇다면 이 비급은 바로 얼마 전부터 계속 시도 때도 없이 궁현을 괴롭히는 노인이 집필한 책이라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읽은 궁현의 눈에서 이채가 사라졌다.
“즉, 자기가 쓴 책을 자랑하고 싶으셨던 거군요?”
창궁무열신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궁현에, 노인은 여러 번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닫았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노인의 낯빛은 굉장히 붉어져 있을 터였다.
―허음, 험, 험. 그,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자고로 검이란, 남의 생명을 빼앗는 무기이니라. 그런데 제 몸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에게 그것을 쥐어 주면 얼마나 위험해지겠느냐?! 기궁법이란 기(氣)와 몸[躬]을 움직이는 방법들을 써 넣어 놓은 것이다. 다 널 생각해서 하는 일이라는 말이야.
노인의 말에 궁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금 비급을 읽어 나갔다.
“천뢰무한기궁법집편. 기법(氣法), 기류공편(氣流功篇). 오행기류(五行氣流)의 장(章). 기류공은 각각의 기운을 어느 정도의 발출력으로 발출하느냐와 얼마만큼의 양을 발출하느냐에 따라 그 활용법이 무궁무진하다. 하나 오행지체를 가진 자에게 어느 한 기운만을 빼내어 사용한다는 것은 극독(劇毒)을 삼키는 것보다 위험한 일임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여 오행지기(五行之氣)를 발출할 때에는 어느 한 기운만이 아닌 모든 기운을 발하여 나머지를 허초(虛招)로 삼거나 흘려보내야만 한다.
먼저, 토기(土氣)를 발할 때는 단전에 생성된 상극상생도(相剋相生圖)에 기초하여 명문(命門), 대추(大推), 천정(天鼎), 천돌(天突), 결분(缺盆), 견정(肩井), 견우(肩?), 견료(肩꽝), 비노(臂?), 협백(俠白), 수오리(手五里), 소해(少海), 척택(尺澤), 곡지(曲池)혈을 거친 후 주관절(?關節)에서부터 오행혈(五行穴)의 유혈(兪穴)을 따라 운기하며 토(土)의 기운을 극화(極化)…….”
구결을 읽으며 단전에서 기(氣)를 일으켜 구결에 따라 운기하던 궁현은 포근하고 따스한 기운이 자신의 팔을 따라 새어나오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그러자 궁현은 연한 갈색 빛을 띤 무형의 기운이 자신의 팔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 오오! 우와! 된다! 이게 바로 토기(土氣)?!”
―에잉, 호들갑은. 쯧쯧…… 아직은 오행지기도 별로 안 모여서 색도 연하구만. 그리고 정확히는 토기류(土氣流)라고 부르는 것이 맞느니라.
토기류!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따스한 어머니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 만물을 품은 흙[土]의 기운.
“그럼, 나머지 기운은 어떻게 되어 있지? ……또한 다른 오행의 기운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각각의 오행혈[정(井), 영(榮), 유(兪), 경(經), 합(合) 혈]을 따라 운기하면 된다……. 우와, 할아버님 집필하시는 게 상당히 귀찮으셨나 봐요?”
궁현의 말에 잠시 어이없어 하던 노인은 이내 실소(失笑)하며 긍정을 표했다.
―으휴, 네놈 맘대로 생각하거라.
노인의 대답을 흘려들은 궁현은 다시금 비급에 시선을 고정했다. 바로 이때, 대한건아(大翰建我)의 전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5. 당설혜(唐設惠)(1)
궁현이 처음 토기류를 뿜어낸 날로부터 이 년 뒤, 드디어 칠천회(七天會)가 보름이 채 남지 않은, 가을의 단풍이 한창 천주산을 수놓은 때였다.
“하아, 하아. 에이잇! 뭔 산이 이렇게 높아!!”
한 인영이 산 중턱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그렇지만 낮다고 할 수는 없는 곳을 오르며 불평을 내뱉고 있었다.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천주산은 과거 이백(李白)이나 소동파(蘇東坡)가 은거를 꿈꾸었던 악산(岳山)으로, 태산, 화산, 숭산, 항산, 형산의 중원오악(中原五岳)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숭산이나 형산보다는 그 산세가 높고 험한 산이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그런 이유로 인영은 연신 불평을 내뱉으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한쪽으로 튕겨지듯 빠르게 달려갔다.
“…….”
목표로 했던 곳에 도착한 후 기척을 갈무리하고 은신한 인영은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하앗! 하! 핫!”
인영의 눈에 보인 것은 한창 검을 연마하고 있는 한 사내였다. 그랬다. 이곳은 바로 천주대협곡(天柱大峽谷)의 도원호. 즉, 검술을 연마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남궁현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영, 당설혜는 그 모습을 냉정하게 판단했다.
‘저게 남궁세가의 소가주? 그래, 둘째는 이미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나이를 넘긴데다 전혀 무공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뭐, 저게 세가의 장로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무공이라니…… 과장이 심한 거야, 아니면 정말 남궁세가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
그렇게 아직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한 당설혜가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던 때였다.
“……!”
발뒤꿈치에서 따끔하는 감각이 일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뭐지?’
그녀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에 차츰 정신을 차렸다.
“응? 깨어났어요? ……아, 아닌가?”
―에잉, 대체 그 말이 몇 번째인 줄 아느냐?
“그, 그치만 입이 조금 움직였잖습니까? 그리고 기척도 조금 움찔거렸고요.”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직 채 눈을 뜰 기력도 없는 자신을 느끼며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대체 뭐였지?’
그렇게 의문스러워 하는 그녀의 궁금증은 얼마 가지 않아 풀렸다.
“그건 그렇고, 그 자혈독사(雌血毒蛇)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겁니까?”
‘자, 자혈독사? 그건, 설마…….’
자혈독사(雌血毒蛇).
정확히는 암컷의 혈독사(血毒蛇)라고 하는 것이 맞았다. 이 혈독사는 조금 특이한 점이 있는데, 수컷인 웅혈독사(雄血毒蛇)의 독은 혈독사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별 효과가 없는 데에 비해, 자혈독사는 엄청난 극독을 가지고 있어서 바늘 끝에 약간 묻은 정도로도 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하여 당가에서도 이 뱀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던 적도 있었다. 하나, 기껏 해서 알아낸 사실이 중원 전체를 뒤져도 이 뱀은 스무 쌍 정도밖에 없을 거라는 것뿐. 그런데 이 자혈독사가 어째서 남궁세가에 아니, 정확히는 천주산에 있는 것인가.
―위험하다 뿐이겠느냐? 원래는 이렇게 콱, 물리면 죽는 게 당연한 게다. 하지만 이 아가씨의 무공이 워낙 출중하고 또, 그…… 네놈의 그 보기 민망한 응급처치 덕분에 수기(水氣)와 독기(毒氣)를 섞어 밖으로 배출해 낼 수 있었던 게지.
‘보, 보기 민망한 응급처치라니. 그건 대체?’
한 시진 전, 궁현이 한창 검술을 수련하고 있을 때였다.
바스락.
“하앗! 핫! 하! 응? 누구냐?!”
열심히 몸을 놀리던 그의 귀에, 초목을 함부로 훼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을 찡그리며 그곳을 본 궁현은 대경실색하고는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그곳에 쓰러진 여인. 당설혜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이봐요! 여기서 쓰러지면 어떡…… 아!”
―저, 저것은! 어떻게 저 요물이 아직도 이곳에!!
그제서야 슬슬 기어서 사라지는 뱀 한 마리를 본 그는 그녀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얼마 안 가 발목에 뱀이 물린 자국을 발견한 궁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단숨에 신을 벗기고 바지를 걷어올려 발목을 노출시켰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둘러보다 이내 자신의 옷을 찢어 발목에서 세 촌(寸) 정도 위를 피가 약간 통할 정도로 묶고는 약간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하고선 입을 움찔거리며 망설였다.
“후우.”
잠시 심호흡을 한 궁현은 천천히 얼굴을 발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 그를 보며 노인 또한 대경실색해서는 일갈성을 울리며 궁현을 꾸짖었다.
―네, 네놈이!! 쓰러진 여인을 살리려고는 못할망정, 이 무슨 망측한!! 아무래도 내가 네놈을 잘못 본 모양이로구나!! 어서 그만두지 못할까?!
“크윽, 시끄러워요! 쭈웁 ……퉤! 쭙, 퉤!”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궁현은 계속 환부에서 독을 빨아내었다.
잠시간 그러던 궁현은 피 맛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자, 피를 빨아내는 것을 그만두고는 품 안에서 삶은 것인 줄 알고 잘못 가져온 마령저(馬鈴藷:감자) 하나를 꺼내 잘라서 즙을 내고는 환부에 붙여 두고 다시 옷을 찢어 고정하고 그녀에 입에도 마령저의 즙을 짜 넣었다.
“하아. 됐다. 일단 응급처치는 끝냈고.”
―뭐라?! 네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아녀자를 희롱한 것도 모자라 이게 응급처치라고! 경을 칠 놈이로다!!
아직도 꽥꽥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노인을 보며 궁현은 귀를 틀어막았다.
“후우, 시끄럽다니까요!! 할아버님 눈에는 제가 지금 음심(淫心)을 가지고 이 여인을 희롱한 것으로 보이십니까?!”
약간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궁현은 차가운 눈을 하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퉤, 퉤. 아, 이런. 아무래도 독을 좀 삼킨 것 같은데…… 뭐, 이 정도야 내공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됐고. 방금 그 뱀, 뭔지 아시죠?”
빨리 불라는 투로 얘기하면서 호수의 물로 입안을 헹구는 궁현을 보며 노인은 약간은 진정했지만 아직까지는 믿음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목소리로 내보이며 말을 시작했다.
―저것은 자혈독사라 불리는 맹독을 품은 뱀이니라. 본디 혈독사는…….
“됐어요, 그 혈독사인지 뭔지는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저 여인, 어찌하면 살릴 수 있습니까?”
약간은 무례하다고 꾸짖을 수 있었건만, 의심이 가기는 해도 지은 죄가 있는 노인은 아무 훈계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금 말을 시작했다.
―일단은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봐야겠구나.
노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궁현은 당설혜를 안아 들고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했다. 결국 한 다경이 약간 되지 않아, 열 사람 정도가 간신히 들어설 법한 적당한 동굴을 찾아 그 안에 설혜를 눕혔다.
“이제 어쩌죠?”
신공서를 꺼내 바라보며 말하는 궁현에, 노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쩌냐구요?”
궁현의 재촉에 노인은 입을 열었다.
―우선은 웃옷을 벗기거라.
“……?!”
방금 전 겨우 발목과 그 위의 정강이를 드러낸 정도로 화낸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웃옷을 벗기라니?
“자,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요?”
―아아, 그, 그래. 손! 두 손을 맞잡거라.
갑자기 말을 바꾸는 노인에 실소하는 궁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불가항력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는데. 에이, 괜히 되물어 봤네.’
조금 때늦은 후회였다.